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당군 기세를 올리다
    [국공내전⑪] 내전 초반의 주도권
        2019년 01월 31일 11: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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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쑤위의 내선작전,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다”

    연극 ‘백발의 여인’

    어느 마을에 양바이라오(楊白勞)라는 소작인이 살았다. 그에게 희아(喜兒)라는 예쁜 딸이 있었다. 희아는 한마을에 사는 따춘(大春)이라는 청년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지주 황스런(黄世仁)이 희아를 보고 흑심을 품었다. 소작인이 지주에게 곡식을 빌려 먹었으나 이자가 너무 비싸 갚을 길이 없었다. 황스런(黄世仁)은 원금과 이자를 한꺼번에 갚으라고 핍박하다 희아를 빚 대신 데려가겠다고 했다. 딸을 빼앗긴 양바이라오는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섣달 그믐날 밤 그는 양잿물을 마시고 죽었다. 악독한 지주는 정월 초하루 희아를 집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지주의 첩이 되어 농락을 당했다. 그 뒤 싫증을 내고 방치하자 큰 마누라가 때리고 학대했다. 희아는 황스런의 집에서 노예처럼 처량한 세월을 보냈다.

    따춘이 희아를 구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분에 못 이겨 홍군에 입대하여 병사가 되었다. 그 후 희아도 견딜 수 없어 도망쳤다. 황스런이 수하를 보내 잡으려 했으나 희아는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가장해서 화를 면했다. 그 후 희아는 산신묘에 숨어 제삿밥을 훔쳐 먹으며 연명했다. 그러는 동안 희아의 머리는 모두 백발이 되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귀신이라 여기며 무서워했다.

    2년 뒤 따춘이 홍군 부대원들과 함께 고향으로 왔다. 그는 마을에서 소작료와 이자를 줄이는 운동을 했다. 그리고 요사스런 귀신이 있다는 지주의 유언비어를 깨뜨리려고 보름날 산신묘에 왔다. 따춘과 부대원들이 산신묘에서 백발귀신을 잡고 보니 희아가 아닌가? 따춘의 부대원들은 희아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 매우 동정했다. 모두 마을에 들어가 황스런과 큰마누라를 잡아 죽이고 집과 재산을 모두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희아와 따춘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백발이 되었던 머리카락도 점점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이 연극은 일제 말기부터 국공내전 당시 인민해방군 부대에서 공연하던 ‘백발의 여인이다.’ 나중에 영화나 가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이 연극을 공연하면 관람하던 장교와 병사들이 모두 분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극의 상황이 현실이었고 바로 자신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당하던 일이었다.

    아래 밑줄 친 곳이 따퉁

    산시(山西)북부와 따퉁(大同)의 싸움

    중국에 우리말로 산시성이라 부르는 성이 두 곳이 있다. 산시성(山西省)과 산시성(陝西省)인데 편의상 산시성(陝西省)을 섬서성으로 부르고자 한다. 산시성은 허베이성 왼쪽에 있으며 그 왼쪽에 섬서성이 있다. 산시성의 성도는 타이위안(太原)이고 섬서성의 성도는 시안(西安)이다. 항전 시기 산시성은 국공합작이 가장 긴밀했던 곳으로 산시군벌 옌시산과 팔로군이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핑싱관과 옌먼관에서 옌시산 군과 홍군은 함께 싸워 이겼으며 산시성 안의 타이항산은 팔로군의 항일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타이위안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옌시산군이 궁벽한 이촨으로 밀려난 뒤 상황이 달라졌다. 공산당이 산시성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며 세력 확대에 나선 것이다.

    일본군은 2차 대전 후기에 베트남이나 버마 전선에서 미·영군과 싸워야 했으며 태평양에서는 미군과 싸웠다. 중국에서 일본군은 대도시나 교통선에 주둔하며 지킬 뿐 군사행동을 일으키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근거지 건설과 확대를 장기로 하는 공산당이 항일 근거지와 해방구를 만들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옌시산은 공산당이 차지한 해방구를 되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공산당이 순순히 넘겨줄 리 없으니 한바탕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류보청이 상당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소강상태였으나 산시성에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전선으로 떠나는 해방군의 모습

