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우경이 피로 사직서 쓴 이유는?
    [역사의 한 페이지] 혈서, 반탁운동 그리고 3.1절
        2019년 01월 11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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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회의 글 “이산(離散)을 넘어 통일로!”

    친애하는 욱(朂)씨!
    샘물 솟듯 솟아오르는 사랑을 억제하려고 했으나
    가슴은 제 먼저 행복에 부풀어 오른다오.
    그칠 줄 모르는 그리움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달려왔습니다만 기다리기에 애가 마르도록
    못내 당신은 어디에 계신지요?
    갑자기 옆구리가 아파서 누웠다가 가요.
    그리운 당신의 체취(體臭)가 스며오는 베개에 정신을 잃고
    용서해 주세요.
    만날 때까지 안녕히.

    한결같은 당신의 방에서 연심이가

    ‘연심’이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절절한 사랑을 담아 연인에게 쓴 편지이다. 1950년대 정도로 추정될 뿐, 역사성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 편지를 몇 년 전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다. 역사 자료 수집을 주로 하는 필자가 이 편지를 수집한 이유는 한 여성의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받은 어떤 감동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편지에 딸린 특이한 별지(別紙) 때문이었다.

    연심은 욱(朂)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편지에 다 담지 못했던지 따로 습자지 재질의 별지에다가 혈서를 썼다. 혈서의 내용은 큼지막하게 쓰인 단 두자 ‘純愛(순애)’! ‘순수한 사랑’이란 뜻의 ‘순애’라는 글씨를 통해 연심은 자신의 사랑이 매우 순수하고 진실된 것임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편지를 받은 욱의 마음이 감동이었을지, 아니면 섬뜩함이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한 여인의 지극한 사랑의 감정을 읽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사진] 왼쪽은 연심이라는 여인이 연인에게 쓴 편지로 1950년대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이 편지에 같이 붙인 별지로 ‘純愛’(순애)라고 혈서를 썼다. 그 혈서 오른쪽 위에 연필로 따로 ‘영원히 당신의 품 속에. 연심 드림’이라고 써 놓았다. (박건호 소장)

    사람들은 왜 혈서를 쓰는 것일까?

    피는 곧 생명이다. 피로 글씨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뜻이 매우 절실하며 목숨을 걸 만큼의 확고한 의지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자결(自決)로써 자기의 의사를 밝히는 더 극단의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이 혈서만으로도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나의 이 의사(意思)는 빈 말이 아니며 목숨까지 걸고 하는 것이니 명심하라는 것이다. 피는 어떤 이에게는 강력한 의지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공포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흥분과 열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지금까지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혈서 자료는 두 점인데, 하나는 위에 소개한 ‘연심의 편지’이고 나머지 하나가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전우경의 사직서’이다. 위 연심의 편지는 역사성을 담지 못했지만, 전우경의 사직서는 해방 직후 격동의 역사를 풍부하게 증언하고 있다. 전우경의 사직서는 어떤 역사를 담고 있을까?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과 해방 후 첫 3.1절 풍경

    몇 년 전 경매를 통해 흥미로운 해방 직후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전우경(全祐慶)이라는 인물이 남긴 자료 몇 점이었다. 그 중 단연 눈길은 끈 것은 네 페이지 분량의 사직서였다. 그것도 1946년 1월 1일을 맞아 쓴 사직서. 대략 73년 전 이맘때이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작성한 사직서라니….

    사직은 그에게 그렇게도 절실한 무엇이었을까? 더 놀라운 것은 사직서 뒤에 비장한 느낌의 혈서(血書)를 붙여 놓았다는 점이다.

    한자 한자 조심스럽게 쓴 한글 혈서 10자의 내용은 이랬다.

    “신. 탁. 반. 대

    조. 선. 독. 립. 만. 세”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새해 첫날 그는 왜 사직서를 써야만 했을까?

    또 그는 왜 혈서라는 극단적 형식으로 사직서를 썼을까?

