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는 부단한 노력’
    극기와 자제 필요한 시기
    [종교와 사회]알릴레오와 고칠레오
        2019년 02월 04일 07: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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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에 천주교의 교리와 권력에 힘입어 과학계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대항했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교회의 갖은 협박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태양 중심설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과학자가 사실에 근거해서 진실과 진리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왜곡된 종교 신앙과 권력들은 과학적 사실보다는 신앙적 종교 경전인 성서를 근거로 하여 과학자들이 밝혀낸 진실과 진리를 거부하고 그들을 모질게 박해했던 역사가 있었다. 갈릴레오도 권력에 굴복하여 한때 자기의 주장을 철회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는 계속되는 교회의 박해 속에서도 자기의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신념과 믿음을 끝까지 사수했다고 한다.

    종교 권력과 왜곡된 신앙교리 및 믿음체계는 그 후에도 과학은 물론 인류 역사 발전에 많은 장애를 가져온 것이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지금 21세기에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종교의 신앙체계가 중세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을 정신적, 영적으로 혼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지금 같은 과학 발전의 시대에 종교가 합리적, 이성적으로 보편타당한 신앙체계를 이해되도록 설명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사회 발전에 큰 적폐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여기저기에서 증명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가 모습 아닐까.

    한국 사회는 작년에 이른바 가짜뉴스의 홍수 가운데 무엇이 진실이고 진리이고 사실인지 혼란스러웠던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가짜다 진짜다 하는 뉴스들이 범람하여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모 정치인의 홍카콜라라는 유튜브 매체를 통한 방송이 큰 인기를 끈다고 하자, 곧 이어 알릴레오라는 대항적 방송이 생겼단다. 코카콜라보다는 자기 신념을 지켰던 갈릴레오를 좋아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홍카콜라보다는 알릴레오를 더 선호하게 되지만 말이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과 진리만을 알리겠다는 정신에 입각한 알릴레오를 듣는 것이 콜라에 취해서 뭐가 뭔지 헤매는 것 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나에게는 상식적인 판단이다.

    알릴레오는 곧 고칠레오로 이어지고 있다. 가짜와 거짓과 왜곡이 난무한 한국 사회에 제대로 사실을 알리고 왜곡된 사실을 바로 고쳐주겠다는 알릴레오와 고칠레오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것은 나에게 비단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사실관계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현재 한국종교 또한 알릴레오와 고칠레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낄 만큼 많은 왜곡과 거짓 신앙체계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왠지 절실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20세기 인도 최고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라다크리슈난 교수는 말하길, ‘종교는 실재를 파지(把持)하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궁극 실재를 파지하는 것은 극기와 자제의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실재란 곧 사실에 근거한 진실과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종교는 과학과 달라서 반드시 사실적, 실험적 증명을 통해 밝혀진 진실과 진리에만 기초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의 이성 초월적, 신비적 요소도 항상 보편타당한 합리성과 이성적 근거를 기초로 하는 것이지, 밝혀진 과학적 근거와 인간 이성으로 증거 된 사실을 부정하는 초월과 신비의 종교는 왜곡과 거짓을 양산하기 쉬운 위험성을 늘 내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라다크리슈난도 종교는 부단한 노력이고, 그 노력은 극기와 자제를 통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종교라는 이유로 쉽게 과학적 사실을 부인하거나 이성적 판단, 상식을 넘어서서 보편타당성 없는 자기주장만을 하기 쉽기 때문에 극기와 자제를 말 한 것이고, 이를 통한 진리를 향한 부단한 노력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목사인 나도 깊이 반성하지만, 많은 종교인들이 과연 얼마나 이런 부단한 노력 가운데 실재적 진리를 알기 위해 극기와 자제의 생활을 하는지 늘 자기를 성찰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교회에 다니고 너무 안일하게 절에 다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기독교의 본래 정신에 따라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변화’없이 ‘교회에만 종속’되어 사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분석하면서, 그 중 큰 이유는 예수를 믿는 것을 일종의 편리를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 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예수님이 모두 대신 해주셨고 또 해주시리라는 편리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다. 나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나 대신 남 사랑하는 일 다 하시고, 나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으니 나는 그저 그의 공로로 편히 놀고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은혜’만 찾고, ‘주여, 믿습니다’만 하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지 말이다.

    나치에게 처형당한 본회퍼 목사는 그것을 ‘값싼 은혜’라는 말로 정곡을 찔렀다. 예수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값싼 은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타고 가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런 값싼 은혜는 요새 말로 하면 가짜 뉴스라고 하겠다.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는다는 신앙생활은 예수처럼 살고, 부처처럼 사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값싼 은혜와 값싼 구원, 값싼 믿음으로 변질될 때 그것이 바로 요새 유행하는 가짜 뉴스가 되어버려 본래적 종교의 실재를 감추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알릴레오, 고칠레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독교 성서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회개는 결코 위에서 언급한 값싼 은혜, 값싼 구원, 값싼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누가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회개의 본래 뜻은 ‘의식 구조의 개변’이다.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는 것이다. 실재를 꿰뚫어봄으로 허상을 벗기고 실상을 찾는 일이다. 불교적 표현으로는 사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님 말씀으로 하면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고, 마음이 청결해 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사회와 종교계에는 가짜 뉴스와 값싼 구원의 소식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라다크리슈난의 말대로 극기와 자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이다. 부디 올 한해는 우리 각 개인부터 먼저 값싼 가짜의 소리들에 휩쓸리지 말고 극기와 자제의 노력으로 실재와 실상을 깨달아서, 더불어 평화로운 한 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목사. 거창씨ᄋᆞᆯ평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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