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보다 1년 내내 흥분시킬 우리 영화가 필요하다"
    By tathata
        2006년 06월 15일 08: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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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토고전이 끝난 지난 14일. 광화문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한 빗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그댄 나의 챔피언, 너와 나의 챔피언’이 반복되는 월드컵 응원가가 거리의 행인들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한 사람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 시위의 주인공은 독립영화 감독 김곡(29). 지난 2월4일부터 시작된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사수 영화인대책위의 1인 시위다. 영화인대책위는 현재 광화문 열린 시민공원에서 노숙농성도 전개하고 있다.

    홀로 비를 맞으며 선 채 시위를 전개하는 모습에서 오는 7월1일부터 시행되는 스크린쿼터의 축소가 월드컵의 광풍 속에 휩쓸려가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 광화문에는 하루 종일 한 이동통신사의 응원가가 쉼없이 울러퍼지고 있었다.
     

    <정당정치의 원리>, <반자본당 선언> 등을 연출한 김곡 감독은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미FTA 저지를 외쳤다. 이 날 그가 들고 나온 피켓의 구호는 ‘스크린쿼터 사수’가 아니라 ‘때려잡자 한미FTA’였다. 영화감독인 그가 왜 한미FTA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을까.

    “한미FTA와 스크린쿼터가 셋트로 넘어간다는 게 드러났잖아요. 안성기 씨도 (‘한미FTA가 물건너 가면 스크린쿼터도 원위치 시켜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듯이, 스크린쿼터는 한미FTA 체결하려고 한국이 먼저 갔다 바친 희생물이잖아요. 그래서 이건 스크린쿼터만 외쳐서는 안 되죠. FTA를 막는 것과 같이 가야 돼요.”

    "한미FTA와 스크린쿼터는 ‘셋트’예요"

    그와의 인터뷰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선 채로 계속됐다. 빗속에서도 월드컵 응원가는 지칠 줄 모르고 울려 퍼졌고, 어느새 축구공 입간판에는 빨간 불이 켜졌다. 우뚝 선 건물들도 빨간 현수막을 걸친 채 한국팀 승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스크린쿼터 축소에 따른 영화계의 전망은 우울하다. 한국영화의 ‘저지선’이 붕괴되어 할리우드 영화에 눌려서 제작편수도 줄어드는 것은 물론 개봉조차 못하고 내려갈 영화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전망이다. 투자자와 제작자가 ‘돈 될만한 영화’에만 판돈을 쏟아 붓고, 흥행이 보증된 A급 스타에게만 캐스팅이 이뤄져 영화인의 진출기회가 봉쇄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스크린쿼터가 줄어들어도 ‘왕의 남자’와 같은 경쟁력 있는 영화가 있으면 괜찮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스크린쿼터가 아니었다면 ‘왕의 남자’는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나마 극장에 걸릴 수 있으니까 투자의 리스크를 무릅쓰고 만드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극장에 걸릴 날이 반으로 줄어들면 투자는 점점 위험부담을 줄일 거고, 그렇게 되면 흥행이 불투명한 ‘왕의 남자’에 투자를 하겠어요?”

    김 감독은 스크린쿼터 축소는 영화 작품의 내용도 결정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작가주의’라고 이름 붙여지는 감독들의 영화가 들어설 공간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주의’ 영화 발 붙일 곳 없어져”

       
       ▲ 김곡 독립영화 감독

    “5백만을 넘어 1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 영화만 살아남을 거예요. 2백만, 3백만 혹은 그 이하의 작품은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돼요. 흥행감독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작품세계를 견지하면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감독들은 투자 유치에 실패하고, 수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가 판을 칠거예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스크린쿼터 축소돼도 어차피 CJ엔터테인먼트가 CGV를 가지고 있듯이 서로 연결돼 있어서 극장에 걸 수는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제작사에 줄을 못 선 감독들은 극장에도 걸 수도 없으니까 나자빠지는 거죠.”

    스크린쿼터, FTA는 독립영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 영화스탭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최근 들어 영화제작에 도제시스템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예요. 스크린쿼터가 줄어들면 이게 부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왜냐하면 되는 영화만 만들기 위해서는 제작편수가 줄어들테고, 그렇게 되면 영화감독들이 ‘입봉'(처음으로 연출을 맡는 것)할 수 있는 구멍도 작아지는 거죠. 잘 나가는 감독 밑에 들어가서 배워야 이력이 쌓이는 거니깐 도제가 다시 부활하게 되고, 감독의 창의성은 떨어지겠죠.”

    "영진위, 지원 떼면 독립영화 흔들"

    “독립영화에는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영화진흥위원회가 독립영화 제작비를 지원하는데 그게 막히지 않겠어요. 저도 영진위에서 제작비를 지원받고 영화를 만든 경험이 있어요. 독립영화는 영진위와 공생관계예요. 독립영화는 자본과 기술이 취약한데, 영진위의 지원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죠. 그런데 FTA가 되면 미국이 영진위가 독립영화에 지원하는 것도 특혜다, 내국민 우대조치다,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무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거잖아요. 영진위의 지원이 끊기면 그나마 있던 독립영화의 물적 토대도 흔들리게 되는 거죠.”

    비는 계속 내렸고, 옷은 이미 절반쯤 젖은 상태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축구 이야기로 돌아갔다.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는 박지성 등 축구스타의 모습을 뜬 상이 멀리 이순신 장군과 함께 어깨를 겨누며 서 있었다.

    "1년 내내 열광하고 싶어"

    “지난밤에 광화문 오셨나요?”
    “저는 골방에서 축구 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참 놀거리가 없나 봐요. 열광하고, 몰입하고, 흥분하고 싶은 마음이 축구 보면서 ‘대한민국’ 외치는 것이라니 좀 씁쓸하더라구요.”

    만약에 스크린쿼터가 현행대로 유지돼서 극장가에도 우리를 흥분시킬 영화가 더 많이 걸릴 수 있다면 축구보다 더 많은 ‘볼거리’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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