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것 아닌데 내 것인 양
    보여 주고 싶은 그것
    [풀소리의 한시산책] 추사의 낭만
        2019년 02월 12일 03: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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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

    – 신경림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잔을 들면 소주보다 먼저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이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샅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새들이 지저귀는 음조(音調)는 한층 올라가고, 시냇물은 경쾌하게 흐릅니다. 햇살은 하루하루 밝아지고, 산하는 조금씩 조금씩 빛을 더합니다. 명랑하고, 쾌활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봄. 그러기에 봄을 젊음에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노년에 느끼는 젊음의 계절은 어떨까요. 신경림의 시처럼 달뜬 젊은이들이 찾는 꽃동산에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그저 고단한 일상일 뿐일까요? 조선 후기 지성 중 한 분인 추사 김정희 선생은 말년의 봄을 어떻게 느꼈을까요? 추사가 말년에 쓴 「과우즉사(果寓即事, 과천 집에서)」를 보면서 노년의 추사가 맞은 봄 풍경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果寓即事(과우즉사)
    과천 집에서 – 추사 김정희

    뜰 앞 활짝 핀 복사꽃
    가랑비 틈타 눈물 흘리네
    집주인 병든 지 오래라
    봄바람에도 웃질 못하네

    庭畔桃花泣(정반도화읍)
    胡爲細雨中(호위세우중)
    主人沈病久(주인침병구)
    不敢笑春風(불감소춘풍)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날 복숭아꽃

    추사 김정희(1786(정조10)∼1856(철종7)) 선생은 집권당인 노론(老論)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영조 임금이 아낀 첫째 딸 화순옹주가 증조할머니입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순조롭게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세도정치의 풍랑을 비켜가지 못했습니다. 세도가인 안동 김씨 가문과 불화한 그는 남해안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이번에는 제주도로 9년 동안 유배를 떠납니다. 풀려난 것도 잠시, 3년 뒤에는 먼 북방 북청으로 유배를 갑니다.

    북청에서 2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추사는 67세(1852, 철종3)에 마지막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유배 전에 살던 용산강가 별서(別墅, 소박한 별장) 대신 아버지 김노경이 마련해 놓은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 터를 잡았습니다. 이곳에서 4년을 더 살다 71세에 죽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과우즉사(果寓即事, 과천 집에서)」는 말년에 과천에서 살면서 쓴 시입니다.

    따뜻한 햇살아래 피어난 복숭아꽃

    뜰 앞 복숭아꽃 난만하게 피어났는데, 이슬비가 내립니다. 봄 햇살 따뜻한 산들바람이 불면 꽃잎이 하늘하늘 날릴 겁니다. 전형적인 봄 풍경이죠. 그런데 이슬비 추적추적 내리고 빗물 묻은 꽃잎은 마치 눈물처럼 뚝뚝 떨어집니다. 어쩜 병든 노년의 쓸쓸함을 표현한 것 같지만, 저는 ‘병든 나 때문에 웃지도 못하는 거니?’하고 묻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속의 욕망에서 한 걸음 벗어난 무욕의 위트라고 할까요.

    내친 김에 추사의 시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제주 유배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설야우음(雪夜偶吟, 눈 오는 밤의 노래)」입니다.

    설야우음(雪夜偶吟)
    눈 오는 밤의 노래 – 추사 김정희

    술 익는 등불 흐린 낡은 집 안에
    수선화 옥처럼 영롱하게 피어났네
    눈마저 내릴 듯하니 마음 흔들려
    시흥 일어나고 그림 또한 그리고파

    酒綠燈靑老屋中(주록등청노옥중)
    水仙花發玉玲瓏(수선화발옥영롱)
    尋常雪意多關涉(심상설의다관섭)
    詩境空濛畫境同(시경공몽화경동)

    제주 길가에 피어난 금잔옥대 제주수선화(2019. 1. 13)

    추사 선생은 수선화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한양에 있을 때도 중국에서 수선화 구근을 얻어다 키웠을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유배지 제주에는 수선화가 지천입니다. 더구나 옥받침에 올려진 금잔 모양이라는 금잔옥대(金盞玉臺) 제주 수선화는 꽃도 기품 있지만, 향기 또한 그만입니다. 수선화가 피어난 밤, 술은 익고 눈마저 내리려 합니다. 이 밤만은 천리 유배객이 아니라 온전히 꽃을 즐기는 시인묵객으로 돌아갑니다. 낭만적이죠.

    어떤 이는 추사의 이런 낭만을 귀족적 취향으로 폄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낭만을 인본주의자가 갖추어야 하는 미덕 중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애정 때문에 낭만이 생겨나고, 그 힘으로 길고 큰 추진력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날씨를 보면 겨울이 끝나는 듯하다가 다시 한 겨울로 돌아간 듯합니다. 그렇다고 길어지는 햇살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은 봄을 맞으려 남녘으로 내려가 어렵사리 만난 한 송이 매화에도 환호하지만, 머지않아 서울에도 꽃들이 주체할 수 없이 피어나는 봄이 오겠죠. 박경애의 「봄」을 보면서 다가올 난만한 봄날을 기대해 봅니다.


    – 박경애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인 양
    보여 주고 싶은 봄

    설렘 가득 안고
    꽃잎 따라
    떠나고 싶고

    하루라도
    내 곁에 오래 머물도록
    비도
    바람도
    막아주고 싶어

    긴 그리움 끝에
    짧은 만남이기에
    눈부신 황홀함으로
    가슴에 안기고

    내년을 기약하며
    떠나려는 그대는
    아름다움은
    짧은 것이라네

    필자소개
    최경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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