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원을 둘러싼 싸움
    [국공내전⑨] 산둥성 딩타오 전투
        2019년 01월 17일 03: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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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회의 글 [국공내전-8] “결국 내전이 폭발하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정세인식

    중국 철도노선을 보면 베이징에서 우한에 이르는 징한철도가 있다. 국민정부 시절에 베이징의 이름이 베이핑이었으므로 이 철도를 핑한철도라고 불렀다. 베이징에서 스쟈좡을 거처 정저우, 그리고 우한에 닿는다. 핑한철로와 나란히 남쪽 세로 방향으로 나아가는 노선이 진푸철로이다. 베이징과 이웃한 도시 텐진에서 난징의 푸커우를 잇는 철도이다. 중간에 산둥성 성도인 지난을 지나 쉬저우를 거쳐 난징에 닿는다. 난징에서 동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상하이이다. 동서쪽으로는 룽하이(龍海) 철로가 있다. 서쪽의 간쑤성 성도인 란저우에서 동쪽의 장쑤성 롄윈강(連云港)에 이르는 노선이다. 이 노선은 산시성 시안을 거쳐 뤄양(洛陽), 정저우, 카이펑, 쉬저우를 지나며 동쪽 바다의 항구도시인 롄윈강에 다다른다. 창장강은 티벳에서 발원하여 칭하이, 쓰촨을 거쳐 윈난, 후베이, 안후이성을 거쳐 난징으로 흘러 황해에 이른다.

    이 세 노선의 철길과 창장강, 그리고 황허 주변이 국공내전이 벌어진 주요 무대였다. 동북쪽에서도 커다란 싸움이 벌어지지만 나중에는 결국 중원을 놓고 자웅을 겨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쑤성에서 쑤위의 해방군 부대와 리모안의 국군이 마지막 결전을 치를 무렵, 장제스와 천청 참모총장이 군사지도를 보며 숙의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어디를 다음 전장으로 할지 골몰하고 있었다. “철로선이 가장 중요해. 중국을 세로로 내려오는 두 갈래 철길, 룽하이로와 진푸로 그리고 가로로 건너가는 룽하이 철로와 창장, 그 안쪽을 완전히 평정해야 하네. 철길과 강 안쪽을 보라구. 이게 어떤 모양인가?” “우물 정자로군요.” “맞아, 우물정자 안쪽을 튼튼히 굳혀야 하네. 다음에 바깥쪽을 소탕하면 천하가 안정되는 거지.” “영명하십시다.”

    장제스는 철도를 파괴하는 공산군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국민정부군이 점령한 대도시를 통치하려면 철도의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것을 잘 아는 해방군과 유격대는 걸핏하면 철도와 도로를 파괴하거나 공격하였다. 장제스는 우선 장쑤성과 산둥성, 그리고 허난성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중원해방구를 공격하여 리센녠 부대를 몰아내었으며 장쑤성 중부에서 쑤위의 부대와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제 산둥성에 있는 천이의 진지루위(산시성, 허베이성, 산둥성, 허난성 관할) 야전군과 전투를 시작할 참이었다. 장제스는 이 싸움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였다. 해방군 사령인 류보청은 결코 쉽게 볼수 없는 맹장 중의 맹장이었다. 장제스는 국방부장 바이충시, 참모총장 천청을 허난성의 고도인 카이펑으로 보내 독전하게 하였다.

    장제스는 늘 “도시가 없이는 정치적 기초가 없다. 교통이 없으면 정치적 명맥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근거지나 배경, 경험에 기초해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그는 난징, 상하이, 베이징, 충칭 등 대도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자본가들과 지주들이 지지기반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는 것이 치명적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전 초기 그는 도시를 점령하고 교통선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도시와 교통선을 기반으로 해방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한편 마오쩌둥은 해방군 총사령인 쭈더, 총참모장 예젠잉(葉劍英)과 함께 지도를 보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장제스군 태반이 이 우물정자를 둘러싸고 있소. 철로로 둘러싸여 적이 쉽게 이동하니 우리에게는 사지라고 할 수 있소. 우리는 저 곳을 한꺼번에 공격할 게 아니라 한입씩 베어 먹어야 하는 거요.” 하고 말문을 열었다. 쭈더는 “적의 부대배치로 보아 첫 입은 허난성 동쪽이 아니오? 그렇지 않으면 산둥성 서남쪽이라 할 수 있소.”하고 호응했다. 마오쩌둥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으니 공격방향이 정해진 셈이었다.

