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군, 사기를 회복하다
    [국공내전⑬] 저우언라이 옌안 복귀
        2019년 02월 14일 11: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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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⑫] 요충지 장자커우 함락, 국민군 푸쭤이 또 맹활약

    내전 초기 국민정부는 각 전선에서 의미있는 승리를 거듭했다. 중원 해방구의 공산군을 몰아냈으며 남만주에서 민주연군을 북쪽 구석인 하얼빈 쪽으로 몰아냈다. 화중에서 쑤위의 부대가 선전을 하고 있었지만 화이난과 화이베이 등 주요지역으로 밀고 들어갔다. 산둥성에서는 천이가 정부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화북에서 푸쭤이가 연승을 거둔 것은 국공양당에 주는 심리적 효과가 컸다. 공산당이 장자커우를 잃어 홍색수도인 옌안까지 위협을 당할 처지가 된 것이다.

    장자커우 점령 뒤 장제스는 자신감을 더하게 되어 잠시 휴전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참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그 무렵 마오쩌둥은 “우리가 이기는 데는 아마 5년은 걸릴 것이다. 우리는 장기간 고달픈 투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장제스는 11월 15일, 공산당과 민주동맹의 보이콧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민대회를 강행하였다. 12월 25일 국민정부의 새 헌법이 통과되었다. 국민정부는 새로운 국민대회를 통해 총통을 선출할 예정이었다. 공산당은 이 대회를 가짜이며 불법이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성탄절 전야에 마샬을 자신의 관저에 불러 칵테일 파티를 함께 했다. 그날 장제스는 마샬에게 독서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마샬은 자신의 임무가 실패했음을 절감하며 이미 귀국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연말에 국민의회가 소집되었지만 공산당과 민주동맹은 회의 참가를 거부했다. 마샬은 1947년 1월 1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우언라이도 옌안으로 돌아갔다. 정치협상회의가 파탄나자 공산당은 대표단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11월 16일, 저우언라이는 기자들을 초청하여 고별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국민당이 소집한 국민대회를 엄중히 비판한다’는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인민, 그리고 진정으로 평화와 민주를 바라는 당파와 함께 분투, 노력해 왔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국민당이 일패도지하여 우리에게 회담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겨서 돌아오는 것이다. 아마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충칭과 난징에 체류하는 동안 일당백의 역할을 해냈다. 그는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뒤 1938년에 충칭으로 갔다.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돌아간 1946년 5월까지 충칭에서 온갖 궂은일을 맡아 처리했다. 이 시기에 저우언라이는 정치가와 외교가의 역할은 물론, 민주운동과 학생운동 그리고 비밀공작에까지 두루 관여했다.

    난징의 팔로군 판사처. 저우언라이는 46년 이곳에서 국민정부와 담판을 진행했다.

    저우언라이의 가장 큰 임무는 국공합작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장제스가 워낙 공산당을 싫어하고 틈만 나면 합작을 깨뜨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때로는 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때로는 각 당파와 민주인사들을 설득하여, 때로는 학생운동을 움직여서 외줄타기 하듯 공산당의 노선을 관철해 나갔다. 충칭에서 그는 공산당 남방국을 이끌었다. 옌안의 당 중앙과 연락하기 위해 그는 전보를 이용하거나 직접 가서 보고했다. 옌안은 저우언라이의 보고를 며칠씩 듣고 함께 결정하고는 했다. 마오쩌둥과 당 중앙이 저우언라이를 절대적으로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즈중, 장충, 펑위샹과 같은 국민당 정치가들이나 군부 인사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저우언라이는 신중한 말과 행동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얻었으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황엔페이(黃炎培), 장란(张澜)과 같은 교육가나 민주인사들 궈모러우(郭沫若), 라오서(老舍)와 같은 문화계 인사나 작가들과도 두루 사귀었다. 청년운동, 아동운동 인사들까지도 저우언라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충칭은 물론 홍콩, 구이린, 상하이, 옌안을 누비며 수백명의 사람들과 교류했다. 소련, 영국, 미국의 외교관들은 물론 미국 대통령 특사까지 모두 저우언라이의 통일전선 대상이었다.

