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안에서 3일간
주더의 생일을 경축하다
[국공내전⑮] 여섯 번 혼인한 주더
    2019년 02월 28일 08: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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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회의 글 [국공내전⑭] 천이·쑤위의 연합작전

1946년 12월 1일은 주더의 육십세 생일이었다. 공산당 중앙은 옌안에서 11월 29일부터 3일간이나 경축행사를 진행하였다. 장쑤성 북부와 산둥성에서, 그리고 남만주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 회갑잔치를 이렇게 거창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전황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감과 단결심을 북돋으려 하였을 것이다.

주더의 회갑은 옌안의 중앙대례당 강당에서 열렸다. 식장에는 누런 기장을 아교로 붙여 ‘수(壽)자를 써서 벽 한복판에 붙였다. 기장은 섬북의 주요 식량 중 하나이다. 마오쩌둥은 ’인민의 영광’이라는 다섯 글자 휘호를 썼다. 그밖에도 류샤오치와 린보취, 펑더화이, 예젠잉 등 주요 지도부들이 휘호나 글씨를 써서 벽에 붙였다. 각 군구 지휘관들도 전보를 보내어 총사령의 회갑을 경축했다. 중앙위원회는 만년장청(萬年長青: 천년만년 변함없이 푸르다는 뜻)이라고 쓴 기를 세웠으며 중앙서기처가 양쪽에 축하하는 대련을 걸었다. 탁자에는 복숭아 모양의 밀떡이 가득했는데 중국에서는 잔치 때 복숭아를 쓴다. 서왕모의 과일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소련은 물론 미국의 시찰조 군인들까지 생일잔치에 참석하였다.

주더 60세 생일잔치 식장의 모습

저녁이 되자 중앙 대례당에서 간부 만찬이 열렸다. 린보취가 축하인사를 한 뒤 류샤오치가 연설을 하였다. 저우언라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축사를 낭독하자 회장 안이 박수소리로 가득찼다. 마지막에 주더 총사령의 인사가 있었다. 그는 먼저 변구 정부와 각계 손님들에게 감사인사를 하였다. “나는 중앙에서 계속 반대했지만 동지들이 주장하여 생일잔치를 하게 되었다. 먼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린다. 우리 어머니는 일자무식이지만 나를 바르게 키워 주셨다. 하지만 진짜로 나를 키워준 것은 중국 인민과 우리 당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우리 다같이 노래를 부르자. 팔로군 행진곡을 내가 선창하겠다.” 주더는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노래는 조선의 작곡가인 정율성이 1939년 옌안에서 작곡한 노래이다. 나중에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었다.

팔로군 행진곡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따라서 간다,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싣고
우리는 백전백승의 역량이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려움 없이, 절대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자.
반동패들을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의 기치를 높이 휘날린다!
들으라! 군대의 함성 소리를!
들으라! 혁명의 쟁쟁한 노래소리를!
동지들은 해방의 전투를 향해 열맞춰 달려간다,
동지들은 조국의 변방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가 태양을 향한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
전국의 해방을 위해

1946년 내전이 일어나 공산당이 막 밀릴 때에 열렸던 생일잔치는 정작 승리가 눈앞에 보일 무렵부터 더 이상 열지 않기로 결의했다. 마오쩌둥은 1949년 3월 5일에서 13일까지 열린 7차 2중전회에서 이렇게 제의했다. “앞으로 회갑잔치, 장례식을 하지 않는다. 술을 마실 때는 조금만 권하자. 행사 때나 회의 때 박수를 지나치게 치지 않는다. 사람 이름으로 지명을 짓지 않는다. 중국 동지들을 마르크스, 엥겔스, 스탈린 등과 같은 열에 두지 않는다.” 특권이나 우상화를 경계한 것이었는데 나중의 역사를 보면 꼭 그렇게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기실 그때에 벌써 우상화의 싹이 트고 있었다. 내전을 다룬 드라마에 보면 그 잔치에서 촌로 한 사람이 ‘동방홍’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동방홍(東方红)

