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충지 장자커우 함락,
    국민군 푸쭤이 또 맹활약
    [국공내전⑫] 정치협상회의의 파탄
        2019년 02월 07일 11: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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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⑪]국민당군 기세를 올리다

    내전 속에서 국공은 여전히 협상을 계속했다. 미국이 연합정부 구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공산당과 자유주의자들을 어떻게든 연합정부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공 양측은 협상에 열의가 없었다.

    장제스는 미국이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로막아 공산당을 돕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만주에서 쓰핑과 진저우, 창춘을 잇따라 함락시키고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을 쑹화쟝 너머 하얼빈으로 내몰았을 때 국군은 정전으로 진격을 멈춰야 했다. 중원해방구 공격에 대병력을 동원했지만 임시 정전협정 때문에 한 달 이상 시간을 지체하였다. 그 사이에 해방군은 탈출 준비를 하였으며 부대 배치나 공격날짜 등 기밀이 새어 주력을 놓치게 되었다. 그래도 전체 국면은 장제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공산당이 가장 공을 들여 근거지로 삼고자 했던 만주는 대부분을 국민정부가 점령하였다. 화이난을 비롯한 중원 근거지를 빼앗았으며 따퉁전투에서 푸쭤이가 승리하여 화북의 주도권도 틀어쥐었다. 공산당은 산둥을 중심으로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부대, 화둥에서 천이와 쑤위의 부대가 지연전을 펼치며 국민당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장제스는 속전속결을 원했다. 천청은 고급 지휘관회의에서 “빠르면 3개월, 늦어도 6개월이면 공산당을 소멸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 장제스의 생각을 그대로 전한 것이었다. 공산당에게는 기반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지만 장제스가 기다려주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난징에서 여전히 민주동맹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자들, 장제스 및 국민당측 인사들, 그리고 마샬 등 미국쪽 인사들과 활발히 접촉하였다. 하지만 연합정부 구성은 파탄이 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장제스의 주장대로라면 공산당은 자신들이 애써 건설한 근거지를 내주고 다시 일제 점령하의 옌안 시절로 돌아가야 했다. 군대는 18개 사단으로 대폭 감축해야 했으며 국민당 소속으로 개편해야 했다. 월급과 보급품을 정부에서 받고 승진이나 인사이동까지 국민당에서 좌우하면 해방군은 눈 녹듯 사라질 게 뻔했다. 국민당은 여론을 좌우하고 있는 공산당과 민주동맹이 주도하는 국민대회가 부담스러웠다. 국민대회가 원만히 성사되고 평화적 기운이 높아지면 군사적 공격에 대한 책임이 더 커질 형편이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군대와 해방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정치협상회의가 시간끌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마침내 45년 10월 10일 맺은 쌍십협정과 그 뒤에 진행된 정치협상회의를 깨뜨리기로 결심했다.

    1946년 7월 4일, 국민정부는 일방적으로 11월 12일에 국민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연립정부를 세우기 전에 국민대회를 개최하지 않는다는 정치협상회의 결의를 공공연하게 무시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만나 대회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동맹도 무시당한 터라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샬은 중국 인민들에게 국공 양당에 압력을 가해 화해를 하게 하자고 호소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샬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계속하면 경제가 붕괴할 것이다. 공산당에게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하고 속전속결을 원하는 장제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였다. 1946년 봄부터 공세를 펴 주도권을 쥔 장제스는 마샬의 중재가 승리를 지연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공산당은 미국이 국민당을 지원하면서 연막을 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공산당은 미군이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1947년 1월 미군의 중국간섭에 항의하는 상하이 중산대학 학생시위