    먼저 우리는 전우경이 이 혈서 사직서를 왜 썼는지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해방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1946년 새해 벽두로 돌아가 보자.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이 찾아왔다. 36년간의 가혹한 식민 지배에 치를 떨었던 많은 한국인들은 열광하였다. 그러나 그 열광도 잠시뿐 해방 후 여러 정치세력들은 독립국가를 세우는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외세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에 주둔한 상황에서 각기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한반도 문제는 그야말로 어려운 고차방정식 풀이처럼 복잡해졌고, 미래 전망 또한 매우 불투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합의 내용이 국내로 전해지면서 정국은 더 꼬이게 된다. 더욱이 이 합의가 발표되기 하루 전에 이미 [동아일보]가 대형 추측성 오보를 함으로써,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여기에 조선의 여러 정당과 단체 대표들을 참여시켜 협의를 통해 ‘임시 조선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이 정부가 아직은 미숙하기 때문에 연합국 4개국이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하게 될 것이고, 이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끝낸 후 한국인들의 완전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이 전해진 1945년 12월 28일을 전후하여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결정에 대해 좌익과 우익은 처음에는 같이 반대 목소리를 냈는데, 이후 새해 들어 좌익이 입장을 바꾸게 되면서 좌우의 대립이 본격화된다.

    먼저 우익 즉 민족주의세력은 신탁통치를 결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가장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표방한 것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이었다. 그들은 어렵게 독립된 마당에 다시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반민족·반자주적인 제2의 망국이고 새로운 식민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각적인 독립을 부정하는 신탁통치는 제2의 식민지배에 다름 아니므로, 반탁운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논리도 내세웠다. 우익은 독립과 신탁통치를 완전히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우리 민족이 다시 노예로 살 바에는 차라리 전부 자살을 해 버리자는 극단적 주장을 담은 삐라도 뿌려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아일보] 12월 29일자 사설에서는 “차라리 옥쇄(玉碎)하자”고 주장했으며, [조선일보]의 이날 사설 제목은 ‘죽음이냐 독립이냐’였다.

    [사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알려진 후 격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전단지는 당시 자살동맹의 이름으로 뿌려진 전단지이다. 제일 마지막 문장은 “…그리하야 정히 그대들이 독립을 허용치 아니하거든 우리 손으로 모두 무찔러서 이 땅을 황무지로 인적 하나 없는 광야로 만들고 우리도 모두 죽어버리자꾸나. 길이길이 노예가 되어버리느니 보다는 아… ”로 끝맺고 있다. (박건호 소장)

    반면 좌익 즉 사회주의 세력은 처음의 반탁 입장에서 1946년 1월 2일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된다. 그들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신탁통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임시’라는 딱지를 달고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정부를 우선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적어도 이 정부는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한국인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탁통치라는 것은 이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며, 신탁통치 기간도 이 정부가 미국·소련과 잘 협의하면 최고 5년 이내에서 단축할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이었다.

    또 좌익은 신탁이 어느 한 나라에 의해 식민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4개국 아래에 두어지는 것이고 조선의 독립이 늦어도 5년 내에는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독립과 신탁통치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을 촉진하고 보장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국민들에게 선전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결정이므로 여기에 협조하면서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 가면 머지않아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하에 좌익들은 ‘모스크바 결정 절대 지지’를 내세웠다. 조선공산당은 1월 3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걸음의 진보다. 임시 조선민주주의정부를 조직한다는 동 결정문에 있어서 이러한 결정은 금일 조선을 위하여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우리는 인정한다.”라고 밝혔다.

    [사진]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왼쪽은 반탁시위를 전개하는 우익 집회, 오른쪽은 모스크바 삼상 결정 절대 지지를 주장하는 좌익 집회 모습이다.

    이처럼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좌우의 대립은 점차 깊어졌다. 우익은 좌익의 주장 즉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한다.’라는 내용에서 신탁통치 부분만을 주목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너희들은 신탁통치도 지지한다는 것이므로 제2의 식민 지배를 지지하는 것이고, 즉각적인 독립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너희들은 ‘민족반역자’ ‘매국노’이다. 그에 비해 신탁 통치를 배격하고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우리들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이다.”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좌익을 공격하였고, 좌익은 우익의 반탁운동을 ‘국제 정세의 무지에서 나온 민족 자멸책’이라면서 비난하였다.