동쪽에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중국에 마오쩌둥이 나셨네.
그 이는 인민의 행복을 위해 에헤라, 그 이는 인민을 구할 큰 별
그 이는 인민의 행복을 위해 에헤라, 그 이는 인민을 구할 큰 별

마오 주석은 인민을 사랑하네, 그 이는 우리의 안내자
신중국 건설을 위해 에헤라, 우리가 나아가도록 영도하네
신중국 건설을 위해 에헤라, 우리가 나아가도록 영도하네.

공산당은 태양처럼 그 곳을 밝게 비추네.
그 곳에 공산당 있어 에헤라 인민들이 해방을 맞네
그 곳에 공산당이 있어 에헤라, 그 곳 인민들이 해방을 맞네

동쪽에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중국에 마오쩌둥이 나셨네
그는 인민의 행복을 위해 에헤라, 그이는 인민을 구할 큰 별
그 이는 인민의 행복을 위해 에헤라, 그이는 인민의 큰 별, 위대한 별

동방홍은 원래 섬북 지방의 민요인 ‘백마를 타고’에서 곡을 가져왔다. 1943년 겨울, 섬서성 자현佳縣)의 농민가수 리유위안(李有源)이 곡으로 10여 단락이 넘는 민요 ‘이주민의 노래(移民歌)’를 지었다. 이주민의 노래는 마오 주석과 공산당 영도 아래 광범위한 빈곤 농민들이 행복한 생활을 그리는 것을 서사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노래를 지은 뒤 리유위안의 조카인 농민가수 리정정(李增正)이 농민과 군중들 집회에서 여러 차례 불렀다.

그 뒤 옌안의 문예 종사자들이 ‘이주민의 노래’를 정리하여 세 단락의 가사로 고쳤다. 이름도 ‘동방홍’으로 개칭하여 1944년 해방일보에 발표했다. 그 뒤 저명한 작곡가인 리환즈(李涣之)가 합창곡으로 편곡하여 행사 때에 쓰기도 하였다. 1964년 총리인 저우언라이가 관여하여 건국 15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혁명음악 무용 서사시 ‘동방홍’으로 편곡하였다. 중국정신을 잘 표현해 주는 노래라고 하는데 마오쩌뚱 우상화 과정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주더의 생활

주더는 생활이 매우 소박했으며 검소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데 지위고하가 없었다. 경호원, 아이들, 부하들을 늘 대등하고 공평하게 대하였다. 그는 스스로 옷을 기워 입었다. 심지어 경호원의 옷을 기워준 적도 있었다. 그는 경호원이나 비서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그가 레이양(莱陽)에 시찰을 나갔을 때였다. 레이양은 산둥성에 있는 고장으로 배가 유명한 곳이다. 기차에서 광주리에 배가 담겨 오자 비서가 받았다. 주더는 비서에게 앞으로는 받지 말라고 하였다. 비서가 “사람들 친절을 무시하기 힘듭니다. 레이양 배가 좋으니 한번 맛보라는 겁니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주더는 “안되네, 주더의 비서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내가 지역을 시찰하는 것은 인민들에 관심이 있어서지 관심을 받으려는 게 아닐세.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으려는 게 아니란 말일세. 오늘 배를 받으면 내일은 귀중한 물건도 받을 텐가? 우리가 전에 3대 전역을 치렀던 진저우를 보게. 사방에 사과밭이 있지. 우리는 사과 한 알도 손을 대지 않았네. 그래서 인심을 얻었던 거야. 그러니 자네는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하네.” 이렇게 말하자 비서가 심복하였다.

