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도와 같은 포퓰리즘
    배경, 그 동질성과 이질성
    [이슈 칼럼] 포퓰리즘(Populism)과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론’①
        2019년 01월 30일 11: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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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노도와 같은 ‘포퓰리즘’
    2.동질성―반신자유주의
    3. 이질성―왜 신케인스주의가 아닌가?
    4. ‘전반적 위기’ 제4단계에 진입한 자본주의
    5. 한국 이론진영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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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도와 같은 ‘포퓰리즘’

    요즘 우리의 귀에 점점 낯설지 않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포퓰리즘’이다. 한국어로는 대개 ‘인민주의’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사실 해묵은 아주 오래된 정치사조에 속한다. 그것의 유래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광장 민주주의’와 인연이 닿는다. 여기서 ‘장군들의 처형’에 관한 유명한 고사가 하나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관례가 있었다. 아테네는 B.C.406년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전투 중 만난 폭풍우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익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아테네 시민들은 광장에서 토론을 거친 끝에 지휘자 6명을 “구원활동에 미흡” 했다는 이유로 처형해 버렸다. 사실 그들은 아테네 함대가 아르기수사이 제도에서 벌어졌던 해전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퇴하여 전쟁 전반기의 승기를 잡는데 공헌하였던 장군들이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유능한 지휘관들을 상실한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지는 운명을 맛보아야 하였다. 이렇듯 ‘포퓰리즘’은 일찍부터 직접 민주주의의 맹점으로 지적되는 ‘중우정치(衆愚政治)’의 대명사로 쓰였다.

    현대사에 들어선 후 포퓰리즘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등장을 야기했던 파시즘과 연관을 맺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남미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부, 또 최근에는 한 때 화제가 되었던 베네스엘라 챠베스의 포퓰리즘을 연상시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포퓰리즘은 과거의 이런 모든 것과도 차이가 있어 보인다.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유럽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명맥만 유지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몇몇 이유로 그들은 조금씩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의 국민전선을 비롯한 유럽의 극우정당들은 유럽 정치계에서는 별반 큰 위협적인 존재들은 아니었다. 당시에 그들의 등장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신문의 가십거리를 장식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이다. 그리하여 2010년을 전후로 하여 포퓰리즘세력은 처음에는 그리스 등 남유럽의 주변부에서 시작하여, 차츰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유럽의 중심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돌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먼저, 작금의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주목받았던 것은 그리스의 ‘시리자’ (SYRIZA, 급진좌파연합)라고 할 수 있다. 시리자는 유로존 회원국인 그리스에서 채무위기가 본격화한 2011년 무렵에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들은 “채무재협상, 유로존 탈퇴” 등의 강령을 내걸고, 마침내는 전통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제치고 집권당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에는 스페인에서 2014년 이 같은 시리자의 성공에 자극 받아 역시 좌파 포퓰리즘 정당인 ‘포데모스’(PODEMOS, “우린 할 수 있다”)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그리스의 시리자처럼 집권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미 몇 차례 선거를 통하여 지지율이 30%에 육박하는 등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지금은 오히려 지지율의 정체와 퇴조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편집자)

    트럼프 연설 모습

    2016년은 포퓰리즘의 확산에 있어 획기적인 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미국에선 기존 정통파와는 다르게 매우 파격적인 정책노선과 개성을 지닌 ‘이단자’ 트럼프가 당선되었고, 영국에선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브블렉시트’ 국민투표가 통과되었다. 이들 대서양 양안의 주요 국가인 미국과 영국은 과거에도 각각 레이건과 대처 정권을 탄생시키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예고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포퓰리즘’ 시대가 열리는 것일까?

    포퓰리즘 정당 또는 정치세력들의 약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의 행보는 더욱 화려하기만 하였는데, 특히 유럽에서의 약진은 실로 눈부시다. 이들은 지역적으로는 남유럽으로부터 점차 서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북유럽으로 동진과 북진을 계속하였다. 네덜란드 극우 ‘자유당’은 2017년 3월 총선에서 제2당으로 부상하였으며, 프랑스의 극우 ‘국민전선’ 마린 르펜은 2017년 4월 대선에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또 독일에선 2017년 9월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이 총선에서 12.7% 득표를 하여 제3당으로 부상하면서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오랜 역사를 지닌 독일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2위를 기록하였다.