    이들의 대립과 갈등은 점점 도를 더해가더니 1946년 3월 1일 결국 무력적인 충돌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날 3.1절 기념식 행사는 몇 군데에서 열렸는데, 공식적인 기념식 행사는 하지 중장, 김구, 이승만 등이 참석한 보신각 앞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 외에 좌익과 우익 세력은 별도로 기념식 행사를 했는데,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기념식을 별도로 한 후, 각각 거리행진을 시작하였다. 좌익은 “모스크바 결정 절대 지지”를 내세웠고, 우익은 “신탁통치 절대 반대”를 내세웠다. 이 좌우의 행진은 서울역 앞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행진의 끝은 결국 유혈충돌이었다. 해방 후 맞은 첫 3.1절은 이렇게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 대립은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 독립 국가를 세우려던 민중의 노력을 좌우대립으로 몰고 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전우경, 피로 사직서를 쓰다

    전우경은 사직서를 쓴 1946년 1월 1일은 아직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좌익의 입장이 바뀐 날은 그 다음날인 1월 2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신탁통치 반대의 목소리만 들릴 때였다. 그는 당시 그는 전라북도 익산군청에서 삼림계 주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 다수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전우경도 신탁통치는 즉각적인 독립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신탁통치를 결사반대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직서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사직서는 전라북도 도지사 앞으로 쓴 것인데, 1946년 1월 당시 전라북도 도지사는 미 육군 중령인 갤로글(R. F. Galloghy)이었다. 사직서의 내용은 이렇다.

    사직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약속한 연합국에 감사의 의(意:뜻)를 표하고, 군정(軍政)이 독립을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 믿었기 때문에 협조한바 뜻밖에 신탁통치안이 실시되어 그 기관으로 전환하려하는 오늘날 더 협력할 수 없는 고로 이에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기에 사직함

    단기 4279년 1월 1일

    익산군청 삼림 주사 전우경
    전라북도 도지사 전(殿)

     

    [사진] 전우경의 사직서이다. 왼쪽이 사직서의 첫 페이지이고, 오른쪽이 사직서의 두 번째 페이지이다. 두 번째 페이지의 네 번째 줄에 전우경(全祐慶)의 이름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그런데 신탁 통치 반대 입장이라면 신탁반대 집회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거나 세를 과시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듯한데, 왜 굳이 사직서를 써야만 했을까? 또 익산 군수라는 직속 상관이 있는데 이를 건너뛰고 도지사 앞으로 사직서를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보자.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민족주의세력 중 반탁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세력이었다. 백범 김구는 1945년 11월 충칭에서 귀국할 때부터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1945년 9월 시작된 미군정은 미군정청이 38도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이며, 한국인의 어떠한 정부 조직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충칭의 임정도 정부 이름을 내리고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을 허가한다는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개인자격으로 국내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굴욕은 미래를 위해서 참을 수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해방 4개월 뒤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합의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은 김구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 어느 곳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인정이나 배려 없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제로베이스에서 완전히 새롭게 한국인의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풍찬노숙하며 임정을 지켜온 지 어언 27년! 지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미국과 소련의 결정에 김구가 격분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김구는 12월 28일 밤 경교장에서 독립운동 시절의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긴급 소집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각 정당, 각 종교단체, 각 언론기관 대표자를 초청하여 개최한 비상대책회의를 통해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회를 설치하여 반탁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12월 29일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12개항의 ‘반탁국민운동 실행방법’을 결의하고 이를 이행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여기에는 ‘연합국의 임시정부 즉시 승인 요구, 신탁통치 절대 배격, 전국 군정청 관공리(官公吏;공무원) 총사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호응하여 이날 군청청 한국인 직원들 수천명은 탁치반대총사직을 결의하고 시위 행진하였으며, 서울 시내 경찰서장, 법조계, 조선금융단 등에서도 반탁운동을 결의하였다.

    다음날인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전체 국민을 향하여 “전국의 관청, 산업기관, 금융기관, 상업기관 일체는 폐쇄”하라는 전국민적 파업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의사, 요리사, 미군정하의 한국인 관리, 교사, 경찰 등 각계각층이 이에 호응하여 파업에 동참하였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는 요리사들도 이 파업에 동참하여 출근하지 않자 미군정청의 미군 관리들도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레이션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이에 당황한 미군정은 그래도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한국인 고용인들에게 10일 간의 휴가를 실시한다는 발표로 대응했다.

    당시 민중일보 기사는 관공서의 업무가 마비된 상태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관공서 방면에서도 신탁이라는 굴욕을 용인할 수 없다하여 각 직원들은 시무를 중지한 상태로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뿐이요, 그중에는 분연히 퇴청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리하여 모든 사무는 중단되고 말았다.”