    예젠잉이 제안했다. “적은 파벌 싸움이 심합니다. 쉬저우 수정공서와 정저우 수정공서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이 점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하고 제안했다. 쉬저우 수정공서 주임은 류즈이고 정저우는 쉐웨가 맡고 있었다. 류즈는 지난번 중원에서 리센넨 부대를 포위했다가 놓쳐서 장제스로부터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쭈더가 “맞아요. 우리는 당이 지시하면 그대로 따르지만 그쪽은 그렇지 않소. 전부터 천청계다 허잉친 계열이다 하여 알력이 많지요.” 하자 예젠잉은 “직계부대와 잡패군 간에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직계군이 공격받으면 잡패군이 잘 도우려 하지 않지요.” 하고 설명했다.

    마오쩌둥은 “좋소, 류덩에게 전보를 보내 그 점을 환기시키시오.”하고 지시했다. 마오는 다시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면 안 되오.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하지. 그러려면 적보다 항상 병력이 많아야 하오. 사대일이 가장 좋고 최소한 삼대일은 되어야 합니다. 열손가락을 조금씩 다치게 하는 것보다 한 손가락을 완전히 자르는 게 중요해요. 기본적으로 적을 분할해서 각개 섬멸하도록 작전을 세우라 하시오.” 하고 매듭지었다.

    마오쩌둥의 이런 방침은 타이웨(太岳) 종대 사령원인 천겅(陳賡)의 경험에서 얻은 것이었다. 1946년 7월 국민정부군 시안공서 후쫑난 사령관이 지휘하는 정편 1사단 등 5만명이 타이웨 해방구를 공격해왔다. 그때 천겅은 4종대와 지방부대를 지휘하여 맞아 싸웠다. 천겅은 주력을 집중하여 적 일부를 각개격파하는 방침을 채택하여 원샤(聞夏)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했다. 매 전투마다 적의 3배나 4배가 되는 병력을 동원하여 국민당군 2개 연대와 다른 3개 대대를 섬멸했다. 천겅의 부대가 전투마다 승리하자 마오쩌둥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즉시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보를 기초하여 전군에 알리도록 지시했다. 마오저뚱은 천겅의 사례에서 크게 영감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전략방침은 1당 10을 지향한다. 하지만 전술방침은 10당 1이다. 우리는 매 전투마다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법칙이다.”하고 주장했다.

    천청과 허잉친의 알력

    국민정부군 장교들 사이에는 알력이 있었다. 특히 군부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천청과 허잉친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허잉친은 1945년 9월 8일 일본 주둔군 대표인 오카무라에게 항복을 받은 중국군 대표였다.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것이다. 이런 허잉친이 후임인 천청을 얕잡아 볼 가능성이 높았다. 허잉친은 1890년에 출생했으므로 장제스와 세 살 차이의 동년배였다. 장제스처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하여 서로 동질감이 강했다. 허잉친은 장제스에게 중용되어 1930년대에 이미 육해공군 총사령관, 국민정부 군정부장 등 군부의 핵심 요직을 두루 경험했다.

    그러나 허잉친에 대한 장제스의 불만도 조금씩 쌓여갔다. 1927년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공산당과 노동자들을 학살하여 우한의 왕징웨이 등에게 공격을 받을 무렵 허잉친은 장제스를 위한 변호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안사변 때에는 난징에 있던 허잉친이 장쉐량과 양후청의 토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신임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제스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강경한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허잉친이 계속 중용된 것을 보면 그렇게만 바라볼 수도 없다.

    일본군에게 항복을 받는 허잉친

    허잉친

    천청은 1898년에 저장성 이수이(麗水)시 칭톈현(青田縣)에서 태어났다. 장제스와 같은 저장성 사람이므로 일단 눈에 들기 좋은 조건이었다. 천청은 젊은 시절 바오딩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으나 미끌어졌다. 성적이 나쁘고 체구가 너무 작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시험관에게 줄을 대 보결로 입학하여 포병과를 졸업했다. 그는 1920년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혁명군 장교가 되었다. 천청은 국민혁명군 중대장으로 1923년 반란을 일으킨 션홍잉(沈鴻英)부대를 토벌하던 중 가슴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치료 중에 부상병들을 위로하러 온 장제스를 처음 만났다. 장제스는 당시 국민혁명군 대원수부 참모장 신분이었다. 그후 천청은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거쳐 군벌들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전했다. 1927년 사단장이 되어 산둥군벌 쑨촨팡(孫傳芳)을 토벌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으나 허잉친에 의해 면직을 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위경련에 시달리던 천청이 들것 위에서 부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천청의 부대가 적을 격파했는데도 억울하게 모함을 당했다. 천청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1927년 잠시 사임했던 장제스가 총사령관으로 복귀하자 천청은 총사령부 경호부대 사령으로 임명되었다. 우리로 말하면 수도방위사령관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천청은 장제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불과 일 년 뒤 천청은 군단장이 되어 장제스 직계군의 핵심요원이 되었다. 천청은 지휘능력도 뛰어나 광시군벌과의 전쟁, 중원대전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천청은 3차부터 장시성 공산당 소비에트 포위 토벌전투에 참여했다.

