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회찬, 그가 없는 세상
    그의 삶, 실천, 신념은 여전히 현재형
    [책소개] 『노회찬의 진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2019년 01월 26일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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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저녁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노회찬 재단’이 공식 출범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온 고 노회찬 국회의원 관련 2권의 책, <노회찬의 진심>과 <노회찬, 함께 꾸는 꿈>을 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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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의 진심』 – 노회찬 유고산문

    노회찬 (지은이) | 사회평론

    2018년 7월 23일. 한 사람이 멈춰 섰다. 기록적으로 거친 폭염 속에서도 수많은 시민들이, 학생들이 그의 장례식장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는 노회찬이었다. 정치인이었으되,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더 기억되는 사람, 세상은 깊게 애도했다.

    이제 그가 없는 세상, 그의 육성과 성찰이 담긴 단 한 권의 유고산문집 『노회찬의 진심』이 출간됐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었던 그의 뜨겁고 생생한 15년간의 기록이다. 더러 건너뛴 해도 있지만, 그는 피곤에 지쳤을 때도 그의 글을 기다리는 지구당 당원들과 시민들을 위해 열정을 다해 글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은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전체 5부 중 1~4부는 제17대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한 이후, 2004년 7월 14일부터 2018년 7월 23일까지 고(故) 노회찬 의원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진보정의당, 정의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에 올린 ‘난중일기’, 노회찬의 공감로그, 페이스북 글 등을 엮었다.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국회에서, 거리에서, 노동의 현장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언제나 가장 약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그가 남긴 살아 있는 역사이자, 기록이다.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 한평생 분투했던 노회찬 의원의 행적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5부는 2004년부터 201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방송토론, 인터뷰, 트위터 글 등 세간에 큰 공감을 자아내며 회자된 ‘촌철살인 노회찬 어록’을 모았다.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명징하고 통쾌한 비유로, 무엇보다 철저한 자료조사와 사실제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선량함과 따뜻함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속 시원하게 뚫어주고 우리 시대의 핵심을 짚어낸, 그의 잊을 수 없는 말들이다.

    정치활동을 같이한 오랜 동지 두 사람, 유시민과 조승수 전 의원의「추도의 글」두 편도 수록했다. 6쪽에 걸친「노회찬 연보」에는 진보정당 지지자들을 넘어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큰 공감과 지지를 얻은 그의 삶을 총망라한 행보를 담았다.

    노회찬, 가장 뜨거운 시대를 관통한 한 사람

    생사가 갈리는 노동의 현장, 노동과 정치권력·독점자본과의 갈등, 노동자와 일하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 첨예한 지역대립과 정치갈등……. 이제껏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현실’이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1972년 10월 17일 이후 나는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라는 노회찬 의원의 회상대로, 유신독재 치하에서 자란 소년 노회찬은 유신반대 유인물을 뿌릴 정도로 결기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청계천 헌책방으로 달려가 사회과학 서적도 탐독했다. 대학시절에는 용접일을 배워 용접공으로 일했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창립을 주도하는 등 1980년대 후반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그는 합법적 정치세력화를 꿈꾸며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해 한평생 노동자와 농민, 중소상인 등 서민의 편에 함께했다.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현실을 목도할 때마다, 그는 진보정당 운동은 바로 매일매일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들’을 위한 일이며, 이것이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라고 선언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대한민국의 모순, 노동의 현실에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법 개혁을 외치고,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이후 그는 제17대, 제19대, 제20대 등 3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끝까지 민중과 노동의 현장에 기반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통쾌한 언변과 설득력으로 현실정치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정치?경제?법 개혁을 일궈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문제 중 하나로 비정규직 양산 등 고용의 불안정 구조를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인권문제, 국가보안법 폐지, 독도영유권, 파병반대, 용산기지를 둘러싼 한미외교협상 비판, 한반도 평화염원 등 흔들림 없이 진보와 정의의 입장에 섰다.

