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나이에도
    사랑은 불쑥 찾아온다네
    [행복칼럼] 노년의 나이와 사랑
        2019년 03월 02일 12: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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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 정서 중에 하나인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이기도 하고, 의지이자 노력이기도 하다. 사랑을 감정으로 볼 때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영어로 ‘fall in love’)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열병으로 비유되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방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한눈에 반할 수도 있고, 쭉 봐오던 사람이 갑자기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Ladies In Lavender』은 노년의 나이에도 얼마든지 사랑의 감정으로 마음이 설렐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라벤터의 연인들’의 한 장면

    자넷과 우슐라 자매는 영국의 작은 해변 마을에서 노년의 시간을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다음날, 한 청년이 파도에 떠내려 온다. 정신을 잃은 채 바닷가에 쓰러져있던 청년을 돌보면서 두 자매의 단조롭던 일상이 오랜만에 생기로 넘친다. 특히 우슐라는 왠지 모를 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설렌다. 처음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으로 행복해 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생 우슐라를 보며 언니 자넷은 안쓰러워한다.

    하지만 이별은 빠르게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헤어짐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 우슐라는 청년이 쓰던 침대에 웅크려 몸을 누인다.

    이룰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안으로 꼭꼭 눌러 감춘 채 침묵 속에서 정제된 사랑과 질투, 슬픔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두 노년의 배우 – 우슐라 역의 주디 덴치와 자넷 역의 매기 스미스 – 의 연기는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딱 그랬다. 오랜만에 찻집에서 마주앉은 친구는 몇 번을 망설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

    말인즉슨 회사 고위간부로 있는 친구는 어느 날부터인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 어린 남자 동료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단다. 요즘 뜨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탤런트처럼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업무 능력이 출중한 직원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젊은이였다.

    나이 차이가 많은데다가 직책상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사인 친구의 말을 젊은 사람답지 않게 잘 받아주고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쳐주곤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하지 않던 얘기들을 그 젊은 동료에게는 스스럼없이 털어놓게 되었고, 어느새 자꾸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야말로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어느새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와 특별한 인연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향한 매혹의 감정은 흥분감과 더불어 모든 것을 달콤하게 느끼며, 이는 상대에 대한 깊고도 신비로운 몰입 상태로 이어진다. 친구 또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낭만적인 감정으로 인해 자주 웃고 약간 들뜬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혹여라도 그 동료를 사무실에서 마주치게 되면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리에 힘이 빠지고 말 것 같은 황홀한 상태가 되곤 했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 동료에 대한 생각은 온통 머릿속을 휘저었고, 한번 떠오른 생각은 떨쳐지지 않고 내내 따라다니는 바람에 아주 사소한 일조차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했다. 동시에 이런 자신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날까 전전긍긍하였고, 혹시라도 다른 직원들 특히 상대 동료가 알게 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친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가슴 벅찬 환희와 동시에 가슴 저리는 아픔에 어쩔 줄 몰라 했고, 자신에게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감정을 누르려고 애쓸수록 더 커져만 갔다.

    딱히 남편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한 지 40년이 지났기에 연애할 때의 달달함만 없을 뿐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안정적인 부부였다. 게다가 상대는 나이로 보나 직장에서의 관계로 보나 도저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난관들이 사랑의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상대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을 부추겼다.

    사랑은 극단적인 긍정적 감정과 극단적인 부정적 감정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상대와 같이 있을 때나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면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은 행복감을 느낀다. 반면에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상황이거나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야말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려고 버둥거리던 친구는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찾아온 불가항력적인 사건의 연유가 뭘까 나름 곰곰이 돌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젊었을 때 남편과의 사랑이 움텄던 것도 자신이 하는 어떠한 얘기에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조곤조곤 맞장단 쳐주던 남편의 모습에 끌렸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남편이나 그 젊은 동료가 가진 몇 가지 특성이 친구의 내면에 만들어져 있는 이상적인 연인상의 기본적인 요소들에 들어맞자 그때나 이때나 자기도 모르게 끌렸던 것이리라. 이처럼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누군가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특성들이 이미 많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불현 듯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 친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중에서 ‘사랑은 어떤 나이에도 찾아온다네’라는 아리아가 생각났다. 그래 맞다, 사랑은 인생 어느 시기에나 찾아올 수 있다. 사춘기 아이들은 첫사랑을 시작하고, 80대 노인도 낭만적인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너무 이른 사랑도, 너무 늦은 사랑도 없다.

    친구는 자신에게 휘몰아쳐온 감정을 인정할 수가 없어 떨쳐버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뜻밖의 선물인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금세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고통스럽지만 황홀한 감정이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예감하기 때문이리라.

    친구와 헤어지면서 사랑의 감정은 바람과 같아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도, 가는 바람을 잡을 수도 없노라고 말해 주었다. 친구의 뒷모습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와 마음을 온통 휘저어놓았던 젊은이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두 자매의 뒷모습이 겹치면서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스탕달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이란 우리 의지와는 별개로 불쑥 찾아왔다가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리는 열병과도 같다.”

    필자소개
    20년 가까이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병동 간호사 및 수간호사로 재직했고 현재는 경인여자대학교 간호학과 교수(정신간호학)로 재직. 저서 및 논문으로 심리 에세이 ‘마음 극장’ “여성은 어떻게 이혼을 결정하는가”“ 체험과 성찰을 통한 의사소통 워크북”(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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