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쑤성 북부 쑤첸의 싸움
    [국공내전⑭] 천이·쑤위의 연합작전
        2019년 02월 21일 11: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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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국공내전⑬] 해방군, 사기를 회복하다

    1946년 11월 국민정부군은 장쑤 중부, 화이난, 화이베이 등을 점령했다. 쑤위의 부대가 치고 빠지는 소모전을 벌여 국민정부군 수만명을 섬멸했지만 전체적인 전황은 해방군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내전이 시작된 뒤 국군은 공산당 해방구인 청더承德, 장쟈커우张家口, 화이인淮阴등 110여개의 도시를 점령했다. 전쟁은 공산당 해방구의 중심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때 장제스는 많은 해방구 도시를 점령하여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장제스의 다음 목표는 화중의 장쑤성 북부와 산둥성등 화동 지역이었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쉬저우 쑤이징 공서 주임인 쉐웨(薛岳)에게 25개 여단을 동원하여 장쑤성과 산둥성을 평정하라고 명령했다.

    쉐웨는 별명이 “새끼 호랑이”로 항일 명장이었다. 쉐웨는 1896년에 태어나 1998년에 죽었다. 우리나이로 103세를 산 것이다. 그는 항일 명장 중에서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쉐웨는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창사 방어전을 지휘하며 십만명이 넘는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당시 광저우 우한이 일본군에 차례로 점령당하고 창사가 국민정부의 병풍 노릇을 하고 있었다. 창사 공격에 일본군은 66만명의 대병을 투입하였다. 국민정부군도 100만명을 동원하여 대항하고자 했다.

    쉐웨. 국민당 장군이지만 항일명장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때 쉐웨는 4차 방어전을 총지휘했는데 ‘화로전법’이라는 전술을 창안하여 사용했다. 화로작전이란 일정한 지역에 미리 그물을 쳐두고 적을 유인하여 공격하는 전술이었다. 쉐웨의 부대는 매복, 유인, 측면공격, 후미공격 등의 여러 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쉐웨가 지휘한 부대가 대승을 거두자 일본군은 몇 년 동안 창사를 공격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발발했을 때 장제스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쉐웨는 나중에 타이완으로 건너가 여생을 보냈는데 임종할 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하인을 기용하고 인재를 쓸 줄 모른다.“(寧用奴才, 不用人才)”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장제스에 대하여 유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쉐웨는 공격부대를 네 길로 나누어 공격하고자 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장쑤성 동타이(東台)와 화이인(淮陰), 그리고 산둥성 이현(嶧縣)에서 출격하게 하였다. 우선 장쑤성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산둥성 이현 동쪽과 옌청(鹽城), 렌수이(漣水) 지역에 집결한 산둥과 화중 두 야전군 주력을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격하는 국민정부군에게 여러 약점이 있었다. 대병으로 공격하기는 하지만 정면이 폭 300킬로에 이르러 너무 광대했다. 지역이 넓다는 것은 병력을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국군은 파벌 등으로 부대 간 협력이 안되고 하급 지휘관이 상급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쉐웨가 상대할 해방군 부대 지휘관은 천이와 쑤위였다. 천이는 산둥야전군 사령원이었다. 쑤위는 화중 야전군 사령원으로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국민당군과 싸워 승리한 경험이 있었다. 천이는 쓰촨성 출신이며 1901년 태어났다. 쑤위는 후난성 후이퉁 사람으로 소수민족인 동족 출신이다. 1907년에 태어났으니 천이가 한참 선배이다. 천이가 프랑스 근공검학 시절부터 시작한 정통 공산주의자라면 쑤위는 18세에 군에 입대하여 홍군이 치른 중요한 전투에 모두 참가한 역전의 맹장이었다.

