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시보다 진한 사랑으로 싸운 시인"
        2006년 06월 05일 10:2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칠레사람 치고 그의 연애시 하나 못 외우는 사람 없다는 시인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네루다는 칠레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시인이자,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네루다의 삶은 격정의 연속이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공화파를 지지하다 외교관직을 박탈당했고, 공화파 난민들을 낡은 어선에 실어 칠레로 수송해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도피와 망명생활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죽음을 무릅쓴 탈출을 감행한 일은 유명하다.

    그의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는 칠레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애송되는 서정시집이기도 하다. 그는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가르시아 로르까) 시인이었고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가르시아 마르께스)으로 불렸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 1920년대 산티아고 학창시절의 네루다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 빠랄에서 1904년 7월12일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까르멘 레예스 모랄레스와 교사인 어머니 로사 네프딸리 바소알토 오빠소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리카르도 엘리에세르 네프딸리 레예스 바소알토.

    그의 시적 재능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열네 살이 된 1918년 최초로 『질주와 비상』지에 「나의 눈」을 발표하고 1920년에는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의 이름을 따 빠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첫 시집 『황혼의 노래』를 출간하고 이듬해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집인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했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였다.

    산티아고의 칠레대학교에서 프랑스어와 교육학을 공부한 네루다는 1927년부터 버마,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자바, 싱가포르, 부에노스아이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명예영사로 근무하게 된다.

    1936년 스페인내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있었다. 가르시아 로르까를 비롯한 스페인 시인들과 친분을 쌓던 중 발생한 스페인내란과 프랑코 군부에 의한 로르까의 처형은 그의 시세계를 양분하는 기점이 됐다.

    "나는 마드리드에서 생애의 가장 중대한 시기를 보냈다. 우리들은 모두 파시즘에 저항하는 위대한 레지스탕스에 빨려들어 갔다. 그것이 스페인 전쟁이었다. 이 체험은 나에게 체험 이상의 것이었다. 스페인 전쟁이 터지기 전에 나는 많은 공화파 시인들을 알고 있었다. 공화국은 스페인에서 문화 문학 예술의 르네상스였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까는 이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정치적 세대의 상징이었다. 이들 인간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무시무시한 드라마였다. 이리하여 나의 낡은 생활은 마드리드에서 끝났다."

    스페인 영사시절 공화파 지지

    공화주의 운동에 동참한 네루다는 본국 정부에 의해 정치적 개입을 이유로 파면당했다. 하지만 그는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흐와 함께 ‘중남미 스페인 지원단’을 결성하고 프랑코 군부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네루다의 시는 스페인내란을 거치면서 『지상의 거처』에서 보여준 초현실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더이상 "흐르는 시간이나 물을 노래하고 창백한 죽음의 모습과 그 설움을 노래할" 수 없었다.

    대신 네루다는 광부와 노동자, 어부와 기관사가 "이것은 동지의 시다"라고 말할 수 있고 "공장이나 탄광 밖에서도 대지에 뿌리를 내려 대기와 일체가 되고 학대받은 사람들의 승리와 결합(「커다란 기쁨」중)"되는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

    1938년 칠레에서 인민전선 후보 아기레 세르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네루다의 외교관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1939년 파리주재 영사에 이어 이듬해 멕시코 주재 총영사로 임명된 네루다는 멕시코에서 디에고 리베라 등 당시 혁명적 벽화운동을 벌이던 화가들과 우정을 쌓았다.

    멕시코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국내에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45년 칠레 북부의 탄광지대에서 칠레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바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공산당 의원으로 정치활동 시작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네루다는 공산당 등 칠레 좌파진영의 지지를 받던 가브리엘 곤잘레스 비델라 후보의 선전 책임자로 일했다. 하지만 비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신을 지지한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당시 남미의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이 압력을 넣은 결과다.

