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쑤위의 내선작전,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다
    [국공내전⑩] 화중해방구 공방전
        2019년 01월 24일 05: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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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9] ‘산둥성 딩타오 전투’

    국민정부의 전략

    장제스가 내전을 일으킨 뒤 먼저 중원해방구를 쳐서 주력을 섬멸하려 하였으나 대부분 서북쪽으로 탈출했다. 장제스는 국방부장 바이충시, 육군 총사령관 구쭈통, 참모총장 천청, 참모차장 류페이(劉斐) 등과 함께 군사전략회의를 열었다. 류페이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작전을 맡았는데 중요한 작전이나 부대 배치 계획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장제스의 신임을 받았다.

    류페이는 일본 육군대학 출신으로 본래는 광서계 군벌 바이충시의 참모였다. 장제스와 바이충시 등 광서계 군벌들이 싸우던 이른바 장계 전쟁 때 류페이는 장제스와 바이충시를 화해시키는데 앞장섰다. 그 뒤 재주를 아낀 장제스가 참모차장을 맡겨 작전계획을 전담하게 하였다.

    국민정부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회의에서 천청이 보고했다. “중원토벌전은 전과가 적었습니다. 비적들은 모두 깊은 산중으로 달아나 숨었습니다. 국군은 우선 핑한철도(베이핑-한커우간) 의 안전을 위해 다음 작전을 해야 합니다.” 바이충시가 뒤를 이었다. “위원장 지시에 따라 군사지휘관 회의를 열어 반년 안에 비적을 소멸해야 한다.”

    난징 국민정부의 국방부

    장제스가 말을 꺼냈다. “마샬에게 이렇게 제기했소. 평화적으로 정부를 수립하려면 공산군이 열흘 안에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먼저 장쑤 북부, 자오지철도(膠濟鐵道: 칭다오-지난간), 청더(承德: 과거의 열하), 안동성(安東省)(1), 하얼빈 등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하였소. 한 달 내로 그곳들을 정부군이 접수해야 한다고 하였소. 다른 지방도 모두 우리가 지정한 곳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소.”

    구쭈통이 물었다. “마샬이 뭐라고 합니까?” “너무 각박하다고 했소.” 천청이 뒤를 이었다. “각박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비적들이 우리 요구를 듣지 않으면 전면적으로 공격할 명분이 생기게 됩니다.” “좋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류 차장, 귀관은 일본에서 유학한 수재이니 의견을 말해 보시오.” 류페이가 지도를 짚으며 보고했다. “아군의 전략방침은 먼저 관내(2)를 정리하고 관외로 향해야 합니다. 먼저 관내에서는 진푸철로(津浦: 텐진-푸커우간)와 자오지철도를 개통시키고 산둥반도의 공산군을 소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해안을 장악해야 합니다.” 장제스가 물었다. “그럼 지금 전략 중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화동(3)에 둥지를 튼 비적들을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우리 정치 중심이 난징, 상하이, 항저우인데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지금은 화동을 우리 주요 전략목표로 두어야 합니다.” 류페이가 대답하자 장제스가 “좋소, 탁견이오.”하고 끝을 맺어 자연스럽게 결론이 났다.

    옌안의 대응책

    옌안의 공산당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전략적 근거지로 삼았던 동북은 국민당군에 밀려 하얼빈까지 철수했다. 중원은 대병에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간신히 주력을 산악지대로 철수시키는 데 만족하였다. 산시와 내몽골에서도 옌시산과 푸쭤이의 부대에 맞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병력과 장비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해방군은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속전속결 방침으로 나온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와 난징에서 민주동맹 인사들과 학생들을 움직여 내전반대 시위를 만들었지만 시위에 굴복할 장제스가 아니었다. “왜 민주라 칭하는 인사들은 옌안에 가서 마오쩌둥에게 항복하라고 권하지 않는가? 중국에서 적통을 가진 정권이 국민당 말고 누가 있는가? 중국에 국가원수가 나 말고 누가 있는가? 나는 질서를 세우고 나라를 튼튼히 할 것이다.”하고 일축했다.