    매일매일 정직하게 일하고,
    이름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인간존엄과 평등사회를 꿈꾼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 최고의 휴머니스트

    이렇듯 치열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의 삶을 살았지만, 노회찬 의원은 진솔한 인간미, 재치 넘치는 유머감각, 문화예술에 대한 조예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악기 하나는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소신에 따라 첼로를 배웠고, 책을 항상 가까이했으며, 신혼의 아내를 위해 요리솜씨를 뽐내고 싶어 한 남편이기도 했다. 자연을 사랑해 광릉 숲에서 업무보고를 받은 날, ‘가장 좋은 하루를 보냈다’고 기뻐했고 좋은 노래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이라는 국회 청소노동자들의 평도 그의 인품을 수식하는 말이다. 70세 시어머니가 연로해 40년 간 운영한 떡집 문을 닫는 날, 마지막 떡을 주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시어머니와 함께 만든 떡을 두고 간 40대 여성, 강연을 마치고 탄 야간고속버스에서 만난 정년 다 된 고속버스기사, 열정에 넘친 항공기 조종사노조원들, 무더위 속에서 정책을 토론하고 공부하던 20대에서 60대까지의 노점상들, 강연이 끝나자 손을 꼭 잡고 “여든하나인 우리들이 살아생전에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는 그날을 꼭 보게 해달라”고 당부하던 노인…, 그가 만난 사람들은 감동이었고, 힘이었다.

    그는 이렇듯 사람들을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다. 생전 2005년부터 14년간 해마다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해 여성리더, 여성노동자 등에게 장미꽃을 선물했으며, 국회 청소노동자들에겐 ”혹시 잘 안 되면 저희 사무실 같이 씁시다” 권하며 이들을 “국민을 위해 한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라고 응원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난 화물연대 노동자의 응원에 감동했고, 새벽 두 시 반, 함께 고생한 보좌관과 터미널에서 헤어지며 아침부터 다시 시작될 일정을 위해 힘을 냈다.

    신영복 선생을 깊이 존경했고,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라는 글귀를 특히 좋아해 힘들 때 자주 읽었다. 또한 이 유고산문집에는 가족과 지인들, 특히 어머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아프게 배어난다. “내 인생의 첫 눈은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어머니 얼굴의 그 눈! 어머님 건강하세요.”라는 글귀가 잊히지 않는다.

    따스한 인간미만큼이나 그의 유머도 특출했다. 엄중한 국정감사기간에도 “야간근로를 반대하기 때문에 질의하지 않겠다”고 분위기를 눅이거나,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암소갈비 먹던 사람이 불고기 먹으면 그 옆의 굶던 사람은 라면을 먹을 수 있어요”, “50년 된 삼겹살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데 만 명만 평등한 것 아닌가요?”라는 촌철살인 어록에서는 통쾌한 노회찬식 유머와 함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그래서 부당한 현실 앞에 더욱 분노하는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용산참사 영결식 추도사를 하면서 고인들에게 함께 숨진 고 김남훈 경사를 하늘나라에서 만나거든 따뜻하게 안아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역시 무모한 진입명령의 희생자이고 무허가건물 옥탑방에서 기거하던 서민이었습니다.”라는 그의 추도사는 누가 진정한 가해자인지 가려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배웠다. 때로 비판하고 논쟁했으며, 같이 열정을 키웠다. 항상 서민이 고통받는 현장을 직접 찾았기에 그의 말과 글은 절절했고, 현실에 닿아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울러 신간 『노회찬의 진심』에 담긴 그의 글들은 놀랄 만한 현실분석력을 보여준다.

    어려운 법과 제도 문제, 난마처럼 얽힌 경제논리, 국방과 외교의 현안을 탁월한 지성과 통찰력으로 해부해 문제의 본질을 꿰뚫었다. ‘국회의원 의정교재’로도 손색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석과 통찰, 해박함, 치밀한 조사,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고민의 힘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갈등에 대해 그가 던지는 해법과 문제분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권력과 자본의 힘 앞에 무너지고, 의지할 데라곤 없이 맨몸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뇌했던 노회찬. 유쾌한 재담, 치밀한 자료조사와 명쾌한 설득력, 끊임없는 공부와 고민, 현실적 해법으로 이 강력한 세상의 벽과 제도에 맞서던 그는 이제 글로,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를 알게 된 건 우리의 특권이었다.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가 남긴 이 기록의 힘이 살아남은 자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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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함께 꾸는 꿈』

    노회찬 (지은이) | 후마니타스

    고 노회찬 의원의 말과 글을 사진과 함께 묶었다. 민주노동당 초선 의원 시절의 ‘판갈이론’부터 KTX 노동자들의 복직을 축하하는,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축전까지 정치인 노회찬의 전 생애를 좇으며 발언과 연설, 출마 선언문 등 사회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말과 글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엮었다.

