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사상 첫 좌파 대통령 탄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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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07일 02: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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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브라도르’라는 성은 스페인어로 노동자, 농민을 의미한다. 참 상징적인 우연이다. 다음 달 2일 있을 멕시코 대선의 좌파 야당인 민주혁명당(PRD) 후보인 그는 선거 유세 기간 내내 텔레비전에 나온 스팟 광고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나의 힘입니다" 라는 구호를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친다. 그리고 가난한 장애인들의 취업을 약속했다. 길가 벽에 붙어있는 선거 홍보 포스터에서도 "모든 멕시코인들을 위해 일하겠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한다. 진보적 정치철학과 비전이 확실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뻬스 오브라도르
     

    이에 비해 70여년 이상 집권당이었다가 요즘은 죽어가는 공룡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제도혁명당(PRI) 대통령 후보의 선거구호는 매우 희화적이다. "멕시코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겠다."

    오브라도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멕시코의 정치지형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자.

    1910년에 터진 멕시코 혁명이 멕시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건임은 물론이다. 혁명 전 경제, 사회 모순의 한가운데에는 식민지 시대 이래 최대 지주였던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독립 이후에도 멕시코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보수적 헤게모니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데 리베라, 시케리우스 등의 거대한 스케일의 독창적인 벽화의 미학세계에는 억압적 기능을 수행했던 가톨릭의 도그마를 배척하고 대중의 힘을 믿는 사회주의적인 가치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와 같은 멕시코 예술, 사회의 진보적 에너지는 60년대를 고비로 급격히 약화되어 간다.

    멕시코 혁명과 토지 개혁

    1910년에 시작된 멕시코 혁명은 극소수에 의한 농지의 대규모 독점이 그 동기였는데 가톨릭 교회가 바로 혁명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멕시코 농지의 약 4분의 1이 서류상으로 주인이 없는 땅이었는데, 19세기말 멕시코 농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토지정리사업법이 만들어져 외국인 자본에 의한 토지정리회사들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가난한 농민들의 땅을 마음대로 빼앗아가곤 했다. 이들 가난한 농민들은 관료들, 법관들을 대부(compadre)라고 부를 수 있는 ‘빽’이 없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도시의 부자들이 지나가던 사람들을 남루하고 옷이 초라하다는 이유 하나로 경찰을 불러 감옥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계급사회에서 가장 힘들고 천한 일은 원주민들 몫이었다. 요즘도 멕시코 속담에 원주민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경멸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도시에 있는 미국계 슈퍼에 갈 때 부자들이 데리고 오는 식모들은 대부분 원주민 출신이다.

    혁명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1913년 멕시코 북부 마타모로 지역에서 첫번째 농지개혁으로 그동안 가난한 노동자로 일하던 사람들에게 농지가 분배되었다.

    멕시코 혁명의 영웅은 둘이 있다. 한명은 ‘북부의 호랑이’로 불렸던 판초 빌라이고 다른 한명은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빠타이다. 현재의 사빠티스타 반군이 그의 혁명정신을 이어 받고자 함은 물론이다.

    판초 빌라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많이 보았던 미국 서부영화에서 바보같고 폭력적인 인물로 희화화되곤 했는데 사실은 미국이 제일 무서워했던 멕시코인이라고 한다. 1916년 급진파인 판초 빌라는 미국의 국경도시 콜럼버스를 기습공격했다. 최근 발행된 멕시코 주간지에는 미국의 극우파가 판초 빌라의 유골을 간직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서부영화 바보 ‘판초빌라’는 미국이 제일 무서워한 멕시코인

       
      ▲판초 빌라
     

    멕시코 혁명 당시 판초 빌라가 활약한 북부에는 대규모 농장이 많이 있어 거기서 일하던 농민은 일종의 노동자 성격이 강했다. 또한 광산이 많이 있어 북부의 사까테까 같은 곳은 오늘날 진보정당 PRD당의 거점이 됐다. 반면 남부는 집단 공유지와 원주민 농민이 많은 지역으로 사빠타는 이들 가난한 농민을 대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혁명이 그렇듯이 판초 빌라와 사빠타가 지지하는 사회주의적인 강령을 가졌던 급진파와 준법정신과 제도를 강조하는 온건파가 갈리게 되는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권력을 잡은 온건파 카란사를 지지하게 된다.

