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전이 폭발하다
[국공내전⑧] 중원해방구 포위공격
    2019년 01월 10일 10: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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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내전-7] 동북 민주연군, 패하여 천리를 물러나다

중재를 위한 마샬과 미국의 노력

천둥이 잦으면 벼락이 치기 마련이다. 그 다음에는 폭풍우가 치고 큰 비가 쏟아지게 된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동북은 완충장치가 사라졌다. 드넓은 만주에 힘의 진공이 생기고 국공 양당이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1946년 1월에 체결한 정전협의에도 장제스는 계속 국민정부군을 만주로 실어 날랐다. 공산당은 만주에 진입하려는 국민당 군대를 곳곳에서 가로막고 싸움을 벌였다. 산하이관, 잉커우에서 교전이 있었으며 쓰핑과 창춘을 재점령하기도 하였다.

먀샬이 3인 중재위원회를 열어 간신히 3월 27일 ‘동북 정전협의’를 이끌어내었다. 그 내용에는 “집행 소조를 충돌지역이나 국공 쌍방이 만나는 지역에 파견하여 충돌을 정지시키고 필요하고 공평한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협의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국공 양당은 공공연하게 상대방을 공격했다. 마샬이 4월 중순 중국에 대한 원조계획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만주에서는 한창 교전중이었다. 국민당군이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마샬의 중재 노력은 전혀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장제스는 마샬이 중재하려고 하는 노력이 자신과 국민정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기에 이런 내용을 썼다.

“내가 마샬을 마지막으로 만난 뒤 열흘 이상이 흘렀다. 그의 어조로 판단하건대, 그는 공산당의 선전에 완전히 홀려 있다.(1946년 2월 25일) ”

“그(마샬)는 이번에 북부 중국을 순시한 일에 대하여 만족해 한다. 그는 마오쩌둥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인정했다.(1946년 3월 7일)”

“대화에서 나는 그가 공산당이 다루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느꼈다.(1946년 5월 5일)”

쓰핑과 창춘을 점령한 뒤 국민정부군은 동북 민주연군을 헤이룽장성 성도인 하얼빈까지 밀어붙였다. 그러자 마샬은 장제스에게 추격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한번은 각서까지 보내어 “정부군이 만주에서 공산당 추격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나의 중재 노력에 장애가 될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인격적 성실성과 신뢰성에 금이 가게 될 것이다.”(1)

마샬은 장제스에게 정전협정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미국 수송기 사용을 중단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원조를 늘리지 말라고 건의했다. 장제스가 정전협정에 동의하여 6월 15일 마침내 두 번째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일로부터 보름 동안 휴전하기로 한 것이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장제스는 마샬의 압력으로 이미 동북 전선에 진격중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국민당군은 하얼빈 남쪽 48킬로 지점에서 진격을 멈췄다. 동북 민주연군은 숨을 돌릴 틈을 얻었으며 하얼빈은 공산당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남만주를 비롯하여 동북 전체의 농촌과 산악지역에 근거지 건설을 지휘하며 신속히 힘을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제스가 나중에 “가장 통탄스러운 실수”라고 후회한 협정의 체결이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도 장제스가 쌍십협정과 정전협정을 계속해서 위반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회고록에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이 정당하다면 협정을 조금 위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마샬과 트루먼을 상대해야 한다. 두 사람의 인생과 경력은 정직성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2)

정전협정을 도외시한 것은 국공 양당이 같았지만 국민정부와 장제스쪽이 주로 위반한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다. 언제나 근엄한 표정으로 쉽게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장제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이 충칭에서 보여준 것처럼 속마음을 감추거나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저우언라이가 충칭에서 보여준 활약에 비하면 국민정부 쪽 인사들은 정치력이 너무도 부족했다. 그것은 아마도 국공 간 역관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군사적으로나 합법적 지위, 국제관계 등 모든 면에서 우세한 국민정부이 공산당과의 협상에 진지한 태도를 가질 이유는 별로 없었다.