    옌시산, 푸쭤이 부대가 장자커우, 지닝 등 성진을 점령하자 해방군 진쑤이 군구 사령원 허룽은 저우스디(周士弟)를 사령원으로 허빙옌贺丙炎을 부사령원으로 임명하고 4개 여단 1만 5천 병력으로 진베이(晉北) 야전사령부를 결성했다. 1946년 6월 16일에서 8월 11일까지 58일간의 산시성 북부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해방군은 일거에 쒀현(朔縣), 산인(山陰) 등 8개 현성을 공격 점령하고 국민정부군 8,600여명을 섬멸했다. 해방군은 7월 중순에 신저우(欣州)에 진출했다. 이때 허룽 사령은 산시성 북부 전투 승리를 축하하고자 ‘7월 극단’을 보내 ‘백발의 여인’을 공연하게 하였다. 부대원들은 이 연극을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다짐하고 가난한 이들의 한을 풀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은 목소리 높여 ‘우리는 모두 쭈더의 야전병단이다.’를 불렀다.

    연극이 끝난 뒤 부대는 남쪽으로 전진하여 텐춘(田村)과 펀양링(汾陽岭), 싱자산(邢家山)을 점령하고 타이위안에서 증원하러 온 국민당군 1,500여명을 섬멸했다. 승세를 탄 해방군은 신현성을 포위하고 보름 동안 맹공을 펼쳤다. 그러나 화력이 부족하여 견고한 방어를 펼친 성을 깨뜨리기 힘들었다. 이때 진베이 야전사령부는 군구로부터 따퉁에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허룽은 8월 15일 진베이 야전군에게 후퇴하여 휴식과 부대 정돈을 하라고 명령했다. 힘을 모아 따퉁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50일동안 해방군은 소도시 9곳을 잇따라 점령하고 국민정부군 옌시산 부대 8,000여명을 섬멸했다. 따퉁과 타이위안 사이의 연결을 끊었으며 신현 북부의 통푸철로(同浦鐵路)(1)를 장악했다. 따퉁의 국군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따퉁의 싸움

    따퉁은 산시성 제2의 도시이다. 유명한 석탄 산지이고 핑쑤이와 통푸철도를 잇는 곳이며 산시성과 허베이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예로부터 병가의 전략적 요지로 꼽혀왔다. 당시에는 진차지 군구(산시,차하르,허베이성)와 진쑤이(산시, 쑤이위안성) 군구 한복판에 있어 공산당으로서는 반드시 점령하고 싶은 곳이었다. 따퉁을 손에 넣으면 두 해방구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중공 중앙위원회는 진차지 군구에 3로와 네 성을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은 마오쩌둥이 입안한 ‘3로 4성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3로는 핑한로(平漢路: 베이핑-한커우), 정타이로(正太路: 스쟈좡-타이위안), 통푸로이고 4성은 바오딩(保定), 스쟈좡(石家庄), 타이위안, 따퉁이었다. 그 곳들을 모두 빼앗거나 장악하여 북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것이었다. 공격적인 작전계획이었으며 장쑤 중부 전투에서 쑤위가 이의를 제기하여 내선작전으로 바꾸기 전까지 외선작전과 맥락을 같이하는 계획이었다.

    어쨌든 북부전선에서 해방군은 초기의 승세를 타서 중앙의 명령을 그대로 집행하였다. 진쑤이 군구와 진차지 군구 부대들은 산시북부에서 싸움을 시작하여 10개 현성을 점령, 따퉁을 고립시켰다. 허룽, 네룽전, 뤄루이칭(羅瑞卿), 장종쉰(張宗遜) 등 두 군구 수뇌들은 타퉁전선 지휘부를 구성했으며 장종쉰을 사령원, 뤄루이칭을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해방군 공격부대 병력은 모두 10만명이었는데 국민정부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하였다. 해방군은 공격군을 3로로 나누어 역할을 분담하였다. 일부 병력은 따퉁 공격에 나서고 또 다른 병력은 따퉁 외곽인 잉현(應縣)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따퉁공격에 참전하게 하였다. 마지막 일부는 푸쭤이 부대의 지원군을 차단, 공격하기로 하였다. 따퉁 공격 부대들과 지원군 공격부대 모두 국민 정부군보다 우세하여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진차지 군구, 진쑤이 군구, 쑤이멍(綏蒙: 쑤이이원성과 내몽골) 군구부대들이 혼합 편성되어 행동통일에 문제가 있었다.

