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청년 김남두가 한강다리 간 사연
[역사의 한 페이지]‘괴물’ 자동차, 인력거를 몰아내다
    2019년 01월 28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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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회의 글 “전우경이 피로 사직서 쓴 이유는?”

“이 차는 30마력의 증기차이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이 차를 처음 본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심지어 들고 있던 짐도 내팽개친 채 숨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새로운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주인들만큼이나 놀라 주위의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 들었다.”

영국 화보잡지 [Graphic]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라는 제목의 그림에 붙은 설명이다. ‘한국의 수도에 처음 출현한 자동차의 시위’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그림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했던 알프레드 맨험이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크롬비에가 익살스럽게 그린 것이다.

조선과 자동차의 첫 만남은 이렇게 요란스러운 것이었다. 1883년 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에 가서 전등불을 처음 본 유길준이 “우리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하고, 몇 년 뒤 경복궁에서 처음 전등불이 켜졌을 때 사람들이 이를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당시 조선인들은 괴물 같은 이 신문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흉측하게 생긴 이 쇠붙이 속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가 좌회전할 때는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멈추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만 달린다는 식으로 그 원리를 자기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 새로운 기계 문명과의 첫 만남은 낯섬을 뛰어넘어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진] 영국 화보잡지 [Graphic]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그림으로 한국이 자동차라는 괴물을 처음 만나는 모습을 그린 그렸다. 그야말로 혼비백산이다.

이런 거친 만남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5년 최초의 조선인 운전수가 탄생하게 된다. 윤권이라는 사람이 의친왕 이강의 차인 미국제 오버랜드를 운전함으로써 조선인 운전수 1호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이다. 경성에 있던 이탈리아 영사관의 마부로 고용되어있던 윤권은 마침 그곳에 있던 자동차를 보고 독학으로 운전을 배웠는데, 그 기술로 의친왕 이강의 운전수로 고용되었던 것이다. 윤권은 왕실로부터 고등관 임명장과 금테 두른 운전복을 받아 고등관 행세를 했는데 일개 마부가 고등관이 되었다는 소식이 온 경성에 퍼지면서 ‘출세하려면 운전수가 되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운전수는 요즘으로 치면 비행기 조종사 정도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한국인의 다양한 증언을 모은 힐디 강의 『검은 우산 아래에서』에 실린 김상순(남, 1916년 경기도 출생)의 증언은 당시 운전사에 대한 대중의 생각들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그것이 어차피 사람을 나르는 일이라면 ‘신식 가마꾼’일 뿐이니, 양반들의 입장에서는 천한 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 나는 버스 운전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우리 마을의 신작로는 학교 바로 앞을 지났어요. 거기로 버스가 다니는 모습이 교실에서 보였지요. 어린 눈에 운전수들이 꽤 세련되고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었어요. 열일곱에 소학교를 졸업하고서 곧장 버스 운전수가 되게 허락해달라고 할아버지께 간청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허락하기는커녕 긴 담뱃대로 나를 사정없이 때리며 양반 집안의 손자가 그처럼 천한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일장 훈시를 하셨어요.”

– 힐디 강, 『검은 우산 아래에서』

[사진] 초창기 운전수의 모습으로 왼쪽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뒷좌석 제일 오른쪽)의 운전수이고, 오른쪽은 1913년 조선총독부 고등관 운전수의 모습이다. 폼 나지 않는가? 이런 모습들이 많은 식민지 청년들을 설레게 했던 것이다. (왼쪽사진은 국립 고궁 박물관 소장, 오른쪽은 [카라이프] 사진)

경성자동차학교와 김남두

정읍 청년 김남두도 이런 문명의 이기(利器)를 남들보다 먼저 배우고 싶어 했던 여러 청년들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일제 강점기의 엽서 한 장을 우연히 수집하였다. 특별할 것 없는 엽서였으나 이 엽서에 나오는 ‘경성자동차학교’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엽서에 김남두가 한강 다리에 가서 서너 차례 뛰어내릴 고민을 했다는 대목도 그랬다. 빼곡히 뒷면을 채운 한 장의 엽서로 모든 상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자동차학교에서 공부하던 한 청년의 생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였다.

