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희정 2심 실형·구속
    "상식적이고 당연한 결과"
    김지은 "마녀로 지냈던 시간과 작별···성폭력 피해자들께 연대의 마음"
        2019년 02월 01일 05: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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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하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실형을 받고 법정 구속됐다.

    1일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판사 홍동기)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과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안 전 지사가 2017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저지른 10차례의 범행 중 9차례의 범행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특히 쟁점이었던 ‘업무상 위력 행사’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지방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상 특징과 비서라는 관계 때문에 피고인의 지시를 순종해야 하고 내부적 사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현저히 침해했다”며, 안 전 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특히 재판부는 “법원은 성폭행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면서 “개별 사건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하는 것은 정의 형평에 입각한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 이 법원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안 전 도지사에 대한 위력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사에 김 씨의 자유의사를 억압하는 ‘위력행사’에 대해선 부정하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사건의 유무죄를 가를 유일한 증거인 김 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안희정 측 주장에
    항소심 재판부 “피해자를 정형화한 편협한 관점” 비판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 김지은 씨 진술의 일관성과 신빙성을 인정한 반면, 안 전 지사 측의 진술에 대해선 “피해자를 정형화한 편협한 관점”이라고 배척했다. 김 씨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주장을 근거로 무죄를 주장해온 안 전 지사를 비판한 것이다.

    그간 안 전 지사 측은 “김지은 씨가 피해를 당한 이후 도저히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을 했다”며 김 씨 진술에 대한 신빙성 훼손에 집중해왔다. 예컨대 피해를 당한 다음날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식당을 알아보는 등 정상적인 업무를 한 것이다. 실제로 1심 재판부는 이러한 안 전 지사 측의 주장을 수용해 무죄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수행비서로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피해자의 모습이 실제 간음 당한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면서 “피해자의 성격이나 구체적 상황에 따라 대처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안 전 지사 측의 주장을 “정형화한 피해자라는 편협한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직접적인 근거가 됐던 김 씨 진술에 대한 신빙성 문제와 관련해서도, 항소심 재판부는 “김 씨의 진술은 일관성 있고, 비합리적이거나 모순이 없다. 자기한테 다소 불리할 것도 상세하고 과장되게 진술하지 않았다. 진술 신빙성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또한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사소한 부분에서 다소 일관성이 없거나 최초 진술이 다소 불명확하게 바뀌었다 해도 그 진정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짚었다.

    재판부는 오히려 “동의하에 한 성관계”라는 안 전 지사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대표적으로 상황이 발생한 이후 안 전 지사가 김 씨에게 지속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한 것을 김 씨의 의사에 반해 간음을 한 근거로 봤다.

    1심 이후 쟁점이었던 ‘위력 행사 여부’도 인정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안 전 지사에게 위력이 있었다고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업무상 위력’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유형적 위력’일 필요가 없다며, 안 전 지사의 사회적 지위나 권세 자체가 비서 신분인 김 씨에겐 충분한 ‘무형적 위력’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사건 당시 현직 도지사이고 피해자 징계권한을 가진 인사권자”라며 “피해자는 근접거리에서 그를 수행하면서 안 전 지사를 절대권력이나 미래권력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수행비서로서 한 업무내용과 강도 역시 상시적으로 심기를 살피고 배려했던 것에 비춰보면 안희정 전 지사의 지위나 권세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재판의 쟁점이었던 위력 행사 여부에 관해서도 항소심 재판부는 범행 당시 위력이 행사됐다고 판단했다. 1심은 “위력을 행사해 간음에 이르렀다는 직접적이고 유일한 증거라 할 수 있는 피해자 진술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정황이 다수 엿보인다”고 판단한 바 있다.