    산시 북부전투에서 승리한 해방군은 기세를 몰아 따퉁을 공격했다. 따퉁을 수비하는 국민당군은 모두 1만 9천명이었다. 동북에서 이동해온 마덴산(馬占山) 휘하 기병 2개 사단과 포병, 특종병, 보안종대 등으로 편성되었으며 옌시산 휘하 8집단군 부총사령 추시춘(楚溪春)이 총지휘를 맡았다. 따퉁은 성벽이 튼튼하고 지세가 험준하여 지키기에는 쉽고 공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해방군은 우세한 병력과 승세를 믿고 함락을 자신했다. 푸쭤이가 지원군을 보낼 것이 분명하므로 그에 대한 대비도 하였다. 쭈어즈산(卓資山)을 주진지로 삼아 수비하게 하고 지닝(集寧)에도 수비군을 배치한 것이다. 지닝은 따퉁 북쪽에 자리잡아 구이쑤이에 있는 푸쭤이가 따퉁에 구원군을 보낼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해방군은 1946년 7월 31일 공격을 개시했다. 먼저 따퉁 외곽진지를 공격하여 30시간이 넘는 격전 끝에 국군 2,000여명을 섬멸했다. 따퉁성 아래에 접근하자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수비군 사령관 추시춘은 옌시산에게 잇따라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옌시산이 있는 타이위안에서 따퉁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뿐만 아니라 통푸철로가 차단되어 그야말로 “먼 곳의 물을 길어다 불을 꺼야 하는 형국”이었다. 장제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국군이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 움직일 병력이 없었다. 유일하게 구이쑤이(후허하오터의 옛이름)에 있는 푸쭤이 부대가 구원군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푸쭤이는 따퉁이 자기 관할이 아니어서 아직 관망만 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푸쭤이 부대를 움직이기 위해 이익으로 꾀는 방법을 썼다. 따퉁을 구원하면 푸쭤이의 관할로 배속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돈과 이권으로 군벌들을 회유하는 것은 장제스가 오랫동안 즐겨 써왔던 방법이었다. 따퉁은 석탄도시이고 산시와 허베이를 잇는 교통의 요지다. 내몽골의 척박한 불모지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푸쭤이에게는 꿈에서도 바랄 일이었다.

    푸쭤이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는 전술’(圍衛求趙)(2)을 택하다.

    푸쭤이는 장제스의 명령을 받은 뒤 비밀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참모장 리스지에(李世杰)와 동치우(董其武), 쑨란펑(孫蘭峰), 궈징윈(郭景云) 등 심복 부하들과 함께 작전을 숙의하고 모래 지형 위에서 도상연습을 진행했다. 그는 이번 결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여러 대책을 강구하였다. 장교들이 집에 가는 것을 엄금하고 영내에서 숙식하게 하였다. 기밀 유지를 위해 장제스 휘하 국민당군이 공용으로 쓰던 비밀번호도 쓰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군이 푸쭤이 부대의 동향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푸쭤이

    국민당 부대 가운데 푸쭤이 부대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푸쭤이는 과거 대일 항전시기에 홍군과 접촉할 때부터 홍군의 기풍을 자기 부대에 심었다. 그의 부대원들은 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야전을 잘했으며, 접근전과 육박전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푸쭤이 부대는 옛 군벌부대의 습관도 가지고 있었다.

    회의 뒤 푸쭤이는 참모장 리스제를 장제스가 있는 루산(爐山)(3)에 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푸 장군은 위나라를 포위해서 조나라를 구하려는 것입니다.” “좋다. 좋은 계책이다.” 리스제가 설명하자 장제스는 크게 만족해 하였다. 리스제는 계속 설명했다. “구원 부대를 삼로로 나누어 출발시킵니다. 북로의 부대는 타오린(陶林)에서 지닝으로 진격하게 하고 남로는 구이쑤이를 나와 량청(涼城)을 공격합니다. 중로의 부대는 구이쑤이에서 쭈어즈로 가서 공격합니다. 삼로의 병력 중 중로가 가장 정예이고 양익은 약합니다. 양익을 의병(가짜 주력)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쭤즈산을 얻고 지닝을 포위하면 따퉁의 적은 반드시 병력을 나누어 북쪽을 지원해야 합니다. 푸 장군 부대가 쭈어즈를 공격하고 아군이 증원되면 따퉁의 어려움이 반드시 풀릴 것입니다. 그 뒤 푸 장군 부대가 동쪽으로 나가 장자커우를 직접 압박할 것입니다.” “좋구나. 푸 장군의 전략이 참으로 고명하다.”장제스가 감탄했다.