엽서는 ‘경성 황금정 삼정목 경성자동차학교 김남두’가 ‘전북 정읍역전 연지리 김계순’ 앞으로 보낸 것이다. 엽서를 보낸 날짜는 우체국 소인에 찍힌 숫자를 통해 알 수 있는데, 1923년 7월 16일이었다. 인사말에 ‘극염(極炎)’이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해 여름은 매우 더웠던 것으로 보인다. 각설하고 이 엽서를 통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김남두가 어떤 인물인지, 또 이 엽서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를 하나하나 찾아가 보자.

[사진] 1923년 경성자동차학교에 다니던 김남두가 고향의 김계순에게 보낸 엽서의 앞면이다. (박건호 소장)

엽서 속 김남두를 만나기 위해서는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가 그가 다녔던 자동차학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동차가 새로운 시대의 총아로서 점차 보급되면서 운전수도 그만큼 필요하였다. 이런 운전수 양성을 위해 경성에서도 새롭게 자동차강습소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는데, 때는 3.1운동의 열기로 뜨거웠던 1919년 10월이었다. 1919년 10월 15일 최초의 관인 자동차강습소로 문을 연 것이 ‘경성자동차강습소’인데, 동경에 있던 동경자동차강습소의 분소로 설립된 것이었다. 이 강습소는 경성 황금정 삼정목(오늘날의 서울 을지로 근처)에 설립되었는데, 이 주소는 앞에서 보았던 김남두의 엽서에 적힌 주소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자동차강습소에서는 16세 이상의 학생을 받아 2개월 코스로 학생을 교육하였는데 1개월은 실습, 1개월은 이론 교육으로 되어있었다. 이렇게 두 달이나 배워야했던 것은 오늘과 달리 당시 정비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운전기능뿐만 아니라 자기 차를 수리하는 법도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9년 10월 4일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이 경성자동차강습소의 학생모집 광고가 실린다. 이 광고는 우리나라 첫 자동차학원 광고로 기록되어 있다.

“보시오!! 당당한 경성자동차강습소의 진용!!

경성에 자동차강습소 개설 10월 15일 개시- 학자금은 112원이요, 입학 전에 납부하면 누구라도 입학하여 자동차 운전기술을 배울 수 있소. 이 정도의 학자금은 동경에 유학하는 학자금에 불과하오…..경성자동차강습소가 졸업생에게는 누구를 물론하고 본소가 설비한 연습용 자동차를 무료로 대여하여 운전시험에 응시케 함을 보더라도 본소가 얼마나 생도 본위의 책임 있는 교수를 하는지 명백히 알 것이다. 이제야 전국에 온통 자동차계가 졸음을 깰만한 형세로서 날로 달로 발전해 가는데, 관 안에 든 학문은 실제를 당해서는 결코 후에 무용하나니 장래 자동차계에 웅비하고저 하는 청년은 모름지기 실력위주의 본소에서 배워가지고 현재 각 자가 받은 행복보다 더욱 다대한 행복세계를 창조할 것이다.”

[사진] 경성자동차강습소 개설 광고로 우리나라 첫 자동차학원 광고이다. [매일신보] 1919년 10월 4일자에 실렸다.

이렇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마차와 소달구지가 아니라 곧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시대가 될 것이었다. 광고의 표현대로 ‘전국에 온통 자동차계가 졸음을 깰만한 형세로 날로 달로 발전해’ 갈 것이었고, 이에 ‘장래 자동차계에 웅비’하고자 했던 많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이 꿈을 이루는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여기에는 남자들만이 아니라 젊은 여성들도 있었다. 1919년 전주 출신의 최인선이 23세의 나이로 면허를 얻어 조선 최초의 여성 운전수가 되고, 1920년에는 강화 출신의 이경화가 평양자동차상회에서 여자 운전수로 활약하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운전수가 되어 출세하겠다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1920년 [동아일보]는 경성의 이 열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요사이 자동차의 수효가 날로 늘어 경성에만 이미 2백 대에 가까워졌다. 자연 운전수의 수요도 많아져서 운전수를 양성하는 곳도 생겼다. 자동차강습소의 다수 졸업생은 각처에 취직하는데, 강습소는 지원자를 모두 받지 못할 정도로 넘쳐난다.”