    1916년 7월 혁명이 마무리되고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1917년 헌법이 새로 제정된다. 새 헌법 제27조는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라고 명시했다. 다만 개인은 점유권을 가진다고 되어있다. 제3조는 “모든 교육은 종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1929년부터 PRI당은 집권을 계속한다. PRI당이 집권하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정권의 안정적 기반이었다. 거의 백년 이상 혼란과 혁명과 내전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PRI당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는 혁명이념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고 대중에 대해선 강력한 민족주의로 어필했다.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해 노조 대표들을 PRI당의 간부로 발탁하고 통제적 시스템의 정점에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이 지도하는 정치 문화를 지속시켜왔다

    물론 1934년 라사로 까르데나스가 대통령이 되어 멕시코 혁명 이후 제정된 헌법 제27조 등의 정신에 따라 석유의 국유화, 농지와 광산의 공개념을 적극적으로 정책화하여 농지분배와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정치를 펼친 것은 PRI당의 전성기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그 후 부정부패에 흠뻑 젖어들면서 PRI당은 대통령 임기말이 되면 당 내부적으로 후계자를 내정하는 방식으로 체제를 무한정 지속해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최소한도의 사회복지를 노동자와 대중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체제 저항세력에 대해 철퇴를 가하는 방식을 병행했다.

    1960년, 멕시코 좌파 전성시대

    자유권적 민주주의에 대해 철퇴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매카시즘 선풍이 일고난 후인 50년대 말부터였다. 그 억압의 정점에 68년과 71년의 군대에 의한 시위 학생 학살이 있게 된다. 그리고 60년대를 통해 일부 세력만 남은 도시 게릴라 조직이 해체된다. 멕시코 공산당은 1919년에 창설되어 1934년까지 지하조직으로 활동했으나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존재가 희미하게 된다.

    한편 1960년대 초는 멕시코 좌파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1959년의 쿠바혁명 성공을 배경으로 1961년 ‘전국 해방운동’을 결성하게 된다. 그 지도자인 라사로 까르데나스와 일단의 지식인들은 초기 혁명정신으로 되돌아가 1917년의 헌법정신을 고양하며 혁명적 민족주의를 전개하게 된다.

    그 후 소강상태를 겪은 멕시코 좌파는 PRI당에서 나온 일부 조직과 다양한 좌파가 통합되어 1987년 라사로 까르데나스의 아들인 꽈테목 까르데나스를 후보로 하여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다. 그러나 대규모 선거부정을 통해 PRI당의 살리나스가 대통령이 된다. 이후 좌파 통합조직은 PRD당을 창당한다.

       
    ▲"여기는 사파티스타의 땅이다. 여기서는 인민이 명령하고 정부가 복종한다."

    지금부터 12년 전인 1994년 1월1일 멕시코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난다. 1994년 1월1일을 기해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에 의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었고 바로 그날 멕시코 혁명세력 사빠티스타도 출범했다.

    루이 알튀세의 철학과 남미 문학을 체득하고 기존 체제에의 반란과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새로운 대안 철학을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실행하고자 하는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의 일부 지역을 접수하고 멕시코 정부에의 반란을 선언하고 살리나스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한다.

    멕시코를 식민지로 만든 FTA

    살리나스, 세디요, 폭스의 세 번의 정권 동안 나프타는 멕시코를 융단폭격하다시피 하여 멕시코를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 사이 독재정당 PRI에서 PAN당으로 민주적인 정권교체를 했다며 멕시코 민주주의의 진보라고 언론에서 요란했지만 국민, 대중, 민중, 가난한 사람들이 몰락한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멕시코 역사를 보면 볼수록 자꾸 한국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나프타 발효후 얼마 지나지 않아 3월23일 그 당시 집권당인 PRI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루이스 도날도 꼴로시오 무리에타는 암살당한다.

    하수인 암살범만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고 있고 배후의 주범은 오리무중이다. 올해 3월23일자 <우니베르살> 신문을 보면 그 사건의 배경을 호기심 있게 해석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멕시코의 힘있는 기득권 세력은 루이스 도날도 꼴로시오를 제거하는데 아마도 이미 정치적 수명이 다한 PRI당을 정당으로서의 권력을 살리는 대신 정권교체를 허용하는 야합을 현재의 여당인 국민행동닫(PAN)당과 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이다.