    천청

    1932년 5차 ‘포위토벌’ 전투에 참가할 때 천청은 ‘한전제(限田制)’ 실시를 건의하였다. 공산당의 토지개혁에 맞서 국민정부도 ‘경자유전’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정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자는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천청은 공산당 소비에트가 있는 장시성부터 실행하자고 했지만 성 정부 주석인 숑스후이가 거부하여 실패했다. 거부한 것은 숑스후이지만 장제스를 포함한 국민정부 인사들도 내심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경자유전’은 쑨원의 지도철학이기는 했지만 지주와 도시 매판 자본가들을 기반으로 한 국민정부 지도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안이었다.

    4차 포위토벌이 실패한 뒤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에서 장교들을 모아 훈련연대를 개설하고 스스로 연대장을 맡았다. 장교들의 자질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이었다. 천청은 부연대장을 맡아 장의 심복이 되었음을 입증했다. 장제스가 있었으므로 당과 정부 인사들이 드나들며 훈련상황을 함께 지켜보았다. 그때 천청은 그 시기를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았다. 천청은 삼십여 차례의 훈화를 통해 줄곧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그는 언제나 “통수권자에게 복종하라. 영수에 대한 신앙을 가져라. 총사령관이 오면 즉시 부동자세를 취하라.”는 식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장제스가 주장하던 “먼저 내부를 안정시키고 외부에 대응한다.”는 반공방침을 역설하여 장을 뒷받침했다.

    1934년 장시성 소비에트에 대한 5차 토벌에서 천청은 33개 연대를 이끌고 린비아오의 27개 연대와 격전을 치러 광창을 함락했다. 그런 다음 해방구로 밀고 들어가 견디지 못한 공산당으로 하여금 장정을 떠나게 하였다. 1936년 훙군이 섬북에 도착한 뒤 천청은 진수섬감(산시, 쑤이위안, 섬서, 간쑤) 비적토벌 총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리쫑런 등이 장제스를 반대한 ’양광사변‘을 일으켜 그곳을 방비하러 떠났다. 서안사변에서 천청은 장제스와 함께 억류를 당하기도 하였다. 서안사변 뒤 장제스는 도피했던 장소에 ‘정기정(正氣亭)을 세우고 천청, 다이지타오(戴季陶), 천리푸(陳立夫), 후쫑난(胡宗南), 왕야오우(王耀武) 등 심복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장제스에게 잇따라 시를 지어 바쳤다. 장제스로서는 굴욕의 장소에서 충성을 다짐받았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 따라하기 힘든 독특한 행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2차 국공합작 뒤 천청은 “국공이 협력하여 일제에 항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항전은 조만간 하면 된다. 하지만 위원장의 전략과 의도를 우리가 짐작할 수 없다. 우리는 복종만 하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천청은 1937년 상하이에서 일본군 상륙에 맞서 싸웠다. 1943년에는 후베이성에서 일본군에 승리한 ’후베이 서부 대첩‘을 지휘했다. 천청은 1946년 허잉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허잉친과 천청은 나이나 경력으로 보아 경쟁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충성 경쟁을 유도하며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는 장제스에게는 예전 동료였던 허잉친보다 천청이 다루기 편했을 것이다. 허잉친에게는 군부의 실무를 장악한 후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허잉친은 천청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UN 안전보장이사회 군사참모단 중국 대표를 맡았다. 실권은 없는 명목상의 직책이었다. 허잉친은 다른 수많은 국민당 장군들처럼 직위를 이용하여 축재를 일삼았다. 그는 소수민족의 토지를 겸병하여 고향인 구이저우에서 가장 부유한 대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국민당 정권은 초기에는 군벌들과 이합집산을 통한 일종의 연맹체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나중에는 장제스의 권한이 강해졌지만 여전히 군벌 출신들을 권력과 돈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력으로 아우르는 군벌연합 정권이었다. 허잉친은 국민당 장군 중에서도 개혁을 극도로 싫어하고 현상유지를 원하는 대표격이었다. 그에 비해 천청은 군부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부패를 미워했다고 한다. 둘은 필연적으로 경쟁관계가 되었으며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돌게 되었다.

