전투적 생태주의의 눈으로 본 강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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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17일 01: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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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체적으로 강금실 전 서울시장후보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서울에 대한 별 생각 없이 선거에 임했다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선전을 했고, 그래서 차세대 정치인으로 나름대로 입지를 갖추고 일단 후퇴한 상황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강의 공약’

강금실이 내놓았던 공약들의 큰 골격들은 끔찍한 것이었지만, 물론 녹색후보를 자처한 오세훈과 공약의 차이에 의해서 선거결과가 좌우된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의 공약들은 자신의 철학의 일면을 약간 비쳐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가장 무서웠던 공포스러운 공약은 경기도지사와 공동 프로그램을 집행하겠다는 거대한 토목자본과의 연계전략이었지만, 이건 어차피 경기도지사나 서울시장이나 열린우리당이 선거에서 졌기 때문에 도상에서만 만들어졌지 당분간 세상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명박 서울시장이 나중에 대선에서 제시할 토목자본 공약과 강금실의 토목자본 공약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 지난 5월2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은 강금실 서울시장 후보(사진=연합뉴스)
 

2.
그러나 강금실이 내세운 이미지가 무서운 것은 그가 급작스럽게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거나 혹은 아주 인기 있는 정치인이 되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정치학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분석이기는 하지만, 문명사적인 관점을 약간 차용하자면 우리나라는 농업문명에서 상업문명으로 매우 빠른 시간 동안에 변하는 중이다.

서양의 경우는 이러한 변화가 200년에서 300년 사이에 변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박정희 중반까지 혹은 적어도 YS 때 OECD에 가입하기 전까지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농업문명의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적극 활용한 이미지 정치에서 그는 늘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비록 시바스 리갈을 즐겨했을지라도 사진에서만큼은 다리를 걷어붙이고 막걸리 대접을 들고 있었다.

강금실은 도시 세련미와 상업자본을 상징

75년을 기점으로 계산한다면 30년 만에 오세훈과 강금실의 이미지 정치의 시대가 박정희 시대만큼 중요한 정치기법으로 등장했는데, 강금실의 보라색 스커프는 한 편으로는 도시의 세련미를 상징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자본을 상징한다.

(상업자본에서의 상징의 최상위에는 종이 위에 약간의 문양으로 가치를 대신하는 화폐가 자리하고 있고, 많은 이미지들은 화폐와의 연관성 위에서 서로간의 상위를 차지하는 우위가 나누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상업자본이 만개했을까? 물론 아직은 아니다. 8%의 농민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또 국토의 70% 이상의 농업용지로 지목분류가 되어 있으며, 도시 지역의 접경을 벗어나면 아직도 농업이 실제로 세력권을 가지고 버티고 있다.

3.
이런 상업문명의 눈으로 본다면 오세훈은 최소한 1차적 반성을 상징하고 있고, 생태주의는 2차적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데, 강금실은 상업문명 그 자체를 세련됨으로 포장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물론 모든 정책과 모든 정치세력이 생태적 고민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강변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울은 도시 생태가 포화점을 지난 상태이므로, 이 특별한 도시에서의 모든 대책은 최소한 도시생태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4년 후엔 강금실이 당선될 것

오세훈을 가짜로 이해하는 것은 그의 녹색이 오히려 뉴타운을 통해서 에너지 사용과 공관활용, 물 사용 등 생태적 물량투입을 더 높이는 방식이라서, ‘경관 생태학’의 관점에서는 개선될지 몰라도 물질적인 측면에서 더욱 악화될 것들을 공약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금실이나 오세훈이나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별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강금실의 정책들이 오세훈보다도 더 토목주의적인 결과가 나온 것으로 이해한다.

4.
있을 수 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4년 후에 다시 서울시장 선거를 하고, 같은 공약으로 격돌한다면 강금실이 이길 것 같다. 우리나라의 상업문명으로의 실질적 전환 속도는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제어되지 않는 질주를 상징하듯이 사람들의 문화와 선호 그리고 기호들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다.

