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보는 시각, 시민단체와 민주노동당의 착각
    2006년 06월 07일 01: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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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선수 많이 맞고 있어요. 저럴 땐 어찌해야 하죠?” “일단 맞지 않아야 합니다. 매에 장사 없거든요.” 바보들의 행진 같은 권투 중계를 듣다 보면 울화통이 돋는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골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골을 안 먹는 팀이 이기는 겁니다.” 따위 하나마나한 중계와 해설을 들을 생각을 하니 암담하기 그지 없다.

필자와 1980년대 노동운동을 함께 헤쳐 나갔던 지방선거시민연대 공동사무처장 오관영 동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시 사람 속에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에서 사람들을 바꿔 나가는 운동이 다시 한 번 필요합니다(<시민의신문> 6월 5일).” 매니페스토 추진본부의 유문종 집행위원장도 같은 견해인 듯 하다. “이번 선거 결과로 시민사회가 할 일은 분명해졌습니다. 지방자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지역 역량 강화가 우선입니다(<시민의 신문> 6월 1일).”

시민운동에서 꽤나 멀리 나간 체 하던 민주노동당의 진단과 대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역시 지역을 튼튼한 근거지로 만드는 데 헌신해야 한다. 다양한 지역조직을 만들고 지역운동을 펼치며 당을 강화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김창현 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풀뿌리 판갈이 뉴스> 6월 1일).”

   
▲1990년 민중당 창당발기인대회

“꾸준히 지역사업을 하자”는 너무도 당연한 주장이라면 굳이 되풀이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중당 후보 51명이 낙선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러한 진단과 대안이 매번의 선거 때마다 마치 금과옥조인 양 되풀이 되는 데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노동당의 일부는 지역의 경실련과 환경운동연합으로 산개했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일부는 주부컴퓨터교실과 한글학교를 만들었다.

15년 가까이를 지역에 몸 바친 오늘의 성과는 어떠한가? 내가 지역 중심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지역주의가 판치는 한국에서조차 지역에 근거한 정치적 승리나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적이 없고, ‘지역’이라는 것이 실체가 아닌 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에는 지역이 하나의 단위였다. 그 때의 지역은 단일한 문화공동체였고, 생산과 소비 주거가 함께 일어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생산과 소비 주거를 분리시키면서 진보적 사회운동의 고민이 시작된다. 러시아에서는 생산지를 저항의 근거지로 선택(정확하게는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하고, 대부분의 유럽 나라에서는 주거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운동을 펼친다.

자본주의 나라들이 사회적 의사 결정의 장(선거구)으로서 지역을 택하면서도 계층이나 직능 대표성을 병행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지역이라는 것이 다분히 행정적 편의적 획정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광진구와 성동구는 다른 지역인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공약대로 대구와 경북을 통합하면 500만 명짜리 주민공동체가 생기는가?

설사 지역이 핵심이더라도,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수다. 박정희는 지역에서 출발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고, 김대중의 지역연합은 지역사업의 산술적 확대가 아닌 정치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1980년 5월을 ‘광주 지역’이라고 평하는 것은 부관참시이고, ‘붉은 악마’ 같은 문화적 신드롬들에서는 지역과 연관되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사회운동적 의미에서의 지역이란, 50년 동안 조직돼온 보수정당의 단단하고 촘촘한 선거조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민당부터 열린우리당까지의 그 역사를 복기하는 것은 전혀 지혜로운 짓이 아니다. 지역구 선거에서 졌으니 지역에 집중하라는 말은 배고프면 밥 먹으라는 앙뜨와네뜨식 해법에 다름 없다.

   
▲ 울산광역시음식업지부 등 지역의 7개 시민·사회단체 회원 150여명이 지난 5월 16일  울산 북구 양정동 현대차  정문 앞에서 "노조도 현대차 살리기에 동참하라"고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갖고 있다.(울산=연합뉴스)
 
 

지역에는 누가 있는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참여연대 회원의 60%를 점한다는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지역을 거점으로 생활하거나 활동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 최대의 조직 집단인 150만 명의 노동조합원은 세계최장노동시간이라는 라이프스타일에 의해 이웃과 말할 기회조차 봉쇄돼 있다.

낮에도 밤에도 지역에 있는 사람, 그래서 지역의 사회적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유통업 분야의 자영업자들이다. 주민의 다수 집단인 노동자들은 매해마다의 임금인상투쟁 부담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꺼리지만, 지역의 의사결정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의 자영업자들은 사업 속성상 인플레이션을 선호한다.

노동자들은 생활의 공공적 보장을 희망하지만, 자영업자들은 공공의 축소가 시장의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근로소득에 의존하는 노동자들은 부동산가 인상을 별로 달가와 하지 않지만, 자산의 대부분과 소득의 상당 부분을 부동산에 의존하는 자영업자들은 난개발을 갈구한다. 지역에 밀착해 있다는 풀뿌리 시민단체들이 난개발에 찬성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들이 대변하려는 ‘지역’이 자영업자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나 민주노동당의 많은 사람들은 지역을 균등한 질을 지닌 하나의 공간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런 의미로서의 지역은 실재한 적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다. 중앙이, 조직된 계급 집단이 제도를 두고 투쟁하는 곳이라면, 지역은 다양한 계층 커뮤니티가 대면 갈등하는 장이다. 진정으로 진득하게 풀뿌리 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 숨어 있는 풀뿌리를 캐보라. 푸른가? 풀뿌리는 희거나 붉다.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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