    긴다리 장군 류즈

    정저우 수정공서 주임 류즈는 중원 공격에서 리센녠 부대를 놓쳐서 장제스에게 크게 질타를 당했다. 그는 본래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 때문에 크게 신임을 받았다. 젊은 시절 장제스를 따라 군벌들과 싸우며 공을 세워 ‘5호장군의 첫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산함 사건’ 때 류즈는 사단과 해군 내의 공산당 대표와 당원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섰다. 1927년 상하이 사변 때는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공산당원 체포에 열을 올렸다. 북벌과 중원대전에서 공을 세운 그는 ‘상승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상장으로 진급하며 ‘복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 중산함(中山艦) 사건은 ‘3.20 사건’이라고도 한다. 1926년 3월 20일 장제스가 부대를 이동시켜 리지룽(李之龍) 등을 체포하고 중산함과 다른 선박들을 억류한 사건이다. 장제스는 이때 광둥과 홍콩의 파업위원회 노동자들을 포위하고 무기를 거둬들인 다음, 황푸 군관학교와 국민혁명군 내의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원들을 축출했다)

    잘 나가던 그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서안사변 뒤였다. 그때 류즈는 장쑤성에서 부대를 검열하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신속히 뤄양으로 갔다. 군정부장인 허잉친이 부대를 집결시켜 서안의 동북군 및 서북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류즈는 부대를 시안에 바싹 접근시켜 겹겹으로 포위하였다. 그 후 비행기를 타고 시안 상공에서 전단과 표어를 살포했다.

    류즈의 행동은 쑹메이링과 쑹즈원, 쿵상시, 구쭈통등 장제스 측근들의 의견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허잉친과 류즈의 행동은 장제스를 사지로 내모는 일이었다. 허잉친의 명령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쑹메이링 등의 눈 밖에 났다. 장제스가 풀려나 뤄양공항에 오게 되자 류즈는 고급 장교들을 인솔하여 영접하러 갔다. 장제스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장교들과 함께 깃발을 흔들며 “교장의 승리 환영, 장 주석 만세!, 장쉐량과 양후청을 타도하자.”고 외쳤다. 하지만 장제스는 침통한 어조로 “깃발 내려. 구호도 외치지 말게.”하고 류즈를 제지하였다. 잘 보이려 했지만 눈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변함없이 그를 신임했다. 쑹메이링이 왜 류즈를 중용하느냐고 묻자 장제스는 “그보다 충성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이오?” 하고 대답했다 한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1937년에 류즈는 국민정부군 제1전구 사령관 겸 2집단군 사령관을 겸했다. 하지만 첫 전투인 핑한루 전투에 패한 뒤 천리를 달아나 ‘긴다리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민정부가 충칭으로 천도한 뒤에 그는 충칭 위수사령관 겸 방공사령관을 맡았다. 그에 대한 장제스의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충칭에서 그는 방공설비 및 보급품 구매에 필요한 돈을 착복하여 ‘공돈장군’이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그런데 그가 지휘책임이 있는 방공호가 부실하게 건설되어 1941년 ‘충칭 방공호 참사’ 사건이 일어났다. 오천명이 수용된 방공호에 일본군 폭격기가 공습하자 수천명이 질식사하거나 중경상을 입었던 것이다. 높이 2미터, 폭 2킬로미터의 방공호에 나무널판으로 벽을 만들었을 뿐 아무 시설도, 준비물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통풍구, 의약품, 비상등 같은 기본적인 설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류즈는 부하들과 함께 특별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직을 거두는 것으로 끝이 났다. 거액의 뇌물을 받은 허잉친 등이 재판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류즈는 2급 상장이다. 형식적으로 심문하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중국의 내전 드라마에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정저우 수정공서 주임인 류즈는 천청이 직접 작전회의를 주재하러 오자 걱정이 앞섰다. 참모장인 자오즈리(趙子立)에게 “지난번 중원에서 실패한 것도 있고 천청이 이번에 조용히 있지 않을 거요.” 하고 걱정하자 자오는 “아마 그럴 겁니다.”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류즈는 상장(중장과 대장 사이의 계급)이고 자오즈리는 중장 계급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참모장은 왜 그렇게 천청에게 밉보인 거요? 그게 나 때문이오?” 류즈가 묻자 자오는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하고 부인했다. “사령관도 잘 아시잖습니까? 쉬저우 수정 주임인 세웨 사령관이 천청의 수하입니다. 그런데 제가 전에 쉐웨 사령 밑에서 참모장을 했지요. 그래서 저도 천총장 계열로 알려졌지요. 그런데 쉐사령과 헤어져 허잉친 사령관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잉친 장군계로 알려져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그런가?” “천 참모총장 눈에는 제가 대역무도한 사람이 된 거지요.”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처럼 국민정부군 고급장교들 사이에는 여러 파벌이 있었으며 국민당에도 파벌 다툼이 이어져 국공간의 경쟁에서 중요한 약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산둥성 딩타오(定陶)의 싸움