    저우언라이와 만난 자리에서 장제스는 “공산당은 불법 점거하고 있는 여러 곳에서 철수해야 한다. 철도 파괴를 멈추고 군대를 국민정부가 관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통첩했다. 저우언라이도 강경했다. 그는 “쌍십협정과 정전협의를 준수해야 한다. 국민당은 왜 정치협상회의 결의를 무시하는가? 정전협의 기간인데 군사행동을 하면 안 된다. 중국 인민들이 내전을 바라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국민당 쪽에서 장췬(張群) 등 협상대표를 보내 군대배속 문제를 설득했으나 저우언라이는 “그럼 우리 보고 양산박 호걸이 되라는 거냐?” 하고 반문했다. 양산박 108두령이 송나라에 반대했지만 송강이 결국 황제에게 투항한 것을 빗댄 말이었다. 공산당에게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마샬의 중재였다. 마샬이 주선하여 맺은 정전협정은 쓰핑 전투에서 패하여 후퇴하는 린비아오의 대군을 구해 주었다. 하얼빈 등 쑹화장 북쪽에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번 것이다. 중원 해방구에서도 3인 중재단이 활동해 다시 중원 정전협의를 끌어냈다. 해방군이 한 달 이상 준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장제스가 마샬에게 각박한 조건을 내건 것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옌안 마오쩌둥의 구거

    마오쩌둥, 쭈더, 류샤오치, 펑더화이, 예젠잉 등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성원들이 대책을 숙의했다. 총사령인 쭈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적이 우리 화둥, 화중 해방구를 공격하려 하고 있소. 적어도 이십만이 넘는 것 같소.” 펑더화이가 반문했다. “20만이오? 우리 화중(4) 야전군 병력을 합해봐야 3만 아니우? 사대 일도 안되네.” 류샤오치가 뒤를 이었다. “화중은 강하고 시내, 소택지가 많아 기동하기도 어려워요. 쑤위하고 탄전린(譚震林) 동지가 싸우기 힘들 겁니다.”

    류샤오치는 과거 신사군 정치위원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화중 사정과 그곳 지휘관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의견을 냈다. “장제스가 남부를 대거 공격하면 나는 본래 산둥과 타이항산에 있는 아군 주력을 출동시키겠다고 생각했소. 일부 병력을 장쑤 북부에 남겨 적을 유인하고 쑤위, 탄전린 부대 병력과 산둥, 타이항 병력을 합쳐 일거에 벙부(蚌埠)(5)에서 푸커우간 철도선을 점령하는 것이 어떻소?” 마오쩌둥의 제안은 안후이성부터 난징까지 철도선을 일거에 장악하자는 공세적 전략이었다. 신중한 류샤오치가 이의를 제기했다. “명령을 내리기 전에 화중 지휘관 동지들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오쩌둥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것도 좋겠소.”하고 양보했다.

    쑤위 내선작전을 건의하다.

    그때 화중군구 사령원은 쑤위(粟裕)였다. 화중군구는 장쑤성 중부 지역도 관할했는데 화동군구의 류보청과 함께 장제스의 다음 표적이 된 셈이었다. 쑤위는 1907년 후난성 후이퉁(会同)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수민족인 동족(侗族)(6)출신이었다. 192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난창기의에 참가했으며 징강산과 장시성 루이진에서 다섯 차례의 반 ‘포위토벌’ 전투에 참가하였다. 장정 때는 중국 남부에 남아 유격투쟁을 계속했으니 그 위험과 고생이 매우 심했다. 그는 신사군 지대장부터 계속 전투경력을 쌓아 1941년에는 사단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는 화중 야전군 사령원으로 활약했다.

    쑤위는 일생에서 여섯 차례 부상을 당했는데 머리를 두 번 크게 다쳤다. 한 번은 총알이 그의 오른쪽 귀 위에서 머리를 관통했다. 또 한 번은 포탄이 터져 머리를 다쳤다. 팔에도 부상을 입었으며 왼쪽 어깨에도 부상을 입어 장애를 남겼다. 저장성 서부에서 전투할 때는 다시 오른쪽 어깨에 총알을 맞았다. 그는 신중국 건립 후에 비로소 총알을 꺼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전장에서 죽은 수많은 전우들을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신사군 출신이 그렇듯 적지 한복판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했기 때문에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능력이 뛰어나 수많은 전투에서 지휘를 맡았다.