    쑤위는 성격이 꽤나 강직했던 모양이다. 그는 리모안의 국군과 일곱 번 싸워 승리할 때 마오쩌둥의 작전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천이는 마오쩌둥의 대병단 작전을 끝까지 옹호하며 쑤위와 견해를 달리했다. 그런 천이와 쑤위가 합동작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마오쩌둥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둘에게 전보를 보내어 “대국은 천이가 영도하고 전투는 쑤위가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즉 회의 주재나 중요한 결정은 천이가 주도하게 하고 실제 전투는 쑤위가 맡도록 한 것이다. 그 뒤로 천이와 쑤위는 함께 작전을 치르며 여러 번 큰 공을 세웠다. 나중에는 류·덩 대군과 더불어 천·쑤 대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천이는 쑤위와 만났을 때 장쑤성 중부 전투 때 마오의 방침을 따르지 않은 것을 두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곧 중앙에 자아비판서를 보내 이 일을 매듭지었다. 마오쩌둥이 이미 쑤위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전투가 끝났는데도 다시 이의제기를 하였기 때문이다.

    1946년 10월 5일, 국민정부군은 산둥 남부 해방구에 공격을 시작했다. 산둥야전군은 맞서 싸우며 자오좡과 이현등 거점을 차례로 포기했다. 이때 국민당군은 산둥 해방구 수도인 린이(臨沂)에 백킬로까지 접근했다. 국민정부군은 탱크 32량을 끌고 왔다. 그때까지 산둥 해방군은 탱크를 본 일이 없었다. 맨몸으로 탱크에 부딪쳐 보았으나 처참하게 죽어갈 뿐이었다. 국군은 네 방향으로 밀고 들어왔는데 장쑤 북부와 산둥 남부를 주공 목표로 삼았다. 천이와 쑤위의 부대들은 국민당의 강공에 밀려 해방구안으로 점점 압축되는 형세였다. 결국 해방구안에서 전투가 벌어질 형국이었다. 천이와 쑤위는 산둥 야전군과 화중 야전군이 합동작전을 벌이거나 연합작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마오쩌둥이 둘의 역할을 조정해 주었던 것이다.

    1946년 겨울, 장쑤성 북부 쑤첸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두 야전군이 함께 싸운 첫 번째 전투였다. 전투 지휘는 쑤위가 맡았다. 쑤위는 당면한 적 11사단과 69사단을 비교하였다. 우익의 11사단은 국민당군 5대 주력의 하나로 장비가 좋고 포병연대를 가지고 있었다. 사단장인 후롄(胡璉)은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역전의 맹장이었다. 좌익의 69사단은 다이즈치가 사단장으로 그는 후롄과 함께 장제스의 직계 장군으로 총애를 받았다. 특히 다이즈치는 삼청단(1) 중앙위원으로 장제스가 장시성에서 청년간부로 육성한 심복이었다. 그는 장제스를 맹목적으로 숭배하였으며 공산당 해방구를 공격한 전투마다 최선봉에서 싸워 왔다. 쑤위는 이번에도 그가 무모하게 치고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69사단을 주공격 목표로 삼았다. 천이와 쑤위는 “정면에서 11사단을 견제하여 69사단과 떨어뜨린 다음 몇 배 우세한 병력으로 포위 섬멸한다.”는 작전방침을 확정했다.

    12월 14일, 정편 11사단과 69사단은 길을 나누어 계속 밀고 들어왔다. 화중 야전군은 일부 병력으로 11사단을 차단 저지하고 69사단은 계속 전진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해질 무렵 정편 69사단과 11사단의 간격이 더욱 멀어졌다. 15일 산둥 야전군과 화중 야전군 각부대가 쑤첸 북부의 예정된 포위지점에 도착했다. 같은 날 국군 11사단장 후렌은 전선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후렌은 “69사단이 너무 빨리 진격하고 있다”고 지적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다이즈치는 “11사단의 진격이 너무 늦다.”고 반박했다. 그때 정편 69사단이 포위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1사단 본부가 있는 곳에도 해방군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산둥 야전군과 화중 야전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두 사단장은 전투지휘를 위해 황급히 부대로 복귀했다. 해방군은 진격하는 다른 국군부대를 차단 견제하는 한편 69사단을 맹공했다.