    장제스가 진찰기(산시,차하얼,허베이성 포괄) 해방구 수도인 장자커우 공격을 명령하자 국공 양당 사이에 파열이 더욱 커졌다. 저우언라이는 마샬을 만나 3인 소조 회담을 요구했다. 그리고 즉각 장자커우 공격을 중지하지 않으면 정치협상회의가 파탄난 것으로 알겠다고 통첩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3인소조 회의 개최를 거절했으며 장자커우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마샬은 10월 1일 장제스에게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귀국하겠다고 위협했다. 10월 12일 푸쭤이 장군이 네룽전, 허룽의 부대가 수비하던 장자커우를 함락하자 장제스는 매우 만족했다. 그는 11월 8일 국민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공산당과 민주동맹이 자신들의 입장을 고려해 볼 시간을 주기 위해서 공격을 잠시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장제스는 12월 1일 마샬에게 “적은 8~10개월 안에 소멸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마샬은 장제스에게 “홍군이 생각보다 강해서 패배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중재가 무위로 돌아가자 마샬은 더 이상 활약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트루먼도 기왕의 방침을 바꿔 국민정부를 계속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1947년 1월 6일 마침내 미국대통령 트루먼이 마샬을 소환했다. 마샬은 귀국인사를 하며 “국민당 내의 비타협적인 집단이 중국에 봉건적인 통치를 하고 있으며 정치협상회의 결의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고 비난했다. 또 “공산당이 공평한 양보를 하려 하지 않는다. 중국의 희망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달렸지만 그들은 힘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마셜은 귀국 후 국무장관직을 맡았다. 중국에서 의욕을 잃었기 때문일까, 그는 중국 문제에 대하여 관망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그래도 마샬은 1947년 7월, 귀국했던 웨드마이어 장군을 다시 중국에 파견했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에서 한 달간 머물며 장제스에게 개혁하라고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웨드마이어는 보고서를 통해 “미군 장병 1만명의 감독 하에 국민정부에게 충분하고 신속한 원조를 하라.”고 건의했다. 또 “5년 기한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만주를 미국,소련,프랑스,영국,중국 등 5개국 하의 보호아래 두자”고 건의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제연합이 만주를 신탁통치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마샬은 이 보고서를 묵살해 버렸다.

    푸줘이 장자커우를 점령하다

    사람이 하는 일은 뜻대로 되는 일이 많지 않다. 특히 상대방과 서로 다투는 전쟁이나 전투는 의외의 방향으로 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쟁이라면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고 경험 속에서 이론을 세워왔다고 자부하는 마오쩌둥도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국공 간에 연합정부 수립과 관련한 정치협상회의가 순조로울 때에는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 공산당이 최소한의 합법성을 얻어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쌍십 협정은 일 년도 되지 않아 사실상 파탄이 나 버렸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소련과 협력하여 동북을 먼저 접수하면 앞으로의 대결에 유력한 근거지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두위밍의 진격과 쓰핑 싸움에서 밀려 만주 남부와 중부는 국민정부군이 장악해 버렸다. 푸쭤이나 옌시산군을 꺾으면 화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뜻밖에도 따퉁 싸움에서 패하였다. 병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가운데서 패배한 것이라 더 뼈아팠다. 이제는 옌안마저 공격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장쑤와 산둥지역만 버티고 있을 뿐 나머지 지역은 모두 주도권을 빼앗긴 채 세불리한 형세가 되었다.

    국군은 우세한 병력과 기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만주에서 두위밍이 내전 초기 기선을 제압했다면 화북에는 푸쭤이가 있었다. 푸쭤이는 따퉁 전투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국면을 뒤집어 역전승을 거두었다. 승세를 탄 푸쭤이는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장자커우를 공격하러 나섰다. 1946년 9월 베이핑 행원(行轅: 전쟁시 임시 지휘소. 행영行營이라고도 한다.) 주임인 리쫑런(李宗仁)은 제 11전구 사령관 쑨롄중(孫連中)과 12전구 사령관 푸쭤이에게 각각 5만명과 2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장자커우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둥은 따퉁 지닝에서 패배한 뒤 삼로사성 계획을 포기했다. 내선에서 적을 섬멸하는 방침으로 바꾼 것이다. 9월 18일, 그는 진찰기 군구에 보낸 전보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장자커우를 공격하는 적을 섬멸하려면 이런 작전계획이 있어야 한다. 차하얼을 보위하자는 구호 아래 동원을 해야 한다. 적을 섬멸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하며 지역을 지키는 것을 위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주력은 행동에 자유가 있어야 하고 주도적으로 적을 섬멸하는 전투를 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장자커우를 잃어도 적을 섬멸하면 된다. 광활한 지역에서 해방구의 유리한 조건에 의지하여 유효하게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시작해야 한다. 남북 두 전선에서 적극방어 전력을 적시에 집행해야 한다. 차츰 아군과 적의 병력 대비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아군이 전략적 반격과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초를 쌓아야 한다.”