    이에 네루다는 1948년 1월 상원에서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제목의 연설로 비델라 대통령의 배신을 폭로했다. 결국 네루다는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검거령을 피해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 프랑스, 멕시코, 이탈리아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한 네루다는 소련에서의 망명생활 중 "오 칠레여 바다와 포도주와 / 눈으로 덮인 길고 가늘한 꽃잎이여 /…/아 언제 다시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아 언제 아 언제 언제」중)"라며 조국을 그리워하고 "불쌍한 공화국이여 그대는 / 비델라 도적떼들에게 채찍으로 매를 두드려 맞고 / 순경들한테 뺨을 얻어맞고 / 혼자서 으르렁대며 길을 걷는 암캐같다 / 곤잘레스화된 가련한 국민이여(「도망자」중)"라며 칠레의 운명을 안타까와했다.

    안또니오 스까르메따의 소설 『불타는 인내』(국내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소개됐다)를 원작으로 한 마이클 레드포드의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해 검거령이 철회되자 네루다는 다시 칠레로 돌아와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 정착해 작품활동과 정치활동에 전념했다. 칠레에서 좌파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1969년 네루다는 칠레공산당의 대통령 후보에 지명됐다.

    아옌데와 대선후보 단일화

       
     

    하지만 사회당, 공산당을 비롯한 칠레의 좌파진영이 인민연합을 구성해 대통령선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하자 네루다는 입후보를 철회하고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로의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1970년 칠레에서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아옌데 집권 시절 파리주재 대사로 임명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지병이 악화돼 대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한 네루다는 1973년 9월11일 자택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 소식을 접했다.

    아옌데 대통령이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네루다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쿠데타가 일어난 지 12일 만인 9월23일 산티아고의 한 병원에서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군부의 민주주의 압살에 숨죽여 분노하던 칠레민중들이 벌인 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집회가 됐다.

    당대 최고의 서정시인에서 노동자, 농민의 희망을 노래하는 혁명시인으로,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희망을 실현하는 좌파정치인으로 살다간 네루다. 그는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의 지지자였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정열적인 휴머니스트였다. 네루다는 탄생 백주년을 맞은 2004년 칠레에서 분열된 국가의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로 다시 부상했고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벌어지는 등 네루다의 삶과 작품세계가 다시 한 번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가 한 가장 힘찬 연설 중 하나였던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네루다는 시인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민중의 일상적 노동에 바치는 자신의 헌신과 애정, 자기 몫의 참여를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인간의 손에 건네려 하는 이 끝없는 투쟁에 시인이 동참하고자 한다면, 그때 그는 땀과 빵과 포도주와 모든 인간의 꿈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내 시 한 편 한 편은 유용한 노동의 수단이 되기를 요구했으며, 나의 노래 하나하나는 서로 교차하는 두 길의 만남을 위한 표지로 내걸리기를 갈구했고, 혹은 어느 누군가가, 다른 이들이, 다음 세대에 올 사람들이 새로운 표지들을 새겨 넣을 돌 조각 하나, 나무 조각 하나가 되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나의 당에게

    그대 덕분에 나는
    낯선 사람들과 형제가 되었다

    그대 덕분에 나는
    살아 뻗어가는 모든 세력에 가담했다

    그대 덕분에 나는
    다시 태어나 조국을 되찾았다

    그대는 나에게 주었다
    외로운 사람들이 알지 못한 자유를

    그대는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친절이 불처럼 타오르는 것을

    그대는 똑바로 서게 해 주었다
    똑바로 뻗어가는 나무처럼

    그대 덕분에 나는 배웠다
    사람들 사이의 일치점과 상위점을 분별하는 기술을

    그대 덕분에 나는 알았다 한 사람의 고통이
    어떻게 하여 만인의 승리 속에서 사라지는가를

    그대 덕분에 나는 배웠다
    형제들의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기술을

    그대는 현실 위에 나를 붙박아 주었다
    꿋꿋하게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그대 덕분에 나는 악당들의 적이 되고
    분노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벽이 되었다

    그대는 내가 보도록 해 주었다
    빛으로 가득찬 밝은 세계와 커져가는 기쁨을

    그대는 내가 사멸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대 속에서 나는 이미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김남주 옮김)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