    지난해인 2018년 역시도 포퓰리즘 정치세력들의 맹렬한 진군이 계속된 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2018년 3월 치러진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극우 ‘동맹’과 중도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연정이 출범하였다. 이는 2차 대전 종식 후 서유럽에서 탄생한 첫 극우와 중도 포퓰리즘 간의 연합정권으로 평가된다. 헝가리의 4월 총선에서는 강경 우파인 ‘헝가리 시민동맹’과 ‘기독민주국민당’이 연합하여 압승하였다. 같은 동유럽 국가인 슬로베니아의 6월 총선에서도 극우 ‘슬로베니아 민주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복지국가로 유명한 스웨덴에서조차 포퓰리즘 세력은 침묵하지 않았다. 신나치에 뿌리를 둔 극우 ‘스웨덴 민주당’은 9월 9일 총선에서 제3당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전 세계의 이목을 끌어 모았다. 이는 유럽의 포퓰리즘 열풍이 남유럽과 서유럽에 이어 이제 북유럽 복지국가들마저 집어 삼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같은 열풍을 등에 업고 극우 정당들은 이제 범유럽 차원의 연대 움직임까지 보임으로써, 유럽 정치의 극우화에 대한 경고음이 더욱 커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포퓰리즘이 유럽과 북미 대륙을 휩쓸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으로 21세기는 정말 새로운 ‘포퓰리즘’ 시대가 되는 것일까?

    2. 동질성―反신자유주의

    물론 아직까지는 ‘신자유주의’처럼, 포퓰리즘이 일반적 경제 원리로 되어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를 포괄하면서 우리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점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은 특수한 일개 ‘정치사조’로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로 유럽과 북미 대륙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 좀 더 폭을 넓힌다 해도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와 같은 일부 남미 국가들이 포함되는 정도이다.

    이렇듯 아직 포퓰리즘이 유행하는 지역이 제한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필자가 보기엔 지금 시기 포퓰리즘이 유행하기 위해선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어느 정도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달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대중들에게 ‘복지’와 ‘공공투자 증대’와 같은 선심성 공약을 내걸 수 있거나, 최소한 그 같은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쟁점화’ 될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한다.

    다음은,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조류로부터 소외되었거나 피해를 받은 국가이어야 한다. 혹은 전체적으로 보면 비록 수혜국으로 분류될지라도, 그 사회 내부적으로 그 같은 소외 계층이 상당 정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여야만 한다. 미국이나 영국 등과 같이 처음 신자유주의의 ‘수혜국’이었다가 나중에는 ‘피해국’으로 전락한 국가도 포함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동아시아나 중동·아프리카 같은 지역에서 아직 포퓰리즘이 유행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위의 두 가지 조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우는 그간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세계화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수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발전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상당정도 뒤처져 있음으로 인해, 선동적인 정치세력들이 ‘복지’나 ‘공공투자’와 같은 선심적 공약을 내걸기에는 물적 조건이 취약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나 ‘최저임금 인상’ 등을 세계적인 포퓰리즘 조류의 하나로 보는 일부의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작금의 포퓰리즘에 대해 하나의 ‘세계적 현상’으로 주목하여야만 하는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때문이다.

    첫째, 작금의 유행하고 있는 포퓰리즘이 현재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원리와 정책에 대한 반발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복지 주장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특히 쟁점화되고 있는 ‘이민문제’도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포퓰리즘이 지구화시대의 초기인 1990년대나 2000년대 초가 아니라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지금처럼 만연하지는 않았다), 왜 그 이후인 2010년 이후에 만연하게 되었는지를 상당 정도 설명해 준다. 즉 신자유주의 초기나 그것이 한창 발전하고 전성기를 구사하던 무렵에는 아직 그 모순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의 불만 역시도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그리 폭발적이거나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오히려 서구 선진국보다 라틴아메리카 등 일부 개발도상국 쪽이 먼저 반응하였다.

    2008년 하반기 금융위기의 폭발을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전면에 드러나고, 또한 대중의 불만과 고통 역시 경제위기와 비례하여 커짐으로써 포퓰리즘은 점차 현 시기 두드러진 정치사조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작금의 신자유주의 위기가 조속히 수습되지 못하고 장기화 될수록, 포퓰리즘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더 만연하고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둘째, 최근의 포퓰리즘이 지구경제의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포퓰리즘은 처음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위치한 나라들에서 시작된 후, 지금은 그 가장 심장부 국가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그 영향력이 ‘전세계’적이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이미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정한 상태에서, 다시 프랑스에서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이 집권하게 될 경우 유럽연합과 유로존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만약 이 같은 현재의 유럽연합으로 상징되는 경제통합이 과거 동구권처럼 붕괴되고 만다면, 그것이 세계경제에 주는 충격은 어떠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패권국가인 미국에서 보호무역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 정권이 세계경제에 던져주고 있는 충격을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이 같은 복고적 추세가 더 한층 강화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3. 이질성― 왜 신케인스주의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즉, 최근의 포퓰리즘이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그 반발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왜 다시 (신)케인스주의로 복귀하지 않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보면 양자는 대립하는 관계에 있고, 현재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의 ‘산업자본주의’와는 대조되는 ‘금융자본주의’의 논리라고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과거에 전통 자유주의가 시장과 금융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자유주의(즉 ‘신’자유주의)로 부활하였듯이, 국가개입과 산업자본을 중시하는 전통 케인스주의 역시도 ‘신’ 케인스주의로의 부활을 꿈 꿀만 하지 않을까?