    다이즈치는 비행기와 포격 지원을 받으며 포위하고 있는 해방군 부대에 돌격하며 반격했다. 그러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질 뿐이었다. 16일밤 다이즈치는 후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후롄은 “다이 선생, 나쁜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대답했지만 구원병을 내보내지 않았다. 그의 사단도 해방군에게 견제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요격을 두려워한 것이다. 다이즈치는 부득이 난징의 장제스에게 직접 구원을 요청했다. “부대가 전멸당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교장께서 병력을 보내 구원하거나 후롄에게 구원하도록 재촉해 주십시오.” 장제스는 곧 후롄에게 전화를 걸어 출병하라고 엄명했다. “다이즈치를 구하지 못하면 네 머리를 난징으로 가져오겠다.”고 위협했다. 17일 오전 후롄은 2개 여단을 내보내 구원에 나섰으나 해방군이 완강하게 접근을 막았다. 반격에 밀린 후롄의 구원부대가 후퇴하자 69사단은 최후를 맞게 되었다.

    18일 새벽, 장제스는 직접 후롄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69사단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후롄의 부대와 69사단의 연락이 이미 끊긴 뒤였다. 69사단이 있던 쪽에서 들려오던 포성과 총성도 잠잠해졌다. 후롄은 69사단이 이미 끝장난 것으로 판단하고 즉시 부대에 방어진지 공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다이즈치는 자신이 이미 사면초가에 빠진 줄 알았다. 그는 부대에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각 부대는 형편에 따라 포위망을 돌파하라.” 부대원들이 탈출을 시도할 때 그는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탈출을 권유하던 부사단장은 포로로 잡혔다. 쑤위의 부대가 쑤첸에서 69사단을 섬멸할 때 산둥성 롄수이, 옌청쪽으로 밀고 들어간 국군 74사단과 산둥 야전군도 밀고 밀리는 격전을 치렀다. 쌍방 4,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싸운 끝에 국군은 롄수이를 점령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장쑤성 북부 쑤첸전투에서 해방군은 21,000명의 국군을 섬멸했다. 해방군은 8,000여명이 사상했다. 전장을 수습한 휘하 부대원들이 쑤위에게 다이즈치의 가슴에 달았던 휘장과 일기, 그리고 단검을 보냈다. 쑤위는 단검을 살피다가 그 칼이 ‘중정검’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중정검은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 학생들이나 공이 있는 부하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표면에 “장중정이 주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쑤위는 좋은 관을 구해 다이즈치를 묻어 주라고 지시했다.

    신사군과 화동야전군 지휘소

    중국의 전사에서는 다이즈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항전시기 혁혁한 전공을 세운 군인이었다. 그는 장제스가 일으킨 내전에서 패하여 자살하였다. 나중에 발견된 다이즈치의 전장일기를 보면 그가 자살한 것은 결코 장제스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장제스가 일으킨 내전에 깊은 실망감 때문에 자살하였다.” 장제스의 심복까지 그런 생각을 할 정도이면 내전에 임하는 국군 장교들의 심리가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쑤위는 쑤첸 전투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전투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다. 하지만 산둥과 화중 야전군이 이 전투부터 하나가 되었다. 이 전투가 화동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쑤위가 말한 것처럼 이 전투의 의미는 작지 않다. 국군의 진격부대 중 한 갈래를 완전히 쳐부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부대배치나 전략 및 전술은 대부분 천이가 담당했다. 마오쩌둥은 거의 매일 전보로 보고를 받으며 방침에 동의하거나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쑤위는 각 부대 전투상황을 종합하며 직접 지휘했다. 쑤첸 전투에서 천이는 모두 24개 연대병력을 투입했다. 국군 한 개 사단을 견제하고 나머지 한 개 사단을 섬멸하는데 비교할 수 없는 대병력을 투입했으니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른 방면의 국군을 차단하거나 견제하는데 20개 연대를 투입했다. 한 개 사단을 완전히 고립시킨 뒤 섬멸하는 것이 천이와 쑤위의 작전이었다. 천이는 69사단을 섬멸하고 다이즈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시를 지었다. “적이 운하구비에 이르렀으니 모두 섬멸할 것을 누가 의심하리오? 펑산 아래를 한번 보시오. 다이즈치를 여기 묻었소. (敵到运河曲 聚殲夫何疑 試看峰山下 埋了戴之奇)” 마오쩌둥도 축하전보를 보냈다. “당신들이 쑤첸과 수양에서 크게 승리한 것을 축하한다. 공이 있는 장병들에게 격려를 전해 달라.”