    꼴로시오가 암살당하기 직전의 연설을 보면 수명이 다한 PRI당을 해체하고 진정으로 멕시코 민주주의를 이끌 새로운 민주개혁 세력의 통합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대상이 오늘날 유력한 집권 후보인 PRD당이었다고 한다.

    결국 꼴로시오 대신 1994년에 집권한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은 미국통의 브레인으로 유명하고 그의 임기가 끝나는 2000년에는 PRI당의 장기집권(71년)이 끝나고 PAN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전직 멕시코 코카콜라 사장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멕시코 정치는 은밀하게 야합한 자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고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강화되는 쪽으로 진행되어 온 것을 상기 신문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날 3월23일 암살당한 PRI당의 꼴로시오의 개인비서였고 또한 PAN당인 현직 대통령 비센테 폭스의 선거참모였던 알폰소 두라소가 오브라도르 진영에 합세함을 밝히고 있다.

    ‘멕시코 역사상 최초 좌파 대통령 나오나’ 세계가 주목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7월2일에 있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좌파 대통령이 나올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민주혁명당 로고 

    3파전에서 현재 여당인 우파 PAN당과 혁명과 노조를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억압하고 부패의 상징인 PRI당이 선거운동의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고 있다고 멕시코 유력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초조해진 여당 PAN당에서는 미국인 선거전략 전문가들을 고용하면서 과격한 내용의 네거티브 선거전을 펼치고 있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없어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보이고 있다.

    PAN 당의 TV 스팟 방송에서 과격좌파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의 이미지를 오브라도르와 겹치게 했고 사빠티스타 마르코스와도 이미지를 연결시키면서 오브라도르가 당선되면 멕시코가 위험해진다고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같은 전략은 많은 돈을 들이고 모셔온 미국인 정치공학 컨설턴트들이 만들어 낸 전략으로 PAN당의 고정 지지층인 기업가들을 붙잡아두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흑색선전을 받아 하원에서는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선거개입 의혹에 대해 조사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수준 낮고 어처구니없는 비난에 멕시코 지식인층이 더욱 오브라도르를 지지하게 만들고 말았다.

    한 정당의 선거전략에 이용하자고 다른 주권국가의 국가원수를 모독하는 내용의 광고를 버젓이 내놓는 현 멕시코 집권당은 외교의 기본도 모르는 행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 같은 공격에 대해 오브라도르는 한마디로 미디어를 통한 ‘더러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멕시코 주재 베네수엘라 대사관은 자신의 국가원수를 선거전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점잖게 항의를 했다. 한편 PRD당의 당수는 선거관리위원회에 이 사건을 고발했고 이에 멕시코 선거관리위원회가 PAN당의 스팟 광고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와 같이 선거전이 네거티브 전략 위주로 진행되고 결과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접전이라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왠지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두려운 분위기인 것이 사실이다.

    집권당 여론조사 조직 의혹 받아

    초조해진 집권당 PAN당은 선거전의 여론조사 결과까지도 조작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에 오브라도르는 길거리 정치라고 비난 받는, 시민에 의한 시위로 대응하고 있다. 노란색의 PRD 상징 색깔의 옷을 입은 시민들이 최근 다시 열리게 되는 후보 토론회를 앞두고 여론조사 회사의 조작을 비난하면서 약 10만 명의 시민들이 50km 이상의 인간띠를 멕시코시티 도심에서 만들어 오브라도르를 연호한 일도 있다. 그 장소는 바로 얼마 전 오브라도르가 멕시코시티 시장일 때 건설한 고가차도가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적 퍼포먼스 연출을 즐긴다고 할까.

    1953년생으로 전 멕시코시티 시장이었던 오브라도르는 원래 잘 나가던 PRI당의 일원이었다. 그는 1988년에 꽈뗴목 까르데나스를 중심으로 PRI당의 비주류로 당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만든 PRD당의 지도자로 성장한다. 그는 1989년에 타바스코주의 PRD당 위원장이 된다. 그는 이 당시 ‘기초위원회’를 만들어 주민들의 참여를 도입하여 당내 민주주의를 실천한다.