    장자커우는 진찰기 군구의 수도로 해방군이 빼앗은 유일한 성도였다. 홍색 수도인 옌안과 함께 제 2의 홍색도시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화북, 동북, 차하얼 및 쑤이위안에 걸친 전략적 요충이었으며 핑쑤이 철도를 축으로 러허, 외몽골, 소련과도 연결할 수 있었다. 섬감녕(산시,간쑤,닝샤성) 해방구에서 동북으로 가거나 철도를 통해 소련의 지원을 얻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내전 초기에 장자커우는 국공 간에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장제스는 따퉁의 싸움이 끝난 뒤 즉시 장자커우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본래 진찰기 해방구의 총병력은 32만명이었다. 하지만 따퉁과 지닝전투 패배 후에는 개편 등으로 20만명 남짓이었다. 국군은 쑨롄중의 11전구 5만명과 푸쭤이의 12전구 2만여명을 합쳐 7만명이었다. 여전히 해방군이 국군에 비해서는 절대 우세하였다.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당연히 장자커우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네룽전 등 군구 지휘부는 푸쭤이 부대가 병력이 적고 지닝회전에서 손실을 입어 공격능력이 약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국군의 공격중심은 동쪽이라고 예측하였다. 여전히 푸쭤이 부대를 경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스 안은 장자커우와 그 인근의 요충지였던 장배이 현과 완취안 현

    피실격허(1), 푸쭤이의 용병

    그들은 또 시간상으로 동쪽 방면의 국군이 화이라이(懷來 :장자커우에 속한 현이다.)를 점령한 뒤 비로소 푸쭤이 군이 출동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푸쭤이군이 지난번에 철도선을 따라 출동했으므로 이번에도 철도로 출동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서 동쪽 방면의 국군과 최단거리인 차이거우부(㾹溝堡: 허베이성에 있는 진鎭)에서 합류할 것이라 본 것이다. 이 판단에 따라 국군의 주공방향이 핑쑤이철로(베이핑-쑤이위안) 동단에서 캉좡(康庄), 화이라이 지역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수비군 주력을 동쪽에 배치해두고 섬멸전을 펼칠 준비를 했다.

    해방군은 1종대 3개 여단, 2종대 2개 여단, 그리고 나머지 종대 3개 여단과 민병을 대거 동쪽에 배치하였다. 4종대 1개 여단 및 진쑤이 군구 주력은 따퉁철로선의 차이거우부와 텐진(天镇), 양까오(陽高)선에 배치하여 세가 약한 푸쭤이군을 상대하게 하였다. 교도여단과 경비연대는 장자커우에서 기동부대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진찰기 군구 7군에게 장베이(張北) 방향을 지키게 했으며 남은 6개 여단은 적이 동쪽에 깊이 들어오면 측후방에서 타격하도록 하였다. 이런 부대배치는 일반적인 군사지식으로 볼 때 흠잡을 데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푸쭤이였다. 그는 이전에도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전술을 구사하곤 하였다. 마오쩌둥은 삼국지와수호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푸쭤이는 일찍이 베이징 칭허쩐(清河鎭) 육군중학 시절 군사교과목 외에 중국 전래의 저명한 전투기록을 탐독하였다. 예를 들면 진나라와 초나라의 성복전투(城濮之戰), 유방과 항우가 싸웠던 성고전투(城皋之戰), 삼국지에 등장하는 적벽전투 같은 것들이었다. 푸쭤이는 특이하게도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뒤 타이위안의 육군소학교, 베이징의 육군중학교, 바오딩의 군관학교를 차례로 거치며 수학했다. 그는 신해혁명 뒤부터 군벌전쟁, 북벌전쟁, 항일전쟁 등을 두루 거친 맹장 중의 맹장이었지만 옌시산과 가깝다는 이유로 장제스에게 중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수성의 명장’ ‘항일명장’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푸쭤이의 글씨

