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홍 씨의 슬픈 이야기
    [철도 이야기] 사상사고, 공황장애, 자살
    By 유균
        2019년 01월 23일 04: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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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년 3사(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 철도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공동파업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철도노조(민주파),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 전노협, 대학생 등 관계된 사람들 백여 명에게 구술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 중 김재홍씨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재홍씨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또 알아도 구술을 주저하였습니다. 어렵게 강영철씨를 찾아 구술을 받았지만, 역시 도중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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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 : 강영철(서울동차사무소, 조합원)
    면담자 : 유균
    검독자 : 유균
    면담일시 : 2011년 9월 20일 오후 1시 42분
    면담장소 : 노동조합 사무실 2층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강영철 : 강영철입니다.

    지금부터 여쭤보는 건 전부 다 김재홍씨에 관한 부분만 여쭤볼게요.

    강영철 : 예.

    공채였나요?

    강영철 : 예. 공채요.

    나이는?

    강영철 : 그 때 당시가 서른 살인가 그랬어요.

    그 당시라는 게 몇 년도인가요?

    강영철 : 94년도. 95년도지 그러니까. 95년도에 서른.

    소속이 어디였어요?

    강영철 : 용산기관차, 전신은 서울동차사무소. 지금은 용산승무사무소.

    노동조합과 관련돼서 무슨 직책이 있었나요?

    강영철 : 없었어요. 그 당시엔 없었어요. 조합원이었어요.

    김재홍씨는 어떤 분이셨어요?

    강영철 : 글쎄요. 그 당시는 뭐 제가 잘 겪어보진 않았는데, 착하고 뭐 남들하고 (잘)어울려서 지내는 보통 직원이었지요. 평범한 직원.

    성격은 활발하고요?

    강영철 : 잘 어울렸어요. 그 때

    술이라든가, 이런 거도 좀 잘하시고?

    강영철 : 글쎄요. 술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제가 잘… 술을 잘 안 마시니까.

    그러시구나. 그러면 용산기관차에 있을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강영철 : 그 당시 그 94년도. 파업 당시에 평조합원으로 있었는데. 저희 사무소에서 파업 출정식을 했어요, 그날. 그 테니스장에서 출정식을 했었는데. 그 당시 테니스장하고 바로 인접해있는 2층 사무실이 서무였어요, 서무. 그러니까 지방청에 공보실이나 이런 데서 있던 분들이 서무에 와가지고 사진을 찍고 그랬다고. 사진을 찍고 그랬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렌즈가 망원렌즈고 비싼 고가였었는데, 그 찍는 것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지부 임원들하고 해서 서무에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카메라를 뭐 뺐고 막 실랑이하는 과정에서 김재홍이란 친구가 평조합원인데 거기에 아마 사진에 찍힌 것 같아요, 강성조합원으로. 그래가지고 지부 임원들이야 나중에 징계 먹고 다 그랬지만, 그 친구는 임원도 아닌데 강성조합원으로 찍혀가지고 정직이란 징계를 먹었다고.

    아~ 그래서 정직을 먹었던 거예요.

    강영철 : 예. 그래서 같이 쫓겨 갔었어요.

    몇 정직 먹었는데요?

    강영철 : 1정직이에요. 그 때만 해도 정직이면 컸죠. 지금은 흔해 빠졌지만은 그 때는 컸다고. 그래가지고 임원도 아닌데 사진을 찍혀가지고 그 안에 강성조합원으로 되는 바람에. 그래서 정직 먹고 쫓겨 갔다고.

    그러면 파업에 대단한 활동을 했다든가 그런 거는 전혀 없는 거네요. 그냥 재수 없게 사진에 찍혀서 그렇게 된 거네요.

    강영철 : 그렇죠. 나중에 얘기를 들어 봤는데 카메라가 망원카메라(렌즈)인 모양이야. 망원카메라가 앞에가 긴 모양이지? 그게 뭐 휘었다고 그래요. 실랑이 하는 와중에서. 그러니까 이제 그 친구만 하는 건 아닌데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서 거기에 묶여가지고 거기에(파업에) 관계됐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됐어요?

    강영철 : 예. 평조합원은 그 친구하고. 제 기억에는 서울기관차에 가 있는 이형중씨라고 그 형님이 아마. 거기서 같이 (카메라를) 뺏는 과정에서. 그 형님도 그 땐 임원이 아니었는데 제 기억에는. 그렇게 해 같고 그 형님은 3감 먹고 영등포 갔다가 지금은 서울기관차에 가 있죠.

    그러면 김재홍씨가 그 전에 사상사고 낸 일이 있었나요?

