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만세운동 이어받아
    싸우다 불탄 경기도 화성 제암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 맞아
        2019년 02월 21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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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평화통일을 위한 연대’(이사장: 박종화 목사)의 새해기도회((2019.01.15)에 이은 이만열 교수님의 특별강연회에서 1919년 3.1운동에서 교회의 역할이 컸음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당시)우리나라 1,600만 인구 중 기독교인은 240,000 여명으로 1.5%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만세운동의 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지대했고, 주동세력, 체포·투옥자와 관련하여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학자들은 기독교 민족운동이 한말부터 시작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고, 이런 전통을 독립협회→상동파와 황성기독교 청년회→신민회→105인사건→신한청년당 및 송죽회로 이어지는 항일민족운동의 흐름이 송계백, 서춘, 백관수 등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을 거쳐, 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날 이만열 교수님은 3.1선언서에 나타난 독립사상은 기독교 이념과 긴밀히 관련되었다고 말하고, 3.1운동이 고종을 복귀시키고 전제 군주체제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를 극복하였고, 다소 부진했던 독립운동을 통합, 활성화했으며,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제를 주창하였고, 무장독립투쟁을 본격화시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또 세계사에도 영향을 끼쳐 약소국가의 반제독립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으며 민족주의를 넘어 동양과 세계평화를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경기도 화성지역의 독립운동이 3.1운동의 무장독립투쟁에서 영향을 받아 공격적인 투쟁을 전개한 점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의 자료와 비디오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화성은 3.1운동 직후 구국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까닭에 주민의 민족역량이 커져서,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편소, 동양척식회사를 방화하고, 일본경찰 처단과 일본인 상점을 파괴한 혁명적 성격을 내포하였으며, 특히 기독교인․천도교인․유학자들이 같이 협력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한 사실에서 종교와 이질적인 교리를 초월한 증거로서, 화성지역 3.1만세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주동자 검거에 나서, 한밤중에 마을을 포위하고 초가집에 불을 놓아 피신하는 남자들을 무조건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무자비한 형태로 진압하였습니다. 이 폭압적인 진입작전의 대미는 제암리 사건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끈 일본군들은 제암리를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들은 제암교회에 몰아넣고 출입문을 폐쇄하고 창문으로 총을 난사하며 예배당에 불을 질렀습니다. 탈출하는 이들에게 총탄을 퍼부었고 일하다가 달려왔던 부인 두 명도 사살하여 23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일제군인들이 지른 불은 바람을 타고 제암리 초가마을 전체를 삼켰습니다. 살육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근 고주리 마을로 가서 천도교 지도자 6명을 살해하였습니다.

    참혹한 사건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커티스 영사에 의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스코필드(Frank W. Scofield, 한국명 석호필) 박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일제의 만행이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기념관 입구의 그의 동상은 분노에 찬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결연해보였습니다. 당시 한미관계나 정교분리를 내세운 미국의 선교정책에 비추어 보면 그의 역할이 참 대단하여 석호필 박사를 3.1운동 민족대표 제34인으로 인정하는데 거부감이 없습니다. 저도 석호필 박사를 잘 모르고 있다가 몇 년 전에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회장 정운찬 전총리와 사무총장 김재현 박사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암리 사건은 1982년 전동례 장로 등의 증언으로 희생자들이 발굴되어, 순국기념관 오른쪽 계단 위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 29명이 합장되어 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중국 간도 “장암동 학살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으로 일하던 2010년 7월 1일, 중국 연변에서 민족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신학생 해외훈련을 할 때 용정 장암촌을 탐방하였습니다. 마을 앞쪽 언덕에 큰 봉분이 있고 “간도참변”의 연장선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장암동참안유적비”가 있었습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인사회, 항일단체,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간도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는데 가장 참혹했던 사건은 “장암동 학살사건”입니다. 연길현 장암동의 주민 대부분은 예수교신자들이어서 장암동은 “예수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1920년 10월 30일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사단의 스즈끼 대위는 군인, 경찰 등 75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에 장암동을 포위한 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또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을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 속에 던졌고 민가 11채, 마을의 영신학교를 불태웠습니다. 며칠 후 일본군은 다시 마을에 쳐들어와서 유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조짚단 위에 모아놓게 한 후 석유를 붓고 태워버렸습니다. 유족들은 참혹하게 이중학살된 시체를 가릴 길이 없어서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합장무덤에서 묵념한 후 잡목이 우거진 불탄 교회터를 내려다보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암교회(그림=이근복)

    제암교회(최용 목사 시무)는 1905년 감리교인 안종후의 사랑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순국기념관 옆에 자리한 교회는 일제 만행에 불탄 후 1938년에 기와집으로 지어졌다가, 1970년 일본의 교회와 양심적인 사회단체들이 속죄의 의미로 보내온 성금을 바탕으로 건축했다가, 2001년 정부가 이 일대를 순국유적지로 지정하면서, 지금의 현대식 건물로 다시 건축되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천정에 나무를 많이 사용하여 격조가 있는 아담한 예배당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제암지 유적지를 걸으니 기독교신앙으로 민족운동을 치열하게 벌인 선배 기독교인들의 기개가 느껴졌습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성명서와 세미나와 행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대회처럼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아직도 일제잔재와 군사독재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처지에서 어떻게 3.1정신을 되살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3.1운동정신의 자주독립사상을 깊이 새기고 한반도에 자주적인 평화통일 체제를 구축하고, 건실한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희생을 감수하고 신앙의지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을 기리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와 민족역사에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음에 수치심을 갖는 것입니다.

    엄혹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면서도 늘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던 윤동주 시인처럼, 한국교회가 자성적 성찰을 통해 부끄러움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내면의 세계를 설파한 김응교 교수가 저서 “처럼”(문학동네, 2016)에서 한 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성서적인 기원을 두고 있고, 윤리적인 부끄러움도 있지만 결국은 역사 앞에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부끄러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P. 383)

    지난 2월 18일, 전북 군산에서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목회아카데미’ 첫날을 진행하고, 일본 구옥을 펜션으로 바꾼 월명동 숙소의 다다미방에서 잠을 자다가 밤비 내리는 소리에 깨었습니다. 윤동주 시 『쉽게 씌어진 시』가 떠올라서 시를 찾아 읽고 방을 살펴보니 다다미 6개를 깐 육첩방이었습니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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