국민정부가 무언가를 결정하면 공산당이 강렬하게 비판하고 연합정부가 구성되기를 바라는 민주동맹 등 사회세력, 학생들이 함께 비판하거나 시위 등으로 압박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국민당은 3월 16일 열린 6차 2중전회에서 격론 끝에 정치협상회의 결과를 부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불과 한 달 전에 힘겹게 얻은 결론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국공 양군이 쓰핑에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국민당 쪽이 명분을 잃을 것은 명약관화했다. 국민당은 민주적인 토론과 협상으로 연합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악화되는 정세

1946년 여름, 미국에서 유학하고 경험을 쌓은 자유주의 교수 두 명이 쿤밍에서 암살당했다. 민주동맹 쪽 리궁푸(李公僕)과 원이둬(聞一多)가 나흘 간격으로 자객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장제스와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정부 측과 정부를 비판하는 쪽은 서로 상대방이 한 일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민주동맹 인사 8명은 미국 영사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조사단을 구성하자는 마샬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나중에 장제스는 두 명의 하급 장교들을 처형하여 국민정부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범인들이 두 교수의 발언에 분개하여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배후는 밝힐 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결국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비밀경찰과 독재수단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한다는 인상이 더욱 짙어졌다. 장제스에게 시위나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며 신속히 진압해야 할 소요일 뿐이었다. 장제스의 이런 생각은 다이리(戴笠)가 죽었을 때 그의 일기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이리는 충성스럽고 정직했다. 훌륭한 열정을 품고 있었던 그는 분명이 혁명의 길을 따라간 인물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1946년 3월 16일)”(3)

“다이리는 남들이 감히 하려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 않았던 일, 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던 일들을 자신이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국내의 전선에서 전복을 노리는 세력을 제거했고, 적의 진영에 불안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잠자리에서도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는 혁명가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을까?”(4)

다이리는 국민정부군 육군 중장으로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장이었다. 조사통계국은 이름과 다르게 비밀공작과 첩보활동을 담당하는 비밀 정보기구였다. 구체적으로는 간첩활동, 일본군 첩자 및 공산당 관계자 색출 및 암살과 모살, 장제스의 정적에 대한 공작 등을 맡아 왔다. 공산당과 반정부 쪽 인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TV드라마에는 장제스가 두 교수의 죽음에 항의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 수천년 역사에서 언제 민주가 실현된 적이 있는가? 왜 하필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민주만 부르짖고 있는가?” 마오쩌둥은 두 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흥분했다. “학생과 민주당파를 움직여 강력한 운동을 만들어내야 한다.” 충칭에 있던 저우언라이는 쿤밍에 가서 미망인을 위로하며 “이런 인물을 잃은 것은 중국의 커다란 손실이며 유지를 받들어 반드시 민주적인 연합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어쨌든 동북지역의 내전과 협정에 대한 공공연한 위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대한 이미지는 계속 악화되어 갔다.

그해 6월 미국 국무부가 제출한 ‘중국에 대한 군사고문 및 군사지원에 관한 법률’이 순조롭게 의회를 통과했다. 중미 양국은 ‘물자차관 처리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미국의 장비를 중국에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미국은 이미 “2차 대전 잉여물자 제공”이라는 명목으로 8개 정편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제공하였다. 이제 백 개 정편사단, 3백만명이 넘는 병력을 무장시킬 무기와 장비가 국민정부군에게 제공될 예정이었다. 장제스의 자신감이 크게 높아졌다. 장제스는 이미 193개 여단, 180만명을 이동 배치시켜 공산당 근거지를 공격할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6월 17일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최후통첩을 하였다. 공산당원들은 6월 17일 이후 화북의 러허, 차하얼 근거지 및 동북의 하얼빈을 비롯한 주요 지역, 장쑤 북부, 안후이 북부, 산시 서부, 허베이의 해방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밤잠을 잊고 대응책에 골몰했다. 그는 본래 새벽이나 아침까지 일하고 한낮까지 자는 것이 습관이었다. 내전이 본격화되면 국군과 전력차가 너무 커서 해방군이 위기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6월 하순 해방일보에 논평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하여 군사원조를 하기로 한 법안이 중국의 평화와 안정, 독립과 민주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중국 인민들은 이미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비지원이 대단히 많으며 중국에 있는 미국 군대가 오래 머물렀음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의 지원과 군대는 중국 인민들의 생존과 자유에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으로 장제스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내전 발발 당시의 국공 양군의 형세도. 내전발발 시 공산당 해방구(분홍색). 쌍십협정 뒤 공산당이 철수한 해방구(주홍색). 국민당이 공격한 해방구(노란색). 화살표는 마오쩌둥이 회담하러 간 경로