    1955년 계급 수여 때 그는 원수 계급을 사양하고 대장 계급을 받았다. “대장으로 평가받았으면 충분하지 무슨 원수가 필요한가? 나는 계급을 높이는 것은 관심이 없다.”고 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마오쩌둥이 “쑤위는 대장 중에서도 으뜸이다.”고 하여 ‘10대 대장의 으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가 죽었을 때 가족들이 화장한 재에서 파편 세 개를 찾아냈다. 파편을 평생 몸에 두고 살아온 것이다. 쑤위는 마오쩌둥은 물론 공산당 중앙군사위의 믿음을 얻고 있었다.

    쑤위 머릿속에 54년간 있었던 파편

    총사령인 쭈더가 그를 가리켜 “명장의 풍모가 있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는 1945년 12월 25일 장시성 중부에서 있었던 가오유(高郵) 전투에서 투항을 거부하는 일본군과 괴뢰군 등 6,000여명을 섬멸하는 등 크게 승리했다. 국민정부군이 화이인과 화이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여 장쑤성 해방구를 지킨 중요한 승리였다.

    쑤위는 작전계획을 세우기 전에 사전조사로 유명했다. 해방군 지휘관들이 대부분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거나 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지휘소를 차리지만 쑤위는 지형을 정찰할 때에도 직접 가서 확인하곤 하였다. 쑤위는 경호원 한 명만 데리고 전장이 될 만한 곳을 다니며 지형을 보며 골똘히 생각하곤 하였다. 특히 장쑤 중부는 그가 오랫동안 활동하여 작전을 세우는데 지도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화중군구 지휘관 회의에서 쑤위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주 전장이 될 화이허 남부 지역은 식량 공급에 어려움이 많소. 여러 차례 전투로 농토가 황폐한데다 인구도 아주 적어요. 우리 쑤중 해방구에서 식량을 공급해야 합니다. 보급품을 운반할 인민들도 우리 쑤중 해방구에서 조직해야 하오.”

    정치위원인 탄전린이 보충 설명했다. “우리 쑤중 해방구는 화중 인구의 사할입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인민들 바탕이 좋으니 이번 전투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 화중 해방구는 적의 근거지에서 매우 가까워요. 싸우지 않고 포기하면 우리 당이 정치적으로 크게 어렵게 됩니다. 힘을 내어 꼭 승리합시다.” 쑤위는 “이번에 우리가 싸울 적은 정편 5군과 74사단 등 정예병력으로 국군 5대 주력 중 하나요. 다른 적들은 약합니다. 우리는 약한 적부터 쳐서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하고 설명했다. 지휘관 중 하나가 “내선작전을 하자는 건가요?”하고 묻자 쑤위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선작전은 해방구 안에서 싸우는 것을 뜻한다. 마오쩌둥이 산둥과 타이항산 화중 등 주력으로 작전범위를 크게 하자는 전략방침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쑤위는 “식량 사정이나 인민들의 지원 등을 감안할 때 우리 근거지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먼저 싸우면 적과 아군의 전쟁에서 전초전이 될 것입니다.”하고 매듭을 지었다. 탄전린은 “우리 쑤중 해방구는 이미 토지개혁을 마쳤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이 크게 고무되어 있지요. 농민들은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토지를 나누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또 전방에서는 싸우고 후방에서는 돕자. 이렇게 구호를 외칩니다. 내선작전에 좋은 조건입니다. ”하고 거들었다.