    푸쭤이는 위급한 따퉁 대신 그 북쪽에 있는 지닝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지닝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량청과 펑진(豊鎭)을 찌르면 해방군이 수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본래 해방군은 홍군 시절부터 유격전이나 운동전에 익숙하였다. 적을 포위한 다음 구원을 오는 적을 이동 중에 공격하는 전술을 예사로 썼다. 접근전과 육박전에 강하고 야전에 강점이 있는 해방군은 기습과 포위, 분할 등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섬멸하곤 하였다.

    그런데 푸쭤이는 해방군을 수비하게 한 뒤 공격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것이었다. 만약 푸쭤이군이 지닝을 함락하고 동남쪽으로 진출하면 따퉁을 포위하고 있는 해방군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동쪽 샹이(向儀), 장베이(張北)로 출병하면 해방군 진차지 군구 수뇌부가 있는 장자커우(張家口)가 위협을 받게 된다. 이렇게 지닝을 공격하여 따퉁의 포위를 풀고자 하는 푸쭤이의 전략은 병력이 적은 그로서는 득의의 기책이었다.

    해방군, 지닝 구원에 나서다

    장제스에게 설명한 대로 푸쭤이는 주력으로 지닝을 공격했다. 마오쩌둥이 지닝을 특히 중시했기 때문에 해방군은 전력으로 돌아와 구원에 나섰다. 1946년 9월, 푸쭤이 부대가 쭈어즈산을 점령한 뒤 네룽전, 허룽은 지닝 수비전략을 세우고 군사위원회에 보고했다. 마오쩌둥은 “부대배치는 좋다. 실정에 맞게 처리하라. 지닝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면 기율대로 집행할 것이다.”하고 답변했다.

    푸쭤이군이 출병을 시작했을 때 따퉁의 해방군은 전력을 다해 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푸쭤이가 3만 2천명의 구원병을 보내 갑자기 지닝을 공격한 것이다. 삼로의 푸쭤이군은 먼저 쭈어즈산을 공격하였다. 쭈어즈산은 지닝 수비의 요지였다. 해방군이 급히 방어 배치를 하고 수비했으나 푸쭤이 부대의 공격이 맹렬했다. 해방군 지휘부는 쭤즈산의 해방군에게 3일간 고수하면 지원병을 보내겠다고 통보하며 독려하였다. 국군은 강력한 포격의 엄호 속에 쭈어즈산을 남쪽과 북쪽으로 우회하여 포위했다. 흡사 해방군이 운동 포위전을 하는 것 같았다. 해방군은 완전히 포위될 것을 두려워하여 포위망이 열린 동남쪽으로 후퇴했다. 3일간 고수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8시간을 버틴 것에 불과했다.

    부대를 사열하는 해방군 따퉁 원정군 장종쉰 사령원

    해방군 사령관 장종쉰은 당황했다. 증원부대 2개 여단이 급히 오고 있는데 요충지를 잃은 것이다. 해방군은 아직도 적의 주공방향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중앙 군사위는 보고 전문을 통해 푸쭤이군의 가능한 진로를 세 곳으로 예측하였다. 첫째, 쭈어즈산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는다. 둘째, 량청으로 밀고 들어간다. 량청과 펑진은 적의 주요한 증원로일 것이다. 셋째, 지닝을 공격한다. 결국 해방군은 량청 부근 마이후투(麥胡圖)에 병력을 배치하여 적의 이동방향을 살피기로 하였다. 다른 전장과 비교하면 해방군의 화북에 대한 정보 수집은 형편없었다. 다른 전장에서는 하루이틀 내에 국군의 모든 작전계획을 얻을 수 있었다.

    푸쭤이의 용병

    이런 상황에서 푸쭤이의 주력부대는 핑쑤이 철로 북쪽을 거쳐 비밀리에 동쪽으로 진격했다. 다음날에는 지닝 서북지역에 도착하여 은밀히 집결하였다. 해방군은 9월 8일 저녁에 푸의 부대가 이동한 것을 알고 주력을 지닝으로 돌리기로 하였다. 푸쭤이 군이 ‘위위구조(圍衛求趙)’의 전술을 쓰는 데 비해 해방군은 성을 포위하고 지원 오는 적을 치려는 것이었다. 해방군은 주력을 계속 지닝으로 보냈으며 따퉁성도 여전히 포위한 채 계속 공격하였다. 지닝 수비군과 따퉁에서 돌아간 지원병력이 푸쭤이 부대를 앞뒤에서 협공하면 푸의 부대가 달아날 구멍이 없는 셈이었다.

