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용 정당 흥망사..고건의 '희망연대'는?
    2006년 06월 05일 10:35 오전

Print Friendly

지난 92년 이후 세 차례의 대선을 거치는 동안 4개의 정당(대선 득표 백만표 이상, 혹은 그에 상응하는 영향력을 가진)이 출몰했다. 대선을 위해 급조된 이른바 선거용 정당들이다. 이들 정당은 정책당이 아니라 특정인의 위세에 기대는 인물당이다. 또 출발은 화려하지만 선거 후 종적은 가뭇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14대 대선을 10개월 앞둔 92년 2월 8일,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김동길 새한국당 창당준비위원장과 함께 통일국민당(약칭 국민당)을 창당했다. 창당 직후 치러진 3.24 총선에서 국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전체 31석(전국구 7석)을 얻어 민자당, 민주당에 이어 원내 3당이 됐다.

같은 해 12월 18일 실시된 대선에서는 선거전 초반 아파트 반값 공약 등으로 돌풍을 일으켰으나 김영삼, 김대중 양강 구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전체의 16.3%인 388만표를 얻어 총선 당시의 득표율인 17.4%를 밑돌았다. 국민당은 대선 후 소속 의원들의 연쇄 탈당으로 창당 1년만에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 후 해체됐다.

역시 14대 대선을 10개월 앞둔 92년 2월 25일, 양김 구도 타파를 주장해온 박찬종씨 등을 주축으로 신정치개혁당(약칭 신정당)이 창당됐다. 신정당은 정경유착타파, 지역감정타파, 토지공개념도입, 금융실명제 실시 등을 표어로 내세웠고, 노상에서의 시민토론회, 정치관계법개정운동, 국민청원서 서명운동 등 당시로서는 새롭고 참신한 활동방식을 선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박찬종 개인의 ‘무균질’ 이미지까지 더해져 92년 대선에서는 박찬종 후보가 약 150만표를 얻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신정당 역시 선거 후 조용한 ‘소멸’의 길을 밟았다.

97년 대선의 ‘킹메이커’는 이인제 후보였다. 의도야 달랐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97년 한나라당 소속이던 이인제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한 후 당을 뛰쳐나와 ‘국민신당’을 창당했고, 대선에서 490여만 표를 얻었다.

결국 이 표가 대선의 결과를 갈랐다.  당시 대선 3위 정당이었던 국민신당은 ‘국민의정부’ 출범 이후 국민회의에 흡수됐고, 이인제 후보는 두번째 기회를 노렸지만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노풍에 휩쓸리며 중도포기를 선언했다.

2002년 대선의 주인공은 노무현 당선자였다. 무릇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조연이 필요한 법이다. 그 조연이 악역이면 더욱 그럴 듯하다. 2002년 대선에서 정몽준 후보가 그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4강신화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대선 4개월여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며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올랐다. 특히 정 의원이 주가를 높이던 시점은 노풍이 사그라들던 시점과 일치했고 정 의원은 여권 일각에 의해 노풍을 대체할 대안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대선을 3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국민통합 21’을 창당하고 대권 예비후보로서의 행보에 나섰으나 여론조사를 통해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단일 후보의 자리를 내주고 중도하차했다. 정 의원은 대선 전날 밤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정치무대에서의 희극적인 퇴장을 자초했다. 맹주의 퇴장과 함께 ‘국민통합21’도 선거 후 국민들의 뇌리에서 흔적도 없이 잊혀졌다.

대선을 전후로 이처럼 정당이 명멸하는 것은 아직 정당정치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이번 대선도 인물 중심의 구도가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미 전조가 보인다. 따지고 보면 지금 여권에서 나오는 정계개편이라는 것도 당선 가능성이 있는 특정 인물들을 중심으로 당이 이합집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한 편에 고 전 총리의 ‘희망한국연대’가 있다. ‘희망한국연대’는 우리 정치의 선거용 정당 명멸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하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