    쑤위는 곧바로 중앙군사위에 보고했다. “화중 야전군 주력은 먼저 장쑤 중부에서 작전하고 다음에 화이인으로 출격하려 합니다.” 마오쩌둥은 처음에 쑤위의 이의제기를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동북의 패배와 중원 해방구를 잃은 것을 만회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쑤위는 자신의 병력이 너무 적어 외선작전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화이난 지역이 가난한데다 인구가 적어 대병이 주둔하기도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후방이 멀어 보급하기도 곤란하니 해방구 안으로 적을 끌어 들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숙고를 거듭한 끝에 생각을 바꿨다. 보고서가 일목요연한데다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쑤위의 결의가 넘치고 있었다. 중공 중앙군사위는 7월 4일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국민당군이 쟈오지, 쉬저우(徐州), 허난 북부, 허난 동부, 장쑤북부에서 동시에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먼저 내전에서 몇 번 전투하고 다음에 외선으로 전환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유리하다.” 이에 따라 쑤위와 정치위원 탄전린(谭震林)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아군 3만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쑤중 군구부대와 민병의 협력을 받는다. 우세한 병력을 집중 운용하여 적을 각개 격파한다. 기동작전으로 쑤중과 화중 해방구를 공격하는 적을 맞아 싸운다.”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는 쑤위의 내선작전에 맞춰 다른 군구는 국민당 지원군을 견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마오쩌둥은 내전에서 뚜렷한 전략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적이 공격하면 적극 받아치고 적이 예상치 않은 곳을 공격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병력과 장비면에서 자신의 열세가 뚜렷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대전략을 생각하게 된다.

    쑤위

    해방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다

    장제스는 이번 화중전투에 리모안(李黙庵)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참모총장인 천청이 리모안을 천거했다. 리모안은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수재 중의 수재였다. 하지만 황푸시절 공산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었다. 바로 탈퇴했다고는 하지만 경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 지금 잘하면 된다.”고 하여 신임을 보였다. 그는 또 “사람을 한번 쓰면 의심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리모안에게 공격군 12만명의 지휘를 맡도록 했다. 장제스는 리모안에게 “류즈가 했던 바보짓을 또 저질러서는 안 된다. 이번에 장쑤 전투에서는 비적 한 명도 놓아 보내지 마라.”하고 당부했다.

    리모안

    1946년 7월 국민당은 정규군 58개 여단 약 46만명을 화동지역 해방구 공격에 동원했다. 리모안은 제1수정구 사령원을 맡아 12만명을 이끌고 화이안과 그 북쪽 지역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화이안은 소환(蘇晥: 장쑤, 안후이) 해방구의 수도였다. 다른 국민당 부대들은 화이난(淮南)과 화이베이(淮北)을 공격한 뒤 공산당 해방구로 밀고 들어갈 예정이었다. 리모안은 공격군 지휘관 회의를 열어 7월 15일을 공격 개시일로 정하고 부대 배치를 단행했다. 그는 쑤위가 인솔하는 화중 해방구 병력이 3만명에 불과하고 자신들이 모두 미제 장비로 무장하여 화력에서도 압도하자 승리를 자신했다.

    뜻밖에도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해방군이었다. 쑤위는 국민정부군이 공격개시일로 삼은 7월 15일을 이틀 빠른 13일 갑자기 쉬안자바오(宣家堡)를 공격했다. 그것도 수비군보다 다섯 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기습하였다. 허를 찔린 국군은 이틀 만에 3,000명을 잃고 참패를 당했다. 총병력에서 열세여도 단위전투에서는 언제나 병력의 우세를 지향하는 해방군의 운동전에 허를 찔린 셈이었다. 리모안은 대병을 동원하여 루가오(如臯)를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민정부군이 공격을 위해 이동하는 사이 해방군은 그중 한 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2개 사단이 쉬안자바오 전투가 끝나자마자 강행군으로 구보하여 18일 루가오 남쪽에서 국군 2개 여단을 포위했다. 이번에도 4배가 넘는 병력으로 후퇴로까지 차단한 뒤 공격하여 49사단 본부 및 2개 여단을 모두 섬멸했다. 국군은 1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을 뿐 10,000명을 잃었다. 화중 야전군은 총 4,000자루와 기관총 500정 등을 노획하였다.