내전 폭발, 국민정부군 정전기간 직후 중원을 공격하다

마침내 내전이 폭발했다. 1946년 6월 26일, 장제스는 정전 유효기간이 막 지나자 중원해방구를 포위 공격했다. 중원 해방구는 창장, 황허, 화이허, 한수 등 네 강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허난성을 중심으로 안후이, 장쑤, 후베이, 산시성 서부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인구 5,300만명, 면적은 60만 평방킬로미터였다. 중원이라는 이름대로 중국의 한복판에 자리잡아 동쪽으로는 난징, 서쪽으로는 시안을 위협하였고 핑한 철도와 룽하이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이어서 교통선 확보에도 중요한 전략적 요지였다. 장제스가 첫 공격에 중원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민정부군은 중원해방구 공격에 3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공산당 중원군구 병력은 모두 5만명이었다. 중국은 이 날을 내전이 발발한 날로 정하고 있다. 아마도 국민당이 노골적으로 정전협정을 위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국공 양측은 46년 1월 10일 정전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3월 27일 ‘동북 정전협의’를 체결했으며 6월 6일부터 보름간 휴전에 합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국공은 필요하면 언제나 교전을 벌여 정전협정이나 휴전을 무력화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내전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했을 때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양쪽이 서로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교전하고, 정전협정을 맺고, 다시 교전하고, 또다시 휴전하고 이런 과정을 거쳤는데 굳이 중원해방구 공격일을 내전 개시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에서 대량의 무기와 장비를 국민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인지, 국민당의 호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다. 이른바 내전이 시작된 뒤에도 국공 양측과 중국의 정치 사회단체, 그리고 개인이 계속 연합정부 구성에 관한 논의를 진행한 것을 보아도 꼭 이날을 내전 개시일로 삼아야 했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중원지역도 5월 10일 ‘한커우 협정’을 체결하여 군사적 충돌을 막고자 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공산당이 영도하는 군대가 그 주둔지에서 보급을 위해 수송하는 것을 국군은 간섭하거나 막지 않는다.” “양측 군대는 국공 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현지에 주둔하며 상대방에게 전진할 수 없다. 다만 무장하지 않은 수송부대는 제외한다.”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협정에 서명한 뒤에도 국민정부군은 군사행동을 계속했다.

6월까지 국민당군은 공산당 해방구의 현성과 소도시 및 마을 1,100개를 공격하거나 점령했다. 중원군구 해방군 5만명은 해방구의 중심인 센화디엔(宣化店)과 그 주변 소읍인 뤄산(羅山), 광산(光山), 신현(新懸) 등 사방 오십킬로도 되지 않는 지역으로 몰렸다. 해방구의 면적은 10분의 1로 줄었다. 위기를 느낀 중공 중앙이 국민정부와 교섭에 나섰다. 공산당은 중원에서 자진 철수하여 다른 해방구로 이동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민정부는 계속 병력을 증강시켜 10개 정편사단 30만명으로 해방군 부대를 철통같이 포위했다.

국민당 장군 류즈

장제스는 정저우 수정공사(5) 주임인 류즈(劉峙)에게 허난성 중남부에 있는 주마디엔(駐馬店)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중원 해방구에 있는 해방군을 모두 소탕하라고 명령했다. 류즈는 각 공격부대에 6월 22일까지 공격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다. 장제스는 시안(西安)과 우한(武漢)의 공군도 이동시켜 작전에 협력하라고 명령했다. 또 시안(西安)의 수정공서 후쫑난(胡宗南)의 부대 일부도 이동시켜 작전에 참여시키고 류즈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중공 중앙은 이에 대하여 저우언라이를 통해 마샬에게 협정 위반을 강력히 항의했다. 그에 따라 삼인 소조는 해방구의 중심인 셴화디엔에 시찰단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센화디엔은 후베이성과 허난성의 경계지역에 있는 작은 진(鎭; 진은 우리의 면에 해당)이다. 그 곳에 마샬과 장즈중, 저우언라이가 시찰을 왔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 시찰단은 전투를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식량을 운반하게 해달라는 요구도 해결할 수 없었다. 국민당 쪽에서 “병력이 이동하면 오해를 부를 수 있다”며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찰로 5월 9일로 예정한 공격을 한 달 이상 늦춰 해방군은 최소한 대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중공 중앙은 막다른 골목에서 대책을 세워야 했다. 중앙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원국과 중원군구에 포위망 돌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허난성 서쪽과 후베이성 서쪽, 산시성 남쪽과 쓰촨성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투쟁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철수명령이 너무 늦었다. 국민정부군이 포위망을 좁히고 공격명령을 대기하던 6월 23일에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다. 중공 중앙은 “즉시 포위를 돌파하라. 생존이 첫째다.” 이미 첩첩히 포위했는데 그런 명령전문 한 장이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명령에 살고 죽는 해방군 지휘관에게는 곧 행동 지침서가 되었다.