– [동아일보] 1920년 4월 24일자

이렇게 자동차 강습소가 인산인해를 이루자 경성자동차강습소는 건물도 새로 짓고 연습용 차를 늘리고 입학 희망자를 늘렸으나 그것으로도 그 열기를 다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교육 여건은 점점 나빠져 심지어 1927년 4월에는 경성자동차강습소 학생 40여명이 동맹휴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김남두가 정읍에서 상경하여 경성자동차강습소에 입학하게 된 것은 자동차 운전을 배우려는 이런 뜨거운 열기를 배경으로 했을 것이다. 이제 어엿한 경성자동차강습소 학생이 된 김남두가 1923년 7월 어떤 내용의 엽서를 고향의 김계순에게 보내게 되는지 알아볼 차례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일까? 자동차 운전을 배우며 느낀 흥분을 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향에 대한 향수일까? 짧은 엽서 한 장만으로 어떻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알 수 있겠는가? 개연성 있는 추리와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김남두가 이 엽서를 쓰게 된 사정을 구성해보자.

전라도 정읍 청년 김남두가 경성에 도착한 것은 1923년 5월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남두의 포부는 대단했다. 조선 최고의 운전수가 되어 출세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만류하는 부모를 뿌리치고 거의 가출하다시피 경성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두 달 코스를 마치는데 학비는 1919년 개소 당시보다 20원이 오른 132원이었는데, 당시 경성에 쌀 한말 값이 대략 3∼4원 정도, 한 달 하숙비가 15원 정도였으니 지방 출신 김남두가 감당하기에는 무척 비싼 것이었다. 게다가 경성자동차학원이 첫 문을 연 후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몰리면서 교육 여건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 반에 40명을 몰아넣고 고작 한 학생이 차를 몰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10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도 132원이라니 요즘말로 가성비가 무척이나 떨어지는 것이었다. 풍족하지 못했던 남두의 부모가 경성행(京城行)을 만류한 것도 이 비싼 학비 때문이었다.

이리 저리 변통해서 강습비와 첫 한 달 하숙비는 챙겨 왔는데, 역시 우려했던 대로 나머지 한 달 하숙비를 부모가 부쳐주지 못하고 말았다. 그 사정이야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지만, 남두는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객지 경성에서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었다. 하숙집 주인에게 사정하는 것도 한 두 번 벌써 7월 중순이 다 되어간다. 그렇다고 한 달이나 공부를 해 온 마당에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숙집 주인도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던지 아예 대놓고 밥을 더 이상 못주겠다고 화를 내기도하고, 당장 집을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정도의 수모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급기야 며칠 전부터는 하숙집 주인이 매일 강습소로 찾아와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고민하기를 며칠 끝에 남두는 죽는 게 낫겠다 각오하고 한강 철교를 찾았다. 굶주린 배와 상처 난 마음을 경성에서는 그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았다. 혼자서 감당하기 너무 힘들었다.

일렁이는 물결!