    류즈가 싸워야 할 적수는 진지루위(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성 관할) 야전군 사령원 류보청과 정치위원 덩샤오핑이었다. 1946년 8월 중순 국민정부군이 한창 중원군구의 리센녠 부대를 공격하고 있을 무렵 진지루위 해방구도 국민정부군 30만명이 공격해 오고 있었다. 8월 하순이 되자 장제스는 쉬저우 등에서 3개 사단을 이동시켜 중원 야전군을 추격 및 차단하고자 하였다. 또 정저우 등에서 8개 사단 등 모두 14개 사단 32개 여단을 전장에 투입했다. 여기에 맞서 싸울 류덩 부대는 4개 종대와 지방부대를 합하여 5만여명이었다. 병력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에서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국민정부군을 각개격파하고자 하였다. 적을 유인하여 깊이 끌어 들이고 이동 중에 섬멸할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운동전은 해방군의 장기였으며 이번에도 퇴로를 차단한 채 정면과 후면에서 협공하는 집게형 공격을 펼칠 생각이었다.

    딩타오전투 형세도 붉은색 화살표가 해방군 진격로 푸른색이 국군 진격로이다.

    그때 국민정부군은 쉬저우 쪽과 정저우에서 서진하고 있었는데 류즈가 총지휘를 맡았다. 류즈는 3사단과 47사단으로 딩타오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딩타오는 산둥성 서남부에 있는 허쩌시(荷澤市)에 속해 있는 구인데 당시는 현으로 되어 있었다. 이때 선봉을 맡은 정편 3사단장은 육군 총사령 구쭈통의 외조카인 자오시텐(趙錫田)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자오시텐은 중장으로 그가 지휘하는 3사단은 장제스의 직계부대였다. 천청으로부터 직접 격려를 받은 그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자오시텐은 자신의 힘만으로도 류덩부대를 섬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다른 부대들이 주춤거리는 가운데 부대를 재촉하여 맹렬하게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에게 “류보청 부대는 벌써 싸울 생각을 잃고 있다. 우리는 2주일 안에 비적의 소굴을 점령하고 곧장 타이항산으로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결과 후속부대와 3사단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서로 응원하기 곤란한 형세가 되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먼저 3사단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3개 종대 병력으로 각각 3사단 1개 연대씩을 맡아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 1개 종대는 3사단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47사단을 견제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격하는 해방군과 국군 3사단의 병력 대비가 5대 1로 역전되어 해방군이 아주 유리한 형세로 되었다. 류보청은 먼저 2개 소규모 연대를 시켜 이동방어와 소모전과 지연전을 펼치며 3사단을 예정된 전장으로 유인하였다. 해방군은 다른 방면에서 전진해오는 3개 사단을 견제하는 한편 47사단과 3사단 간의 간격을 계속 벌려 나갔다.

    이때 국민정부군 정저우 사령관 류즈는 3사단과 47사단으로 딩타오를 합동공격하려던 계획을 바꿔 각각 허쩌와 딩타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9월 3일이 되자 두 사단 간의 거리가 12킬로미터 이상으로 벌어졌다. 나머지 국민정부군 사단들은 두 사단과 최소 40킬로, 먼 곳은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지게 되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47사단이 예정된 따양후(大陽湖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였다. 해방군 지휘부는 응원군이 오기 힘든 지금이 공격의 적기라고 판단하고 3일밤 11시 30분 갑자기 총공격을 시작했다.