    ‘진보 정당 운동’, 삼성 엑스파일 사건에서 시작된 ‘권력의 카르텔과의 싸움’, ‘선거제도 개혁’, ‘국회의원으로서의 일’, ‘약자들과의 연대’로 이루어진 다섯 부분의 서두에는 그와 지근거리에서 함께했던 동료 5인(보좌관 박창규, 엑스파일 사건의 변호인이었던 박갑주, 그와 함께 진보정당 싱크탱크에 몸담았던 김윤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당직자로 동고동락했던 후배 정치인 강상구, 그리고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의 편집장이었던 이광호)이 고인의 말과 글이 위치한 맥락을 되살림으로써 울림을 더했고, 오랜 세월 그의 곁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담아 왔던 사진작가 이상엽과 김흥구 등의 사진이 온기를 더해 준다.

    진보정당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의 1부는 진보 정당의 역사와 함께한 고인의 삶을 각종 기사와 연설, 진보정당에 대한 고민을 담은 에세이 등을 통해 되살려 낸다. “끈도 동료도 없이” 위장취업이라는 말이 있기도 전부터 용접공으로서 노동운동가의 삶을 시작한 노회찬의 정치 인생은 “노동운동의 최고 형태”로서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한 진보 정당 건설 운동으로 본격화된다.

    인민노련을 결성한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여의 수감 생활 끝에 시작한 진보 정당 운동은 “자갈밭에 씨를 뿌리는 듯한 10년”이었지만 2004년 총선에서 결실을 맺는다. 특히 “썩은 정치판”을 바꾸자는 판갈이론으로 ‘토론의 달인’으로 등극하며 단숨에 스타 정치인으로 떠오른 노회찬이 2004년 4월 16일 새벽, 10선 의원에 도전하는 보수 정객 김종필을 0.1퍼센트 차이로 누르며 마지막 299번째 당선자로 여의도에 입성하는 순간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기도 하다. 또 국회 진출 4년 만인 2008년, 분당 이후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을 거쳐 온 그의 행보는 한국 진보 정당의 굴곡진 역사와도 그대로 겹쳐진다.

    주요 선거 때 있었던 중요한 연설들은 그가 꿈꾸었던 ‘진보정당’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떠들 때 경제가 아니라 “분배가 문제”라고 외칠 줄 알았던 그는, “강물이 아래로 흐르듯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대중정당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고, 진보 정당이란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이 “냄새 맡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실제 월급쟁이들이 모여들고 가게 주인들의 고충이 나눠지고 아줌마들이 자신의 고민으로 드나들고 젊은이들이 편하게 의지하는”, “특정 계급이 아닌 국민 모두를 위한” 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 곳곳에서 엿보이는 진보 정당에 대한 고민들도 여전히 곱씹어 볼 만하다. 통진당 사태를 거쳐 진보정의당을 창당한 후 진보 정당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2012년 새누리당의 대선 공약이 2007년 민주당의 그것보다 진보적이며, 2012년 민주당의 대선 공약이 2007년 민주노동당의 그것만큼 진보적이며, 2012년 박근혜 후보의 무상 보육 공약이 2010년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무상 보육 공약보다 더 진보적인 내용으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진보라는 정체성만으로는, 그리고 과거의 방식으로는 차별화하기 불가능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책 없이 ‘더 많은 복지’를 약속하는 포퓰리즘적 접근을 진보 정당이 선도하고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따르는 양상에 대한 ‘자기반성’이나 진보정당 내의 공통분모, 즉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합의 부족을 지적하는 부분은 통진당 사태를 돌아볼 때 특히 뼈아프다. 무엇보다 그는 ‘현실주의자’로 진보의 정체성을 사민주의로 분명히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기 이상은 높고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라고만 이야기하는 진보 활동가 특유의 순수성을 통렬히 비판하며 진보적 가치와 정치적 현실주의는 양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이상주의나 현실주의의 잣대로는 가를 수 없는 정치인이었다.

    “정치는 엄연히 현실이고 진보주의자의 기본 덕목은 실사구시다. 현실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현실 위에서 현실을 바꾸는 게 진보주의자의 덕목이다. 진보의 가치는 정치화되는 만큼 실현된다.”

    법조 권력과의 끈질긴 싸움이 남긴 상처

    삼성 엑스파일 사건은 2004년 초선 의원이 되고 나서 겨우 1년 후부터 시작되어 2018년 여름 생을 마감하기까지 노회찬의 정치 인생 전체에 걸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오랫동안 노회찬과 활동해 오면서 법률 자문 역할을 했으며 삼성엑스파일 사건 당시 노회찬의 변호인이었던 박갑주 변호사는 그를 “법조 권력의 감시자이자 피해자”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현역 국회의원 시절 내내 법사위 소속으로 법조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 대법원의 유죄 판결로 19대 국회의원직을 8개월 만에 상실한 그는 이후 2016년 창원에서 3선 의원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내내 야인 신세로 지내야 했다. 더구나 그는 3선 의원으로 국회에 돌아온 이후에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와서 삼성의 뇌물 공여가 드러남에 따라 “재벌-청와대-검찰-법원”이라는 더 큰 권력의 카르텔과 마주하게 된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 재판 당시 노회찬 본인의 1심 법정 진술문, “국회를 떠나며” 등에서 느껴지는 노회찬의 통렬한 비판의 목소리는 고위 공직자 비리 수사처 설치가 여전히 법사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양승태 대법관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있는 지금,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게 묻는다. 지금 사법부에 정의는 있는가? 양심이 있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회의원의 일: 선거제도 개혁과 입법