    해방군 여세를 몰아 산둥성 남부에서 대승하다.

    쑤첸 북부 전투가 끝난 뒤 싸움은 산둥성으로 옮겨 붙었다. 1946년 12월 중순 국민정부군은 산둥성 자오좡(棗庄)에서 산둥해방구 수도인 린이를 공격하고 있었다. 국군 정편 26사단과 제1쾌속종대는 69사단이 쑤첸 북부에서 섬멸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1쾌속종대는 중형탱크와 유탄포,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기계화부대였다. 2차 대전 때 미얀마 전선에서 활약하던 80여단을 개편한 부대였다. 그들은 린이 서남쪽 30킬로미터 란링현(蘭陵縣)까지 접근했다가 방어로 돌아섰다. 좌익에는 정편 51사단이 자오좡과 치춘(齊村)지역에 있었으며 우익에 정편 제 59사단과 77사단이 타이얼좡(台兒庄) 북쪽 지역에 있었다.

    장쑤성 쑤첸전투를 다루고 있는 중국드라마. 자막으로 천이의 시가 보이고 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군사위는 쑤첸 북부 전투가 끝날 무렵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다음 작전은 주력을 집중해서 루난(鲁南: 산둥 남쪽)의 적을 섬멸해야 한다. 기회를 보아 자오좡, 타이얼좡을 수복하라. 쑤첸 북부보다 더 큰 섬멸전을 기대한다.” 이 명령에 따라 신사군 사령 겸 산둥 야전군 사령원 천이와 화중 야전군 사령원 쑤위는 두 야전군 주력을 인솔, 쑤첸 북부에서 산둥성 남부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그들은 4개 사단병력과 포병연대 등 12개 연대로 우익 종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1종대, 1사단등 15개 연대로 좌익종대를 편성했다. 그들은 우선 돌출하여 고립된 정편 제26사단과 제1쾌속 종대를 포위 섬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화중 야전군 정치위원인 탄전린에게 24개 연대를 지휘하여 롄수이 지역에서 북진하는 국군을 견제, 요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산둥성 남부 부대는 적 후방에 깊이 들어가 유격활동으로 국군 후방을 습격, 교란하도록 하였다. 양군의 병력대비는 해방군 27개 연대, 국군 6개 연대로 해방군이 비교할 수 없는 우세였다.

    해방군 참전부대들은 예정된 부대배치 계획에 따라 1947년 1월 1일 집결지역에 비밀리 이동하여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2일 밤, 공격을 맡은 해방군은 갑자기 정편 26사단과 제1쾌속종대를 공격하여 3일 오전까지 포위와 분할을 완성하였다. 견제를 맡은 해방군은 이현, 자오좡 방향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지원 오는 국군 공격을 준비했다. 3일밤, 전면 공격을 펼쳐 마자좡(馬家庄)에서 정편 26사단 사령부 대부분을 섬멸하여 지휘를 마비시켰다. 그리고 타이즈탕(太子堂)을 수비하던 44여단을 모두 섬멸했다. 또 카좡(卞庄)에서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던 169여단 대부분을 섬멸했다.