    격전을 치른 해방군은 점령했던 루가오를 포기한 뒤 하이안(海安)으로 이동하여 휴식과 부대정돈을 하였다. 리모안은 루가오를 점령한 뒤 하이안을 공격하여 결전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중공 중앙군사위는 화동 야전군에게 전보를 보냈다. “승리할 수 있다면 일부 지방을 잃어도 된다. 승산 없는 전투를 하지 마라.” 행동에 자유를 얻은 쑤위는 주력을 하이안 동북 지역으로 이동시켜 계속 휴식을 하게 하였다. 일부 부대는 지방부대와 함께 하이안 남쪽에서 공격하는 국군에 맞서 지연전을 펼쳤다. 공격하는 국군과 해방군이 4일간 격전을 치러 사상자가 발생했다. 해방군은 200명이 사상했으며 국군은 3,000명이 사살당했다. 8월 3일이 되자 쑤위는 하이안 지역을 포기하고 부대를 철수시켰다.

    해방군이 하이안에서 철수하자 리모안은 “공산군이 대세를 잃어 다시 싸울 힘이 없다.”고 판단했다. 리모안은 병력을 나누어 북쪽으로 계속 해방군을 쫓아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화중 야전군 지휘부는 2주간 휴식한 주력을 움직여 국군 우익부대에게 돌격하기로 했다. 8월 10일, 국군 105여단과 신편 7여단이 리바오(李堡)와 양쟈좡(楊家庄)에서 방어교대를 시작했다. 해방군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어수선한 두 곳을 기습 공격했다. 11일 새벽이 되자 리바오의 국군을 전부 섬멸하고 오후에는 양쟈좡의 국군도 모두 섬멸했다. 국군은 400여명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을 뿐 모두 전멸당했다. 해방군은 20시간 만에 국군 1개 반 여단 8,000여명을 섬멸했다.

    네 번이나 허를 찔린 리모안은 주둔지 수비를 강화했다. 국군은 공격목표인 화이인과 화이안을 최종목표로 두고 샤오보(邵伯)와 가오유(高郵)를 먼저 공격 점령하려고 하였다. 국군은 대병력을 동원했으므로 주둔지가 여러 곳에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쑤위는 일부 병력으로 거짓 공격을 하여 국군을 유인하였다. 그런 다음 주력을 은밀히 이동시켜 전력이 약한 교통경찰 부대를 기습했다. 하루 동안 전투 끝에 국군 교통경찰부대 5개 대대와 국군 1개 대대를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국군 1,500여명을 사살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밖에 소총과 기관총 다수를 노획했다.

    리모안은 8월 23일 마침내 화이인을 공격하게 하였다. 해방군이 곳곳에서 국군을 기습하며 다섯 번이나 승리했지만 국군은 여전히 밀고 들어왔다. 샤오보는 화이인의 관문이다. 해방군은 중원 돌파에서 이름을 떨쳤던 피딩쥔 여단과 일부 부대로 샤오보를 방어하게 하였다. 해방군 수비부대는 정편 25사단의 공격에 맞서 3일간 백병전과 돌격을 통해 샤오보를 사수했다. 해방군 다른 부대가 우회하여 공격하던 25사단의 측면을 위협하자 국군은 부득이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국군 2,000명을 섬멸했으나 자신도 1,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8월 25일 국군이 루황루(루가오-황차오)를 이동할 때 화중 해방군 주력이 기습했다. 해방군은 15개 연대 병력을 동원하여 국군 3개 여단을 잇달아 섬멸했다. 모두 한 개 여단씩 차례로 포위하여 섬멸한 것이었다. 8월 31일 황차오에서 국군 1개 대대가 항복하여 루황루 전투가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국군 5,000여명을 사살했으며 12,000명을 포로로 잡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화둥 야전군 사상자는 3,500명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 협력하여 진기로예(산시,허베이,산둥,허난성) 야전군은 란펑(蘭封) 등 5개 현성을 점령하고 룽하이 철도를 장악했다. 산둥 야전군 주력은 화이베이(淮北)에서 남하하여 쉬저우에서 증원하는 국민당군을 견제했다. 장쑤 북부지역의 중공 각급 조직은 인민들의 전선지원을 조직했다. 64만명이 동원되어 식량과 탄약, 그리고 부상병들을 실어 날랐다. 쑤위가 말한 대로 인민들의 토대가 승리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화중 야전군은 1개월 반 동안 6개 여단 및 5개 교통대대 등 모두 5만 3천명을 섬멸했다. 특히 적은 병력을 운용하여 국군을 각개격파한 쑤위의 용병이 돋보였다. 리모안은 이 전투 뒤에 곧바로 지휘관에서 물러났다.