    9월 12일, 해방군은 지닝에 있는 푸쭤이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때 해방군 사령관인 장종쉰이 실책을 범했다. 푸쭤이군 부대의 궈징윈이 지휘하는 101사단이 강력한 기세로 구원하러 오자 주력을 빼내어 101사단 쪽으로 돌린 것이다. 푸쭤이군 공격부대 둥치우의 부대와 지원하러 온 해방군이 맹렬하게 시가전을 벌였으나 서로 교착하여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지닝성 안의 해방군은 푸쭤이 부대의 맹공에 견디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철수했다. 성을 점령한 둥치우의 부대는 101사단과 호응하여 해방군 지원부대를 협격하려 하였다. 그때 산에 의지하여 수비하던 해방군을 겨냥한 포탄이 100여발이나 산을 넘어가 지원오던 해방군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엉터리 포격이었지만 해방군 지휘부는 푸쭤이의 대부대가 도착한 것으로 오인하여 크게 어지러워졌다. 장종쉰 사령원은 전 부대에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약한 부대에 쫓겨 강한 부대가 후퇴하게 된 것이다.

    해방군이 지닝에서 후퇴하자 푸쭤이는 원군을 즉시 따퉁으로 보냈다. 따퉁의 해방군도 안팎으로 협공을 당하게 되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946년 9월 16일 지닝전투가 끝이 났다. 따퉁과 지닝의 전투는 한달 반 동안 지속되었다. 국민정부군이 따퉁을 방어했으며 지닝과 해방구의 중심도시인 장자커우도 얻었으므로 해방군이 참패한 것이다. 이 패배로 인해 해방군은 여러 불리한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진차지 군구 주변은 물론 서북쪽도 국민정부군이 주도권을 쥐게 되어 후쫑난이 뒤를 걱정하지 않고 옌안에 출병할 수 있게 되었다.

    옌안 방송은 1946년 9월 12일 지닝에서 적을 포위하여 섬멸했다고 방송했지만 옌안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중원돌파 전투는 국군의 의도를 좌절시켰다고 하나 주력을 보존한 것일 뿐 근거지를 내주었다. 쑤위가 장쑤 북부에서 칠전칠첩을 거뒀다고 하여도 국군은 병력 일부를 소모했을 뿐 전체 전황을 좌우할 만한 싸움은 아니었다. 딩타오 전투도 해방군이 선방하여 상황을 교착시킨 것일 뿐 국면을 전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따퉁전투의 패배로 화북쪽 전황은 국민당군이 확실히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푸쭤이는 따퉁 싸움을 이렇게 평가했다. 47년 2월에 그는 “지닝 회전은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었다. 적이 실책을 하지 않았으면 이기기 어려웠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 전투에는 국공 양쪽으로 갈린 형제의 일화도 있다. 지닝 공격의 주장인 국민정부군 안춘산(安春山)이 31사단을 지휘하여 성을 공격하는데 수비군 주력 연대인 진쑤이 군구 27연대장이 안춘산의 넷째 동생인 안즈(安智)였다고 한다. 안즈는 성을 지키지 못해 나중에 파직당하고 학습반에서 조사를 받았다. 친형제가 생사를 걸고 싸운 것이다. 내전에서 볼 수 있는 가슴 아픈 정황이었다.

    지닝 전쟁기념관 조형물

    푸쭤이, 마오저뚱에게 공개전문을 보내다.

    푸쭤이의 승전은 장제스와 국민정부 인사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참모총장인 천정은 따퉁 수비 지휘관인 추시춘을 불러 고위 지휘관들 앞에서 칭찬했다. 추시춘은 1개 사단 병력으로 해방군 수만명의 공격을 견디며 45일간 따퉁을 사수했다. 푸쭤이는 마오쩌둥에게 ‘항복을 권하는 전문’을 보내며 기염을 토했다. 다음은 46년 9월 21일 발표하여 중앙일보에 전재한 공개 전문이다. 일부를 요약하여 게재한다.

