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의 근대사,
    공간의 분할과 경계의 변천 과정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식민지 '분거' 도시의 형성
        2019년 03월 05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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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 회의 글 “식민도시 대전의 탄생과 성장”

    식민지 조선의 도시 유형들

    경찰인 아버지를 따라 식민지 조선의 각지를 전전한 바 있던 일본인 작가 다마가와 이치로는 1951년에 『경성 · 진해 · 부산』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출간하였다. 이 소설은 도쿄 출신인 작가가 조선인 사회는 물론 간사이 출신이 많았던 재조일본인 사회까지도 상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지만, 책 제목의 세 도시, 곧 경성 · 진해 · 부산은 식민지기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도시거주 형태의 유형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목포의 근대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위 소설의 내용을 매개로 우선 각각의 도시 유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진해는 한반도에서 일본인에 의해 조성된 최초의 계획도시였다. 러일전쟁 직후 대한해협의 방비를 위해 진해만을 점령한 일제는 1910년대부터 영구적인 기지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군항 건설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군수품 공급을 위해 대규모 시가지의 조성을 동반했다. 그 점에서 진해는 군항 건설을 위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탄생한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철저히 일본인 위주였다. 땅을 대부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도로명 또한 모두 일본식으로 붙여졌다. 소설 속 주인공 미키치는 진해의 거리를 보며 “엄마, 이 거리에는 조선인이 없네?”라고 물었는데, 이는 조선의 땅임에도 조선인이 부재하는 주객전도 상황에 대한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림1. (위)「鎭海市街地町名案」(日本防衛省防衛硏究所 소장) (아래) 초창기 진해시가지 모습.

    진해가 일본인들만의 ‘독거(獨居)’ 도시라면, 경성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잡거(雜居)’ 도시였다. 19세기 후반 한반도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세계질서가 교착하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서울은 일국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부터 이미 외국인의 거주가 전면 허용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경성으로 이주한 미키치가 마주친 풍경 또한 진해의 그것과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도쿄에 버금가는 경성의 근대화 수준에 놀랐고, 또 “서양 같은 거리를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백의의 조선인들이 느긋하게 걸어 다니고 있”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경성을 ‘이중도시’라 하는 것처럼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지역이 북과 남으로 분리 형성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경계는 법제를 통해 공간 분할이 이루어진 도시들에 비해서는 분명 애매한 것이었다.

    부산은 ‘독거’와 ‘잡거’의 중간 형태인 ‘분거(分居)’가 이루어진 도시이다. 조선시대에 설치된 왜관은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일본인의 거류구역인 조계로 탈바꿈했다. 조선인은 조계 내에서 거주할 수 없었고, 일본인 또한 원칙적으로는 조계 밖 거주가 금지되었다. 조약에 근거한 이러한 공간 분할은 조계 안팎의 거주 환경에 천국과 지옥에 비유될 만큼의 차이를 유발했다. 그러나 그러한 조계 내의 우월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거리의 고요함을 꺼림칙한 생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내지인(곧 일본인)뿐이었다”는 소설 속 서술처럼, 경계 밖 조선인들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선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원천이 되었으며, 바로 그러한 시선에 의해 이중적인 도시구조는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목포는 ‘독거’, ‘잡거’, ‘분거’와 같은 식민지기 도시 유형들 중 어디에 해당할까. 1897년 개항과 함께 일찍이 인천의 각국공동조계를 모델로 외국인 거류지가 설치되어 조선인과 외국인 사이에 거주의 분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목포는 부산과 같은 ‘분거’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글은 목포의 ‘분거’ 도시 형성, 그리고 그러한 도시 형성의 논리가 남긴 흔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대도시 목포의 출발

    개항 후 목포가 하나의 도시로 발전해 가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조계 부지가 시가지 건설에는 매우 부적합하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시대 목포는 무안현의 해안방어기지로서 목포진이 설치되었던 곳인데, 목포진을 포함한 조계의 경계 안쪽은 대부분 구릉지나 경작지, 갯벌의 상태였다. 따라서 조계지 건설을 위해서는 우선 가옥 건축과 도로 부설이 가능한 부지 조성부터 착수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해안선의 해벽 공사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공사는 1899년 6월에 시작되어 1901년 5월까지 약 1.5km의 해벽이 건설되었으며, 그를 따라 이면도로를 축조하여 15m 폭의 해안도로가 만들어졌다.