    4일 10시 제1쾌속종대 및 정편 26사단 남은 부대는 탱크로 길을 열며 이현 방향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때마침 눈비가 잇따라 내려 도로는 진흙탕이 되었다. 후퇴하는 국군의 행동이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해방군 좌우익 공격부대는 유리한 시기를 기다려 추격에 나섰다. 측면 공격, 차단 공격 등으로 국군을 탕시호(糖稀湖)의 저습지 진흙지대로 몰아붙였다. 해방군은 발이 묶인 탱크와 장갑차를 폭약과 수류탄 그리고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파괴했다. 국군이 자랑하던 기계화부대는 병력과 차량, 화포 등이 한덩어리로 다투어 달아났다. 15시가 되자 7량의 탱크가 이현으로 달아난 것 외에 정편 26사단과 1쾌속종대는 모두 섬멸 당했다. 구원오던 국민당군도 저지를 당했다. 26사단 남쪽의 장편 59사단, 77사단은 패전 소식을 듣고 타이얼좡 및 운하 남쪽지역으로 급히 후퇴했다.

    9일 저녁 해방군 우익종대는 이현 현성을 공격했다. 먼저 외곽을 소탕한 뒤 10일 밤 성안으로 돌입했다. 격전이 11일 새벽까지 이어져 정편 51사단 114여단 일부를 섬멸했다. 또 정편 제 52사단 98연대와 정편 26사단 후방기관과 보안연대 등 모두 7,000여명을 섬멸하였다. 해방군은 정편 26사단장 마리우(馬勵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도주했던 탱크 7량을 노획했다. 좌익종대는 자오좡 방향으로 공격을 확대했다. 자오좡 외곽 궈리지郭里集와 치춘齐村등 거점을 점령하고 정편 51사단 113 여단(1개 연대 부족)을 섬멸하였다. 해방군은 자오좡을 점령하고 정편 51사단과 2개 연대를 섬멸했으며 사단장 저우위잉을 포로로 잡았다.

    전투기간에 산둥 해방구는 60만명의 전선지원 노무자를 조직했다. 크고 작은 차량이 1,500량, 담가 6,000개를 준비하여 부대의 작전에 협력했다. 전투는 모두 19일이 걸렸으며 산둥 야전군과 화둥 야전군에 8,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민당군 53,000여명을 섬멸했으며 탱크 24량, 각종 화포 200여문, 자동차 474량을 노획했다.

    전투가 끝난 뒤 천이는 노획한 탱크 위에서 ‘루난대첩’이라는 시를 썼다.

    “쾌속종대는 나는 듯, 인도 미얀마 광시에서 달려와 북을 울리네. 루난의 진흙탕은 나아갈 수 없어 탱크는 한낱 고철더미가 되었네. 오늘 쾌속종대와 26사단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쉬저우 쉐웨는 얼굴 가리고 통곡하네. 난징의 도적(장졔스)은 마땅히 눈물 흘리리.

    “快速纵隊起如飛,印缅桂来自鼓吹。鲁南泥濘行不得,坦克變成廢鐵堆,快速纵隊今以矣,二十六师汝何爲,徐州薛岳掩面哭,南京將贼应泪垂”

    천이의 글씨. 마오쩌둥과 함께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천이의 결혼, 라이웨밍 후란치 장치엔

    1930년, 천이가 홍 22군 군장이 되었을 때 장시 신펑(信豊)에서 19세 여학생 샤오쥐잉(蕭菊英)과 결혼했다. 다음해 천이는 반혁명분자 숙청회의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우익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타고 있던 말이 죽고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우물에 뛰어들었다. 천이는 결혼한 지 일년 만에 상처를 하게 되었다.