    그는 비밀공작을 통해 여러 중요한 정보를 미리 알아 엔안의 당 중앙에 제공하였다. 그는 국민당 정부 인사를 통해 2차 대전에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정보를 확인했다. 국민당 장군 후쫑난의 측근인사를 통해 옌안 공격 정보를 알아낸 것도 저우언라이였다. 환남사변에서 신사군 사령원이던 예팅이 투옥되자 그는 각계인사들을 만나 석방운동을 펼쳤다. 예팅이 석방된 뒤 공산당 가입을 요청하자 중앙에 승인을 요청하여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헐리를 움직여서 연합정부 구성 협상을 주선하게 한 것도,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충칭회담을 막후에서 뒷바라지한 것도 저우언라이였다. 저우언라이가 이처럼 탁월한 능력을 보인 것은 명석한 두뇌와 타고난 친화력에 의지하기도 했지만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1946년 1월, 저우언라이는 충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옌안으로 향했다. 그때 수행원들과 함께 예팅의 딸인 양메이(陽眉)가 타고 있었다. 양메이의 나이는 겨우 11살이었다. 비행기가 구름 속을 뚫고 나오자 갑자기 이상 한류에 휘말렸다. 순식간에 비행기 날개와 프로펠러에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 비행기가 얼음에 뒤덮이자 기체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기체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에 덮인 산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기장이 창문을 열고 물건을 모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낙하산을 지고 뛰어내릴 준비를 하라고 했다. 모두 놀라서 낙하산을 찾고 있는데 양메이가 울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놀라서 보니 비행기 앞자리에 타고 있던 양메이가 “낙하산이 없어요.”하며 큰 소리로 우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양메이에게 다가가 자신의 낙하산을 벗어 소녀의 등에 매어 주었다. 그리고 “얘야, 울지 마라. 네 아빠처럼 용감해야지. 곤란이나 위험이 와도 굳세게 투쟁해야지.”하고 격려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모두 자신의 낙하산을 소녀와 저우언라이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내게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모두 침착하세요. 당황하면 안 됩니다.”하고 소리쳤다. 잠시 뒤 비행기가 한류를 뚫고 나왔다. 햇빛이 비치고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위험을 벗어난 것이다. 이 일화는 아름답지만 그 뒷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양메이는 불과 세달 뒤 아버지 예팅과 왕루어페이, 보구 등과 함께 충칭에서 옌안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함께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비운의 소녀. 저우언라이와 함께 있는 어린이가 예팅의 큰 딸 양메이

    저우언라이와 부인 덩잉차오. 1940년 충칭에서 찍은 사진이다.

    저우언라이는 아주 검소했던 모양이다. 그가 입던 잠옷은 아내인 덩잉차오가 여러 번 기워준 것이었다. 덩잉차오는 바느질 주머니를 늘 가지고 다녔는데 표면에 오성홍기를 수놓았다고 한다. 과연 모범생 총리와 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우안라이뿐 아니라 마오쩌둥, 주더, 펑더화이등 혁명 1세대 원로 대부분은 모두 청렴해서 재물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어떨지, 보도를 보면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해방군 차츰 사기를 회복하다

    장제스가 전면공격을 시작한 뒤 해방군은 가장 중요한 후방인 동북을 잃었다. 동북은 공산당이 심혈을 기울여 차지한 후방기지였다. 그곳에는 일제가 남겨둔 군수공장과 공업시설이 있었다. 당시 동북의 공업시설은 중국에서 70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드넓은 대지에서 충분한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공산당에게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공산당은 화북에서도 주도권을 잃었다. 지닝 전투와 장자커우 전투에서 패하여 자신의 수도인 옌안까지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이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이었다. 마오가 쓰핑과 장자커우 전투에서 지시했던 것처럼 “끝까지 사수하라. 한 치의 땅도 넘겨주지 마라.” 는 식의 방침을 재빨리 거둬들였다. 그런 방침을 한참동안 유지했다면 공산당은 다시 한 번 루이진을 잃고 대장정에 나섰던 것처럼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내전이 시작될 무렵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감히 전면적인 내전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정치협상회의와 국민대회 개최 전 최대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마오나 공산당 지휘관들은 “적이 변하면 우리도 변한다.”는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과 현실이 맞지 않으면 스스로를 바꾸는 방식으로 적응했던 것이다. 장제스가 전면공격으로 나오고 주요 전장에서 자신들이 밀리자 마오와 중앙은 판단을 달리했다. 공산당은 내전 초기를 ‘전략적 후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개념이나 단계별 구분은 전쟁 도중에 차츰 정리해간 것이고 초기에는 마오쩌둥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적극 공세를 통해 평화회담의 주도권을 쥔다.”는 방침 속에 대병력을 동원하여 중원 쪽에 대공세를 취하려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중앙이 “땅보다 승리, 전략적 후퇴”라는 전략을 정하고 또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분할 각개 섬멸하라.”는 전술을 분명히 하자 상황이 차츰 변하였다. 해방군 지휘관들은 비로소 상황에 맞는 작전과 전술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이 현실에 즉각 적응한 것은 생존본능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홍군 창설이래 “패하지 않는 싸움”은 곧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리하면 즉각 도망치고, 대병력에 포위당할 염려가 있으니 늘 이동하며 상대를 기만해야 했다. 정면 공격보다 기습이나 성동격서와 같은 기공법을 사용한 것도 소모전을 피하고 병력을 보존하려는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또 개개인이 가진 경험이나 능력을 총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쑤위나 천겅과 같은 지휘관들의 의견이나 보고를 즉각 받아들여 전 군의 행동방침으로 바꾼 예도 그렇고 황커청의 의견을 수렴한 과정을 보더라도 그렇다. 내전 때 마오쩌둥이나 지도부의 태도와 사고가 매우 유연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장제스의 말 한마디가 그대로 지상명령이며 참모총장조차 늘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는 국민당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만주 민주연군 싸우며 퇴각하다