    -민중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1945년 12월 마지막 날에 반탁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주관한 반탁시위 대회가 열렸고, 수만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3천만 전국민이 절대 지지하는 임정을 우리의 정부로 세계에 선포하며 정식 승인을 요구한다는 것과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 미소 양군이 즉시 철수할 것’등을 결의하였으며 동시에 전국 총파업도 결의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임정세력이 주도한 반탁운동은 명백히 임정을 한국의 정식정부로 인정해달라고 미군정에 촉구하는 운동, 즉 이른바 ‘임정 추대운동’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날 임정세력은 한걸음 더 나아가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국자(國字) 1⋅2호’ 포고를 발표하여 정권 접수를 선언하였다. 중경 임정의 내무부장 신익희는 국자 제1호와 제2호 포고문에서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정부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을 선포하고 앞으로 한국인 직원들은 임정의 명령만 따를 것을 명령함으로써 미군정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선언은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접수할 것이라는 걸 시사하는 것이었고, 실제 미군정은 이를 미군정 축출을 위한 쿠데타 음모로 받아들였다. 이에 미군정은 한국민들에게 냉정을 찾을 것을 호소하는 한편 임정요인 33인을 다시 중국으로 추방하려는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1월 1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불러 반탁운동을 즉시 중단할 것을 협박했고, 이에 맞서 김구는 “이 자리에서 자결하겠다”며 강력히 저항하였다. 하지는 이런 김구를 겨우 진정시켜 반탁시위가 군정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밝히도록 요구하면서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치열한 기 싸움 끝에 결국 김구는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을 시켜 국민들에게 파업을 중지하고 일터로 돌아갈 것과 자신들의 운동이 신탁통치 그 자체에 대한 반대이지 미군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와 임정이 이렇게 꼬리를 내리면서 미군정과의 갈등 상황은 그럭저럭 수습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반탁 열기가 식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전우경의 사직서로 돌아가 보자. 그가 사직서를 쓴 날은 1월 1일이다. 이 사직서를 쓴 행위는 위에서 언급한 임정의 반탁 운동 당시 내린 일련의 조치나 지령에 찬동한 행위로 보인다. 당시 미군정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임정의 조치를 지지하는 미군정청의 한국인 공무원들의 동향도 우경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직서가 전우경 혼자 감행한 외로운 싸움의 일환이었는지, 아니면 다수의 공무원들의 일반적인 행동이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경의 사직서 작성에 영향을 준 것은 12월 29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발표한 ‘반탁국민운동 실행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전국 군정청 관공리 총사직’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30일 이 위원회가 내린 전국민적 파업 명령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런 위원회의 호소에 많은 공무원들이 호응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출근하지 않거나 심지어 사직서를 제출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미 1945년 12월 29일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서울 시내 각 경찰서장들이 신탁통치배격 긴급회의를 열고 공동담화를 발표하여 반탁운동에 동참하였으며, 12월 30일에는 서울시청 직원들도 탁치반대 총사직을 결의하고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런 탁치반대를 위한 공무원들의 파업과 총사직의 바람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우경이 근무했던 전라북도 익산군청의 한국인 공무원들의 동향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대구시보] 기사를 통해 대구나 경북 지방 공무원들의 동향은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전라도도 이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경상북도 공무원들의 움직임을 살펴 보자. 대구시보 1945년 12월 31일자 기사이다.

    “도내 조선인 관리 총사직

    군정청에 결의문을 제출하고 항의

    29일 오후 4시 경북도의회실에서 개최중인 도내 군수, 경찰서장회의 석상에서 조선독립경북촉진회 문장주(文莊宙)씨의 긴급 동의(動議)로 신탁통치관리문제 절대배격안이 제의(提議)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 속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표명되어 경북 도민 일동, 도내 22군수 일동, 경북도 군정청조선인 직원 일동, 도내 22경찰서장 일동, 조선독립경북촉진회, 경북도인민위원회, 농조경북도연맹, 노조대구지방평의회, 청년경북연맹 등 각 단체의 명의로서 도군정(道軍政) 당국에 제출하기로 되었다. 군정청 조선인 직원 일동과 각 군수, 서장 일동은 근일 중에 총사직을 단행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대구시보, 1945년 12월 31일자