    1932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천이는 리푸춘(李富春), 차이창(蔡暢) 부부의 소개로 알게 된 싱궈(興國)의 18세 된 홍군 여성 라이웨밍(頼月明)과 재혼하였다. 라이웨이밍은 14살 때 부친이 어떤 집에 민며느리로 팔았는데 다음해에 홍군이 고향에 왔다. 그녀는 당장 시집을 벗어나 공산당 활동에 참가했다. 고향의 소비에트에서 부녀개선위원회에 참가했다가 나중에 주임이 되었다. 당조직은 그녀를 홍색수도 루이진의 사범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하였다. 그 뒤에는 소년공산당 장시성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때 리푸춘과 차이창 부부의 소개로 천이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홍군이 장정에 나설 때 천이는 이전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어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천이는 장시성 중앙소비에트에 남아 유격투쟁을 지휘했는데 라이웨밍이 옆에서 천이를 보살폈다. 나중에 천이가 라이웨밍에게 고향에 가서 유격투쟁을 하라고 지시했다. 라이웨밍은 헤이지기 싫어 천이에게 “나를 보내려면 차라리 권총으로 쏘라.”며 총을 빼들었으나 천이에게 빼앗겼다. 두 사람은 결혼 2년 만에 눈물을 머금고 헤어지게 되었다.

    1937년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남방의 홍군은 2년간에 걸친 유격전을 끝냈다. 그때 천이는 사람을 보내 부인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 파견했던 사람이 돌아와 말하기를 라이웨밍이 국민당군에게 붙잡힌 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천이는 9월초 죽은 부인을 기려 ‘싱궈여관’이라는 시를 썼다. “싱청여관 밤은 처량하기 짝이 없구나. 찢어진 창문틈으로 달빛이 비쳐든다. 전쟁의 어려움이 아직도 남았는데 아, 고인의 정이 부끄럽구나. (興城旅夜倍凄清 破纸窓前透月明 戰鬪艱難还剩我 阿矇媿負故人情)”

    그런데 “배신자가 밀고해서 희생당했다.”는 소식은 와전된 것이었다. 라이웨밍은 죽지 않았으며 전투 중에 조직과 연락이 끊겼다. 그녀는 유랑걸식하다 아버지에게 잡혀 돌아갔다. 아버지는 보장(保長)(2)이었는데 딸을 신기료 장수에게 팔아 버렸다. 팔자가 기구했는지 신기료 장수는 다음해 타향에서 객사하였다. 라이웨밍은 부상당해 낙오한 홍군인 팡량쑹(方良松)과 결혼한 뒤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였다. 천이는 평생 그녀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이가 죽은 뒤인 1989년 기자가 취재하여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59년 라이웨밍은 천이가 외빈과 회견하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천이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남편과 아들이 결사적으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1972년 그녀는 천이가 방송을 듣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제사를 지내며 분향하였다. 나중에 천이의 시 ‘싱귀여관’을 읽으며 눈물을 빗물처럼 쏟았다고 한다.

    1937년 천이는 신사군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난창에서 상하이 전선지원단을 이끌고 위문 온 후란치(胡蘭畦)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국민정부의 여성장군 7명 중 하나로 소장계급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한데다 문학 자질도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녀의 어머니는 후란치에게 제갈량의 ‘출사표’, 악비의 ‘만강홍’, 문천상의 ‘정기가’등 유명한 애국자들의 글이나 시를 암송하게 했다고 한다. 그녀는 청두 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혼처가 줄을 이었는데 아버지는 외종오빠인 양구즈(陽固之)와 결혼시켰다. 양구즈는 재산을 크게 모은 상인이었는데 의기를 중시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후란치와 도대체 생각이 맞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3년도 안되어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쓰촨 군벌인 량썬(陽森)이 그녀를 작은 마누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량썬은 공인된 부인만 12명에 자식이 43명인 유명한 호색한이었다. 량썬이 쓰촨의 실력자였지만 후란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후란치 소장, 쓰촨의 여걸