    국민당군 1개 사단을 분할 포위한 뒤 다시 그중 1개 여단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해방군이 사면에서 공격하자 3사단 20여단은 6일 새벽에 모두 섬멸되었다. 3사단장 자오시텐이 류즈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류즈는 47사단에게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해방군 1개 종대에 막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자오시텐은 비행기와 탱크가 지원하는 가운데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6일 모두 섬멸당하고 자신은 포로로 잡혔다. 정편 3사단이 섬멸되자 국민당군 각로 부대는 놀라서 모두 철수했다. 예젠잉이 예측한 대로 국민정부군 부대들의 협력하지 않는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해방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원하러 왔던 47사단을 맹공하여 2개 여단을 섬멸했다.

    딩타오 전투 당시 해방군의 지휘소

    딩타오 전투에서 해방군이 노획한 탱크

    해방군은 전투가 시작된 지 5일만에 국민당군 1개 정편 사단 4개 여단 1만 7천명을 섬멸했다. 그중 사상자가 5천명, 포로가 1만 2천명이었다. 해방군은 3천 5백명이 사상 당했다. 이 전투는 해방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했지만 고비도 있었다. 3사단을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47사단이 응원하여 가장 가까울 때는 서로의 거리가 10리(5킬로)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정부군은 투지가 부족했다. 해방군의 저지선을 뚫지 못해 합류에 실패했으며 나머지 지원부대들도 겁을 먹고 주춤거리며 접근하지 못했다. 류보청은 중앙군사위에 쓴 보고서에서 딩타오 싸움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적을 유인하여 공격하였다. 운동방어전을 준비했으며 전투력이 약한 부대를 집중 공격했다. 직계군과 잡패군 사이에 병력을 투입하였다. 직계군이 공격받으면 잡패군은 구원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대담하게 주력을 두 사단 사이에 투입하여 서로 갈라 놓았다. 아군은 공습에 대하여 대책이 없었다. 적의 화력이 강한 조건에서 대낮에 전투하기가 힘이 들었다. 마땅히 극복해내야 한다.”

    참전했던 해방군 하급 지휘관이 쓴 전투 수기는 이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도원 주후이(朱揮)는 머리, 가슴, 다리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다. 선혈이 군복을 붉게 물들였으나 그는 여전히 전사들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소대장 쑨진구이(孫金貴)는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았다. 그러나 전사 세 명을 데리고 진지 전방의 적에게 돌격했다. 전사 리싼위안(李三元)은 적의 기관총 진지에 다가가 옆에서 돌진했다. 두 손으로 달아오른 총신을 잡고 적과 밀고 당겨 기관총을 빼앗아 적들을 섬멸했다. 54연대 진지 전방에는 적의 시체가 가로 세로로 누워 있었다. 적이 십 몇 차례나 돌격해 왔지만 모두 격퇴했다. 따양후를 공격하던 6개 연대는 사상자도 많았다. 총알도 다 떨어져 가고 수류탄도 떨어졌다. 종대 사령원인 왕진산(王近山)은 이런 상황을 류덩 등 지휘부에 보고했다. 류보청 사령원은 덩샤오핑에게 전체 지휘를 맡기고 자신이 직접 6종대 지휘소로 갔다. 류보청은 왕진산에게 ”적이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희생이 있지만 적의 사상이 훨씬 더 많다. 적 연대장이 여단본부에 보고하기를 “우리는 15분간 버틸 수 있다. 15분 안에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나는 자살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내자.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류보청 사령원이 직접 지휘하러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6종대 부대원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따양후를 공격하던 6개 연대의 모든 기간 간부, 심지어 마필 관리병, 취사원까지 전부를 전투에 투입하였다. 겨우 5분만에 버티던 적 59연대 병사들이 줄지어 투항했다. 자살하려던 국군 연대장 우후이둥(吳輝東)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포로가 되었다.”

    9월 8일 딩타오 전투는 해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장제스가 시도했던 중원야전군 섬멸, 쑤위의 화중 야전군 공격, 진지루위 해방구 점령 및 야전군 섬멸이 실패로 돌아갔다. 공산당은 전체 전황이 불리한 가운데 치고 빠지는 전략과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통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딩타오 전투의 승리에 마오쩌둥이 기뻐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9월 16일 전군에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하라.“는 지시를 하며 딩타오 전투를 모범사례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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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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