    [사진] 경상북도내 미군정청 소속 조선인 관리 총사직을 결의한 사실을 보도한 대구시보 1945년 12월 31일자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물론 그 다음날 [대구시보]가 “임시정부의 지시 따라 도내 관리 행동 결의. 조선인 관리사직설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그 전날의 보도에 대해 미군정청 하의 조선인 전(全) 관리가 사직서를 내기로 했다는 보도는 다소 과장되었다는 점을 밝히기는 하였으나, 다수의 공무원들이 사직을 결의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우경이 사직서를 작성한 것은 이런 당시 공무원들의 파업, 총사직 움직임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다만 그가 사직서 정도를 쓰는 것이 아니라 혈서를 썼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적극적인 신탁통치 반대론자임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신문에 혈서 사직서를 제출하는 일이 많았다면 신문에 실렸을 법한데 그런 기사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우경이 사직서를 쓴 것까지는 홀로의 고독한 결단이라기보다는 다수의 흐름에 동참한 것으로 보이지만, 혈서의 형식을 취한 것은 그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독자 행동으로 보인다.

    한편 익산군청 산림계 주사 전우경이 사직서를 직속 상관인 익산군수가 아니라 전라북도 도지사에게 쓴 이유도 살펴보자. 이는 당시 익산 군수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시보]에 실린 경상북도의 사례로 보건대 그들은 군수, 산림계 주사라는 서로 다른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군정청 소속의 한국인 관리라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였다. 그러므로 전우경은 한국인 군수가 아닌 당시 미군 도지사에게 이 사직서를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맞서고자 하는 대상은 임정을 부정하고 신탁통치를 결정한 미국 또는 미군정이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우경은 ‘반탁국민운동 실행방법’에서 제시한 ‘미군정청 산하 한국인 공무원의 총사직’에 호응하여 당시 많은 공무원들과 뜻을 같이하여 사직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사직서를 쓰면서 우경은 사직서 뒤에 자신의 뜻을 더 명확히 드러내고 싶었던지 사직서 뒤에 부서(符書)라는 제목의 글을 덧붙인다. 이런 내용이다.

    부서(符書)

    38도 문제는 누구가 만들었으며 경제, 산업, 기술 등은 독립국가로써는 원조를 못하는가!!!!
    필요하면 청할 것이 아닌가
    그 실례(實例)는 얼마든지 있다.
    연합국이여!
    성명에 배약(背約)하며 제1차대전의 전철을 되풀이 하려나!!!!
    자주독립을 열망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경은 이 부서 뒤에 마지막으로 혈서를 써 붙이기로 했다. 자주 독립을 위해서 이 손가락하나 베는 것이 무슨 대수랴. 우경은 날카로운 칼로 새끼 손가락 끝을 베었다. 피가 뚝뚝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종이에 대고 천천히 글씨를 써 나갔다. 통증이 손가락 끝에서 전해져 온다.

    “신. 탁. 반. 대 / 조. 선. 독. 립. 만.세”

    이로써 혈서 사직서가 완성되었다.

    [사진] 전우경이 사직서와 부서 뒤에 붙인 두 장의 혈서이다. 한 장에는 “신탁반대”, 또 한 장에는 “조선독입만세”라고 썼다. ‘독입’은 ‘독립’의 의미로 쓴 것인데, 당시에는 ‘독립’을 ‘독입’이라고 표기한 사례도 많았다. (박건호 소장)

    전우경이 쓴 혈서 사직서가 어떻게 작성되었는지 전후 사정을 유추해 보았다. 해방 직후 미군정시기 우경이 전라북도 익산군청에서 산림계 주사로 일하고 있었고, 그가 민족주의자로서 반탁운동에 열렬히 참가했다는 것 말고는 더 자세히 그에 대해 알기는 힘들다. 다만 그가 남긴 다른 자료 중에 ‘무궁화동산가’와 ‘독립가’ 노래 가사를 적어 놓은 것이 있는데, 1945년 9월에 지었다고 써 놓은 것으로 보아 자신이 직접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사의 제목과 내용을 통해 그가 민족의식이 상당히 강한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랬기에 혈서 사직서를 쓰지 않았겠는가?