    푸쭤이의 옛집. 우측 현판은 덩샤오핑의 글시

    푸쭤이는 또다시 성동격서의 방법으로 해방군 지휘부의 예상을 깨뜨렸다. 그는 장제스가 공격명령을 하기도 전에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다. 해방군이 착각하도록 하기 위해 9월 하순부터 1개 연대를 주력으로 위장하여 열차에 승차하게 하였다. 장갑차의 엄호 속에 매일 대낮에 따퉁에서 양까오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밤에는 다시 따퉁으로 돌아오게 하며 대병력이 이동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요원을 파견하여 따퉁 전방의 정거장에 부근 가옥에 표시를 하고 군량과 마초를 사들이며 대군이 따퉁에 집결할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또 푸쭤이 장군이 따퉁에 와 공격을 지휘할 것이라고 퍼뜨렸다. 그러자 해방군은 푸쭤이군 주공방향이 따퉁, 양까오, 차이거우부일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푸쭤이군 주력은 지닝(集寧)에 집결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29일, 장자커우 동부전선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쑨롄중 휘하 국군 16군과 94군, 53군 일부 부대가 해방군 부대에 맹공을 퍼부었다. 진찰기군구 주력과 격전을 벌였는데 해방군도 미리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10일 넘도록 격전을 벌였지만 국군은 화이라이 동쪽지역에서 막혀 전진하지 못하였다.

    동부전선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하자 장제스는 장자커우 전투를 푸쭤이의 12전구가 관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미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던 푸쭤이군에게 즉각 출동하여 장자커우로 직행하라고 명령했다. 푸쭤이군 주력은 이미 지닝에 집결을 마친 상태였다. 맹장 둥치우(董其武)가 지휘하는 11사단과 101사단, 31사단이 출전하기로 하였다.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푸쭤이는 평소에 아껴서 잘 쓰지 않던 기계화부대를 포함시켜 전투력을 증강하였다. 기계화 부대는 보급차량 연대, 미제 105밀리 유탄포 대대, 전방포 대대, 전차대대 (모두 2개 중대가 있었는데 1개 중대당 중형탱크 12량 보유), 소형탱크 1개 중대(일제 12량), 운전병 1개 연대, 장갑차 1개 대대 등이었다.

    푸쭤이 부대 주력은 정예라고 할만 했으며 지휘관들도 모두 역전의 맹장들이었다. 장자커우 공격에 대한 푸쭤이의 전술방침은 “기습을 위주로 강력하게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병력 중 한 갈래를 양공부대로 편성하여 따퉁, 펑진(豊鎭)에 2선부대로 두어 주공격 부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그리고 철도를 이용해 따퉁에서 출발하지 않고 지닝에서 출격하였다. 푸쭤이 부대는 장성밖의 황폐하고 인가가 없는 곳을 지나 장자커우 북쪽 초원과 산악지역으로 향했다. 서쪽에서 북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우회하였는데 그 속도가 질풍 같았다. 푸쭤이 부대는 방비가 매우 허술한 장베이를 바로 치고 들어갔다. 장베이는 장자커우의 후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푸쭤이군을 방비하려고 차이거우부선에 배치했던 해방군 수비가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렸다.

    1946년 10월 8일, 푸쭤이는 지닝에서 기병 4사단과 12여단을 출격시켰다. 기병들은 솜옷을 입고 말발굽을 헝겊으로 쌌다. 그들은 순식간에 차이거우부를 수비하던 해방군을 지나쳐갔다. 초원을 지나 산 언덕을 뚫고 지나가 따칭거우(大青沟: 스쟈좡의 지명)와 난후쳰(南壕堑: 허베이성 상이현의 진)을 점령했다. 기병대는 진격 도중에 만나는 누구라도 잡아 부대에 가두었다. 출병했다는 정보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0월 9일 오후 2시에는 이미 장베이 현성 5킬로까지 진출하여 정찰하며 공격준비를 마쳤다.