1958년 베이징 교회 저수지에 일하고 있는 주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꼭 화부나 마부처럼 하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스메들리가 옌안에 와서 취재할 때 그녀는 주더를 몰라보고 마부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밥하는 취사병으로 자주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팔로군 총사령부에 있을 때 장씨 성을 가진 장기 고수가 있었다. 주더도 그를 불러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세 판을 총사령이 내리 이겼다. 그는 평소 주변에 적수가 없다고 자랑했는데 저 노병에게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장기 둘 때 주더가 졸을 자꾸 올렸기 때문에 그는 “저 노병은 졸을 잘 쓴다.”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주더는 그에게 “당신, 졸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졸도 내를 건너면 차를 견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장기는 가운데에 경계가 있는데 그것을 하천이라고 부른다. 주더는 또 “이 졸은 인민이다. 우리가 일본을 공격할 때 팔로군만으로 이길 수 있었나. 인민군중들에게 의지해야 이길 수 있었다. 당신 눈에는 이게 졸로 보이지만 우리는 졸에게 의지해야 한다. 인민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고수가 “당신은 일개 노병인데 말하는게 참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그때 경호원이 와서 주더에게 보고했다. “총사령, 아무개가 보자고 합니다.” 그 고수는 깜짝 놀라 “당신이 총사령? 주더란 말이오?”하고 물었다. 그렇게 주더는 사람들에게 소탈하고 온화하게 대했다.

해방군 최고의 고참병 주더

주더는 1886년 12월 1일 쓰촨성 이룽현(儀隴縣)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쿤밍의 윈난 육군강무당에서 입학했으며 그해 쑨원이 영도하는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1년에는 신해혁명에 호응하여 일어난 무장기의에 참가했다. 1917년에 윈난군 여단장이 되어 돤치루이의 북양군벌에 맞서 싸웠다. 1921년에 그는 윈난성 헌병 사령관이 되어 경비처장 겸 경찰청장을 겸임하였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은 그는 점점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22년 주더는 고위 관직을 내던지고 독일로 유학하러 갔다. 처음에 그는 상하이로 가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려 하였으나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천두슈가 주더를 군벌이라 하여 거절하였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와 공산당원들을 만난 그는 마침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독일 괴텡겐(Göttingen)의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1925년 베를린으로 가서 국민당 독일지부 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혁명활동을 하다 두 번이나 강제출국을 당하였다. 1925년 그는 소련으로 가서 군사학을 공부했으며 1926년 귀국하였다. 중공 중앙은 그를 쓰촨군에 보내 혁명공작을 하게 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진 뒤 그는 장시성 난창에서 8.1기의에 참가하여 기의군 9군단장을 맡았다. 기의가 실패하자 후난을 전전하던 그는 농민기의를 일으켜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는 데 참가했다.

1928년 1만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징강산에 들어가 마오쩌둥의 부대와 합류했다. 역사적인 주·마오의 공농 훙군 4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주더와 마오쩌둥은 정치와 군사 부문을 나누어 맡았다. 주더는 중국 홍군, 그리고 팔로군과 해방군에 이르기까지 총사령관을 맡아 공산당 군대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평생 군대를 지휘하며 군무에 대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게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과 함께 ‘16자 전법’(1)을 완성했다. 이 요결은 홍군 유격전의 기본 지도원칙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군사 논문을 썼으며 운동전, 산악전, 험로전투, 조우전, 추격전, 습격전, 공성전, 섬멸전등 전술문제를 기술하여 마오쩌둥 군사사상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주더는 생김새가 중국의 여느 농민처럼 꾸밈이 없고 소박하였다. 행동거지도 소탈하고 격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하지만 평생 수많은 시를 쓴 시인이었다. 1977년 베이징에서 출판된 그의 시집에는 고른 시 80수가 실려 있다.

벗에게 주다 (赠友人)

화북을 뭇 영웅들이 수복하였네.
용사들이 구름처럼 대풍가(2)를 노래한다.
무기를 휘둘러 일제를 내치리라 믿으니
강산은 의구한데 군기만 붉구나.

