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혁명적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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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14일 03: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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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 둘째날, 아침에 호텔에서 3분 거리에 있는 회의장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설 때, 호텔 직원이 잠시 기다렸다가 가라고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해외 참석자 4~5명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경호 업무로 파견 나온 군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가라는 것이었다. 외국인들 모두 귀찮아하는 눈치였지만, 차베스 정부가 소환투표 부결 이후 안정화되기 전에는 지지자와 반대자들 사이에 유혈충돌도 적지 않았다니 거부할 근거도 없었다.

       
    ▲회의 참석자들이 숙소에서 회의장까지 가는 길에 군인의 경호를 받고 있다.
     

    서구 좌파들 중 여전히 차베스에 대해서 의구심을 지닌 이들이 자주 지적하는 것이 바로 정부 내에서 군부가 지니는 막대한 영향력이다. 차베스 자신이 군부 출신이라는 것 또한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날 아침식사를 같이 한 에릭 투상 제3세계외채탕감위원회 벨기에 위원장은 다르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남미를 연구하고 베네수엘라에도 다섯번째 방문이라는 그는, 작년에 베네수엘라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협정에 동의한 것을 우려한 장교들이 독자적으로 장교 대상 강연을 조직해 자신을 초청했던 사례를 전했다.

    정부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볼리바리안 군대의 장교들. ‘혁명적 군인’이라고 하는 것이 전통적인 국가기구 분석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베네수엘라에서는 최소한 군부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이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군부에 대한 서구 시각 그대로 적용할 수 없어

    이날 오전에는 브라질, 멕시코, 칠레의 교수들, 그리고 콜롬비아의 노조 지도자와 함께 “세계무역과 국제금융경제기구들의 영향”이라는 포럼에서 발표를 했다. 홍콩 WTO 각료회의에서 한국 민중운동이 조직했던 저항운동과 한국에서 현재 진행중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대한 민주노동당과 민중진영의 대응에 대해서 소개를 했다.

    사회는 베네수엘라 국회의 재정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봤고, 주제 발표는 베네수엘라 재정부 장관이 직접 나섰다. 새로운 모델의 경제 공동체, 남미에서의 정치사회적 통합, 대안적 언론 등 모든 포럼에 집권당인 ‘제5공화국운동’과 정부는 비중있는 인사들을 배치했다. 주요 방송사의 카메라들도 회의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차베스가 이번 회의에 오지 않은 이유는 점심식사 후 방에 잠깐 들렸던 숙소의 텔레비전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볼리비아에서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투표가 임박한 가운데, 집권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당’(MAS)의 운동본부 출정식에 차베스가 힘을 보태러 간 것이었다. 무심코 켠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모랄레스와 차베스, 그리고 쿠바의 부통령은 원주민 전통의상을 입고 나란히 서서 수만 명의 볼리비아 원주민 앞에서 연설하고 있었다.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차베스는 “제헌의회는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오로지 국민 주권에 따른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압도적 승리가 필수”라며 모랄레스의 지지자들을 독려했고, 쿠바의 부통령 카를로스 라헤는 제헌의회 구성에 대한 피델 카스트로의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볼리비아에서 울려퍼진 체 게바라의 유언

    다음날, 볼리비아의 대통령궁으로 자리를 옮긴 세 명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제협력 협정들을 체결했다. 쿠바의 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바로 에보 모랄레스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우리는 승리하리라”라는 남미 혁명운동의 상징적 구절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과 쿠바의 라헬 부통령(왼쪽부터)
     

    체 게바라가 혁명의 지속을 위해 향했던 타국의 밀림, 결국을 목숨을 잃은 바로 그 나라의 대통령궁에서, 그가 떠나면서 피델 카스트로에게 남겼던 편지의 마지막 구절과 일치하는, 바로 그 구절이다.

    차베스는 남미의 통합을 위한 진전을 축하하며 지속적 연대를 약속했고, 모랄레스는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지지와 연대에 감사를 표했다. 남미에서의 변화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후에는 ‘제5공화국운동’의 국제위원회 위원들인 추에코스 의원과 쎄스네로스 의원과 연달아 면담했다. 둘 다 남미의회의 의원들인데, 베네수엘라가 남미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이 의원들을 직선으로 뽑고 있었다. 남미 통합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분명하고 완결적인 외교노선

    당의 이념과 주요 정책 및 활동들에 대해서 서로 소개를 한 후, 민주노동당 대표단의 베네수엘라 방문 문제와 미국과의 FTA 반대 운동 협력을 요청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당의 국제 활동 노선이었다.

    대륙별로 업무 분담을 하고 있는 ‘제5공화국운동’ 국제위원회의 노선과 활동 목표는 명확했다. 씨스네로스 의원은 대외활동의 목표로서 다극체제의 형성, 남미 통합의 이념으로서 볼리바리아니즘(Bolivarianismo), 그리고 국제 경제 협력의 모델로 지속적으로 추진 중인 ‘미주지역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을 제시했다.

    목표 실현의 방법론과 관련, 현재의 일극체제 극복을 위해서 중국, 아프리카, 이란, 인도, 러시아, 남미 등과의 전략적 동맹 관계 구축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남미에서는 볼리바르의 이념에 따라 여러 진보 정권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정치사회적 통합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베네수엘라 정부와 집권당은 이러한 세력들과의 협력, 공조를 통해 “제국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경쟁과 도태의 원리에 기반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 주권, 상호보완성이라는 원칙에 기반한” ‘미주지역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질서 차원에서는 다극체제 형성, 남미 지역 차원에서는 정치적 통합과 연대, 경제 통합으로서는 볼리바리안 대안의 확산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에 대한 의견을 떠나 그 노선의 명확함과 완결성이 인상적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아직까지 이 수준에 있지 않아 아마 더욱 그랬을 것이다.

    베네수엘라-브라질 관계악화의 진실은?

    모든 것이 완결성과 정합성으로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당장 베네수엘라와 브라질과의 관계 악화에 대한 보도들이 볼리비아 에너지 국유화 조치를 계기로 집중적으로 있었다. 미국 언론들을 중심으로 제기가 됐는데, 이의 진상이 사실 회의에 가기 전부터 가장 궁금했던 바이기도 하다.

    도착한 이후에도 남미 타 국가들에 비해서 브라질 정치인들의 수가 이 회의에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과, 참석한 브라질 교수들도 대부분 룰라 정부에 대해서 부정적 의견을 피력한 것도 의외여서 의문이 풀리질 않았다. 이러한 의문은 다음 날 룰라 대통령의 외교 보좌관인 마르코 아우렐리오 가르씨아의 도착으로 상당 부분 풀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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