계절이 여름이라 그래도 강물이 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두는 차마 뛰어 내리지 못한다. 한강 다리에서 뛰어 내리기를 시도한 지 벌써 서너 차례!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자신의 젊음이 너무 못나 보였다. 윤권 같은, 또 이경화 같은 운전수로 출세하겠다는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공개적으로 수모를 당한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더더욱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한강변에서 펑펑 울다 부은 눈으로 하숙집으로 돌아오기를 몇 차례 끝에 남두는 결심했다. 정읍의 고향 선배 김계순에게 마지막으로 엽서를 보내기로 했다. 고향 선배 김계순은 남두가 친하게 따랐던 형으로 경성자동차강습소를 알려준 것도 그였다. 식비는 경성에서 새로 알게 된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빌려 볼 요량이고, 정읍에 내려갈 여비만이라도 부쳐주길 빌어볼 참이었다. 남두는 눈물을 닦고 펜을 들었다. 이렇게 엽서에 빼곡히 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1923년 경성자동차학교 김남두가 고향의 김계순에게 보낸 엽서의 뒷면이다. 세로로 줄 친 부분에 “한강을 3∼4차례 갔다 차마 그리 못하고 돌아와 눈물로 면(面;얼굴)을 가려(?) 인형(仁兄)께 내 수명을 부탁하오니..”라고 남두가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쓴 내용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일차 상별 이후로 소식이 구조(久阻;오래 막힘)하여 정의(情誼)가 박약하와….극염(極炎)에 그 동안 잘 지내시는지요?….저는 자동차학교 입학 후 금전을 불송(不送)하야 1개월 식비를 주지 못하고 졸업을 맞게 되얏으나 주인이 매일 학교까지 와서 식비 달라 함으로 안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한강을 3∼4차례 갔다 차마 그리 못하고 돌아와 눈물로 면(面;얼굴)을 가려(?) 인형(仁兄)께 내 수명을 부탁하오니 심량(心深)하시고 심량하시와 식비는 우인(友人)에게 빌리고 졸업 후 전북도청으로 면허시험을 보고자하노니 차비 5량(50전)만 구변하여 7월 25일내로 송부하여주시면 면허를 마쳐 형님의 은혜를 갚겠사오니 동생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거저 바라나이다. 차비만 부송하시면 즉시 내려가겠습니다.”

이 엽서에는 당시 김남두의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자살하려고 한강다리를 서너 차례 갔다는 것도 그렇고, 김계순에게 “수명을 부탁”한다느니, “구원” “은혜”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마치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절대적 인물로 그를 대하고 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심량하시고 심량하시와..”처럼 ‘심량’이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했을까? (‘사정 따위를 깊이 헤아려 살핀다’는 뜻으로 쓰는 ‘심량’의 한자는 ‘深諒’인데 남두는 ‘心諒’으로 잘못 쓰고 있다.)

남두가 엽서를 보낸 김계순은 문맥상 친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름에 남두와 같은 돌림자가 없는 것도 그렇고, 인형(仁兄)’이란 표현을 봐도 그렇게 보인다. 보통 ‘인형’은 편지를 쓸 때 친구 사이에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만 엽서에서 김계순을 형님, 자신을 동생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친한 고향 선후배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상황인데도 남두가 고향의 부모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집이 너무 가난해서 애당초 부모한테 손을 벌릴 수 없음을 알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경한 터라 차마 다시 손을 벌리기가 멋쩍었을 수도 있었겠다. 멋있는 운전수의 옷을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꿈꾸었을 정읍 청년 김남두는 이 엽서를 보낸 이후 무사히 고향에 내려갈 수 있었을까? 또 내려가서 시험을 합격해 운전 면허증을 당당하게 따냈을까? 엽서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알 방법은 없지만, 다만 그가 고단한 경성 생활 끝에 운전수로 성공했었기를 바랄 뿐이다.

자동차로 직격탄을 맞은 인력거

남두가 전북도청에서 실시한 면허시험에서 합격해 면허증을 땄다면 그는 대중이 부러워하는 운전수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로서는 중산층 이상의 삶도 살았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운전수는 출세한 직업이었다.

그런데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남두의 눈물은 그래도 새롭게 도래할 자동차시대를 준비하는 눈물이었다면, 다른 한 쪽에서는 사양(斜陽) 산업으로 몰리면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의 눈물도 있었다. 즉 자동차 운전수가 버스나 택시를 몰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지만, 그 한편에는 생계의 어려움에 몰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바로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들은 인력거부(人力車夫) 또는 인력거꾼이라 불렸다.