    서울 역삼동 호텔에서 성폭력을 한 혐의와 관련해 “안 전 지사는 그날 해당 호텔에 투숙하게 된 경위나 성관계 경위 등 진술을 계속 번복했다”며 안 전 지사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범행에 이른 경위나 범행 직전, 직후 태도를 보면 안 전 지사는 피해자를 상하관계에서 인식하고 이를 이용해 간음했다고 보인다”며 “위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안희정 측 “상식에 맞지 않는 판결…양형도 과다”
    김지은 “마녀로 살았던 고통스러운 시간과 작별, 성폭력 피해자에게 연대를”

    김 씨는 선고가 나온 후 입장문을 내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판단해주신 재판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면서 “화형대에 올려져 불길 속 마녀로 살아야했던 고통스러운 지난 시간과의 작별”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제 진실을 어떻게 밝혀야할지, 어떻게 거짓과 싸워 이겨야 할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더 고민하려 한다”며 “그리고 제가 받은 도움을, 힘겹게 홀로 증명해내야 하는 수많은 피해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말하였으나 외면당했던,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저의 재판을 지켜보았던 성폭력 피해자들께 미약하지만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안 전 지사 측은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며 안 전 지사와 상의해 상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안 전 지사 측은 항소심 판결 직후 기자들과 만나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당하지 않다”, “전체 맥락이 아니라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만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양형 자체도 너무 과다하다”고도 했다.

    2심 재판 후 공대위 기자회견 모습. 박스 안은 안희정 전 지사

    여성·시민사회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결과”,
    사회전반의 성인식 변화 촉구

    158개 여성·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선고 직후 서울고등법원 동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입법 취지를 반영한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결과”라고 유죄 선고에 환영을 표했다.

    공대위는 “위력에 대해 좁게 해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판단기준으로 처벌의 공백이 만연하던 ‘우월적 지위’, ‘업무상 위력’ ‘피감독자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그 특성을 적확히 파악해 판단한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사법부가 오늘의 의미 있는 판결을 기억하여 최근 드러나고 있는 체육계 성폭력 등 여타 성폭력 사건들에서 사법의 본령을 더욱 분명히 지켜나갈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의 선고결과가 3심에서도 당연히 유지되어 자신의 지위, 권세, 업무상 위력을 이용하여 성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공대위는 “피해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언론을 통해서 피해를 고발하지 않아도 법적,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변화해야 한다”며, 사회 전반의 성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대위는 “우리는 사법부의 역할만으로 지독한 가해자 중심 사회에서, 위력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며 “피해자를 꽃뱀으로, 거짓말쟁이로 모는 부당하고 차별적인 잔혹한 공동체는 더 이상 안 된다”고 짚었다.

    이들은 “직장이라는 공적 장소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중요 지위를 누가 독점하고 있는지, 비정규직 내 성별비율, 성별임금격차 등 성별이 곧 차별과 취약함이 되는 현실에서 따로 불러내기, 요구하기, 불이익주기, 압력 넣기, 괴롭히기가 얼마나 의도된 일상적 차별이자 폭력일 수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변화할 수 없다”며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가해자 중심 사회, 위력에 사로잡힌 구조와 문화에 대해 질문하고 ‘미투’에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의당 “순백의 피해자라는 ‘환상’ 깨부수는 계기돼야”

    정치권도 안 전 지사에 대한 유죄 판결에 일제히 환영 논평을 내고 1심 재판부의 자성을 촉구했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지연된 정의의 실현”이라고 평했다.

    최 대변인은 1심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2차 가해에 대해 비판하며 “‘정상적인 성폭력 피해자’의 행동을 특정하며 피해자의 진술의 무게를 깎아내리는 등 피해자 인권을 침해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하며 “온갖 음해에 시달려 마음 고생이 심했을 김지은씨께 위로를 보낸다”고 밝혔다.

    최 대변인은 “오늘 판결로 대한민국 법원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환상의 틀을 깨부숴야 한다”며 “적어도 대한민국 사법부가 피해자에게 왜 피해자답지 못했냐고 힐난하며 2차 가해에 앞장서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사회 또한 피해자에 보내는 시선에 대해 고민해야 할 차례”라며 “피해자다움을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미투운동은 성폭력과 피해자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위선과 폐습을 바꿔나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영석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도 “이제라도 안 전 지사의 2심 재판에서 ‘위력의 존재감’을 인정하고 유죄선고를 내린 것을 당연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 수석대변인은 “이번 판결로 인해 더 이상 피해자가 숨어서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침묵의 카르텔을 깰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되고 권력형 성범죄라는 낡은 악습을 우리 사회에서 뿌리 뽑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삼화 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은 “안희정 전 지사는 즉각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법원의 판결을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박주현 민주평화당 수석대변인은 “이번 판결로 우리사회에 만연했던 상폭행과 성추행의 그릇된 문화가 일소되고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논평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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