    그림2. 「木浦外國人居留地地圖」 (『목포시사』 제1권(목포시 · 목포시사편찬위원회, 2017), 124쪽에서 인용, 필자 작성)

    해벽 건설이 한국정부 부담이었다면, 조계 내 도로 부설은 거류지회 부담이었다. 거류지회는 기본적으로 지주가 납입하는 지조와 지구의 공매 과정에서 발생한 수익금을 가지고 도로 부설 비용을 충당했으나, 개항 초에는 납입되는 지조의 액수가 많지 않고 급설을 요하는 도로도 많았기 때문에 도로 부설에는 편법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가구(街區) 분할은 일본영사관 부지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해안선에 평행하여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중심축을 형성했는데, 그 도로의 양단은 각각 바다와 산을 면하고 있어 조계 밖으로의 확장성이 없는 내부종결적인 형태를 띠었다.

    조계의 안과 밖

    조계 내 일본인 마을은 1897년 개항 이래로 영사관(1906년 통감부 설치 후에는 이사청) 앞 동운루 부근, 동해안통 1정목, 구 목포진의 동쪽 및 서쪽 구릉, 무안통 1정목, 본원사 부근 등지의 각 방면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그림 3〉의 적색 원 부분). 초기의 시가지는 어느 한 곳을 중심으로 발달하지 못했다. 무계획적으로 각자 원하는 곳에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건물들 사이에는 수전이나 간석지 상태의 공지와 산기슭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시장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1901년 이후 도로 및 매축 공사가 진척을 보임에 따라 영사관 앞 시가지는 서쪽 및 남쪽 방향으로 성장해 갔다. 또한 무안통의 시가지는 북쪽의 조계 경계 방향으로, 그리고 구 목포진의 동쪽 구릉 시가지는 동해안통 1, 2정목 방향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그림 3〉의 화살표 방향). 러일전쟁 이후로는 조계의 경계를 넘어 무안가도를 따라 죽동 이북까지 진출하는 일본인 숫자가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경향은 죽동 유곽이 공식 허가를 받고, 또 목포-광주 간 도로와 호남선의 착공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조계 밖 조선인 마을에 일본인들이 잡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림3. 1900년대 목포 시가지(적색 원은 조계 내 일본인 거류지역 중심, 흑색 원은 조계 밖 조선인 거주지역 중심). 조계 내 주요 건물 위치는 다음과 같다. ①일본영사관(이사청), ②목포거류민단역소, ③경찰서, ④동운루, ⑤미요시노여관, ⑥구 목포진(목포대), ⑦본원사. (『목포시사』 제1권, 130쪽에서 인용, 필자 작성)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계 내에는 조선인의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1899년까지 조계 내에 위치한 구 목포진의 조선인 부락은 모두 철거되었다. 조계 밖에는 쌍교리와 같이 목포진 시대부터 이미 존재했던 마을들이 있었는데, 개항 후 새로운 기회를 찾아 몰려온 사람들을 이 공간들이 모두 수용해 내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초대 감리 진상언은 쌍교리 근처의 무덤들을 이장시키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조처했다. 이후 조선인 마을은 죽동, 만복동, 남교동의 서쪽 산기슭 방면과 양동 및 신창동의 각 방면으로 확대해 갔으며, 온금동 방면에도 조선인 가옥들이 들어섰다(〈그림 3〉의 흑색 원 부분).