    강영철 : 그건 제가 나중에 알았는데, 그전에는 성북서 의정부 갔다가 오는, 그 신탄리 가는 경원선. 경원선은 저희 사무소에서 담당을 했었는데, 그거를 아마 갔다 오다가 객차는 의정부에 잘라놓고 단기, 기관차만 청량리 기관차로 입고를 시켜야 되는데. 망월사역에서 군인 두 명을 아마 이렇게 사상사고를 낸 거 같아요. 군인 두 명. 그러니까 그게 좀 인제. 군인이 이렇게 절단이 된 거 같애요.

    사망한 건 아니고요?

    강영철 : 사망이지요. 사망. 여기가(허벅지 부근) 이렇게 절단이 된 거지. 그런데 그 친구가 그걸 보고서 좀 이제 심경변화가 많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 때 당시…

    그때가 언제에요?

    강영철 : 글쎄. 그게 언젠지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나는데…

    대충 88년 파업 전인가요?

    강영철 : 아니죠. 94년도 파업했으니까 그 전이지요. 92년도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면 자세히 알겠지만 그 당시 기관사는 김영하라고.

    그러면 (기관)조사였었구나.

    강영철 : 김재홍씨는 부기관사, 조사였고. 기관사가 김영하라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전동차 가 가지고 지금은 사표를 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친구하고 둘이서 단기로 오다가. 아마 그걸로 인해서 청량리 정신병원에 아마 얼마간 입원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뒤에?

    강영철 : 사상사고 뒤에

    아~ 이게 용산에서 난 거지

    강영철 : 그 때 용산기관찬데. 그리고 나서 사무소에 병가를 내고 자꾸 고민을 많이 하니까. 그걸로 인해 병가를 내고 청량리 정신병원에 가 가지고 치료를 받은 걸로 제가 알고 있어요.

    얼마를 (오래) 받거나 이런 거는 모르고?

    강영철 : 그런 거는 제가 확실히 모르겠어요. 그런 거는 모르겠고. 그리고 나서 다시 근무를 하다가 파업을 맞은 거지요.

    그러면 파업하고 그것 때문에 대창을 간 거잖아요.

    강영철 : 그렇죠. (전화로 잠시 중단)

    * 94년 당시 서울철도공작창대전철도공작창부산철도공작창 이렇게 3곳이 있었는데끝자만 따서 이라고 불렀으며 그 중에서 대전은 객차화차의 중정비 작업을 하는 곳이다

    그 때 결혼을 했었나요?

    강영철 : 안 했어요. 총각이었어요. 총각이었었는데. 그 당시… 그 친구와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해봤지만 남들보다 어떻게 보면 소심한 게 좀 있었어요. 소심한 게 좀 있는데. 그 때도 대창을 같이 갔는데. 같이 가게 됐는데 대창을 가면 처음에는 독신자 아파트를 들어가게 돼있다고. 10만원짜리. 그러니까 그건 방 한 칸에다 세면실이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쓰는 덴데. 거기 있다가 얼마 안 있다가 보통 다 13평이나 18평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 때 저하고 나경호 둘이서 같이 옮겼는데 그 때 ‘같이 옮기자’ 그랬거든. 그런데 ‘안 옮긴다’ 그래. ‘자기는 혼자 거기 있는다’고. 18평짜리 방 하나면 어차피 같이 써도 되는데.

    그 담에 서울기관차 전성철이. 전성철이는 집이 개봉이니까 계속 출퇴근을 했고. 네 명이서 (전출)갔거든요. 그 친구는 계속 출퇴근을 했고, 그런데 안 들어간다고 그래. 그러면 할 수 없지. 안 들어간다는데. 그래서 나하고 경호는 방을 들어가서 있었고. 전성철이는 출퇴근을 했었고 그 친구는 혼자 있었다고. 그래도 가끔 만나서 밥 먹고 그랬지만은. 그런 식으로 이해 못하는 그런 게 있더라고. 같이 있으면 엄청 좋을 텐데. “그래” 싫다는데 어떡해.

    그러다가 그런 계기 된 결정적인 게, 제 생각인데. 그렇게 지내다가 우리가 여기 복귀하게 되는 그 무슨 원직복귀하는 자술서 같을 걸 쓰는 게 생겼었어요, 그 때. 근데 그 친구가 병가를 냈었다고 그 당시에. 병가를 내고 안 나왔어요. 안 나오는 중에 나하고 우리 그 나경호 친구하고 전성철이 하고는 셋이 다 썼어요. 그걸 ‘원직 복직하겠다’ 이런 식으로 써 가지고 그게 한 1년이 안됐죠. 우리가 쫓겨간 지가. 94년도 9월 달 쯤 갔는데 95년도 7월 달 쯤 그런 거를 하나 썼어요.