    요즘 시중에서 인기를 모으는 <포퓰리즘의 세계화> 저자 존 주디스는 이와 관련한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한다. 즉 오늘날 미국과 서유럽의 포퓰리즘과 제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한 파시스트 운동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파시즘은 팽창주의적 특징을 지녔지만, 지금의 포퓰리스트 운동은 제국주의나 세계주의와는 정반대인 ‘국가주의’적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그녀는 “트럼프 또한 국가주의자다.”라고 주장한다.(<포퓰리즘의 세계화>, p239)

    위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앞서 ‘포퓰리즘’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놓았던 각국 정치현상의 내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최근 포퓰리즘이 유행하는 데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 그 배경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긴 하지만, 나라나 지역에 따라 그 사정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포퓰리즘의 ‘동질성’(즉 反신자유주의)에 주목하였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그 이질성에 주목하도록 하자.

    스페인 포데모스 지지자들의 행진

    우선 포퓰리즘이 가장 유행하고 있는 유럽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최근 포퓰리즘 발단이 되었던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부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들은 대부분 유로존 내 주변부에 속한다. 잘 알다시피 이들 국가들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은 현실화한 국가채무 및 대중들의 빈곤화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들 국가들에서는 포퓰리즘이 좌파적 색체가 강하다. 시리자, 포데모스, 중도 성향이지만 오성운동 등도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이는 국가부채와 좌파적 포퓰리즘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스와 북유럽 국가로 올라가게 되면 쟁점과 주도세력이 달라진다. 이들 국가들은 유로존 내에서도 중심부에 속하는데 우파적 포퓰리즘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선 아직 국가채무 등의 문제가 현실화하지 않았다. 대신 복지삭감에 대한 우려와 같이 주로 ‘예방적 차원’에서 대중의 불안과 불만이 표출된다. 특히 이민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유로존 내 잘나가는 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복지와 경제력이 충실한 덴마크나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 같은 나라들에서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이 이민문제 때문이다. 이들은 ‘이민’과 ‘이슬람’의 위협을 사회적 쟁점으로 집중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미 유권자들 상당수가 이들 문제로 인해 심각한 위협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100만 명의 난민이 유럽으로 몰려들자 이들 국가에서 反난민 정서를 앞세운 극우정당이 급속히 성장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유권자들의 눈에는 기존 정당들이 포퓰리즘 정당들만큼 이민자들에 대해 적극적이고 단호한 대처를 할 수 없다는 인상이 강하게 새겨져 있는 듯하다.

    프랑스 국민전선

    ‘독일을 위한 대안'(AfD) 지지자들의 집회 모습

    이상의 유럽에서의 포퓰리즘은 그 자체 복합적인 성격을 띠지만, 그 본질을 관철하고 있는 것은 반 신자유주의적 정서이다. 왜냐하면 위의 공공부채, 복지삭감, 이민문제 등이 모두 신자유주의 정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즉 유로존 내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재정적자에 대한 제한과 공공복지의 축소 등 신자유주의의 기본원리가 그 역내에선 국경이 철폐된 만큼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관철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민문제’ 역시 이 같은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의 값싼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외부 노동력에 대해 취한 비교적 관대한 개방정책이, 지금에 와선 이 같은 이민문제를 낳게 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선진적인 서유럽 국가들의 노령화와 인구증가의 정체 내지 감소를 해소키 위해 동유럽이나 아프리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 데서 발생한 문제이며,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노동력을 포함한 생산요소의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이동의 요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리하여 유로존 내의 경제가 균일화되기 보다는, 독일과 북유럽의 제조업 강국은 항상적인 ‘수출국가’로 변신하고, 스페인이나 그리스 등 제조업이 취약한 남유럽 국가들은 만성적인 ‘수입국가’로 변신하였다. 경제 이원화의 이 같은 구조화로 인해 ‘채권국-채무국’ 관계가 고착화되어 유로존 내의 국가채무 위기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채권국들은 상대적으로 유로존 통일의 혜택을 입었지만, 그러나 ‘이민’이라는 새로운 난제 앞에서 이들 역시 더 이상 안전지대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중산층은 자신들이 누리는 지금의 사회복지 혜택이 언제 박탈될지 모른다는 강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처럼 유럽은 신자유주의적 역내 통합, 그리고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과 연관되어 각국은 다양한 문제들에 노출되게 되었으며, 다양한 상호 이질적인 유럽 포퓰리즘이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우리는 이로부터 反신자유주의라는 포퓰리즘의 동질성 속에 존재하는 이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과 유럽의 포퓰리즘을 비교할 경우, 포퓰리즘이 갖고 있는 이질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우선 같은 미국 내에서도 ‘버니 샌더스 류’의 좌파 포퓰리즘과 ‘트럼프 류’의 우파가 다르다.