    조계 내 일본인 시가지가 ‘계획 시가지’였다면, 조계 밖 조선인 마을은 ‘비계획 시가지’였다. 목포의 조선인 마을은 도시로서의 기본적인 시설조차 갖추지 못했던 까닭에 ‘돼지우리’와 같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무덤을 이장시켜 겨우 터전을 마련한 조선인 마을 근처로는 다시금 일본인 전용묘지가 들어섰다. 조선인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선 계획시설이 다름 아닌 죽동 유곽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인 마을의 계획 부재의 현실을 잘 보여 준다.

    차별적 경계의 재생산

    근대도시 목포의 기원을 이루는 조계의 경계는 본래 외국인과 조선인 사이의 거주 지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다만 1883년의 조영수호통상조약 이래 조선정부가 각국과 체결한 조약들에서는 조계로부터 10리, 곧 4km까지는 조선의 지방행정규칙을 준수한다는 조건 하에서 외국인의 잡거를 허용했다.

    이러한 공간 분할은 1905년 일본의 법률 제41호로 공포된 「거류민단법」에 의거, 조선 각지에 설치된 일본인거류민단에 의해 계승되었다. 1914년에 신설된 목포부의 경계(〈그림 4〉의 ③)는 조계의 경계(〈그림 4〉의 ①)를 넘어서면서도 거류민단지구(〈그림 4〉의 ②)의 범위에는 훨씬 못 미쳤다. 이때 경계 설정의 기준이 된 것은 ‘시가지’였다. 시가지의 범위는 새로운 세제의 시행 과정에서 구체화되어 갔는데, 시가지를 대상으로 지방의 호세나 지세를 대체했던 가옥세와 시가지세 등이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림4. 목포의 공간 분할 경계들. (『목포시사』 제1권, 133쪽에서 인용, 필자 작성)

    새로운 부제 실시와 함께 부의 경계 자체는 더 이상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분할된 거주 공간의 경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명은 그러한 경계의 존속을 증명하는 동시에 유지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개항 직후인 1899년에 일본인들은 장차 시가지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을 7개 구역으로 구분하고, 우선적으로 영사관통, 동해안통(1〜4정목), 남해안통(1〜2정목), 본정통(1〜5정목), 무안통(1〜6정목), 산수통(1〜2정목), 목포대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그림 5〉의 왼쪽). 나머지는 시가의 발전에 따라 추후에 명명하기로 했다. 1912년에 하시모토 부윤은 구역이 아닌 도로를 기준으로 새로운 지명을 붙이고 곧 시행에 옮기려 했으나, 마침 총독부 토지조사국 조사반이 행정구역 개정을 위해 각지의 시가지조사에 나섬에 따라 그 시행을 잠시 미루었다가, 결국 1913년 12월 9일에 다음 표와 같이 전면 개정을 시행했다.

    표1. 목포부의 지명 변경

    새로운 지명은 개정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 조계 내 일본인 시가지에는 모두 일본식 지명이, 조계 밖 조선인 시가지에는 한국식 지명이 붙여졌다. 다만 일본인의 조선인 마을 진출과 함께 조계 내 가구 형태가 동서축에서 남북축 중심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지명에도 이와 같은 변화가 반영되어 조계 밖이라 해도 목포역 앞 신개발지에는 창평정, 호남정과 같이 한국 지명을 이용한 일본식 지명과 대정정, 명치정 등과 같은 완전한 일본식 지명까지 등장하게 되었다(표의 적색 부분, 〈그림 5〉 참고).