    후배 정치인 강상구가 쓴 ‘선거제도 개혁’과 보좌관이었던 박창규가 쓴 ‘국회의원의 일’은 진보정당의 정치인으로서 선거 때면 으레 겪어야만 하는 현실의 벽과 그에 맞선 분투를 보여 준다. 선거 때면 늘 나오는 ‘단일화’의 압력, “될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패배주의, 야권 연대 속에서 들러리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진보 정치인, 그리고 ‘묻지마 연대’ 요구 등이 그것이다. (국민의 뜻이 제대로 완전히 ‘대의’되는) 선거제도 개혁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회찬이 민주노동당 이전부터 정의당 원내대표 시절까지 평생을 애써 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노회찬의 선거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은 진정추 대표였던 1993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지역구 의석 비율에 따라 전국구 의원을 배분받는 방식을 문제 삼았고, 지역구 후보가 아닌 정당 자체에 대한 별도의 투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청구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각하당한다. 하지만 그는 2000년 2월 다시 헌법 소원을 제기해 결국 2001년 7월 한정 위원 결정을 받아 내며 2002년 지방선거부터 1인2표제가 도입된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정당 투표는 모두 노회찬 의원의 집념으로 일군 것들이다. 2004년 총선에서 민노당의 선전 역시 바로 이런 1인2표제 개혁에 힘입은 바 컸다.

    하지만 소선거구제의 문제는 여전하다. 선거 때마다 다량의 사표를 양산하며 양당제를 강화하고 있는 소선구제로 인해 진보 정당은 언제나 득표율보다 낮은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다. 2004년 총선 이후 15년여가 흐른 지금까지 선거제도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여전히 기득권을 놓지 못하겠다는 양당의 저항에 막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뿐만 아니라 최근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요 개혁안들은 노회찬 의원이 생전에 오랫동안 꿈꾸고 주장했던 일들이기도 하다. 선거연령을 만 18세로 확대하는 선거제도 개혁,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비롯한 김용균 3법 등이 그렇고, 아직도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이 43건이다. 대표적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법사위에서 1년여가 지나도록 논의조차 되지 않다가 김용균 씨 사망 이후에야 김용균 3법 중 하나로 통과되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책은 이와 같이 그가 못다 이룬 꿈에 대한 이야기, 즉 그의 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담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약자들 곁에서 : 여러분 덕분에 더 나은 인간이 되어서 고맙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KTX 승무원, 쌍용차 해고자, 조선소 하청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언제나 약자들 곁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노회찬의 모습을 비춘다.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사람들, 그래서 심상정도 노회찬도 모르는 이들의 고단함을 알았던 그는 파업 중인 KTX 승무원들을 위해 법사위에서 “KTX 여승무원은 철도공사에서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아냈고, 2005년부터 매해 여성의날이면 각계각층의 여성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했으며, 국회 청소노동자들을 ‘직장 동료’처럼 챙겼고, 쌍용차 사태 때는 단식으로 맞섰으며, 용산 참사 때는 “무허가 건물 옥탑방에서 기거했던” 특공대원까지 추모할 줄 아는 그런 정치인이었다.

    삼성 엑스파일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이후 부인 김지선 후보가 안철수 후보에 맞서 고전을 치른 재보선에서 그는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위로했다.

    ## 많은 분들이 이 힘든 선거에, 전망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선거에, 마음과 뜻을 모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세상은 주판알 튕기듯이 금방 답이 떨어지는, 계산에 의해서만 바뀌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옳은 것이 끝내는 이긴다는 믿음, 확신, 그리고 대가를 한없이 치르더라도 양심을 지키려는 노력, 그런 순수함이, 늘 이기지 못했지만 끝내는 이겨 왔다고 저는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마저 무력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 정말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여러분 덕분에 더 나은 인간이 되어서 고맙습니다.

    “대가를 한없이 치르더라도 양심을 지키려는 노력”은 끝내 이길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믿었고 여전히 믿고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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