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세철 동지를 기억하며
[철도 이야기] 그의 뜨거운 열정 기려야
By 유균
    2019년 01월 18일 10:3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994년 6월 당시 철도노동조합(민주파),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에서 임금인상과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공동파업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여 노조원들을 해산시키고 체포하였으며, 이후 징계로 많은 조합원들에게 해고, 부당전출을 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꼭 기억해야 할 분이 계시기에 소개합니다. 그리고 아래 글은 당시 같이 근무했던 분들의 구술을 통해서 작성하였습니다. (필자)

가운데 흰옷을 입은 이가 박세철 동지

박세철씨는 1961년생으로 충남기계 공고를 졸업하고, 다음해 1981년 7월 22일 대전기관차사무소에 입사했습니다. 가족은 부인과 남매가 있었으며 첫째가 딸로 지금 대학생쯤 됐고, 아들은 고등학생 정도일 겁니다. 성격은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고 술도 좋아했으며, 의협심이 강했고 노동조합의 직책은 없었지만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94년 전기협 때 용산에서 밤샘 농성하다가 다음 날 대전에 와서 승무하곤 했답니다.

94년 파업이 끝나고 제천기관사 사무소장이었던 이영기씨가 조합원을 압박하기 위해서 대전기관차 사무소장으로 전입을 왔고, 당시 권용훈씨가 지부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장과 지부장 직대가 결탁해 오히려 조합원을 탄압하고 지부 사무실도 폐쇄했습니다. 그리고 95년 정기 지부장 선거에서 이영기씨는 “반대파로 대의원에 나오기만 하면 다 전출 보내겠다”고 공공연히 소문을 내기도 했습니다.

조합원들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입장이었으며 그래도 몇 몇 조합원이 뜻을 모아 ‘민주지부를 세워 보자’는 기치로 모 여관에 모여 선거본부를 차리게 됩니다. 모두 ‘지부장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누가 선뜻 ‘내가 지부장을 하겠다’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박세철씨가 “내가 하겠다”고 선언하고 단독 출마해 95년 4월 지부장에 당선됩니다.

지부장이 되고 난 후 지부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생활했습니다. 30대 초반, 젊고 의욕이 강해 조합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소장하고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또 게시판의 선전물 뗀 것에 대해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하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관리자들의 횡포로 조합원이 지부 사무실에 가는 것조차도 어렵던 시절이었고, 94년 파업으로 해고된 연제찬씨(파업 당시 지부장)가 식당을 운영했는데, 그곳마저 감시하며 출입한 조합원을 불러서 압박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고자들을 돕기 위해서 지부 회의를 했고, 그 회의에서 ‘회람을 돌리는 등 공개적으로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음성적으로 돕자’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지부장이 계좌번호를 프린터해서 조합원 개개인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전달했습니다. 그 중 예전 어용지부 시절에 일했던 조합원이 지방청 감사관실에 이러한 사실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감사관실 조사를 받았고, 당시 ‘타이핑하고 도장을 찍지 않으니까 5명이 달려들어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철도청은 박세철씨를 ‘기부금품 모집위반’이라는 명목으로 1995년경에 파면시켰고. 소청에서 기각, 행정소송에서 이겨 복직됐습니다. 재판은 1년이 훨씬 넘게 진행됐고, 그 사이에 박용복씨로 지부장이 바뀌었습니다. 박용복 지부장은 박세철씨가 원직으로 복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의 노동조합은 어용이라 오히려 방해하여 원직복직은 물 건너갔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대전객화차 지부장의 도움으로 기관사가 아닌 객화차 장항 분소로 1997년 2월 27일 발령을 났습니다.

당시 장항 분소는, 생활권이 대전인 분들이 많아서 6개월~1년 주기로 직원을 교체하고, 거리가 멀어 카풀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항 객화차분소에서 근무한 지 1년 반 정도 지난 1998년 7월 11일(음.5월18일) 교통사고로 박세철씨를 비롯해 차에 타고 있던 4분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 기일 날이 되면 친한 사람 몇몇이 산소를 찾는 정도였으며 故 박세철씨 가족을 돕기 위한 활동은 공식적으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대신 동기인 박희빈씨가 동기와 노조 임원들을 상대로 매월 1만원씩을 모금해 20~30만원 정도를 모아 약 3년(또는 5년?) 정도 가족들을 지원했습니다. 대전기관차사무소나 노동조합 차원의 행사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 박우근씨가 지부장으로 당선되면서 대전기관차지부에서 공식적인 추모행사를 진행했고, 현재까지 지부 차원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9년 이대식 본부장부터는 대전지방본부에서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故 박세철 동지는 그 엄혹한 시기에 민주노조 운동의 시금석이 될 만한 일을 한 분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조합원들의 머릿속에서 잊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올바른 노동조합이라면 그 분의 뜨거운 열정을 가슴으로 받아 안아 지금이라도 박세철 동지를 되새기는 동상이나 추모비를 제작하여 후배들에게 길이 알려야 하기를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