北華收复賴群雄
猛士如雲唱大風
自信挥戈能退日
河山依舊戰旗红

이 시는 주더가 항일전쟁 시기에 쓴 것이다. 팔로군이 화북의 해방구를 개척한 것을 칭찬한 시이다. 마오쩌둥이나 주더, 그리고 천이처럼 적지 않은 지휘관들이 때때로 시를 지었다. 국민당 장군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중국의 전통인 것인지, 군인이라 하면 경직되고 교양과는 담쌓은 인상을 주는 우리 고위 군인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섯 번 혼인한 주더

그는 평생 여섯 번 혼인했다. 첫 부인은 류총전(劉從珍)으로 인근마을 처녀였다. 큰 외삼촌의 딸이니 주더와는 외종사촌 간이었다. 그녀는 주더보다 두 살 위였는데 1905년 부모들이 정혼하고 그해 결혼하였다. 그녀의 나이 10세, 주더의 나이 8세 때였다. 다음해 봄 주더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선생의 도움을 얻어 인근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3년 뒤에는 더 먼 쿤밍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일로 주더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주더의 부인은 매우 괴로웠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오히려 주더의 우국애민 정신에 깊이 감동하여 잘되기를 빌었다.

류총전, 주더의 첫 부인

결혼 후 계속 독수공방이 이어졌지만 시부모 앞에서 한 번도 원망하거나 화를 낸 일이 없었다. 주더의 부모도 감동해서 며느리를 깊이 사랑하였다. 길쌈으로 돈을 벌어 시부모를 봉양하며 주더에게 돈을 보내라고 한 번도 편지를 쓴 일이 없었다. 1930년대 중기에 국군이 세 번이나 주더 조상묘를 파헤쳐 그녀는 그때마다 머리를 풀어야 했다. 선량한 그녀는 그때부터 절에서 염불하며 주더가 일생동안 평안하기를 빌었다. 주더가 그녀를 부인 대접한 일이 없지만 남매간의 정은 있었다. 쓰촨성 남부의 루저우(瀘州)에 주둔하고 있을 때 어머니와 류부인을 여단장 숙소에서 재운 일이 있었다. 신중국 성립 후 그는 그녀를 베이징으로 불러 편히 살라고 하였으나 그녀는 시골이 좋다며 가지 않았다. 1958년 주더의 첫 부인은 향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더의 딸이 그녀를 정실 어머니로 인정하여 장례를 치렀다.

주더와 샤오쥐에팡

두 번째 부인, 하지만 주더가 원해서 처음 결혼한 부인 샤오쥐에팡(肖菊芳)은 결혼 6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주더 소생의 유일한 아들을 낳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 세 번째 부인은 천위전(陳玉珍)으로 친구의 외조카였다. 그녀는 살림을 아주 잘하고 소박했으며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 꽃을 좋아해 집안에 많은 꽃을 심었으며 첫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그녀는 집안에 작은 서재를 두어 ‘신청년’ ‘신조(新潮) 등 진보 잡지를 비치해두고 있었다. 또 주더를 위해 시경(詩經), 수호전, 홍루몽, 삼국연의, 서유기, 당시 삼백수, 손자(孫子) 등을 사들이니 주더가 매우 좋아하였다. 두 사람은 의가 좋아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혁명에 투신하기로 한 주더에게 이별은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그는 1922년 상하이로 가기 위해 부인 및 아들과 헤어졌는데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주더는 총사령이 된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였다.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오늘날 중국혁명 기념관과 주더의 생가 기념관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한다.