    내전 초기에 국민정부군은 주요 도시와 공산당 해방구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지만 해방군도 선전하며 조직적인 퇴각을 하고 있었다. 동북지역은 두위밍이 남만주를 완전히 석권하였다. 쓰핑전투 패배 뒤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동북 민주연군 주력은 하얼빈 방향으로 후퇴했다. 창춘이나 진저우, 션양 등 주요 도시를 내준 것은 뼈아픈 일이었지만 주력은 그대로 보존하였다. 세 불리하자 스스로 철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남만주에는 지린성(吉林省) 단둥(丹東)에 본부를 둔 민주연군 랴오둥(遙東)군구 1개 종대 2개 사단이 남아 있었다. 국민정부군은 1946년 10월 31일, 남만주의 민주연군을 완전히 소탕하고자 10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였다. 병력의 완전한 열세 속에서 민주연군은 선두에서 진격해오는 국민당군 25사단을 신카이링(新開嶺)지역에서 분할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당장 섬멸하지 않으면 국민정부군 대병력이 뒤따르는 상황에서 결사적으로 선제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군 8,900명을 섬멸하고 사단장 이하 5,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런데 섬멸당한 25사단은 국민정부군 중에서 “천리마 사단”의 이름을 얻은 역전의 강군이었다.

    이 사단은 1936년 섬북에서 홍군의 원정을 두 차례나 저지한 일이 있었다. 특히 두 번째 원정에서 섬북 근거지의 개척자인 류즈단(劉志丹)이 전사했으니 공산당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 수 있었다. 류즈단은 시중쉰 등과 함께 섬북 근거지를 건설하여 장정에 나선 마오쩌둥과 1방면군을 영접, 안착하게 한 공신이었다. 중국은 류즈단이 주로 활동했던 바오안(保安縣)을 즈단현으로 개명할 만큼 그를 기리고 있다.

    25사단은 일본군과 싸운 타이얼좡 대첩에서도 일본군의 맹공을 거듭 막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그 뒤 일본군으로부터 “관린정(關麟征)이 지휘하는 25군은 다른 중국군 10개군과 맞먹는다.”는 평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후임자인 리정이(李正誼)가 무모한 전투 끝에 부대를 전멸시키고 자신도 포로로 잡혔으니 두위밍으로서는 낙심천만할 일이었다. 리정이는 “비적들을 몰아내어 장백산 나무껍질이나 먹게 하자. 압록강에 밀어 넣어 강물을 먹이자.”고 호언했다고 한다. 리정이는 전투 초기에 무선전화로 전황을 묻는 두위밍에게 “탄약만 주시면 원병은 필요없습니다.”하고 장담했으나 불과 사흘 만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 뒤 국민정부는 역전의 25사단을 다시 재건하였다.

    남만주 신카이링 전투에서 포격하는 민주연군 병사

    샤오화. 랴오둥 군구 사령원으로 신카이링 전투를 지휘했다.

    옌안의 마오쩌둥은 랴오둥 군구 사령원인 샤오화(肖華)에게 축하전보를 보내 승전을 축하하고 포상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한 번의 국지전에서 승리했다고 하여 동북의 전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11월 10일, 국민정부군이 다시 공격에 나서자 남만주 민주연군 주력은 퉁화(通化)지역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다. 일부는 산악지역 등에서 유격전을 하도록 남겨 두었다. 이로써 남만주는 창바이산(長白山: 백두산의 중국 이름이다.) 일대의 서너개 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두위밍의 국민정부군이 석권하게 되었다.