    후란치는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는가 하면 여성운동, 학생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후란치는 나중에 독일에 가서 투옥되는가 하면 러시아에서 고리키의 장례식에 주빈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쑨원의 미망인인 쑹칭링과 교분을 쌓았으며 점점 명성이 높아지자 국민정부에서 소장 계급을 주었다. 장제스는 부인인 쑹메이링에게 중장 계급을 주는 등 사회적 활동이나 영향력에 따라 계급을 주었다. 어쨌든 후란치는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 되었다. 천이는 후란치에게 청두의 학생시절부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난창에서 만났을 때 후란치는 두 번 이혼한 처지였는데 천이도 상처를 해서-사실은 죽지 않았지만- 홀아비 신세였다. 이번에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약속해서 천이는 부모의 동의까지 받아 두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공산당 남방국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남방국 서기인 샹잉(项英)이 후란치를 만나 “당신은 숨겨둔 공산당원이다. 국민당 소장이니 계속 신분을 유지하는 게 좋겠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신분이 유지되지 않을 것이므로 종용한 것이다. 천이도 편지를 보내어 “나는 군인이다.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 혁명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죽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삼년안에 결합할 수 없다면 각자 자유다.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하자.”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던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신사군 군사고문 겸 전선지원단장이던 주커징(朱克靖)은 천이의 시를 보고 역시 시를 써 놀렸다. “장군은 어째서 그렇게 여위웠소? 반은 란치 때문이고 반은 치엔 때문이라.” (將軍爲何多癄悴?半爲蘭畦半爲蒨) 여기서 란치는 후란치를 일컫는 것이고 치엔(蒨)는 나중에 천이의 아내가 된 장치엔(張蒨)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신사군을 떠난 뒤 후란치는 천이의 안위를 계속 걱정했다. 1946년 후란치는 구이저우 일보 사장이 되었다.1947년 6월, 국민당 신문에 대문짝만한 글씨로 “천이 전사, 천이 사살” 등 제목 아래 천이의 추도회가 열린 경과 등을 다뤘다. 후란치는 크게 상심하였다. 나중에 그녀는 천이 부모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들을 부양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청두(成都) 동문 밖에 과수원과 밭, 그리고 집을 마련하여 모두 두 노인이 쓰도록 준비했다. 1949년 해방군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천이는 시장이 되었다. 후란치는 편지를 써서 접견을 요청했다. 그런데 막상 나온 것은 부시장인 판한녠(潘漢年)이었다.

    그때 이미 천이는 다시 결혼하여 아들, 딸을 두고 있었다. 1940년 천이는 장치엔과 결혼하여 평생을 해로했다. 천이는 결혼 전에 “춘란(春蘭)을 찬양한다.”는 시를 썼다. 춘란은 장치엔의 본명이었다. 천이는 과연 3년 뒤 결혼했지만 후란치는 평생토록 다시 혼인하지 않았다.

    장치엔은 원래 신사군 지원단의 배우였다. 장치엔의 우아한 자태에 천이는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장치엔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겪을수록 그의 경력이나 공적, 인품이 괜찮게 느껴졌다. 어느 날 천이가 시 한수를 써서 그녀에게 주었다. 장치엔은 시를 읽으며 너무 행복해 하였다. 그래서 천이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봄 경치가 눈에 들어오니 정신이 산란하니, 강남의 장수인 내가 부끄럽다. 20년 호방한 정은 어디에 있는지, 붉은 꽃에 진 것도 모르고 있네. *.붉은 꽃은 장치엔을 가리킨다.

    春光照眼意如痴,媿我江南统锐師。豪情卄载今何在,輸與红芳不自知。

    장쳰. 천이의 부인이다.


    <각주>

    1. 삼민주의 청년단의 약칭이다. 1938년 설립했으며 장제스가 단장을 맡았다. 천청, 천리푸, 장즈중등이 핵심으로 국민당안에서 장제스를 지지하는 핵심그룹이었다.
    2. 보장은 청나라때부터 시행하던 보갑제도의 장을 말한다. 보갑제도는 주민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우리의 반상회와 비슷하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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