이때 중원군구 사령원은 리센녠(李先念)이었으며 참모장 겸 부사령원은 왕쩐王震)이었다. 그때 장면을 묘사한 중국 드라마를 보면 리센녠(李先念)과 왕쩐(王震)이 지휘소에서 죽을 끓이며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왕쩐) “장제스가 왜 우릴 먼저 공격하려는 거요?”

(리센녠) “장제스에게 우리 중원 군구가 우환거리니까 그렇지.”

“장제스가 우리 약점을 알고 있는 것 같소.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니 포위하여 보급선을 끊으려는 거요. 우리를 굶겨죽일 작정이오.”

“아닐세, 장제스는 우리가 굶어죽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 5일 안으로 우리를 싹 해치우려 할 걸.” “흥, 꿈 깨라고 하지요.”

리센녠(왼쪽)과 왕쩐. 리센녠은 나중에 국가주석이 된다

두 사람이 비교적 여유 있고 담대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이미 포위 및 공격을 당한 지 오래되어 식량과 탄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홍군 시절부터 졸병과 장교가 고락을 같이해 와 지휘관인 그들도 죽을 끓여 먹고 있었지만 심정은 초조하고 복잡했을 것이다. 부대원 5만명과 가솔 등 40만명을 머나먼 이웃성, 심지어 쓰촨성으로까지 이동시켜야 했다. 아마 다시 한 번 장정에 나서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리센녠은 중원에서 태어나 혁명에 참가하고 중원해방구를 개척한 중원의 인물이었다. 그는 1909년 후베이성 황안(黃安: 지금의 홍안紅安)에서 태어났다. 농민운동을 하던 그는 1927년 18세로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했으며 그해 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공 허난성 위원회 군사부장을 하던 그는 나중에 신사군 유격지대 사령원이 되어 유격투쟁을 지휘했다. 그는 1941년 환남사변 뒤 재건한 신사군 사단장이 되었다. 부대를 이끌고 일본 괴뢰군을 소탕했으며 근거지를 잠식해오는 국민정부군에 맞서 견결히 투쟁했다. 1942년에는 악예(鄂豫: 후베이성과 후난성) 해방구 서기가 되어 일본군과 싸우면서도 근거지를 확대하고 튼튼히 굳혔다. 언제나 적지 한복판에서 싸우며 성장해 왔으니 백절불굴의 의지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참모장 왕쩐은 후난성 유양(瀏陽) 사람으로 1929년 중국 공농 홍군에 참여한 이래 장정, 항일전쟁 등을 두루 거친 맹장이었다. 그는 항일전쟁 시기 옌안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곤란을 겪자 옌안 부근 난니만(南泥湾)의 황무지 30만무(苗: 1무는 200평이다.)를 개간한 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병사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 식량 900만근(중국의 1근은 500그램이다.)을 생산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들었다. 마오가 친필로 “창조정신이 있다.”는 요지의 글을 써서 보냈던 것이다.