인력거는 1894년 일본인 하나야마가 일본에서 10대를 수입해서 경성에서 영업을 첫 영업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도시 대중교통의 중요한 축이었다. 물론 경성의 경우 1899년 전차가 개통되면서부터는 그 역할을 일부 나누긴 했지만 그래도 그 지위는 꽤나 든든하였다. 그러나 자동차가 대중교통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인력거는 한순간에 구시대의 낡은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동차는 진정한 괴물이었다.

[사진]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의 모습으로 왼쪽은 일제 강점기(위키백과사전), 오른쪽은 해방 직후 미군정기 사진(서울시립대학교 소장)이다. 대체로 한국에서 인력거는 1890년대 처음 등장해서 해방 직후에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다면 자동차와 경쟁관계에 돌입한 인력거꾼들의 경제적 처지는 어땠을까? 자동차와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될 때인 1920년대 인력거꾼의 수입을 따져 보자.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주인공인 인력거꾼 김 첨지가 친구 치삼에게 하루에 30원을 벌었다고 자랑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날 실제 김 첨지가 번 돈은 정확히 2원 90전이었다. 소설 발표가 1924년이니 이때를 기준으로 이 돈의 가치를 환산해보자. 당시 쌀 한 되 가격이 33.3전이었는데, 한 말 값은 3원 33전이다. 그러니까 김 첨지가 번 돈 2원 90전으로는 쌀 한말도 살 수가 없는 돈이었다. 지금의 쌀 가격을 기준으로 대략 25,000원 정도를 번 셈이다. 이 정도 번 것을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할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면, 평소의 하루 수입은 이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25년 인력거꾼의 평균 한 달 수입이 30원 정도였다. 한 달 30일을 하루도 쉼 없이 일했다고 가정했을 때 하루 평균 1원 정도의 수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 김첨지가 하루에 3원을 벌었으니 그날은 정말로 ‘운수좋은 날’인 것이었다. 인력거꾼의 평균 한 달 수입 30원은 조선 총독부가 빈민을 나누는 기준 소득 30원과 같은 액수이다. 인력거꾼의 경제적 처지가 그만큼 열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수입이나 경제적 처지만이 아니었다. 이 수입이 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이미 교통수단의 교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었고, 이 거대한 물결을 쉽게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나오고 2년 뒤인 1926년 아사히 택시회사가 일본에서 들여온 미터기를 달고 영업을 시작해 운행 거리만큼 요금을 매기는 방식이 본격화됐다. 물론 1921년에 이미 경성택시회사가 세워져 택시 영업이 시작되긴 했으나, 미터기 없이 시간당 대절하는 방식이고 너무 비싸서 극소수의 사람만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시간당 대절 비용이 6원, 경성 시내를 한 바퀴 도는데 3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택시 정도였다면 인력거는 아직은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미터기를 달고 요금을 매기는 오늘날과 같은 택시 영업이 시작된 1926년부터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되었다. 1926년은 대중 운송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이때부터 인력거가 택시와 본격적으로 생존권을 걸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1924년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은 인력거와 인력거꾼에 대한 조사(弔辭)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움직임에 인력거꾼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인력거꾼들은 택시 회사의 영업 허가를 막고자 집단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당시 상황을 전한 신문기사를 보자.

“종로경찰서 관내 인력거꾼 오륙백 명은 임금 인상과 시내에 새로 등장하는 ‘탁시-’에 대한 대책을 토의하기 위한 인력거꾼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조선신문, 1925.6.27.

[사진] 택시 영업을 곧 허가할 것이라는 보도로 경성 시가에 택시가 영업을 하면 인력거 영업자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시대일보] 1925년 6월 24일자이다.