    쑤위가 잇따라 승리한 뒤 내전에 대한 마오쩌둥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어딘가에서 싸워 이길 수 있으면 그곳에서 싸워라.”하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적극방어가 더 유리하다. 일부 지방을 잃어도 된다. 지역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않다. 적을 섬멸하는 것이 관건이다.”하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쑤위와 다른 내선작전의 승리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군사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운동전이었다. 운동전은 사람의 민첩성과 능동성을 최고로 발휘하는 특징이 있다. 운동전의 목적은 하나의 성이나 지역에 구속받지 않고 주력을 보전하거나 적을 섬멸하는 데 있었다. 그가 처음에 홍군을 창설한 이래 계속 실천해 왔던 것인데 내전 초기에는 아무래도 전략적 근거지를 중시하여 근거지 사수도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46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공 중앙에 ‘3개월 총결’을 기초해 보고했다. “과거 3개월 동안 우리는 적 25개 여단을 섬멸했다. 지금의 방법으로 계속 싸워 적 25개 여단을 섬멸하면 아군은 전략적 주도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적의 섬멸을 강조하고 지역은 잠시 잃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이런 유연한 사고방식이 나중에 커다란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해방군은 지역을 빼앗기고도 사기를 잃지 않았으며 주력을 보전하고 적을 섬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내전 초기 국면을 전략적 후퇴라고 정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적을 충분히 섬멸하여 소모시키면 전략적 반격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어느 부부의 투쟁과 사랑

    추칭(楚青)의 원래 이름은 잔용주(詹永珠)이다. 아버지 잔커밍(詹克明)이 상하이의 은행가여서 집안이 부유했다. 추칭은 1923년 장쑤성 양저우(楊州)에서 태어났다. 중일전쟁 중이던 1937년 12월 14일 고향 양저우가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곳곳에서 살인과 약탈, 강간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추칭의 집안 뜰에는 나뭇간이 있었는데 장작 등 땔감이 쌓여 있었다. 나뭇간 앞에는 장작이 쌓여 있고 안에는 넓지 않은 공간이 있어 잡다한 물건을 놓아두었다. 일본군이 온 뒤에는 온 집안 사람들 피난처로도 쓰였다. 하루는 일본인을 따라온 어린 애가 나뭇간으로 들어와 놀다가 나뭇가지에 눈을 찔려 엉엉 울며 돌아갔다. 상하이의 부친이 이 일을 알고 미국 교회당에 돈을 주고 딸들을 그 곳에 피난시켰다.

    이 일로 추칭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추칭은 상하이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고등중학교 2학년이 되자 “공부보다 ‘구국”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하루는 어떤 동창이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어떤 친구를 신사군에 데려다 주려고 해.” 추칭은 곧장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되나? 꼭 데려가 줘.”하고 부탁했다. 그 결과 추칭은 집안 식구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따라 나서게 되었다. 언니인 용산(永珊)과 다른 동지 등 모두 8명이 신사군에 참가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닝보(寧波)를 거쳐 안후이성 남부로 갔다. 징현성(涇縣城) 서남쪽 오십리 부근에 있는 장자두(章家渡) 신사군 초대소에 도착했다. 초대소에는 7명의 열혈 청년들이 묵고 있었는데 모두 신사군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개하는 편지가 없으면 거절당한다는 것이었다. 추칭은 마음이 급했지만 어디서 소개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때 광산 구호대에서 활동하던 어느 여성 동지가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다. 추칭은 그에게 가서 조용히 부탁했다. “동지, 그 소개장에 내 이름 좀 추가해 주면 안 되나요? 부탁합니다.” 그 동지가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추칭은 15살 나이로 신사군에 들어갔다.