    타바스코주는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주이다. 혁명기에도 별 영향이 없었고 정치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식민시대부터 내려오는 사회구조를 개혁할 생각은 없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원주민과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태생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또한 이 주는 3천년 전에 중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올메카 문명이 싹텄던 멕시코의 요람같은 곳이다. 촌탈레스 원주민들은 전통방식대로 자연과 조화되면서도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카카오가 화폐로 기능했고 상업이 발달하여 멀리 중미와 쿠바와도 무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정복이 시작되면서 약 3백년간 정체와 퇴보가 시작된다. 16세기초부터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었는데 약 50년만에 인구의 95%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스페인인들이 가져온 이름 모를 질병 때문이었고 거기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혹한 수탈을 행한 스페인 대농장주들 때문이었다.

    멕시코의 현대사는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인데, 현재 대통령직을 놓고 싸우고 있는 오브라도르와 PRI당의 대통령 후보인 로베르토 마드라소는 이미 타바스코주에서도 숙적이었다.

    타바스코 숙적의 재대결

    1994년 타바스코 주지사 선거를 두고 두 사람은 대결을 한다. 연설을 잘하는 로베르토 마드라소는 항상 유세 때면 빨간 셔츠를 입고 나온다. 노동자들을 의식한 강력한 혁명세력임을 자처하는 PRI당은 사회주의적 강령을 내세우고 혁명세력의 특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금권선거, 선거부정 및 폭력과 부패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선거에서 승리한 로베르토의 선거부정에 항의하여 오브라도르는 1995년 내내 비폭력 항의 농성을 하고 엄청난 규모의 민중의 시위와 불복종 운동과 함께 민중정부를 세운다. 그리고 촌탈빠 민중대학을 세우고 농수산물 유통공사를 만들고 실직자를 위한 기금을 만든다는 구체적인 정책을 결정한다. 이어 계속되는 공권력의 탄압과 깡패들을 시킨 폭력 앞에서 오브라도르는 그의 주특기인 멕시코시티까지의 시민행진을 시작한다. 그의 고향인 타바스코주에서 멕시코시티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인데 대장정을 실천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카리스마와 뛰어난 대중동원력을 보여준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깃발

    그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1910년의 혁명을 배반하지 않고 치아파스에 군대를 투입하지 않을 것, 연방정부 예산의 10%를 원주민을 위해 쓸 것, 국영업체의 정리해고 반대, 부패한 전직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의 재산 몰수, 멕시코 국영 석유회사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등 진정한 개혁을 요구했다. 그리고 또다시 두번째 멕시코시티까지 엑소더스 시위행진을 한다. 이들의 시위행진에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격려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멕시코시티의 시장으로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예를 들어,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빈민 노인들, 미혼모와 모자 가정, 장애인, 실업자, 길거리에서 헤매는 극빈 청소년들, 가정폭력의 커다란 피해자인 청소년과 여성들, 의료보험의 한계 밖에 있는 빈곤층 등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이런 진보적인 사회 정책은 현 대통령이 일부 카피해서 대중들의 인기를 확보하려는 전술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그는 이런 사회적 공공성의 정책을 전국으로 확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멕시코의 마초주의, 권위주의적 정치사회의 악영향으로 가정 내 폭력의 수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툭하면 여성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흔하다.

    정부여당, PRI 오브라도르 죽이기 공작 시도, 역효과만 초래

    범죄와의 전쟁, 건설 및 교통시스템의 확장 등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끌어왔지만, 국제적으로 오브라도르의 이미지가 강화되고 국내 정치적 기반도 확고해진 것은 정부 여당과 PRI당의 야합에 의한 오브라도르 피선거권 박탈을 위한 비겁한 고발 때문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공공병원 건설을 위한 도로 확보를 위해 사유지의 일부를 수용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땅 소유자는 수용이 부당하다고 2001년에 멕시코시 검찰에 고발했고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도로 건설이 중지되었는데도 오브라도르가 이를 무시했다는 이유였다. 2005년 1월 오브라도르의 대통령 출마가 확실시되자 검찰총장은 이 사건을 빌미로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하여 피선거권을 무효화시키려는 동의를 의회에 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치아파스에서 연설하는 오브라도르

    이에 2005년 4월24일 멕시코시티 중심부에서 1백2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뒤따랐고 뉴욕타임스 등 외국의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 여당은 결국 이 모두를 포기하고 만다.

