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닉스 비정규지회 장기투쟁 532일째
        2006년 06월 09일 12: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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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2년 5월 12일 대전 유성유스호스텔.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조합원 242명이 한국통신과 합의서를 받아들고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도급업체 취업보장과 민형사상 책임 면제, 노조해산과 위로금이 합의서의 전부였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합의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000년 12월 13일 파업을 시작한 지 517일 만의 일이었다.

    한국통신에서 전화가설과 고장수리, 선로보수를 하던 계약직 노동자 1,490명이 2000년 10월 14일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12월 13일 전국에서 1천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서울로 모여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통신은 전국적으로 8천명에 달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12월 31일부로 계약해지하고 도급업체로 전환했다.

    한국통신 계약직, 517일 정규직화의 꿈을 접고 노조해산

    이 때부터 길거리로 쫓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극한 투쟁이 시작됐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87년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처럼 격렬했다. 영하 20도 노숙농성, 한강대교 고공 시위, 목동전화국 점거농성, 국회 본회의장 농성, 광케이블 고공시위 등 투쟁은 ‘위대’했지만 거대공룡 한국통신과 정권의 탄압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28명이 구속되고 100명이 불구속 기소됐으며 200명이 즉심에 넘겨지고 10억의 손해배상이 떨어졌다.

       
     
    ▲ 2002년 4월 6일 오전 8시 30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조합원 3명이 한강대교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에겐 정규직의 연대가 없었다. 한국통신 정규직노조는 이들을 노조원으로 받지도 않았고, 독자노조를 설립하도록 규약도 개정해주지 않았다. 2000년 12월 19일 정규직노조가 파업을 벌여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할 때 함께 하자고 찾아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야멸차게 외면했다. 홍준표 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위원장은 "만약에 연대파업이 이루어졌다면 위력적인 효과를 나타냈을 것이고 이렇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들은 비정규직 투쟁의 시작을 알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통신 계약직의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의 ‘군불’이 됐다. 현대자동차 울산과 아산, 전주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뒤를 이어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어섰다. 하이닉스, 현대하이스코, KM&I, 기륭전자, KTX여승무원… 투쟁의 불길이 2004년부터 전국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비정규직노조 설립 봇물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든 지 정확히 4년 후인 2004년 10월 22일 하이닉스 매그나칩 하청노동자 260명이 금속노조에 가입해 비정규직 투쟁의 횃불을 다시 올렸다. 회사는 12월 25일 직장폐쇄로 200여명의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았고, 2005년 1월 1일 4개 업체를 폐업해 조합원들을 정리해고했다.

       
     
     

    이 때부터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시작됐다. 35도 불볕더위 집단단식농성, 영하 20도 노숙농성, 15만볼트 송전탑 고공농성, 본사 사장실 점거농성 등 목숨을 건 투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이닉스, 7명 구속 50명 불구속  14억 손해배상

    6월 9일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난 지 532일을 맞았다. 그동안 신재교 지회장을 비롯해 7명이 구속됐고, 50여명이 불구속 기소됐으며 14억원의 손해배상이 떨어졌다.

    전 조합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경찰서와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2∼3번 이상 입원한 조합원들도 30여명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쓰러지지 않고 더욱 단련되어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받아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와 지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속노조는 지난 3월 15일 하이닉스를 포함해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전국에서 2만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연대파업을 벌였다.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는 지난해에만 2차례 연대파업을 벌였고 공장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또 임단협 파업 때마다 하이닉스 공장 앞으로 달려가 집단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싸웠다. 민주노총 대전충북본부도 지역본부 총파업을 벌였다.

    4차례 연대파업, 1인당 1만원 연대기금

    조합원들의 생계도 금속노조와 지역의 조합원들이 책임졌다.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1,500명의 조합원들은 지난 1월부터 1인당 1만원씩 월 1,500만원을 하이닉스 투쟁이 끝날 때까지 지원하고 있다. 또 충북대병원노조와 정식품노조에서도 하이닉스 조합원들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해 조합원들에게 모금을 해 6월부터 월 1천만원을 지원한다.

       
     
     

    "저희는 솔직히 금속노조와 지역에 기대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지만 해나갈 수 있었던 것도 지역과 전국의 금속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한국통신은 안타깝게 끝났지만 우리는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연대의 마음에 대해 조합원들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고 더욱 더 힘차게 싸울 것입니다." 하이닉스 사내하청지회 임헌진 사무장이 말이다.

    6월 5일부터 교섭은 시작됐지만

    지난 6월 5일부터 하이닉스 노사분규 중재위원회가 가동돼 사용자들과 금속노조 사이의 간접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위로금으로 해결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조남덕 사무국장은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계는 우리들이 책임질 것"이라며 "사측이 집단해고를 철회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더 큰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연대하는 정규직이 없었지만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4만 금속노조 조합원과 민주노총 충북지역 조합원들이 있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정규직 노동자들이 헌신적인 연대와 지원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300일을 넘긴 기륭전자도, 200일을 넘긴 KM&I도, 그리고 이제 100일을 넘긴 KTX 여승무원도 정규직의 연대와 지원 속에서 투쟁해나가고 있다. 이들은, 집단해고된 108명 전원이 공장으로 돌아가기로 합의한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 승리의 사례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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