    제 기억에는. 뭐 저 위에서는(청) 그 당시 원직복직하면 뭐 ‘노동조합 활동을 다신 안 하겠다’ 뭐 이런 식으로 서약서 비슷하게 받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안 썼지. 그냥 ‘원직복직 하겠다’ 뭐 가서 하느냐? 안하느냐? 그런 건 안 쓰고. 그래가지고 그리고 관리에 있는 사람들하고 쓰고 있었는데, 그 후에 그 친구가 복귀를 했다고 다시. 병가를 내고(마치고) 다시 들어왔어요. 들어왔는데 우리가 막 1년 만에 발령을 나고 다시 올라왔거든요. 근데 이 친구는 안 썼거든. 못썼단 말이에요.

    우리는 ‘올라간다, 발령이 난다’ 얘기가 막 났는데 이 친구는 못써가지고 그게 해당이 안 된 거예요. 그래서 실망을 더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그 날 발령이 나 가지고 저는 용산을 바로 왔어요. 그 다음에 나경호 그 친구는 서울차량, 서울차량에 (발령이) 나가지고 저기 오봉에 좀 있었어요. 오봉에 있다가 청량리로 가고. 전성철이는 구로차량으로 와 가지고 구로차량에 조금 있다가 서울기관차로 가고 그렇게 됐거든요. 그렇게 올라왔는데, 올라온 날 이렇게 사고가 난거라구요.

    그게 며칠인데요?

    강영철 : 그게 9월9일인가? 그래요. 왜냐하면 제가 355일 만에 왔거든요. 10일 모자라는 1년 만에 복직을 했는데 그게 9월 9일인가, 10일인가 그래요. 제가 사무소에 딱 왔는데 그 소식을 들었거든요.

    그러면 같이 대창에 있었을 때는 뭐 좀 날라가 가지고 비관적이었다든가

    강영철 : 그런 건 물론 내색을 안했죠. 우리끼리 모이면, 거기서도 처음엔 내려가서 활동을 많이 했으니까, 처음에는.

    무슨 활동을 했는데요?

    강영철 : 그 때 여기가 노민추가 생기는 바람에. 그 우리도 대전 쫓겨 가 가지고, 대전서 대전 노민추에 들어가 가지고 그런 활동 같은 거. 그 담에 풍물 같은 거 만드는 거 그런 거를 지속적으로 했었거든요.

    그 때 김재홍씨고 같이 했나요?

    강영철 : 했죠. 같이 다니고 그랬는데. 그리고 나서 금방 뭐 이렇게 확대가 된 게 아니고. 그때는 우리가 뭐 전기협이 와해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다 쫓겨 갔단 말이에요. 전국적으로 소위 그 민주노조라고 그러나? 그게 붐이 다시 일었어요. 처음에 각 창 같은데, 그 때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그 때 노동조합 같은 거 잘 모르더라고. 솔직히 말해서. 그 때 가가지고. 그런 여파도 컸었을 거야. 그 때 그런 거 하면서, 어차피 우리랑 같이 갔으니까. 그 때 당시 거기서 임원은 안했더라도 시간이 되면 “같이 가자” 그 다음에 풍물을 하는데도 “같이 가자.” 그런 거 보고 같이 지냈죠. 어차피 같이 지내야 되니까.

    그 때까지는 뭐 이렇게 특별난 게 없었네요?

    강영철 : 없었지요. 평조합원으로 있었다가, 아마 거기에 정직을 먹고 내려가는, 쫓겨 가는 그 때부터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마음으로는 혼자 다짐을 했었을 수도 있어요.

    그 때 나중에 대창에서 병가를 냈을 때 어느 정도나 냈는지 이런 건 모르구요?

    강영철 : 예. 고 기억은 잘 안나요. 왜냐하면 같은 방에 있었으면 바로바로 알 텐데. 또 이게 혼자 독신자 방에 있어가지고. 뭐 한 날짜는 정확히 몰라도 비슷한 건 다 알죠. 2-3일 차이나니까 어차피. 안보이면 바로 또 찾고 그랬으니까. 그랬는데 아마

    그 때 이제 병이 다시 재발한 거 같애요.

    강영철 : 예. 우리는 올라간다는 소식을 받았고 그 친구는 공교롭게 하여간 병가 중에 그런 걸 작성을 못해가지고 그런 소식이 없었으니까 나름대로 아마 또 생각을 했을 꺼 같아요. 왜냐하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으면 괜찮은데 달랑 4명 중에서 셋은 (며칠)날짜로 올라간다 이러는데 자기 혼자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좀 “에이 씨, 뭐” 그런 식으로. 원래 성격이 좀 소심한 면도 있었고.