    특이한 것은 오브라도르를 둘러싸고 지식인들이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운동 차원이 아니라 그의 창의성 있고 상상력이 넘치는 정치철학과 비전에 대해 흥미를 느껴 전문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이스 만도키라는 다큐영화 전문감독이 그에 대한 다큐영화를 찍었고 정치 사회학자들이 그를 기호학적 대상으로 삼고 두꺼운 연구책자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급진적이면서도 상식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멕시코인들의 가난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은 신뢰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상식을 존중하지만 그는 수십년 동안 시행되어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기를 주장함으로서 단순히 정책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 예술가들 오브라도르 지지 잇달아

    이같은 그의 정치적 비전의 신선함에 대해 예술가 및 많은 지식인들이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멕시코 역사는 오랫동안 배반의 역사로 많은 가난한 대중들은 정치가들 일반에 대해 큰 불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오브라도르는 신뢰성과 함께 이들 대중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특히 앞서 언급했던 그에 대한 현 정부의 탄핵 시도가 오히려 더욱 대중들의 인기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천주교 국가인 멕시코에서 억울하게 의인이 고통받는 모습은 쉽게 그리스도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의 연설은 못배운 대중들이 흔히 쓰는 평범한 단어들과 구어체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멕시코 뿐 아니라 중남미에는 글을 모르는 민중들이 많이 있다. 글을 겨우 알더라도 추상적인 단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구어체 연설은 그들의 집단 무의식에 파고 들어가는 예리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천주교 국가인 멕시코에서는 대중적 인기와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인에 대해서 대중이 신화적인 접근을 한다. 이에 대해 부정부패와 권모술수의 이미지만 가득한 PRI당의 로베르토나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현정부를 계승하려는 평범한 이미지의 PAN당의 펠리페 깔데론 등은 상대가 안 된다.

    사실 오브라도르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거의 유토피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70여년 이상 지배했던 권위주의 정권 그리고 6년 전에 집권한 우파 정권 앞에서 포퓰리스트로 폄하되었던 오브라도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아무도 인정할 수 없었다.

    진보적 시정경험 확고한 지지기반

       
       ▲로베르토 마드리소

    1996년에서 1999년까지 PRD당의 전국의장으로서 여러 군데의 주지사를 확보하였고 특히 멕시코시 의회의 압도적 다수를 확보하였고 하원에서 두번째 정치세력이 되도록 하였고 2000년의 선거에서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 후 현대의 로빈후드로 불리도록 사회적 공공성 정책의 실현에 애를 쓴다. 예를 들어 가난한 노인들에게 매월 약 70불씩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규모 금융 사기사건으로 그 구제를 위해 약 1천억 불의 공공자금이 투입된 포바프로아(Fobaproa)사건을 비판하며 대통령에 당선되면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멕시코의 대표적 은행이었던 바나멕스(Banamex)의 시티뱅크에의 부정 매각도 비판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부정부패 사건을 파헤치는 ‘진실위원회’를 당선된 뒤 구성하겠다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현 대통령 폭스의 아내인 퍼스트레이디 마르타 사하군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부정부패 사건이 사법부의 비겁함으로 밝혀지지 않은 사건을 들 수 있다. 그야말로 어정쩡한 정치공학적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멕시코시티의 시장으로서 행정업무 추진에서 민주주의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가 중요한 이슈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직접 물어보았다는 사실이다 멕시코시티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고가차도의 건설에 대해서도 시민의 의견을 들어 건설에 착공했다. 또한 주민소환제를 정착시켰다. 이와 같은 신임투표에서 90%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경제정책에서 시장만능주의를 버리고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일 것을 약속하고 있다. 국영 석유회사의 민영화는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전기값과 가스값, 휘발유값을 내릴 것을 약속하고 있다. 전기값 인하는 단지 포퓰리즘적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으로 전문가들이 평가하고 있다.