    그때 비로소 적을 발견한 해방군 장배이 수비대는 적병 규모가 작다고 판단하여 2개 기병연대를 출동시켰다. 그러자 장베이에는 겨우 1개 중대와 2개 경비소대만 남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 해방군 화북군구 3종대장 정웨이산(鄭維山)이 파견한 1개 대대가 장베이 현성에 도착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푸쭤이의 기병대는 성안에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1개 연대를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단숨에 성 아래까지 치달은 공격군은 기병도와 기병총을 휘두르며 성벽을 기어올랐다. 기습을 당한 수비군은 응전했으나 서남쪽과 서북쪽이 뚫렸다.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병력이 부족한 수비군은 성안으로 후퇴하였다. 정위산은 장베이현성이 기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비연대 주력에게 자동차를 타고가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출동 도중에 국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를 만나 지연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장베이 현성에는 푸쭤이의 병력이 속속 도착하여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3시간이 지나자 수비군은 사상자가 너무 많아 방어를 포기하고 부득이 충리(崇禮) 방향으로 철수했다. 9일 기병대는 오후 장베이 현성을 점령했다.

    내전 시의 장자커우의 모습

    장베이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네룽전은 형세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동부전선에 배치했던 주력을 장자커우와 장베이 사이의 험준한 요새인 랑워거우(狼窩溝)로 이동시켰다. 이제 랑워거우에서 장자커우를 둘러싼 공방전이 결판날 것이었다. 랑워거우는 장자커우에서 25킬로 떨어져 있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격전지가 되어 왔다. 소련과 팔로군이 장자커우를 점령할 때에도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으며 예전에는 당나라와 거란이 크게 싸운 일도 있었다. 또 칭기즈칸과 금나라 군대도 이곳에서 결전을 치렀다. 그래서 이곳은 예전부터 이름난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예후(2) 경승은 옛부터 알려졌네. 길은 험하고 산은 높은데 구름이 은하수 가에 떠 있구나. 군대가 이곳에서 싸웠음을 탓하지 마라. 먼 곳에서 달려와 유연을 평정했네. (野狐勝地古今傳,路險山高雲漢邊 莫怪軍家爭此地,長驅直捣控幽燕) 하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정웨이산은 수비를 맡은 해방군 교육여단에게 “퇴각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독려했다. 그리고 랑워거우와 장자커우 사이에서 기동방어를 하라고 지시했다. 계속 지연전을 펼쳐 장자커우의 당,정,군이 철수할 때까지 엄호하라는 것이었다. 10일 아침 7시, 교육여단의 일부가 장자커우 남문 지역에서 수비에 들어갔다. 장자커우와 존망을 같이 할 태세였다. 한편 랑워거우에 진입한 국군은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자동차, 탱크, 포차, 말이 모두 나아갈 수가 없어 도로를 닦으며 계속 전진했다. 국군과 해방군은 10월 10일 오전 10시에 랑워거우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다. 랑워거우는 지세가 험준하여 “지키는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할 수 있다.”는 곳이었다. 국군은 도로 양쪽에 105밀리 유탄포를 설치하고 산위의 해방군을 향해 맹렬하게 포격했다. 산포와 박격포, 그리고 비행기 여섯 대가 포격과 폭격, 기총소사를 하는 가운데 국군은 도로 우측에서 공격해 올라갔다. 하지만 지형을 이용하고 있는 해방군이 잘 버텨 별 효과가 없었다. 국군을 지휘하던 궈징윈(郭景云) 사단장은 직접 2개 연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그때 국군은 랑워거우 수비군이 장자커우 지휘부에 보고하는 통신을 감청하게 되었다. “푸쭤이 부대 보병과 기병이 비행기, 대포의 엄호 속에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전투가 매우 격렬하니 부대를 보내 증원해 주기 바란다.” 그러자 장자커우 지휘부는 “해질 때까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가능한 원군을 빨리 보내겠다.”고 응답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국군 둥치우 군단장은 궈징윈에게 해지기 전에 반드시 랑워구 산 정상을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해방군이 완강히 저항하여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국군은 탱크 12대를 끌어다 놓고 비행기 대포와 함께 공격을 퍼부었다. 그때 해방군은 전화로 “푸쭤이군이 대병력으로 탱크, 비행기, 대포의 엄호 아래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해질 때까지 수비하기에는 너무 손실이 크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해방군 지휘부에서 “해질 시간이 멀지 않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전장을 벗어날 수 있으면 장자커우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런 통화 내용을 모두 국군이 감청했다. 그 소식을 들은 국군은 사기가 올라 맹렬하게 공격하여 오후 다섯시에 마침내 랑워거우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11일 7시 푸쭤이 부대는 장자커우를 공격했다. 비행기 6대가 엄호하는 가운데 11에 장자커우 부근 완취안(萬全) 현성을 점령하였다. 그때 뜻밖에 공군 부사령인 왕쑤밍(王叔铭)이 둥치우 사령관에게 무선 전화를 걸어 왔다. “공중에서 정찰하는데 장자커우에서 센화(宣化)로 향하는 도로에 해방군이 대거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장자커우 해방군이 이미 철수한 것 같다. 신속하게 장자커우를 점령하라. 공군이 엄호하겠다.” 둥치우는 상황을 판단한 뒤 기계화부대에 장자커우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만약 해방군이 철수하지 않았으면 공격을 시작하라. 먼저 토치카들을 점령하여 후속부대의 공격을 엄호하라. 해방군이 확실히 철수했으면 전성을 점령하고 아군의 입성을 준비하라.” 10월 11일 오후 2시 국군이 장자커우에 이르니 해방군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다. 오후 4시 푸쭤이의 국군이 모두 장자커우에 입성했다. 푸쭤이의 피실격허, 성동격서의 전술이 얻은 커다란 승리였다.

