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화는 아파트 장식품이 아니라 무기다"
        2006년 06월 12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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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피해 아버지 뒤에 잔뜩 웅크리고 숨은 열두살 팔레스타인 소년의 두 눈에 비친 극도의 공포심. 이라크에, 아프가니스탄에 연일 쏟아지는 미군의 폭탄. 그리고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희생자의 시신들….

    21세기 지구촌에서 목격되고 있는 이 서글픈 광경들을 만약 피카소가 봤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20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비극적인 그림이라 불리고 있는 <게르니카>(1937년 작)의 작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라면 전쟁을 양산하는 광기어린 비이성을 통렬하게 꾸짖고 전세계 민중들에게 반전평화 투쟁을 선동할 역작을 다시 한 번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과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

    이렇게 선언했던 피카소이기에, 1973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30년 동안 프랑스공산당의 당원이었던 피카소이기에 이런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르니카 폭격의 잔혹함 벽화로 그려

    1936년 인민전선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프랑코 장군 중심의 반란군이 벌인 스페인내전은 사실상 유럽사회에서 파시즘의 득세를 예견케 하는 징조였다.

    당시 스페인 노동자들은 인민전선 정부를 지키기 위해 시민군을 결성해 프랑코 반란군에 맞섰고 유럽 각지의 사회주의자들은 시민군에 결합하기 위해 스페인 국경을 넘었다.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 화가로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며 전세계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피카소는 평소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왔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출범하고 피카소를 프라도 박물관의 관장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이 직책을 즉각 수락했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 첫 발을 내딛은 이후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피카소는 조국 스페인에서 위협받고 있는 민중의 자유를 옹호하며 <프랑코의 꿈과 거짓말> 등을 통해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작품활동을 펼쳤다.

    1937년 프랑코파를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한 것을 소재로 피카소는 프랑스 정부 주최의 전시회에서 폭탄에 놀라 부릅뜬 눈동자와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벽화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 게르니카(1937년 작)

    <게르니카>를 그릴 때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현재 내가 그리고 있는, 장차 <게르니카>라 불리게 될 이 작품과 최근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 나는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피바다 속으로 몰아넣었던 군부정치에 대한 증오를 명백히 표현했다."

    <게르니카>뿐 아니라 많은 작품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적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며 대항했던 피카소는 파시스트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시절 어느날 나치 장교가 그의 집을 수색하러 와서 <게르니카>의 사진을 보고 피카소에게 "이것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 피카소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오, 바로 당신들이오!"

    "공산당 가입은 내 인생의 논리적인 귀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투사들과 교유하던 피카소는 독일군이 물러간 1944년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는 뉴욕에서 발간되는 <신대중(New Masses)>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산당에 가입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건 내 인생과 작품 전반의 논리적인 귀결입니다. 나는 지금껏 유배상태였지만 이제 더이상은 아닙니다. 내 조국 스페인에서처럼 프랑스에서, 소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용맹하기 때문에 나는 공산당원이 된 것입니다. 스페인이 나를 다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때까지 프랑스공산당은 나의 조국입니다. 그리고 난 당 안에서 위대한 과학자와 시인들, 그리고 지난 8월에 내가 본 파리 투사들의 그 아름다운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내 형제들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1944년 8월 해방을 위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파리 중심부에 살고 있던 피카소는 목숨을 걸고 파시즘과 맞서 싸웠던 파리의 사회주의자들과 물리학자 폴 랑주뱅, 시인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을 비롯한 당대의 지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다.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1944년 10월 5일자 1면에 파블로 피카소의 입당 소식을 전하자 이 소식은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1900년대 초 그의 나이 20대 때부터 전세계적인 명성을 떨쳐온 당대 최고의 화가 피카소가 당시 63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단지 지나가는 일 정도로 폄하하거나 그의 작품활동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실제 많은 미술평론가들이 공산당 가입 후 피카소의 작품이 공산당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피카소는 1973년 9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 30년 동안 프랑스공산당에의 공식행사에 참가하는 한편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며 열성적인 당원으로 활동했다. 물론 프랑스공산당이 그의 작품활동에 이의를 제기하곤 했지만 그는 끝까지 충직한 당원으로 남아 있었다.

       
    ▲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작)

    1951년 조국 스페인에서 벌어졌던 내전을 상기시키는 한국전쟁의 참혹한 소식을 접하고 <한국에서의 학살>을 통해 다시 한번 전쟁을 고발했던 피카소는 노년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 무쟝의 별장에서 숨을 거뒀다.

    공산당에 가입하기 전부터 작품을 통한 동참과 "정신적인 가입"을 했던 파블로 피카소. "단 한번도 그림을 단순한 장식이나 심심풀이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던 그는 "경악스러운 억압의 세월 속에서 예술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성 전체로써 투쟁해야 함"을 깨달은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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