주더와 허쯔화

네 번째 부인은 허쯔화(賀治華)이다. 그녀는 중학교 교사였는데 성격이 밝고 시원시원했다. 그녀는 주더가 독일로 유학을 가자 뒤따라가 마침내 혼인에 이르게 되었다. 주더의 나이 36세, 허쯔화의 나이 19세 때 일이었다. 그녀는 주더와 함께 괴팅겐의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주더가 독일에서 추방되고 소련에 공부하러 갈 때 그녀는 이미 임신상태였다. 주더는 모스크바 교외의 농장에 그녀를 맡겨두고 자신은 계속 공부했다. 그녀가 딸을 낳자 주더는 말할 수 없이 좋아하여 이름을 쓰쉰(四旬: 나중에 정식이름은 저우민(朱敏이다.)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허쯔화는 그 이름이 촌스럽다 하여 서양식으로 ’페이페이‘라고 개명하였다. 그녀는 점점 주더가 건실하기만 하고 낭만을 알지 못한다고 불평하며 거리를 두게 되었다. 딸을 낳은 뒤에도 주더를 차갑게 대하여 관계가 좋아지지 않았다. 주더가 귀국하게 되자 안전을 고려하여 허쯔화와 딸을 소련에 두었다. 그녀 또한 주더와 함께 귀국하여 무서운 나날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주더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동생을 시켜 딸을 쓰촨성 청두로 보냈다. 이름도 자신의 성을 따서 허페이페이로 바꾼 뒤였다. 그리고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대학에서 공부하던 훠쟈신(霍家新)과 사랑에 빠져 곧 결혼했다. 그래서 주더와의 혼인도 파탄이 났다.

우뤄란, 지휘부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처형되었다.

다섯째 부인은 우뤄란(伍若蘭)으로 후난성 레이양현(耒陽縣) 사람이다. 그녀는 후난 제3여자사범학교 출신으로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그녀는 레이양현 여성연합회 주석, 홍4군 정치부 선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8년 2월 16일, 주더 등이 인솔한 공농 홍군이 그녀가 있는 레이양현을 공격 점령하여 레이양현 소비에트 정부를 세웠다. 그때 그녀는 레이양현 부녀연합회 주석 등으로 활동하다 현위원회 동지의 소개로 주더와 부부가 되었다. 그녀는 주더를 따라 징강산으로 갔는데 늘 남편에게 청하여 군사기술을 배웠다. 사격, 수류탄 던지기, 단검 사용 등을 배워 나중에는 양손으로 사격해도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쌍권총 여대장‘으로 불렀다.

1929년 2월 1일, 홍4군 지휘부가 국민당군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때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싸워 마오쩌둥, 주더, 천이 등 지휘부를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그때 국민당 지휘관인 류스이(劉士毅)가 그녀를 심문하며 마오쩌둥과 주더의 행방을 알고자 하였다. “마오쩌둥과 주더가 어디 있느냐?” “홍군 속에, 인민의 마음 속에 있다.” “너는 왜 비적이 되었느냐?” “진짜 비적은 너희들이다. 우리는 혁명가다. 너희들 반동파를 없애려고 하였다.” 국민당 군은 그녀를 매달고 때리며 고춧가루물을 먹이는 등 혹형을 가했으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응수했다. “혁명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너희들이 내 입을 열게 할 수 있다면 태양이 서쪽에서 뜰 것이다.” 류스이는 그녀에게 주더와의 관계를 끊고 투항하라고 권했다. 그러면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내가 주더와 관계를 끊으면 간강(赣江)의 물이 거꾸로 흐를 것이다.” 1929년 2월 12일 겨우 23세이던 여장부는 간저우에서 살해되었다. 국민당군은 그녀의 머리를 잘라 간저우(赣州) 성문에 효수하였다.

그녀가 희생된 뒤 주더는 매우 비통해 하며 오래도록 추념하였다. 미국작가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그녀는 견결한 농민의 조직자였다. 그녀는 선전할 줄 알았으며 싸울 줄 알았다. 문무를 겸했으며 지용을 겸비한 얻기 어려운 인재였다.”고 썼다. 주더는 그녀를 소개받고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은 매운 것(쓰촨사람)을 두려워 하느냐? 나는 매운 게(후난 사람) 무섭지 않다. 우리 함께 매운 사람이 되어 보자.” 쓰촨 사람과 후난 사람이 모두 매운 것을 잘 먹는 것에 착안한 농담이었다.

