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뿐 아니라 '관료주의 병'과도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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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12일 03: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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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수엘라를 다녀왔다. 3~4년 전부터 그 사회의 변혁 과정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기도 했고 민주노동당으로서도 베네수엘라 집권당과의 전략적 관계 설정을 검토하던 때에 마침 수도 카라카스에서 개최되는 회의의 초청장이 와서 참석하게 되었다.

    작년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했던 심상정 의원과 필자가 여러 국가의 정당 관계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잠깐 대화를 나눴던 베네수엘라 집권당의 의원 한명이 잊지 않고 이 회의에 초청한 것이다. 회의는 지난 달 25일부터 27일까지 열렸다.

    참석하게 된 국제회의는 ‘사회적 부채와 남미 통합에 관한 5차 회의’로서, 2002년부터 매년 카라카스에서 열리고 있는 정기행사다. 올해의 주제는 ‘새로운 사회, 경제, 문화, 생태적 질서를 위한 남미민중포럼’이었다. 남미 주요 좌파정당들과 운동조직들의 “문화적으로 진보적이고, 사회적으로 공평하며, 경제적으로 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신자유주의의 대안 모색”을 위한 자리이다.

       
    ▲행사 첫날 호세 빈센테 랑헬 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또한 남미 운동 사회에서 베네수엘라 정부의 존재감을 높이고, 주요 진보세력들 사이에서의 연대와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장으로 기능한다. 오래 전부터 브라질 노동자당(PT)이 남미 좌파조직들의 토론과 소통의 장으로 조직해온 상파울루 포럼의 베네수엘라판이라고 할까.

    회의의 주최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실, 외무부와 베네수엘라 국회, 그리고 남미 의회의 지역개발위원회가 공동으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무는 남미 의회의 지역개발위원회 소속 의원실에서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남미 좌파정당 관계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유럽과 아시아 등 외부 인사들도 몇 명씩은 매년 참석한다.

    24일 새벽에 도착한 숙소 힐튼 호텔. 정부가 매입했다는 이 호텔은 안락했지만, 보수가 꽤 오랫동안 안 된 듯, 호텔 외부의 ‘HILTON’ 간판에 ‘I’자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공항에 나오기로 했었던 사람도 안 나와 어렵게 찾아간 호텔에는 그 다음날 들어오는 것으로 예약이 되어 있어 한동안 안내데스크에서 호텔 직원과 씨름을 해야 했다.

    다음날 만난 회의 조직위 관계자는 공항과 숙소 사이의 교통편을 담당했던 정부 부처에 문제가 생겼다며, ‘관료주의라는 병’과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답변했다. 누구의 책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국가의 관료조직 내에 있는 수만의 중간층 공무원들이 개혁 대상이라는 인식은 회의 기간 내내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개막식과 함께 회의는 시작됐다. 해외에서 70~80명이 참석했는데,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참석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보였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민주노동당과 인도네시아의 민중민주당 뿐이었다. 회의 기간 3일 동안 적게는 1백여 명, 많게는 3백여 명의 베네수엘라 활동가와 정치인 및 관료들도 회의 일정에 함께 했다.

    1시간 반 늦게 시작한 개막식에는 예년과는 달리 차베스가 직접 오지 않고 부통령이 와서 연설을 했다. 얼마 전에 다녀온 KBS의 이강택 피디나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각종 베네수엘라 방문기에서 베네수엘라인들의 시간관념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던 터라 ‘베네수엘라 타임’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정부 주관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1시간 이상 지체되는 것은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부통령 호세 빈센테 랑헬은 언론인 출신답게 차분하고 냉정하게 사실 중심으로 차베스 정권의 성과에 대해서 연설을 했다. 그는 정부에서 새롭게 실시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에 4백만 명의 빈민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빈민 지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무상의료 프로그램(바리오 아덴트로)의 일환으로 지난 1년 동안 1천6백만 차례의 의료 진찰이 진행됐다고 발표했다.

    이 외에도 1만3천 가지 필수 식료품을 싼 값에 공급하는 점포가 설립됐고, 16만 채의 새로운 공공주택이 건설됐다고 발표했다. 교육, 의료, 주택, 먹거리 등 ‘민생정치’의 장에서 차베스가 거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성과들이다.

    미국의 부시 정부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차베스의 선동적이고 전투적인 연설 스타일과 달리 그는 차분하게 부시 행정부가 지속적으로 자신들에게 붙이고 있는 포퓰리스트 딱지에 대해서 반박했다.

    그는 꾸준히 70%의 지지를 받고 있는 차베스 대통령과 20%대의 지지를 받는 부시 정부 중에서 누가 과연 더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냐고 물으며 비꼬았다. 또 “혁명의 심화가 민주주의의 안정을 가져오고 있다“며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존재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아니라 혁명”이라고 못을 박았다. 개막식에서는 그 외에도 교육부 장관, 보건부 장관, 베네수엘라의 미주기구(OAS) 대사 등이 참석해 연설했다.

    오후에 이어진 원주민에 대한 첫 번째 포럼의 관심사는 단연 최근 원주민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볼리비아였다. 볼리비아에서는 산토스 라미레스 상원의장이 직접 참석해 회의에 힘을 실었다. 가스산업 및 에너지 자원 국유화 조치로 인한 언급이 관심을 모았던 연설에서 그는 최근 진행된 국유화 조치에 대해서 “모두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선택”이었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우발적이거나 임시적인 조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역시 원주민 출신인 그는 모랄레스 정부가 원주민들의 존엄성과 정체성, 그리고 고유 역사의 복원을 위한 정부라며, 정부는 원주민 권리의 쟁취와 사회적 통합을 활동기조의 중심에 놓고 있다고 역설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MAS) 당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조직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과는 달리 본인은 맑스주의와 거리를 뒀다는 사실이다.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거부 입장은 분명히 했지만, 베네수엘라와 마찬가지로 볼리비아에서도 기존 사회주의와는 다른 방향의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녁때에는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유럽연합의회의 좌파 블록인 유럽통합좌파-북유럽녹색좌파(GUE-NGL) 그룹의 남미 담당자와 만나 민주노동당과의 지속적 교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벨기에 출신인 그는 차베스가 쿠데타 위기에 처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이쪽과 지속적으로 연대를 하고 있었고, 참석자들의 상당수와도 이미 이전 활동으로 인해 가까운 관계였다.

    당시에는 며칠 후에 있을 콜롬비아 대선에서 좌파가 처음으로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우리베(Uribe) 대통령과 결선투표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흥분해 있었다. 결국 좌파의 단일 후보는 22%를 득표하여 결선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남미에서 파라과이와 함께 좌파의 파장이 중앙정치까지 미치지 못한 콜롬비아에서 좌파의 통합이 이뤄져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식사 후 다음 날 있을 발표 준비와 함께 첫날은 막을 내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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