    다음 날 푸쭤이는 전화를 통해 부대원들을 포상하라 일렀다. 그리고 각 부대에 인근의 현성들을 차례로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해방군은 국군의 공격에 맞서 부대를 엄호하면서 차하얼 남쪽 위현(蔚縣)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푸쭤이 부대는 장자커우를 점령한 뒤 즉시 기병대를 출격시켜 후퇴하는 해방군을 추격했다. 쌍간허(雙干河)까지 추격하며 살상하니 후퇴하는 부대의 모습이 매우 처참하였다. 해방군 간부와 전사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화북 야전군 부대원들은 푸쭤이 부대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

    랑워거우를 잃은 뒤 네룽전은 장자커우를 수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0월 10일 오후 6시에 군사위원회에 전보로 철수 결심을 보고했다. 중앙은 10월 11일 회신을 통해 장자커우는 매우 중요하니 포기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네룽전 동지 등에게: 푸쭤이 군은 먼거리를 달려와 기습했다. 경무장이며 외로운 군대가 깊이 들어와 식량과 마초, 탄약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핑쑤이 간 주도로도 개통되지 않아 병력 이동에도 어려움이 많다. 아군은 성 모두를 방어하려 하지 말고 중점방어를 진행하라. 특히 독립가옥을 견호하게 방어하라. 며칠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푸쩌이 군을 견제하며 아군 주력으로 야전에서 적 4-5개 연대를 각개 섬멸하라. 장자커우를 이미 잃었으면 성 남쪽의 몇 개 거점을 수비하라.”고 지시했다.

    군사위원회는 장자커우 수비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포현했다. 하지만 네룽전 등 지휘부는 지시를 이행할 방법이 없었다. 지닝을 잃은데 이어 장자커우를 잃자 네룽전에 대한 군사위원회의 불만이 매우 커졌다. 그래서 47년 7월 전국 토지회의에서 류샤오치는 진찰기 해방구 지도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47년 9월에는 펑전을 보내 정치국원이 직접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네룽전의 권한을 박탈해 버렸다. 장자커우를 잃은 뒤 진찰기 해방구는 몇 개의 조각으로 찢어졌으며 반년 넘게 주도권을 되찾을 수 없었다. 국군은 핑쑤이로 전선을 개통시켰으며 동북과 화북, 그리고 서북 해방구 사이의 교통선을 차단했다. 장자커우를 전진기지로 삼아 진찰기 해방구 한복판을 공격해 들어갔다. 장제스는 장자커우를 점령하자 신이 나서 국민대회 개최를 강행하였다.

    공산당이 화이인과 장자커우를 잃은 것은 근거지의 가장 중요한 중심 도시를 잃은 것이었다. 푸쭤이 부대는 지방의 소규모 부대였지만 몇 번의 전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지닝전투와 더불어 장자커우 공격에서 푸쭤이는 자신의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네룽전과 푸쭤이를 다룬 책

    <각주>

    1.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친다는 뜻으로 군사용어이다.

    2. 예후링(野狐嶺)을 뜻한다. 장자커우 인근에 있는 고개이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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