    그녀는 신사군 훈련대 및 속기 훈련반에서 학습했다. 1939년 초겨울 추칭은 몇 명 동지들과 함께 신사군 강남 지휘 사령부 비서실 속기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로 신사군의 여러 지휘 사령부, 신사군 군사령부 속기원을 거쳐 각지의 군부대나 당위원회 기밀비서, 비서, 참모, 간사, 연구원 등으로 활동했다. 신사군에 참가한 뒤 그녀는 가족이 연루될 것을 우려하여 이름을 추칭으로 개명했다.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추씨 성은 쑤위 동지가 지어준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신문지에 20개 성을 썼다. 나보고 고르라 해서 보니 ‘왕王’씨하고 ‘이李’씨등 여러 성이 있어 ‘추楚’씨를 골랐다. 입에 잘 맞는 것 같아서였다. 그랬더니 쑤위가 농담으로 “샤오잔(7) 동지, 대단한데. 내 고향이 옛날 초나라인데 알고 보니 고향사람이구먼” 하였다. 추칭은 신사군 강남 지휘부 기밀비서로 일했다. 항상 지도자의 지시에 공손히 따랐으나 쑤위의 군무 지도나 지휘하는 모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늘 닮으려 노력했더니 사상 수준이나 업무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녀는 중일전쟁 때 강남, 장쑤 북부지역의 ‘토벌’에 맞서 싸우거나 황차오(黄橋) 결전, 텐무산(天目山)의 세 차례 반격전투 등을 경험했다. 쑤위가 직접 지도하는 가운데 그녀는 뛰어난 혁명전사로 성장했다. 그녀와 함께 속기반에서 공부한 8명의 여성 동지들 가운데 5명이 나중에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그중 한 명인 스치(施奇) 동지는 지방에서 공작 중 지주 무장대에게 잡혔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살을 한 점씩 바르는 중에 죽었다. 어떤 동지는 윤간을 당한 끝에 산채로 묻혀 죽었다. 전우들의 이런 희생에 추칭은 나도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겠다고 결심하곤 하였다.

    첫눈에 반하다

    1939년 겨울 추칭은 몇 명 동창들과 함께 신사군 강남 지휘부 사령부 비서실 속기원으로 발령받았다. 이곳에서 바로 쑤위를 만났다. 쑤위가 훈련대에 유능한 대원을 선발하러 온 것이다. 쑤위는 총명해 보이는 여자 대원이 조용히 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책임자가 대원들을 소개해서 쑤위는 그녀의 이름이 잔용주이고 양저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추칭과 몇마디 해보니 묻는 말에 대답이 민첩하고 말솜씨가 뛰어났다. 어조에도 감정이 풍부해서 쑤위에게 깊은 인상을 심었다. 그때부터 추칭의 총명하고 귀여운 모습이 고독한 쑤위의 머릿속에 떠돌았다. 쑤위는 부사령으로 평소에 부하에게 엄격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데는 부드러웠다.

    언젠가 모두 어느 사당에 있는데 쑤위는 사당옆 작은 누각에 자리하고 있었다. 추칭과 여성대원 몇 명은 사당 아래 있었다. 쑤위는 평소에도 일이 바빠 밤 늦게까지 일하곤 하였다. 경호원이 과자를 사다가 쑤위 자리 뒤 대나무통에 넣어 두었다. 일하다 출출하면 먹으라는 것이었다. 하루는 추칭과 여성대원 몇 명이 대나무통 안의 과자를 모두 먹어 버렸다. 그 뒤 종이에 “쥐가 와서 몰래 먹었다.”고 써서 빈 통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쑤위는 추칭 등을 보더니 웃으며 “생쥐들이 다시 오셨으니 환영합니다.”하고 인사했다. 여성 대원들은 모두 얼굴이 빨개져 달아났다.

    언젠가 쑤위는 그녀에게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추칭이 편지를 보더니 얼굴색이 변하여 바로 찢어버렸다. 쑤위는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애정에는 감정이 우선이지. 잔용주 동지가 나하고 연애하기를 원치 않으면 할 수 없소.”하고 한탄했다. 추칭은 속기반을 졸업한 뒤 강남 지휘부에 배속되어 쑤위의 부하가 되었다. 두 사람은 매일 함께 일했지만 쑤위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무심히 대했다.