    그래서 서울지하철에서 자살한 거예요.

    강영철 : 아냐.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9층에서 아마 뛰어 내렸다는 거 같아요.

    그러면 병원에 있었네요.

    강영철 : 그게 아마. 그게… 올라왔는데 제가 거기도 못 갔어요. 하루 만에 저… 상을 치러가지고.

    아~ 하루만에…

    강영철 : 오늘 죽었으면 내일 바로. 이제… 왜 그랬냐하면. 이제 제 추측인데. 저희들이 올라오고 발령 나고 이러다보니까 그 친구가 집에 와가지고 “안 다닌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 한 거 같애요. 집에다. 그런데 집에 형이 있었다고. 형이 같이 부모님하고 살았는데 거기 조카가 있었어요. 조카가. 제가 전화하고 이렇게 들어보면 4살 5살 정도. 그런 조카가 있었는데, 아마 우리가 올라오면서 그 친구가 집에 가서 “에이 씨, 나 안 다니겠다” 이런 거 같아. 그러니까 부모님이나 그 친구 형이나 좋아할 리가 없죠.

    나무랐겠죠.

    강영철 : 예. 나무랬을 거야. 부모님이야 뭐 “야! 이런 판국에 안다니면 어떻게 하겠냐. 좀 더 다녀봐야지” 그랬을 거고 형은 뭐 어떻게 보면 더 심하게 “야! 이놈아. 정신 있어, 없어” 뭐 이런 식으로 얘길 했겠지. 그러면서 그 와중에 좀 ‘욱’한 거 같애. 욱 해가지고. 조카를 아마 잘못한 거 같애. 그래가지고 거기서. 그래가지고 바로 경찰이 와가지고 잡아가지고 했는데 그게 좀 ‘정신이상자’라고 해가지고. 거기가 세브란스 병동이. 거기가 정신병동이라고 그래요.

    조금 전에 못 들었는데요. 조카를 때렸다고요?

    강영철 : 죽였지요.

    그래요?

    강영철 : 그래서 이거 그런 거 때문에 그러는데. 조카가 죽었다고. 그래가지고 경찰이 와가지고 갔는데 9층이라고 그래요. 근데 거긴 다 철망으로 되어있다고 그래. 그런데 그 항상 저거 되어 있는 건(정신이 나간 건) 아니니까. 나중에 제 정신으로 들어와 가지고 “내가 여기 왜 있느냐?”그런 모양이야. 그런데 어머니가 있다가 그럴 어떻게 얘기를 해 준 거 같애요. 어머니가. 어차피 알게 될 거고 그래서 얘기를 해 준 거 같애. 그러니까 얘가 또 제 정신으로 들어오니까 죽을 맛이지. 그래서 “화장실 간다” 그래가지고 화장실에서 뛰었다고 그러더라고. 9층에서 그래가지고 사망한 거거든요.

    더 이상 못 쓰겠는데…

    강영철 : 그래서 이게 별로… 그래서 그 아버님이 한 번 왔었어요. 사무실에 아버님을 그 후에 만났는데 아버님도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쉬쉬하자고 그러더라고. 그래가지고 예를 들어서 그 직원이니까. 금전적인 관계문제. 그런 거만 얘기하고 말았거든요. 그리고 하루 만에 화장했다고요. 그게 주간지에는 났어요. 신문에. 일반신문에는 안 나고. 주간지에 귀퉁이에 조금 이렇게 났었다고요. 그 당시에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겠네. 아주 굉장히 자세하게 이걸 쓰지 않으면 건드리지 말아야겠네요.

    강영철 : 예. 그런 게 있어요. 물론 원인은 철도에서 그…

    그러니까요

    강영철 : 신체적인 조건의 변화가 철도에서 물론 제공했지만, 결과는 하여간 그렇게 됐기 때문에 그게 조금 그래요.

    아시는 건 그 정도까지 지요?

    강영철 : 예.

    수고하셨습니다.

    후기1 : 만약에 이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조사하고 싶다면 사상사고로 인한 ‘공항장애’까지 정확하게 파헤치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그냥 자료로서 보관만 하고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후기2 : 처음에는 구술을 받고 너무 충격적이라 검퓨터에 저장만 했습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제 깐엔 고민했습니다. 이 글을 다시 세상에 꺼내는 이유는 그냥 묻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읽어도 마음이 애잔합니다.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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