택시 영업에 대한 인력거꾼들의 저항은 전국 곳곳으로 번져 갔다. 흥미로운 것은 [시대일보] 1926년 5월 29일 신문에는 엽서의 주인공 김남두의 고향 정읍에서 일어난 인력거꾼의 파업 소식도 실려 있다.

정읍 인력거꾼 총파업

전북 정읍 인력거친목회에서는 지난 24일에 긴급회의를 연 후 그날 오후 일곱 시부터 대총조(大塚組) 인력거꾼 30명이 돌연 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는데(…….) 수개 월 전부터 역전에 매일 기차 도착할 때 (……)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는 승객이 전혀 없어 (수입이) 하루에 담배 8갑도 못됨으로 (사납금) 50전을 30전으로 감(減)해 달라고 누차 교섭하였으나 절대로 거절할 뿐 아니라 폭언을 발함으로 그와 같이 동맹 파업을 한 것이라고.

– [시대일보] 1926년 5월 29일자

정읍 청년 김남두가 면허를 따서 정읍에서 운전수로 근무했다면, 역전에서 이들 인력거꾼과 치열한 손님 쟁탈전을 벌였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택시 운전수 김남두는 이들 인력거꾼의 생계를 위협한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당시 택시 운전수 김남두는 이 인력거꾼들의 파업을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승자의 득의만만한 여유였을까? 아니면 한강 다리에서 눈물 흘렸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깊은 동정심을 느꼈을까?

이들 자동차와 인력거의 갈등은 비단 조선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중외일보] 1927년 5월 4일자 신문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타이완의 타이베이에서도 인력거꾼의 파업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택시로 인한 인력거꾼의 수입 감소는 사납금이 차이 났던 일본인 인력거꾼과 조선인 인력거꾼의 분규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 인력거꾼은 수입의 30퍼센트 가량을 사납금으로 낸 데 비해, 조선인 인력거꾼은 40퍼센트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도도한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사진관이 결국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동네서점이 인터넷 서점의 파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버스 안내양이 버스카드의 파도를 넘어서지 못했듯이. 인력거는 자동차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런 변화 때문이었는지 20년대 후반이 되면 인력거꾼의 어려운 처지를 보도하는 신문 기사들이 줄지어 실리게 된다. 조선신문 1928년 3월 4일자에는 이런 글이 기사가 실렸다.

“탁시-에 타격받은 수천 인력거꾼의 슬픈 처지.
최근의 경성 시내에는 각처에 값싸고 신속한 탁시-회사가 생기어, 시내에는 어데를 가든지 ‘일원 균일(一圓 均一)’이라는 표어 아래, 날로 그 세력이 번창하여……”

이 신문은 9개월 뒤인 12월 18일자 신문에서 다시 “탁시-시대에 타격받은 인력거꾼의 비애(悲哀)”라는 글을 실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0년대가 끝나고 30년대를 맞는 첫 해, 식민지 조선에서는 기존의 1원 택시 보다 훨씬 저렴한 반원(半圓, 50전) 택시의 등장을 앞두고 술렁거리고 있었다. 1920년대 당시 인력거 요금은 대략 5정보(약 500미터)에 15전, 장거리는 1리(약 4km)에 60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50전짜리 택시요금의 출현은 인력거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매일신보 8월 1일자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자동차 교통계에 대 혼란이 올 듯. 반원택시의 출원으로.

불안 중에 있는 인력거부(人力車夫)들. 인력거부에게는 커다란 위협”

이 날 [매일신보]에는 이 택시 가격 인하 소식에 대한 한 인력거꾼의 소감도 이렇게 실려 있다.

“위의 오십전 균일 택시 출현에 대하야 가장 위협을 느끼는 것은 경성부 내 일천여명의 인력거꾼들이라 하겠는데 이에 대하여 종로 한일조(韓一組) 사무원 김윤주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이것이 실시되는 날이면 인력거는 소용없게 되겠습죠. 오십전짜리 자동차가 생긴다면 누가 인력거를 타겠습니까? 그저 일천명 인력거꾼의 오천여명의 가족의 사활 문제인즉 이에 대하여 다만 당국에 진정이나 하여 볼 수밖에 없습죠.’”