포위망 돌파

적지에서 오랫동안 투쟁해온 지휘관들의 경험과 지휘가 부대를 구했다. 리센녠은 부대를 분산하여 각각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1개 여단병력을 주력으로 위장하여 진푸철도(텐진-푸커우간) 동쪽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후베이성 동쪽 부대와 협력하여 그곳을 돌파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주력은 서쪽으로 나아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성동격서라는 속담 그대로 행동한 것이다. 처음에 좌로군과 우로군으로 나누어 탈출한 해방군 주력은 나중에는 남북 양로군으로 나누고 다시 또 분산하며 적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우로군은 사령원인 리센녠을 비롯한 1만 5천명이 센화디엔에서 서북쪽으로 이동했다. 29일 류린(柳林: 산시성(山西省) 서부에 있는 현) 부근에서 국민당군 포위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계속 늘어선 국민당 차단 진지와 추격을 뿌리치며 산시(陝西)성 남부에 도착하여 한숨 돌렸다. 그들은 현지에서 투쟁하던 유격대와 합류하여 악예섬(鄂豫陝: 후베이,허난,산시) 군구를 창설하고 유격투쟁에 들어갔다.

왕쩐이 인솔하는 간부여단 등은 자수이(柞水: 산시陝西성 남부에 있는 현)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 북진했다. 도중에 국민당군 부대의 추격과 차단을 뿌리치며 8월말에 섬감녕(陝甘寧: 산시, 간쑤, 닝샤성) 해방구로 들어갔다. 허난 군구 부대는 주력을 엄호한 뒤 방향을 틀어 허난성으로 들어갔다. 8월초에 산시성과의 경계지역에 도착하여 유격전을 펼쳤다.

좌로군 부대는 모두 1만명으로 군구 부사령겸 1종대 사령원인 왕수성(王樹聲)이 지휘했다. 6월 26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왕쟈디엔(王家店)에서 국민당 차단부대와 하룻밤 내내 싸우고 7월 1일 핑한철도(베이핑-한커우간)를 넘어 서진하였다. 11일 한수(漢水)를 강행 도하한 다음 국민당 차단 부대에 돌격하여 돌파했다. 7월 25일 우땅산(武當山지역에 들어가 주시(竹溪), 주산(竹山) 등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분산하여 활동했다. 그들은 8월 27일 다른 부대와 합류하여 후베이 서북 군구를 설립하여 유격투쟁에 들어갔다.

마오쩌둥, 쭈더가 왕쩐과 함께 옌안에서 359여단을 검열하고 있다. 359여단은 나중에 피딩쥔과 함께 탈출한 1여단이 된다.

또 다른 부대는 포위망 돌파 중 떨어져 푸뉴산(伏牛山) 지역에서 허난 군구부대와 합류했다. 처음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국민당군을 기만했던 1종대 1여단은 따뉴산(大牛山)과 따볘산(大別山)을 뚫고 지나갔다. 국민당군이 여러 차례 길을 막고 공격했지만 피하거나 돌파한 뒤 천리를 행군하여 소환(장쑤와 안후이)해방구로 들어갔다. 악동(鄂東 : 후베이 동부) 군구 부대는 주력이 포위망을 뚫는 것을 엄호한 뒤 계속 따베산 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이동경로를 기록하는 것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중원해방구 부대들은 포위망을 뚫고 전투하며 이동하다가 1만명을 잃었다. 어떤 이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40만명에 이르던 가솔들과 해방구 인민들의 고통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해방구 1만명의 기층 간부들은 변장한 채 포위망을 벗어나다가 국민당군의 검색에 걸려 처형당하기 일쑤였다. 기자증, 국민당 통치지구의 신분증 등을 위조하여 검문소를 벗어나는 등 목숨을 운에 맡겨야 했다. 식량을 모집하러 간 병사나 간부들이 국민당 토벌군에 잡혀 생매장됐다는 기록도 있다.

한커우 협정에 따르면 부상병들을 인도적으로 후송해야 하였다. 하지만 국민당군이 다친 다리를 때리는데도 미국 감시단이 웃으며 쳐다보았다고 분개한 기록도 있다. 식량의 부족도 심각했다. 중원 군구에서 중공 중앙에 보낸 전문에는 “밥을 해야 하는데 안칠 쌀이 없다.”고 적었다.

이렇듯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았다. 그들의 지휘관은 무장봉기와 피신, 다섯 차례의 포위토벌과 장정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맹장들이었다. 기층 간부들과 병사들은 일본군 치하에서 근거지를 건설하며 유격투쟁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나무열매나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였고 길가의 인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흩어져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각지에서 근거지를 확대하고 병력을 보충하며 힘을 키웠다.