    뉴욕 출신인 버니 샌더스는 상하원 의원 시절 민주당이 신자유주의를 끌어안는 분위기에 굳건하게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나프타와 중국과의 협정, 기업 감세, 사회복지 지출 예산 삭감, 금융 규제 완화 등에 반대했다. 대선 과정에서 샌더스는 국민을 억만장자 계층에 맞서도록 일깨웠는데, 그는 99% 국민과 1% 상류층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요구하였으며, 이후 그것은 ‘월스트리트 점령’을 야기하였다.

    이와 비교할 때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으로부터 소외된 대중들의 불만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였다. 그는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전통적인 나토 동맹국들을 향해 미국의 국방력을 빌려 돈 안 내고 안보문제에 무임승차한다고 호되게 비난하는 한편, 다른 동맹국들에 대해선 나프타 탈퇴와 한미 FTA 재협상 등을 요구하였다. 최근 중국과 유례없는 무역전쟁을 벌리면서,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무역흑자를 얻은 국가들(그들이 전통 우방이든 사회주의국가든)로부터 보통의 평범한 미국인의 일자리를 되찾아 오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주창자이며 패권국가라는 점에서, 미국의 포퓰리즘은 그것이 좌익적이든 우익적이든 상관없이 유럽의 그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기존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최근 커다란 장벽에 부딪침에 따른 새로운 패권전략의 조정과 모색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트럼프라는 인물의 ‘우연적’ 요소가 가미됨으로써 복잡성이 다소 더해졌을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미국의 트럼프처럼 원인을 불문하고 그 결과만 가지고서 대책을 운운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전형적인 특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포퓰리즘을 빌린, 또는 트럼프라는 우연성을 빌린 또 다른 패권주의 정책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도 미국의 우파적 포퓰리즘은 반드시 다른 나라, 심지어는 서유럽 선진국가의 그것과도 구별되어야만 한다, 미국은 그간 자신의 패권적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해왔으며, 자신의 달러 패권을 이용해 전 세계 상품을 상당정도 무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해 왔다. 그 대가로 국내 산업의 공동화라는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소외계층의 불만이 상당 수준에 도달하자 이제 이 모든 것을 외부 탓으로 돌리면서 ‘보호무역’ 정책을 내놓고 무역흑자 국가에 대한 압박에 들어간 것이다. 국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 이미 해외에 생산기지를 구축한 자국 기업들에 대해 다시 국내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지구화의 대세에 역행하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에도 포퓰리스트들에겐 마치 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그들에겐 객관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란 없으며, 정책 간의 유기적 관련성도 필요가 없다.