-[매일신보] 1930년 8월 1일자

인력거꾼의 비극은 수입 감소로만 끝나면 좋았을 것이다.

점입가경!

인력거꾼은 도로 위에서 자동차와 가격 경쟁도 벌여야했지만,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빈번한 교통사고와도 맞서야 했다. 20년대 중반 이후 신문에는 교통사고로 죽거나 중상을 입은 인력거꾼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실리고 있었다.

“서대문정서 사상(死傷)의 참극. 자동차 인력거 충돌로”

“자동차에 치여 인력거꾼 중상”

“광화문통에서 충돌 삼중주. 택시와 소형자동차와 인력거”

“자동차와 충돌. 인력거꾼 절명, 욱정가로상의 참극”

어차피 쇠붙이와 충돌하면 지는 것은 사람이니 교통사고가 났다하면 인명피해가 나는 쪽은 주로 인력거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자동차는 진정한 괴물이었다.

[사진] 일제강점기의 자동차와 인력거의 교통사고를 전한 신문 보도들이다. 택시 영업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인력거꾼들에게 교통사고 역시 쉽게 피하기 힘든 산업 재해였다.

2019년 택시 그리고 카풀

1919년 국내 최초로 택시 회사가 설립되고, 1926년 오늘날과 같은 택시 영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인력거를 몰아내기 시작한지 거의 100년이 되었다. 그런데 인력거를 내몬 강자(强者) 택시 운전기사들이 최근 생존권 투쟁에 나서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가 작년 12월 7일 카풀 시범 서비스를 시작하자 택시업계는 여기에 거세게 반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택시 운전기사가 분신 사망하기도 하였다. 그 중 지난 1월 10일 분신 사망한 임모(64)씨는 그의 유서에서 “카카오가 카풀로 택시 기사를 죽이려하고 있다……경제는 다 망그러지고 60대 택시 기사들은 또 어디로 가란 말이냐”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거센 반발에 결국 카카오는 카풀 시범 서비스를 일단 중단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공유 경제는 전 세계 산업의 주류가 될 것이다. ‘우버’와 ‘카카오 카풀’같은 차량 공유사업도 언젠가는 허용되고 일반화될 것이다. 더 나아가 기술적 진보로 자율 주행 차량이 도로를 달리는 시대도 머지않아 올 것이다. 운전기사들의 자리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인력거꾼의 쇠락처럼 이런 변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고, 행형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생존권의 위협을 받는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도 없다. 그 변화가 되돌릴 수 없는 대세라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에는 그들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고, 그들의 삶 역시 다른 누구들의 삶처럼 고유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주 2019년 1월 22일 택시업계와 카카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택시와 플랫폼의 상생 발전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공식 출범하였다. 여기에서 어떤 묘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묘안은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온전히 담아내는 대책이 될 수 있을까? 단순히 택시 회사나 운전기사들의 생존권 보호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을까? 고차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거시적으로는 미래 산업 발달을 보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택시업계의 부단한 혁신을 독려하여 새로운 경쟁력을 갖추게 하면서도, 생존권 위협을 받는 택시 운전기사들의 불안감과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그런 지혜와 대책을 기대해본다.

<사진> 카카오의 카풀 앱 시범 서비스에 택시업계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경향신문 사진)

<참고한 자료>

∙힐디 강, 『검은 우산 아래에서』, 산처럼, 2011

∙[카라이프] 2010.12.15., ‘한국 최초의 관인 자동차운전학원 설립 – 출세하려면 운전수가 되 라’

∙[동아일보] 2017.12.13. 유원모 기자, ‘소설 ‘운수 좋은 날’ 인력거꾼 김첨지는 한달에 얼마 벌었을까‘

∙네이버 블로그 [군산여행, 인력거꾼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sherpasherpa/221415851149)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강남대성학원의 역사강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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