    우파 후보의 오브라도르 공약 베끼기

    여기서 페멕스(PEMEX) 즉 멕시코 국영 석유회사의 민영화는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멕시코 혁명 후 혁명정신을 구현한 마지막 기호로서 읽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전문가들을 내세워 언론을 통해 멕시코 경제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 경제의 구조개혁을 해야 하고 거기에 에너지 개혁의 일환으로 페멕스 일부 기능의 외주 민영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브라도르는 분명한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선거 공약을 경쟁자인 PRI당의 로베르토 마드라소는 그대로 카피해서 자기도 집권하면 똑같이 전기값 등을 인하하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오브라도르는 건설업을 진흥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멕시코 최대의 재벌인 카를로스 슬림이 지원할 것이다. 또한 멕시코의 구조적 취약성의 하나인 인프라 확충을 위한 투자에 있어 공공부문뿐 아니라 민간부문의 투자도 유도하고 있다. 이런 정책은 경제 운용의 시장경제적 원칙을 그대로 지키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거시경제 지표 안정을 위한 통제 위주의 인플레정책을 풀고 중소기업 지원을 통한 경제활성화를 도모할 것을 약속하고 부유층의 탈세를 방지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지나친 안정 위주의 경제 정책은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지 못하고 고용 문제도 심각하게 방치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현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재정적자를 초래하지는 않을 거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집권 후 은행의 국유화 등의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사회정책 수행을 위한 재정확보는 정부 예산 중 경상비의 지속적인 상승을 행정개혁을 통해 절감하여 충당할 것이라고 한다. 공공 계약의 투명성 확보 및 부정부패의 퇴치를 통해서도 재정확보가 가능하다고 보고있다.

    나프타 재협상 약속

    그리고 중요한 것이 멕시코 농민들에게 치명상을 안겨준 나프타의 재협상을 약속하고 있는 점이다. 멕시코인들의 주식인 옥수수와 콩의 전면적인 수입개방을 반대하고 있다. 사회정책에 있어 빈곤퇴치를 위한 사회개발 전국 프로그램을 실시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범죄단체와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 것이며 마약단과 공무원의 결탁도 척결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또한 원주민의 권리 보장을 위한 1996년 정부의 약속을 지킬 것도 천명하였다. 초중등 공립학교와 공립대학의 증설을 약속했다. 그리고 모든 가난한 국민들을 위한 무료진료와 치료를 약속했다. 정직을 행정부의 최고 규약으로 삼으면서 부패와 싸울 것도 약속했다.

    고급예술에 대한 전국민의 접근권, 즉 문화 민주주의를 약속했으며 원주민 등 소수자의 문화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고 공공 도서관을 확충하고 과학 기술에 GDP의 1%를 투자할 것도 약속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브라도르가 대통령이 되는데 가장 큰 장애는 1930년대의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 시절을 빼고 좌파 대통령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2000년에 집권한 폭스 대통령은 그 이전 정부의 워싱턴 컨센서스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하면서 정권교체 이전의 PRI당과 사실상 연정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더 큰 장애는 미국이 과연 멕시코의 좌파 대통령을 용인하고 싶어할 것인가이다. 또한 기업인들과 외국인 투자업체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브라도르는 아마 전략적인 이유인 것 같은데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거리를 두고 있고 마찬가지로 마르코스도 오브라도르를 ‘중도우파’ 로 명명하면서 진정한 좌파가 못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마르코스, "오브라도르 진정한 좌파 아니다"

    오브라도르의 대중 동원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선거 유세 때마다 모든 광장이 인파로 뒤덮여 왔다는 사실이다. 또한 멕시코시티의 시장으로서의 구체적인 업적으로 인해 그의 약속이 지켜질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그의 단순하고 솔직한 화법이 대중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가져온다.

       
    ▲멕시코 혁명의 상징 에밀리아노 사파타

    오브라도르의 정치적 자산에 대해 보수층이 공격하는 수단중의 하나가 그가 ‘포퓰리스트’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포퓰리즘이란 용어 자체가 엄청나게 애매한 해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의 평가의 키는 민중, 시민이 쥐고 있다"고 했다. 파우스토 페르난데스 뽄세는 "용어의 단순한 정의를 넘어 포퓰리스트는 덜 오염된 사회적 요소를 불러조오고 자본에 의해 침해된 대중의 목소리를 불러온다"고 했다.