    항복을 권하는 전문 (중앙사 차하르, 쑤이위안 9월 20일 전문)

    푸장관 쩌이가 마오쩌둥 선생에게 드립니다. 교훈을 받아들이고 무기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정부에 참가하여 헌정을 촉진시킵시다.

    “옌안의 마오쩌둥 선생, 1945년에 일본이 투항하고 당신들은 대거 쑤이바오(绥包: 쑤이위안과 바오터우)을 공격해 왔습니다. 내전의 첫 총성을 울린 것입니다. 어리석은 저는 당신들이 일시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출동한 줄 알았습니다. 당신들 당의 정책이 절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11월 24일 선생에게 전문을 보내어 솔직하고 간곡하게 호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년간의 비참한 일들은 당신들이 장기간 준비해온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평화회담은 결과가 없었으며 전면 전쟁이 날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따퉁의 일은 정부의 평화적 해결 노력이 모두 절망상태가 된 뒤의 일입니다. 우리 전구의 국군은 부득이 행동에 나서 따퉁을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목적은 따퉁의 포위를 풀려는 것이었으며 2만 군민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무력이 만능이라고 믿으며 17개 여단, 51개 연대 병력을 이동 집결시켜 지닝에서 국군 섬멸을 기도하였습니다. 성 교외의 야전과 참혹한 시가전이 4일 밤낮으로 벌어졌습니다. 결국 당신들은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당신들이 패퇴하기 하루 전, 옌안 방송은 우리 국군이 당신들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패배하였으며 섬멸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날 포위되어 패퇴하고 섬멸당한 것은 국군이 아니고 당신들입니다. 이른바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했다고 자랑하던 허룽과 녜룽전의 부대들입니다. 나는 이것이 군사적인 승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말한대로 우리 전구의 국군은 무기가 가장 열악하고, 병력수도 가장 적으며, 전력도 가장 약합니다. 호전적인 정도가 당신들에 비할 바 아닙니다. 하지만 실패한 것은 오히려 당신들입니다. 이것은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라 인민의지의 승리입니다. 이번 전역에서 당신들은 전장에 최소한 2만명 이상의 시신을 방치해 두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땅에 묻었습니다. 당신들은 패퇴하며 국군의 추격이 무서워 죽어라고 도망쳤습니다. 코와 입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당신들 동료의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비참한 장면입니까? 나는 그들을 누가 죽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도 죄인이고 천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지도를 잘못하여 무력을 과시하며 날뛰고, 나라와 백성에 해를 끼친 것이라면, 바로 당신들이 죽인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밤이 깊어 조용할 때에 당신은 흔이 나야 합니다. 전국 인민들의 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푸쭤이의 전문은 공산당내에서 분개를 불러 일으켰다. 쭈더는 이 전문을 전군에 보내어 읽게 하였다. 해방군 지휘관들을 분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이 전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원한을 갚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맹세한다.” 하지만 커다란 일에는 여러 소문이 있는 법이니 이런 이야기는 그대로 믿을 게 못된다.

    위 전보는 푸쭤이 장군의 비서이며 중공의 오래된 지하당원인 옌유원(閻又文)이 상사의 지시에 따라 썼다고 한다. 푸쭤이는 이 싸움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장제스의 직계가 아니어서 변방을 떠돌았지만 곧 중책을 맡게 되었다. 항일 명장 푸쭤이의 명성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따퉁 전투는 공산당 전사에서 그다지 크게 다루지는 않는다. 내전을 다룬 드라마에서는 아예 소개도 되지 않았다. 공산당에게 그만큼 뼈아픈 패배였던 것이다. 어쨌든 국민정부군은 쓰핑전투의 승리, 중원해방구 점령, 산시와 차하르, 허베이 지역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내전 초반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각주>

    1. 통푸철로(同浦鐵路)는 따퉁에서 타이위안을 거쳐 푸저우진浦州鎭까지 운행하는 철로이다.

    2. 위위구조(圍衛求趙)는 전국시대 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였을 때 제나라 군사인 손빈(孫矉)이 쓴 전술에서 비롯한 고사이다. 구원 요청을 받은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 수도를 포위하여 돌아오는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장군인 방연을 죽였다. 적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외의 곳을 공격하는 전술을 뜻한다.

    3. 루산은 장시성에 있는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산이다. 당시 루산에 장제스의 여름 별장이 있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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