피딩쥔의 활약

‘중원돌파’ 작전에서는 1종대 1여단장인 피딩쥔(皮定均)과 부대원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피딩쥔은 중원군구 부사령원이던 왕수성으로부터 “주력으로 위장하여 국민당군을 기만한 뒤, 여러 방향으로 철수하는 주력을 엄호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드라마에 보면 피딩쥔은 왕수성과 만나 비장한 인사를 나눈다. “상쟝(湘江) 전투 때처럼 목숨을 바쳐 임무를 완성하겠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최선을 다해 엄호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세.”

피딩쥔은 1934년 11월 홍군이 상쟝을 도하할 때의 일을 말한 것이었다. 장정에 나선 공산당과 홍군은 후난성 상쟝에서 국민당군의 차단에 막혀 3만명이 넘는 희생을 당했다. 그때 34사단은 지도부와 주력이 도하할 때까지 국민당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막아 자신의 임무를 완성했다. 그 대신 사단 전 병력이 희생당하는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피딩쥔

피딩쥔과 1여단 7,000명도 취에위안(雀園)에서 일자진을 치고 국민당군 10만명의 공격을 삼일간 방어했다. 주력이 철수할 때까지 폭 20킬로에서 공격해 오는 국민당군 4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한 것이다. 그 뒤 부대를 수습하여 철수하는 일이 남았다. 피딩쥔은 주력을 따라가거나 병력을 분산하여 철수하자는 주장을 모두 물리친 다음 핑한철도를 넘기로 결정했다.

여단 주력이 핑한철도를 넘었을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피딩쥔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하고 크게 기뻐했다. 그는 폭우속에서 부대를 폭 20킬로가 넘는 정면으로 전진시켰다가 갑자기 병력을 거둬들였다. 폭우가 그쳤을 때 국민당군은 해방군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사라진 해방군은 때로는 동쪽으로 산을 뚫고 지나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향하며 종잡을 수 없이 행군하다 작은 산간 마을에서 휴식했다. 그 곳은 국민당군 2개 군의 경계지역이었다. 국민당군이 이용하는 도로 두 개 사이에 시골집 여섯호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비가 그친 뒤 여단 신병이 마을 아래 도로를 보니 국민당군 대병력 십 몇만 명이 계속 지나가는 것이었다. 신병과 부대원들은 혼비백산했으나 피딩쥔은 태연자약하게 다음 행군로를 구상할 뿐이었다. 이틀 뒤 피딩쥔은 적 주력이 대부분 서북쪽으로 갔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이동을 명령했다. 황마공로(潢川-麻城)를 지나 후베이, 허난, 안후이 성 경계에 있는 따베산으로 들어갔다. 국민당군이 부대를 되돌려 뒤쫓아 왔으나 드넓은 따베산 속에서 피딩쥔 부대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7월초 그는 부대를 이끌고 고향인 진싸이현(金寨懸) 우쟈덴(吳家店)에서 휴식했다. 자신이 17년전 소를 먹이다 16세의 소년병으로 홍군에 입대한 곳이었다. 서른세 살에 장군이 되어 찾았으니 감개가 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옌안과 끊겼던 무전이 연결되었다. “빨리 이동하라. 빨리 이동하라!” 그 후로 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마침내 소환(장쑤, 안후이)해방구로 들어갔다. 도중에 국민당군의 추격과 차단, 전투와 돌격 속에서도 1여단은 주력 대부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피딩쥔과 1여단의 활약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해방군 통수부와 국민당 통수부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 후에 그들은 모두 무전 연락 중에 1여단을 “피여단”으로 불렀다.

피딩쥔 여단의 탈출로

공격 정보와 중앙의 실책

중국 드라마에서는 장제스가 중원 해방구를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정보원이 통보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쭈더와 류샤오치, 그리고 런비스가 그 사실을 마오쩌둥과 이야기하며 심각하게 대책을 상의하는 것이다. 사실은 미국의 구호물품 공급 감시원이던 시드니 리턴버그(Sidney Rittenberg)가 정보를 제공하였다. 리턴버그는 본래 미국 공산당원으로 옌안에 와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비밀당원이었다. 그는 마샬쪽 인사로부터 우연히 중원 해방구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찰조가 셴화디엔에 왔을 때 변소에서 리센녠에게 통보해 주었다. 리센녠은 미리 정보를 알고 철수계획이나 부대배치 등을 준비할 수 있었다.