   
 
▲ 지난 5월30일 72시간 마라톤유세를 마치고 명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강금실 후보(사진=연합뉴스)
 

서울시민들에게 최소한 아이들의 보건이 악화되지 않거나 환경성 질환의 창궐로 인한 재앙 수준의 현 상황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불행히도 앞으로 4년이 지나면 더 약화될 것이다.

보통은 환경문제가 더 심해져서 생태적으로 견디기 어려워지면 자연발생적으로 제도 개선과 의식에 대한 반성이 벌어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업문명 그리고 교환주의 문화로의 전환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환경은 더 끔찍해져도 사람들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에서 더 희열을 느끼고 기뻐하는 경향이 강하다.

선거의 마지막에 이미 현실적으로 상황이 종료된 이후 강금실은 마라톤 유세를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어쩌면 약간의 생태적 반성이나 각성 보다는 ‘서민에 대해서 이해하였다’는 아주 정치적인 말을 남기고 선거를 종료하였다.

건설자본의 손을 들고 선거에 임했던 강금실은 ‘서민’을 어떻게 자신의 편에 서도록 해야 하는지 보다 철저한 이미지 정책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것 같다.

5.
여성민우회의 생협이나 서울한살림 조합원들의 경제적 삶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수 있고,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한 우리농업 살리기와 직거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많은 엇갈린 평가들이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실천들이 서울에서는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전투적 생태주의의 한 부류라는 점이다.

우리 수준은 농업살리기와 직거래 프로그램만 해도 전투적 생태주의

아니, 미사일 위에 맨 몸으로 올라가거나 탱크 위에 망치 들고 맨 손으로 올라가는 게 전투적 생태주의 아냐?

물론 그렇기는 한데,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유기농 채소를 먹거나 아이들에게 조금 안전한 음식을 먹게 해주려는 것들도 전투적 생태주의로 분류되는 것이 현실이다. 집 앞의 대형 할인매장과 딜럭스 코드로 장식된 백화점 유기농매장과 동일한 디스플레이를 했다고 자랑하는 유기농매장들이 아파트 앞 골목에 자리 잡은 상태에서 1주일에 한 번 배달되는 생협활동을 한다는 것이 서울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전투적 생태주의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홍대 앞에서 영국의 모던팝을 듣고 인도풍의 옷을 입고 모던 팝을 하는 사람들을 그들이 영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전투적 생태주의로 분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많은 지역 생협에서의 조합원들이 지향하는 활동과 한살림 같은 결사체 혹은 30년 결사 즉 만일 동안의 결사체인 정토회 같은 곳을 서울에서는 전투적 생태주의의 한 흐름으로 분류한다.

(지율스님이 세 번째 단식을 풀도록 나섰고 그를 지켰던 많은 스님들이 서울에 정토를 회복시키겠다는 정토회 소속의 스님들이시다.)

전투적 생태주의의 대척점에 선 강금실

생활정치에서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서울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이 전투적 생태주의의 대책점에 강금실이 서 있었던 셈이다.

강금실은 상업문명을 대변하였고, 서울의 전투적 생태주의들은 자본주의적 유통질서 위에 서 있는 것들을 반대하는 반자본주의 흐름이고, 또한 서울이라는 관점 그리고 상업문명이라는 관점에서 반문명적인 흐름 위에 서 있다.

기계적으로 반대라고 하기는 쉽지 않지만, 세련된 도회지, 아파트, 그리고 스커프로 상징되는 강금실의 철학은 아마도 비슷한 복장을 입고, 역시 아파트에서 하루를 살아가지만 서울 한살림의 여성조합원들이 머리에 그리고 있는 이상향과는 상당히 먼 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6.
일상성이라고 부르는 서울의 하루하루를 분해하면, 기반은 약하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과, 작은 실천 혹은 작은 반항이지만 생태주의에 속하는 것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사실상 정치적 구도에서 이런 것들은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세력화가 되어있지 않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건강과 시민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생활정치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 강금실 후보 선거캠프에 차려졌던 KTX 승무원 농성장(사진=참세상)
 

내 주위에는 그래도 성공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강금실 전 서울시장 후보가 이러한 생활정치와 풀뿌리 정치 그리고 버겁게 서 있는 생태적인 것들의 편에 서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동일한 이미지 만들어내는 조선일보와 강금실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성공한 도시의 모습과 화려한 겉치장 그리고 박제처럼 보여주는 전원의 느긋한 이미지와 강금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다를 바는 한 치도 없다. 물론 그런 점에서는 한겨레를 포함한 다른 종이신문들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다.