    그림5. 1914년 전후 목포의 지명 변화(흑색은 한국식 지명, 적색은 일본식 지명). (『목포시사』 제1권, 137쪽에서 인용, 필자 작성)

    식민당국은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새로운 지명 부여와 관련하여 본래 ‘사용빈도’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이 원칙에 따르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일정 지역에 상대적으로 다수가 분포하는 민족의 의견이 더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성을 예로 들어보면, 1914년 당시 경성부 내 인구 248,260명 중 일본인 인구는 59,075명으로 23.8%, 한국인은 187,176명으로 75.4%를 차지했으나, 실제 지명의 비율은 각각 49%와 51%로 인구 비중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즉 일본식 지명은 실제보다 과도하게, 그리고 한국식 지명은 실제보다 과소하게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목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일본식/한국식의 이중적인 지명 부여는 거주 민족의 실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민지 통치 권력이 가졌던 이중적인 심상지리를 구체화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렇게 붙여진 지명은 부 단위 내에서의 행정적 차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가의 변화와 도시계획

    1910년대에는 190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시가지 내부의 정리가 진행되어 도시의 대체적인 윤곽이 잡혀 갔다. 먼저 1912년에는 동해안 1정목 남측 도로가 개선되었다. 이 도로는 본래 구 목포진 북면의 산기슭을 따라 한쪽 도로면만 이용 가능했는데, 민유 택지와 도로 부지를 교환하여 양쪽 도로면을 모두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듬해인 1913년에는 호남선 철도의 개통을 전후하여 죽동 유곽이 앵정(櫻町)으로 옮겨 갔다. 남쪽 해안 방면은 상대적으로 시가의 발전이 부진했으나, 유곽 이전에다가 이 일대가 공장구역으로도 지정되면서 1910년대 초 급격히 성장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구 조계 밖 조선인 마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시가지 조성 또한 활발해졌다. 저습지가 많이 분포해 있던 양동 남부 및 남교동 북부는 1924년부터 점차적으로 매립이 진행되었다. 같은 해 온금동 방면에서도 매립이 시작되어 2개년 후 완성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는 절벽을 폭파하여 죽동의 도로를 넓은 직선도로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 가장 큰 변화는 목포역 부근에서 일어났다. 1927년부터 철도관사와 대사사(大師寺)의 뒷산을 깎아 호남선 서쪽 편의 광대한 호면을 매립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1929년까지 호면의 약 8할을 시가지로 조성하는 한편, 목포역 앞 광장을 지나 신 매립지를 관통하는 삼선도로를 만들었다(〈그림 6〉 참고). 1920년대의 이와 같은 변화는 일본인의 구 거류지 밖 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대체로 조선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 간 연계시설의 정비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그림6. 1920년대 목포역 앞 공간의 변화 (『목포시사』 제1권, 138쪽에서 인용, 필자 작성)

    경계의 확장

    1934년 6월에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의 특징으로는 첫째 도시계획법 · 건축법 ·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의 내용을 모두 포괄했다는 점, 둘째 국토계획의 관점을 크게 반영했다는 점, 셋째 기존 시가지 개량보다 교외 신시가지 창설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법령을 근거로 같은 해 11월 함경북도 나진읍을 시작으로 1944년 8월 삼천포까지 총 43개 지역에 시가지계획이 결정 고시됐으며, 목포시가지계획은 1937년 3월 23일 총독부 고시 제187호로 공포되었다.

    그림7. 「木浦市街地計劃平面圖」 (국회도서관 소장) (『목포시사』 제1권, 142쪽에서 인용, 필자 작성)

    목포 시가지계획은 1965년까지 인구 1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를 목표로 했다. 대상 구역은 “장래 시가지 형성상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구역”, 즉 목포부와 부 외곽의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 및 용당리를 포괄했다. 부의 영역은 이미 1932년 8월 15일 총독부령 제75호에 따라 이로면의 죽교리, 산정리, 용당리 일부를 죽교동, 산정동, 용당동으로 편입함으로써 크게 확장된 상태였지만, 시가지계획은 그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갔다. 왜냐하면 부역 확장에도 불구하고 부 내 인구밀도가 포화상태에 가까워졌고, 산정리와 용당리의 인구도 1919년에는 581명에 불과했으나 1934년에는 2,998명으로 급증하는 등 도시화 경향이 현저해졌기 때문이다.