리센녠은 외국인이 자신과 부대원들의 목숨을 구해준 공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리턴버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6년을 감옥에 있어야 했다. 그러다 리센녠이 국가 주석이 된 뒤에 리턴버그를 불러 치하하고 행사 때 천안문에 세웠다. 리턴버그는 감회가 새로웠지만 가족과 함께 중국을 떠났다. 그는 “감옥을 살았어도 후회는 없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그런 일을 보면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최고 지휘부인 중공 중앙이 그렇게 뒤늦은 시점에 철수명령을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마오쩌둥은 충칭에서 돌아온 1945년 10월, 해방구 공격 1년 전쯤 중원군구에 이런 전보를 보낸 일이 있었다. “중원은 조만간 포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당신들이 장제스의 집 문앞에서 왔다갔다 하니 그가 잠을 잘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장제스의 부대를 잡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북과 동북의 행동에 힘을 보태야 한다.” 일 년 전에 그런 생각을 한데다 미리 공격 정보까지 입수했는데도 공격 3일전에 철수를 시킨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장제스의 병력을 묶어둘 목적이라고 해도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중원 해방구에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각 해방구로 흩어진 사건을 중국에서는 ‘중원돌파’라고 부른다. 드라마에서 장제스는 주력이 모조리 달아난 것을 확인하고 류즈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동안 혼쭐을 낸다. 그리고 한탄했다. “류즈, 저 돼지는 적이 어디로 갈지 전혀 예측을 못하니…..” 류즈는 억울한 역을 맡았다. 실제로 류즈는 왕쩐 부대의 방향을 정확히 예측, 추격하고 차단하며 괴롭혔다. 왕쩐 부대 만 명의 부대원이 옌안에 도착했을 때는 4천명만 남았다고 한다. 류즈는 장제스의 부하 가운데 가장 심복이었다. 상장(중장과 대장 사이의 계급)을 달았을 때는 장제스의 ‘오호장군’ 중 한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 뒤에 돼지장군이라는 별명을 달아야 했다.

<국공내전 중 국공의 전력비교>

지휘관

– 국민당

장졔스(蒋介石),리쫑런(李宗仁), 탕언보(湯恩伯), 구쭈통(顧祝同), 류즈(劉峙)、푸쭤이(傅作義)、후쫑난(胡宗南),두위밍(杜聿明)、정동궈(鄭洞國)、장링푸(張靈甫)、바이충시(白崇禧)、웨이리황(衛立煌)、옌시산(閻锡山)、펑위샹(馮玉祥)、천청(陳誠)、장즈중(張治中)、마오런펑(毛人風)、다이리(戴笠)、천리푸(陳立夫)、야오요상(廖耀湘)、궈루구이(郭汝瑰)、황바이타오(黄百韜)、취칭쳰(邱清泉)、황슝(黄雄)、리미(李彌)、쑹시롄(宋希廉)、손웬량(孫元良)、류페이(劉斐)、류루밍(劉刘明)、리팅녠(李延年)、마홍쿠이(馬鸿逵)、마부팡(馬芙芳)등

– 공산당

대원수:마오쩌둥(1955년 계급수여 시 그는 이 계급을 거절했다.)

원수:주더(朱德)、펑더화이(彭德懷)、천이(陳毅)、린비아오(林彪)、뤄룽환(羅榮桓)、허룽(贺龍)、류보청(劉伯承), 녜룽전(聂榮臻)、쉬샹첸(徐向前)、예젠잉(葉劍英)

대장: 쑤위(屬裕)、황커청(黄克誠)、쉬하이둥(徐海東)、천겅(陳赓)、탄정(譚政)、샤오쥔광(肖勁光)、왕수성(王樹聲)、뤄루이칭(羅瑞卿)、장윈이(張云逸)、쉬광다(許光達)

해방후 비군직: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런비스(任弼时)、류샤오치(劉少奇)、가오강(高崗)、겅비아오(耿飚)、리셴넨(李先念)、펑전(彭真) 등