    하루는 쑤위가 추칭에게 시냇가를 걷자고 청했다. 다시 좋아한다고 이야기하자 추칭은 냉정하게 “사령 동지, 당신의 인품과 재주에 늘 감탄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사람이고 연애 같은 걸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국난이 눈앞인데 개인의 생활이나 작은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하고 거절했다. 추상같은 거절을 당했지만 쑤위는 감탄했다. “추칭 동지, 당신 말이 옳소. 우리는 항전에서 승리할 것을 먼저 생각해야지요. 당신의 뜻에 감복했소. 하지만 혁명가는 혁명과 애정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고행승처럼 남녀 간의 감정을 말살할 일은 아닙니다.” 추칭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렇게 합시다. 우리 둘이 좋은 친구가 됩시다. 서로 학습하고, 서로 도우면 혁명하고 모순이 될 리 없잖소?”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1940년 10월, 쑤위는 천이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국민당 반동파 부대와 황차오(黃橋) 결전(8)을 치러 크게 승리했다. 추칭은 그 소식을 듣고 쑤위를 우러르는 마음이 깊어졌다. 황차오 결전의 승리로 신사군과 남하한 팔로군이 합류할 때 추칭의 마음속에 애정이 싹텄다. 1940년 말 어느 날, 해질 무렵에 쑤위는 다시 시냇가에서 추칭에게 고백했다. 추칭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쑤위가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 줬으면 좋겠소. 동지가 받아 들일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소.”하고 말하자 “그럼, 오래 기다려야 될 겁니다.”하고 대답했다. “삼년 아니라 구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소.” “그럼 좋아요.”

    1941년 12월 26일, 스쟈좡의 신사군 1사단 사령부에서 열여덟살 추칭과 34살 쑤위는 부부가 되었다. 그 뒤로 그들은 쑤위가 죽던 1984년까지 전우이자 부부로 그리고 동지로 고락을 함께 했다. 쑤위가 죽은 뒤 추칭은 눈물을 머금고 회고시를 썼다. 그리고 1959년 반우파 투쟁 때 비판받은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쑤위전쟁 회고록‘ ’쑤위가 화이하이 전투를 이야기하다.‘ ’쑤위 군사문선‘ ’쑤위가 말하는 장쑤 중부의 항일전투‘ 등을 펴내는데 주력했다.

    쑤위와 추칭 부부

    회 상
      – 추칭

    맑다가 흐리다 하던 청명절
    만리밖에 님을 보내고 함께 가기도 하였네.
    충혼의 웃음이 보이는 듯 위로가 되고
    전우의 정을 소중히 회상한다.
    오직 말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던 생각
    전장의 잇따른 승리 소식이 떠오른다.
    동남쪽은 지금 꽃이 만발했으니영령의 마음이 위로를 받겠구나.

    遣懷
     – 楚靑

    時晴時雨正清明,萬里送君伴君行。
    寬慰似見忠魂笑,遣會珍惜戰友情。
    唯思躍馬揮鞭日,但億疆場捷報頻。
    東南此刻花似錦,堪慰英靈一片心。

    <각주>

    1. 안동성은 중화민국 시기 동북 동남부 지역에 설치했던 성을 가리킨다.

    2. 관내(關內)는 산하이관과 자위관(嘉峪關) 안쪽을 일컫는 말이지만 내전때는 산하이관 안쪽을 가리켰다

    3. 화동(崋東)은 중국의 동부 지방으로 산둥(山東)·장쑤(江蘇)·안후이(安徽)·저장(浙江)·장시(江西)·푸젠(福建)·타이완(臺灣) 등 7성(省)과 상하이(上海)시를 포함한 지역을 가리킨다.

    4. 화중(華中)은 창장(長江) 중류, 즉 후베이(湖北)·후난(湖南) 일대를 가리킨다.

    5. 벙부는 안후이성 중부에 있는 도시로 베이징-상하이 철도와 화이난(淮南)철도의 교차점이다.

    6. 동족은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후난, 구이저우, 광시장족 자치주에 분포되어 있다.

    7. 중국에서는 젊은이에게는 성앞에 샤오(小), 나이가 든 이에게는 라오(老)를 붙여 부른다.

    8. 황차오 전투는 1940년 10월 장쑤 중부지역에서 국민당 장쑤성 주석인 한더친(韓德勤)부대가 신사군을 공격한 전투이다. 신사군은 7천명 병력으로 1만 5천명의 국민당 부대에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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