넓게 보면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언표 위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의 본질이 지금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서민’의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하는 강금실이 과연 돌아올 때 만개한 천박과도 같았던 그녀의 공약들을 버리고 풀뿌리 민주주의와 서울 한살림이나 여성 민우회 생협 혹은 작은 수십 개의 지역 생협에서 생활정치를 주창하는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과연 그녀의 입에서 그야말로 입에 바른 말이라도 ‘민중’이라는 단어가 나올 수 있을까?

선거 캠프에서 농성 중인 KTX 여승무원들에게 야박하게 대접하던 그의 행동을 보면서 조금은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과연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 정동영을 뛰어넘어 새만금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될까? 물론 열려진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이건 아무도 모른다.

7.
우리나라가 상업문명으로 그리고 서울이 더 그 돈 중심 문화의 중심에 설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한 쪽 극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농업과 상업 아닌 것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아직은 그 흐름은 없다.

그래서 별로 전투적이지도 않은 생태주의적 흐름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투적 생태주의를 형성한다. 우리나라의 근본생태주의는 별로 근본적이지 않고, 전투적 생태주의도 별로 전투적이지 않다. 슬픈 일이기는 하다.

8.
이미지 위에 서서 몇 가지의 장치로 표를 얻으려던 강금실의 이미지 정책은 선거에도 실패하고, 공약에도 실패한 결과를 낳았다. 그 모든 실패를 강금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사실 강금실이 정동영보다도 천박한가라고 질문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아직도 강금실에게 기대하는 것

   
▲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박근혜 의원(사진=연합뉴스)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상업문명 그리고 서울의 만개한 유통주의 이미지 위에 서 있는 더 극단적 이미지가 아니라 무언가 철학적인 성찰과 대안에 대해서 눈 뜨고 돌아오기를 나는 아직도 기대하기는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정치공학적으로 보려는 ‘서민’으로 쉽게 자신의 실패를 덮어버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실망하였고, 다시 돌아올 때 오히려 더 상업문명, 그리고 ‘돈이면 최고다’라는 신서울의 화신이 되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얼버무려 만든 도시의 상업주의 이미지에 ‘돈을 주겠다’는 서민이라는 두 가지 코드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 강금실과 박근혜에 작은 차이라도 있는가? 박근혜가 언제 민주주의 하지 말자고 그런 적이 있던가?

그런 면에서 지난 선거 때 보여준 모습만으로는 보라빛 색깔을 거두어내고 보면 강금실과 박근혜 사이에도 어떠한 철학적 차이와 문명적 근거지에 대한 차이는 없었다.

지금 생태주의가 더 전투적이지 못한 것만큼 민주주의의 투사도 전투적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이다. 거대한 흐름 위에서 격동하며 구토증을 느끼는 것은 사실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 생태주의자들은 비겁하고, 개혁파는 천박하다. 전부 모으면 ‘왕천박’이다. 그 위에 화려하게 꽃핀 천박주의의 초절정에 강금실이 서 있었다.

(꼭지점 댄스를 심각한 표정으로 추고 있던 강금실의 표정을 보며 새 시대를 여는 희망보다는 획일주의 위에 세련된 하이 엔드 마켓으로 상품의 원가를 비웃는 한국 자본이 새로 채택한 마케팅의 우울한 숨결과 조악한 획일성이 느껴졌었다.)

(한 마디만 첨언하면 나는 민주노동당의 지나친 정치공학적 접근 역시 당내 선거공학의 추접함의 냄새를 너무 풀풀 풍기는 오염물질일 뿐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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