    시가지계획은 가로망계획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때 계획된 가로망 구조는 현재의 가로망과 매우 유사하다. 다만 목표연도인 1965년 시점에서 봤을 때 그 계획은 거의 실현되지 못했다. 계획 내용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 볼 것은 당시 시가지의 중심이 목포역 앞으로 설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목포시가지계획평면도」의 동심원 중심에 목포역이 위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그림 7〉 참고), 인구 및 생활의 중심이 무안가도를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는 ‘조계 밖’이었을 뿐인 조선인 마을 일대가 구 조계를 대신하여 시가지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시가지 개발은 조선인을 주변으로 몰아냈지만, 시가지의 중심은 그 뒤를 다시 좇아갔다.

    경계 밖의 구도심

    해방 후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지명의 개정이었다. 1949년 4월 1일 ‘정(町)’이나 통(‘通)’과 같은 일본식 지명은 모두 ‘동(洞)’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7월 4일에는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여 ‘목포부’를 ‘목포시’로 바꾸었다. 이후 독자적인 도시계획 수립을 반복해 가는 과정에서 목포의 중심은 하당 · 옥암 등의 신시가지로 이동해 갔다. 그 결과 조계와 그 주변에 형성되어 있던 옛 중심지는 언제부턴가 ‘구도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조계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가 새겨 놓았던 상이한 풍경은 여전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경계 안팎의 구분 없이 개발로부터 소외된 풍경으로 덧칠해져 있는 지금은 그 차이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8. 구 조계 안팎의 현재 풍경. (위) 조계 설치 초기 본정(本町)으로 불렸던 조계 내 거리의 현재, (아래) 서산동은 본래 조계 내에 속했던 곳이지만 유달산 등줄기로 인해 시가의 발달이 어려웠기 때문에, 현재 모습은 오히려 조계 밖 온금동의 풍경과 연속선상에 있다.

    식민지기 송도 신사가 있던 자리는 해방 후 ‘불법 점거’에 의해 마을이 형성된 곳이라고 한다. 압제와 해방의 시간적 단절 사이에서 조계 안팎을 구분하던 경계를 무너뜨리며 탄생한 공간이었다. 높은 언덕 위에 둘러쳐진 옹벽과, 사람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미로화되어 있는 골목은 마치 하나의 성과 같은 형상이다.

    그림9. 옛 송도 신사 자리에 형성된 마을과 목포진 역사공원에 오르는 언덕길(오른쪽 아래).

    신시가지의 경계 밖에서 오래도록 개발의 침입을 막아낸 거대한 요새. 목포진 자리를 비롯하여 또 다른 언덕들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성들은 이제 구도심 그 자체이다. 이 거대한 요새를 망각의 무덤 속에 묻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 장소를 기억하는 뿌리로 남길 것인가. 어쩌면 목포는 뿌리를 드리운 채 하늘로 부상하는 ‘천공의 성’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겠다.

    ※ 이 글은 『목포시사』 제1권에 수록된 필자의 글(제1장 목포의 경계와 도시계획)을 크게 수정하고 가필한 것임을 밝혀 둔다.

    <참고문헌>

    박종철, 「제13편 도시계획」, 『목포시사』 社會 · 産業編, 1990

    배종무, 『목포개항사 연구』, 도서출판 느티나무, 1994

    고석규,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김종근, 「식민도시 京城의 이중도시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울학연구』 38, 2010

    박준형, 「경계의 저편, 타자의 발견-다마가와 이치로의 소설 『京城·鎭海·釜山』(1951)에 나타난 공간의 특성과 타자인식을 중심으로-」 『사이間SAI』 17, 2014

    박준형, 「‘거류지’에서 ‘부’로-1914년, 한반도 공간의 식민지적 재편」, 『사회와 역사』 110, 2016

    필자소개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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