    전우경의 ‘혈서 사직서’는 사직서를 쓰면서 혈서까지 붙여야 했던 전우경의 절박함과 함께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결연한 의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소중한 현대사 자료이다. 다만 전우경이 이 사직서를 실제 제출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사직서가 그의 다른 자료들과 함께 한 묶음으로 같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도지사에게 결국 제출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사직서가 제출되었다가 이후 우경에게 반려된 것일 수도 있겠다.

    2017년의 3.1절 풍경

    2019년 기해년 올 해는 3.1운동 100주년 되는 뜻 깊은 해다. 그래서 3.1절에 관한 사족으로 긴 글을 마무리하고자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1946년 3.1절의 비극적 풍경을 기억할 것이다. 그 해 3.1절은 신탁통치 문제로 촉발된 좌우의 격렬한 대립의 결과 서울역 앞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그로부터 71년 지난 2017년 3월1일!

    이 날의 서울 풍경 역시 비극적이었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당시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을 심리하는 중이었다. 3월 1일 그날 서울 시내는 술렁이고 있었다. 절대 다수 국민의 여론을 반영한 시위대가 광화문에서 “박근혜 탄핵 인용”을 주장하면서 촛불 시위를 전개할 때, 덕수궁 앞에서는 ‘애국보수’를 자칭하나 실제로는 대통령의 헌정 유린을 비호하는 세력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탄핵 반대”를 외쳤다. 다행히 경찰의 차벽설치로 71년 전처럼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두 쪽 생각은 근본부터 달랐다. 광화문 쪽에서는 ‘박근혜 탄핵과 구속’을 주장했고, 덕수궁 쪽에서는 ‘탄핵 기각과 특검 구속’을 외쳤다.

    [사진] 2017년 3.1절의 풍경을 보도한 조선일보 2017년 3월 2일자이다. 1946년 찬탁반탁 대립을 비유한 표현인지 ‘찬탄 반탄’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왼쪽) 당시 광화문 집회에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인근 지하철역에서는 아예 집회 참가자들에게 두 집회의 방향을 친절히 안내하였다. 저 화살표의 방향만큼이나 두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식은 판이하였다. (오른쪽, 인터넷 사진)

    46년 해방 후 첫 3.1절에는 좌우가 신탁통치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면서도 그래도 태극기는 같은 태극기를 흔들었지만, 2017년 3.1절의 두 집회에서는 아예 태극기 사용법도 달랐다. 한쪽은 노란 리본을 단 태극기를 들었으며, 한쪽은 성조기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었다. 같은 한국인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의 생각은 너무도 달랐다. [조선일보]는 다음날 신문 1면에서 이를 “낮엔 반탄(反彈; 탄핵반대), 밤엔 찬탄(贊彈; 탄핵찬성)”이란 헤드라인으로 보도하였다. 탄핵반대 집회가 오후 2시에 시작되었고, 탄핵찬성 집회가 오후 5시에 시작되었으므로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시각으로 보면 자칫 찬탄 반탄 세력이 반반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시 국민들 80프로 이상이 탄핵을 찬성하고 있었으므로, 찬탄 반탄의 대립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시각을 비판하고자 당시 [한겨레신문]은 아예 “두 동강은 무슨….민심은 탄핵이죠” 라는 제목의 헤드라인을 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세력의 우열이 매우 두드러진 점은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 내부에 저렇게 큰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세력이 존재하고 그들이 서로 적대적 대립을 보이는 것만은 뼈아픈 사실이다. 그리고 그 대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1946년 해방 후 맞은 첫 3.1절의 찬탁과 반탁 대립!

    그리고 71년이 지난 2017년 3.1절의 찬탄과 반탄!

    이 날은 [경향신문]의 표현을 빌면 “슬픈 3.1절”이었고, [동아일보]의 표현을 빌면 “부끄러운 3.1절”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2019년의 3.1절은 또 어떤 모습일까? 2019년의 한국인들은 또 무슨 이슈로 갈려 대립하고 싸울 것인가? 3.1운동 당시 조선인들은 너나 없이 같이 한 목소리로 “조선 독립 만세”을 외쳤다. 올 3.1절만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분노의 목소리와 증오의 눈빛을 모두 내려놓고 희망적 미래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같이 노래할 수는 없을까?

    올해만은 아름다운 3.1절을 보고 싶다.

    [사진] 2017년 3.1절 풍경을 보도한 신문들이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의 3.1절 풍경을 이 신문들은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참고한 책>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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