    오브라도르에 대한 포퓰리스트 비난은 멕시코 우파 지식인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한 문학 잡지의 발행인인 엔리케 크라우세는 계몽주의적 톤으로 "오브라도르는 권위주의적이고 메시아적이라 그가 집권하면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독재체제로 가게 되며 현재 중남미에는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포퓰리즘이 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통인 전직 대통령 에르네스토 세디요도 비난 대열에 합세하고 있다. 그는 유명한 미국 잡지 <포브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중남미 포퓰리스트들의 정책은 그들이 무책임한 약속을 집행하려고 할 때, 전에는 몇 달 아니면 몇 년씩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몇 시간 아니면 며칠 안으로 시장에 의해 저지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정책은 국내총생산, 고용, 인플레 등의 경제지표에서 위험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자유주의 경제 전문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내 꿈은 정권교체 아니라 멕시코의 진정한 변화"

    이에 대해 오브라도르는 북부지역의 선거유세에서 "모든 국민들이 참여해서 우리나라의 진정한 변화를 이룩해보려고 한다. 단지 대통령이 되고 정권교체에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다. 억압과 부패와 특권의 체제를 바꾸어보자는 것이다. 밑바닥 PRI당의 당원과 PAN당의 당원들도 우리와 생각이 같을 것이다.…나는 멕시코 민중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우리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고 했다.

    오브라도르에 대한 포퓰리스트 비난은 멕시코 국내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거의 대통령 선거가 겹치는 멕시코와 자국 페루를 두고 페루의 유명한 작가이자 우파 이데올로그인 바르가스 요사는 "다시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 잘 뽑아야 한다.

    우리의 불쌍한 베네수엘라 형제들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면 안 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건설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정권교체로 물러난 스페인의 우파 정치인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도 "포퓰리즘의 환상에 속지 말라"고 포퓰리스트 비난에 합세하고 있다. 여기에 오브라도르는 선거유세에서 PAN당은 ‘우파 왕자’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비판했다.

    오브라도르가 정치적 적수들로부터 포퓰리스트로 비난 받을 만한 소지가 된 것이 있긴 있었다.

    선거 유세 기간 중, 그는 대중들에게 현 대통령 폭스에게 전직 대통령 연금을 지급해야 하냐고 물어 대중들이 ‘노’ 라고 외치게끔 만들었던 에피소드도 있다. 풍자와 유머의 감성적 접근도 활용하는 것 같다. 그는 1995년의 지방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대장정 끝에 대통령 궁 광장 앞에 선거 투표함을 내려놓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멕시코 자생적 좌파 정치철학과 비전 보여준 정치인

    오브라도르의 정치철학은 전문가들에 의하면 멕시코 혁명 이후 1930년대에 집권했던 라사로 까르데나스의 사회주의적 기호를 가진 대중위주의 정치철학과 혁명 이후 노동자, 농민 지도자들의 철학과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선후보 토론회 기사를 실은 멕시코의 일간 <라 호르나다>

    그 당시와 사회 역사적 맥락이 바뀐 것은 물론이고 오브라도르는 대중 중에서도 특히 도시빈민 문제를 중시하고 있는데, 이는 약 30년에 걸쳐 시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경제, 사회정책 즉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인 사회적 소수가 몰려 있는 곳이 도시 빈민가라는 점에서 멕시코 경제, 사회 문제의 핵심을 잘 짚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도, 제도도 아니고 ‘시민이 권리를 가지는’ 것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오브라도르의 역정을 보면 그는 민주주의 그 중에서도 시민의 사회권을 중시하는 좌파 민주주의자이고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멕시코 자생의 정치철학과 비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70년대 이후 중남미 전체의 체험이 보여주듯이 미국의 개입이 커지면서 멕시코 자체의 사회 발전 동력이 왜곡되어 온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멕시코 대중의 힘의 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70년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68년에 멕시코시티에서 올림픽이 열리면서 진보적 학생운동을 유혈로 진압했던 사건은 이정표적 의미를 가진다.

    1910년의 혁명정신과 30년대와 60년대의 진보적 열정이 가득했던 멕시코의 정통성을 80년대 신자유주의 출범 이후 30년 만에 다시 이어받으려는 정치인에 의해.

    마지막으로 멕시코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잇는 라사로 까르데나스(1895~1970)의 1934년에 행한 다음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나는 확신한다…통치자의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집단의 요소가 불가결하다.…멕시코의 국민들에게 다음의 단어들은 공허하기만 하다.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경제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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