    패권국가 미국에겐 이 같은 억지가 어느 정도 통할 수는 있다. 이미 자신들의 정통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파산 난 지금, 미국의 정통 지배계급도 어느 정도 이 같은 ‘억지’를 당분간 필요로 할지 모른다. 기존 공화당의 정통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으로는 더 이상의 대안이 없으며, 민주당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미국 내 경제 및 사회적 상황은 날로 심각해지면서 뭔가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다수 대중들의 불만이 이미 그렇게 폭발 직전으로까지 누적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할 때 트럼프라는 ‘우발적’ 인물이 나타나서 다소 변칙적 행보를 보이는 것은, 지배계급에 있어서도 당장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지금 상황에선 한편에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측면에서, 또 대중의 관심을 잠시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우발성은 엄연히 우발성에 불과하다. 그것이 일괄되고 체계적인 정책을 대신할 수는 없으며, 미국의 지배계급은 다시 머지않아 본래의 난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서 있는 현 지점에서, 과연 그들은 무언가 다른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더구나 지금은 제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는 초입부에 있으며, 이로부터 로봇과 인공지능 때문에 사회적 대격변이 예고되고 특히 고용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샌더스의 경우도 사실 오십보백보이다. 비록 그가 ‘좌파’에 속하긴 하지만, 그 역시 진정한 대안을 가졌다기보다는 좌파 쪽의 방향에서 대중들에게 ‘무정부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복지삭감 반대, 중국과의 협정 반대 등 그가 제시하는 제안들은 얼핏 대중들의 입맛에는 맞지만, 지금의 지구화시대에 있어 그 같은 정책들이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만약 그가 집권하였다면 지구상 유일 ‘패권국가’인 미국을 고분고분하고 제 분수를 아는 평범한 자본주의 국가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을까? 과연 달러패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리하여 천문학적인 국내외 부채에 미국이 매몰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세계 곳곳에 구축해 놓은 군사동맹을 자발적으로 해체하고 미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최근의 포퓰리즘은 지역과 국가에 따라 국가부채와 일반 복지문제, 이민문제, 보호무역주의 등 각각의 주요 쟁점이 다르며, 그것을 주도하는 세력 역시 좌파에서 우파까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각국마다 쟁점의 차이, 좌파와 우파의 성격 차이, 특히 대서양 양안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포퓰리즘’이라는 단일한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회의조차 낳게 만든다. 이러한 이질성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포퓰리즘의 외연을 확대시킬 경우, 자칫 지나친 개념의 ‘추상화’와 내용의 ‘공동화’ 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정작 그것이 반영하고자 하는 객관 세계의 참 모습을 놓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퓰리즘의 다양성과 이질성, 그 포괄범위의 광범위함이 보여주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위기의 심각성과 전면성 그리고 그에 따른 절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즉 이미 그 기본모순의 절대적 성숙으로 인해 그 생명력을 다한 생산양식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포퓰리즘 세력이 앞으로 우리의 생각보다 더 오래도록 잔존하고, 지금 추세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그들 세력이 확대되어 간다면 이점은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때문에 그것은 본질상 (신)케인스주의가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며 다시 케인스주의로 복귀할 수 없게끔 만든다. 각국의 다양한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 즉 그것이 만들어 낸 ‘신자유주의 세계화’라 불리는 과정과 그 부정적 결과를 제 측면에서, 그리하여 ‘전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최근 포퓰리즘의 복잡성은 이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객관 현실세계의 복잡성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포퓰리즘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포퓰리즘의 그간 역사를 보면, 그것이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대개는 객관적으로 대단히 복잡할 경우가 많이 있다. 2차 대전 직전의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등장할 무렵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좀 더 일찍이는 미국에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반독점’ 에 대한 요구가 등장할 무렵 역시도 그러하였다.(이 점은 최근 포퓰리즘의 저작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존 주디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잘 소개하였다.) 이 같은 복잡한 상황에 대해 기존 정치세력과 정치제도 틀로써는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이점이야 말로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이다.

    원래 포퓰리즘이 기초하는 것은 이 같은 객관세계의 ‘대혼란’이다. 즉 그것은 일종의 ‘반이성’을 먹고 살며, 본질상 ‘무정부주의’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들은 특정 주제만을 고립시켜서 대안을 제시하며, 이 때문에 그들의 정강에는 총체적 인식과 정책간의 유기적 관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중의 가장 민감하고 아픈 문제를 건드리긴 하지만, 그 대안은 매우 ‘파편적’이다. 이들이 주요하게 이슈화하는 복지, 이민, 국가부채 등의 문제가 모두 그러하다. 지금 일국적 자본주의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에도, 이들은 여전히 ‘복지국가’의 재건을 약속한다. 생산요소의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이동 속에서 얻는 초과이윤의 혜택을 맛보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국경을 폐쇄하여 이민자들의 더 이상의 유입을 막고 자신들만의 동질적 삶이 유지되길 바란다. 또 전혀 가망성 없는 ‘부채탕감’ 협상을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호언장담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들의 대안은 현실성이 없으며, 결국 엄혹한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 곧 좌절하고 만다. 그리스 시리자가 집권하자마자 자신들의 핵심강령인 ‘부채탕감’을 포기하고 유로존 채권국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만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게 보면 현 시기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출발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대립자인 과거의 케인스주의로 복귀할 수 없는 딜레마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어떤 분명한 해결책이나 돌파구가 제시될 수만 있다면, 신자유주의 쪽으로 흡수되든지 아니면 신케인스주의로 정리되든지 간에, 이 같은 무정부적이고 어정쩡한 정치 강령을 가진 세력들은 곧바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왜 이들은 과거 케인스주의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이들이 현재 머뭇거리고 있는 현실 자본주의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해명하는 작업이 당대 포퓰리즘의 연구에 있어 핵심과제라 할 수 있다. <계속>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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