    만주지역의 조선족, 내전시기의 북한과 중공

    (조선족과 북한 관련 글은 모두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이종석의 글을 발췌 인용한 것임)

    남만주가 국민정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자 북한이 중요하게 되었다. 북한은 당시 소련의 군정치하에 있었지만 김일성이 주도권을 쥔 채 건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북한은 내전 초기 동북의 민주연군이 활동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으며 6.25 때는 몇십 배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 해방 당시 중국에는 216만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만주지역에서 살았는데 해방 뒤 상당수가 귀국하고 1947년에는 110만명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조선족들은 대부분 중공을 지지하였다. 중공이 조선족에 대하여 훨씬 우호적인 정책을 채택했으며 실제로도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국민당 정부는 만주의 조선인들을 추방하려고 했을 정도로 냉혹한 방침이었다. 당시 조선족들은 ‘조선’을 조국으로 생각하였으며 북한 역시 그들을 북한 국적의 교민으로 생각하였다. 조선족들이 중국 국적을 얻은 것은 1952년 신중국 건립 이후의 일이다.

    내전 당시 중공 중앙은 조선족에 대하여 조선이 조국임을 인정했으며 중국 공민으로도 인정하였다. 조선족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항일 유격대들은 상당수가 만주에 남아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 방호산, 이덕산, 진우 등이 조선족 부대들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 사이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국공내전 때 북한은 당연히 중공을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김일성은 당시 북한으로 지원요청을 간 중공 요원에게 “중국의 사정이 바로 우리의 사정”이라고 말했다 한다. 나중에 마오쩌둥도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인민지원군에게 “중국 동지는 반드시 조선의 사정을 자기 사정처럼 간주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하지만 내전 당시 북한은 소련의 군정 치하였기 때문에 공개적이나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 중공은 북한주재 동북국 판사처를 통해 북한과 소통하였다. 1946년 국민정부군이 창춘, 션양 등 남만주 대부분을 석권하게 되자 남만주와 북만주의 공산당 근거지를 잇는 교통로가 차단되었다. 비로소 북한이 매우 중요하게 된 것이다. 북한으로 우회하면 남만주와 북만주는 물론 관내(산하이관 안쪽)와 관외도 이동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때부터 북한을 통해 물자 및 사람이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판사처의 주요 임무가 1. 부상병의 철수 및 안치 2. 전략물자의 이동 3. 중공인원의 조중 국경선을 넘는 이동공작 4. 북한에 대한 작전물자의 지원과 요청 및 구매 5. 양국 사이의 우호증진 및 경제교역 6. 화교공작 등이었다고 하니 남만주를 잃은 중공으로서는 불가침 성역인 후방기지를 따로 둔 셈이었다. 북한은 만주에 있던 병기공장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으며 가능한 전략물자 지원을 해주었다. 북한은 긴급할 경우 정규열차를 세워놓고 중공 물자를 운반하기도 했다 한다. 해방 직후 극심한 경제난에 있던 북한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중공을 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과 중국을 “혈맹의 관계”라고 하는데 그 시작은 바로 국공내전 초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국공내전 초기 만주에서 수만명의 조선족이 중공 부대에 참가하였다. 1947년 5월 30일자 신양 주재 미국 영사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만주에서 공산당의 우세가 조선족 부대의 도움에도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1949년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부대원 6만 3천명 중 전사자와 중상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북한에 들어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 20만명 중 4-5만명이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 병사들이었다. 숫자나 전투경험을 볼 때 그들이 북한군을 얼마나 강화시켰을지 짐작이 간다.

    류보청과 천이 굳게 버티다

    허베이성 한단에 있는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야전군은 여전히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내전 초기 류덩(류보청,덩샤오핑) 대군과 천쑤(천이,쑤위) 대군은 공산당의 기세와 사기를 지켜주는 양대 축이었다. 1946년 11월초, 국민정부 정저우 수정공사 주임인 구쭈통(顧祝同)이 한단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눈앞에 다가온 국민대회에 승전을 보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민당이 정치협상회의 합의를 깨뜨리고 일방적으로 국민대회를 소집하게 된 것은 앞에 쓴 것과 같다.

    구쭈통은 당시 육군 총사령관으로 정저우 수정공사 주임을 겸하고 있었다. 연패하여 경질한 류즈 대신 류보청을 상대하게 한 것이다. 전장의 주도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류보청은 이번에도 과감한 선제공격을 선택했다. 11월 18일, 해방군은 진격해오는 국민당군 두 부대의 틈으로 치고 들어갔다. 하루 사이에 40킬로를 쾌속으로 진격한 해방군은 화현(滑縣)에서 먼저 여단 지휘기관을 급습했다. 지휘부가 마비되어 혼란에 빠진 국군을 계속 공격한 다음 승세를 타고 나머지 국군 보안부대를 공격했다. 19일까지 하루 사이에 해방군은 공격해오는 국민정부군 1만 2천명을 섬멸했다. 그리고 국민당군 대병력이 증원하러 오자 노획한 무기와 보급품을 가지고 신속하게 철수했다. 전광석화 같은 기습과 철수작전이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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