캉커칭(康克清)

캉커칭은 장시성 완안(萬安) 사람이다. 그녀는 주더와 처음 만나던 때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징강산으로 진군하던 도중 어느 날이었다. 우리 대오는 쑤이촨(遂川: 장시성 남부에 있는 도시) 부근에서 잠시 쉬었다. 그때 동지들이 흥분해서 ”주 군단장이 왔다.“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전부터 사람들이 ‘주마오’라고 하길래 한 사람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신처럼 알려졌는데 직접 보게 되니 호기심과 존경심이 일었다.

대오에서 다른 사람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체격이 건장하고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다가와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먼지가 잔뜩 묻은 군복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온몸에 먼지가 가득했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주 군단장이 준 인상은 평범했으며 영락없는 농민이었다.” 이 농민처럼 생긴 군인이 결국 캉커칭의 남편이 되었으며 47년간 평생을 해로하였다.

캉커칭, 주더와 해로했다

캉커칭은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자랐다. 주더의 전 부인들이 모두 지식인이었던데 비해 그녀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징강산에 있을 때 캉커칭은 글자를 몰랐다. 홍군에 참가한 뒤 캉커칭은 선전업무를 맡았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각성과 교양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면 주더를 방문해서 가르침을 청했다. 참으로 대담한 처녀였다. 주더의 열성적인 가르침 속에 캉커칭의 교양 수준은 매우 빨리 향상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혁명투쟁 속에 장군과 전사 사이에 애정이 싹텄다.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캉커칭은 솔직하게 토로했다. “내 혼인관은 무산계급의 것이다. 혁명에 견결해야 하고 품성이 고상하며 당에 대한 공헌이 커야 한다. 서로 의기가 투합하면 나는 연령이나 권세 따위를 따지지 않는다.” 1929년 3월, 43세의 홍4군 군단장인 주더는 18세의 여전사와 결혼했다.

캉커칭은 자신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회상했다. “1939년 겨울, 주 총사령은 53세 생일을 맞았다. 나는 축하편지를 써서 주었는데 이렇게 적었다. “나와 당신은 십몇년을 살았다. 당신에게 국가와 혁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모든 일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일도 당신은 모두 참을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할 수 없다고 하는 일도 당신은 가서 한다. 당신은 책을 보면 바로 읽는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언제나 진보한다. 동지를 일깨우고 격려하며 사랑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몇십년이 흐른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주더가 여섯 번 결혼을 한 것을 보면 혁명과 결혼, 혁명과 가정의 행복이 참으로 어울리기 힘든 사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중국혁명에서 평생토록 사이좋게 해로한 부부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고위 간부들이거나 고위 지휘관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전사율이 가장 높았던 중간이나 초급 지휘관들도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십중팔구는 배우자를 혁명의 제단에 바쳤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들에는 혁명열사능원이 있고 기념관이 있다. 거기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전사자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민당군으로 전사하거나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은 또 얼마이겠는가? 혁명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 휩쓸려간 사람들의 인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항일전이던 아니면 혁명전쟁이던 전쟁은 과연 필요악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국공내전기를 쓰다보면 가끔 이런 감상에 빠지게 된다.

<각주>

1. 16자 전법 : 원래 이름은 ‘16자결(十六字訣)’이다.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물러선다.(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우리는 교란한다.(敵驻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물러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敌我追)를 외우기 쉽게 요결로 만든 것이다. 본래 1929년 국민당군이 포위토벌을 할 때 후난성의 공산당 완안현(萬安縣) 위원회에서 채택했던 요결인 견벽청야(堅壁清野), 적래아퇴(敵来我退), 적주아추(敵走我追), 적주아요(敵驻我擾), 작소아공(敵少我攻)를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라 한다.

2. 대풍가는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 고향에 가서 지은 노래이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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