전공이 뛰어난 상장(上将:중장과 대장사이의 계급)

쑤커(蕭克)、리다(李達达、리커농(李克農)、왕전(王震)、쉬스유(許世友)、양청우(楊成武)、한센추(韓先楚)、쑤화(蕭華)、류야루(劉亞褸)、예페이(葉飛)、양더즈(楊得志)、웨이궈칭(偉國清)、마란푸(馬蘭夫)、셰푸즈(謝富治)등

국공 양당의 병력 및 장비 비교

내전을 시작할 때 국민당군 총병력은 430만명이었다. 육군 200만명, 비정규 부대가 74만명, 특수부대 36만명, 공군 16만명, 해군 3만명, 보급부대와 군사기관 및 교육기관 101만명 등이었다. 해방군 총수는 127만명이었다. 그중 야전부대가 61만명, 지방부대가 66만명이었다. 개전 당시 각 전장의 병력 대비를 보면

동북전장 : 해방군과 국민정부군 모두 정예부대를 골라 보냈다. 개전 당시 중공 부대는 11만 6천명이 있었는데 국민 정부군은 대략 3배 정도로 더 많았다.

중원전장 : 개전 당시 해방군 병력은 30만명이었다. 국민당의 중원 전력은 바이충시 집단군과 장제스 직계군이 주력이었다.

화동전장 : 개전 당시 해방군 병력은 32만명이었다. 중공 최강의 부대들이 배치되었다. 국민당군 병력은 35만명이었다.

무장비교

– 국민당

1946년 7월 국민당군의 장비는 대략 4분의 1이 미제였다. 2분의 1이 일제, 4분의 1이 국산장비(스스로 생산 제조한 장비)였다. 미제 무기와 절반쯤 미제 무기를 갖춘 부대가 최소 22개군(정편 사단) 64개 사단(여단)이었다. 교통 및 경찰부대 18개 총대, 4개의 교도총대가 있었다. 그중 45개 사단(여단)과 교통 및 경찰부대는 모두 미제였다. 장비가 보통 수준인 정편 11사단을 예로 들면 장총과 단총이 11,520자루인데 그중 기관단총 등 자동화기가 2,370자루였다. 화포는 440문인데 대구경포는 105밀리 유탄포가 8문이었고 로켓포가 120세트, 자동차 360량이 있었다. 그외 3개의 쾌속 종대를 다시 조직했는데 쾌속종대마다 1개 보병여단, 1개 전차대대, 2개 포병대대, 1개 장갑수색대대, 2개 공병대대, 2개 차량대대를 관할했다. 장비는 탱크 40량, 중포 24문, 자동차 200량을 보유했다. 잡패군은 장비도 비교적 열악했다. 공군은 5개 군구사령부가 있었고 5개 전투기 대대, 2개 중형 폭격기 대대, 1개 B-24대대, 거기에 1개 정찰기 중대가 있었는데 비행기는 900여대가 있었다. 장비는 가장 선진적인 것이 B-24이다. 그밖에 B-25 폭격기와 P-51전투기가 있었다. 해군은 일본으로부터 함정 288척을 접수했으며 미군이 넘겨준 함정이 271척이었다.

– 공산당

1945년 소련이 동북을 점령했을 때 항일연군도 소련군을 따라 동북에 진주했다. 동북 해방군은 대략 총 30만 자루, 경·중기관총 2만정, 척탄통 천개, 각종 구경의 박격포, 산포, 야포 등 약 1500문을 획득했다. 그러나 관내 해방군의 주요 무기와 장비는 주로 항일전쟁 시 일본군 무기를 노획한 것이었다. 해공군이 없었으며 전군 장비는 소총 44만 7천자루, 단총 4만 4천자루, 기관단총 2,678자루, 경기관총 4만 6천정, 중기관총 1,699정, 총류탄 1,428세트, 척탄통 5,050세트, 박격포 1559문, 보병포 124문, 산포 58문, 탱크 8량이 있었다. 장비가 가장 좋았던 동북 민주연군 제1종대를 예로 들면 장단총 12,991자루, 그중 기관단총 등 자동무기가 92자루, 화포 46문 가운데 대구경은 일제 75밀리 산포 12문이었다. 군수품 생산을 보면 각 해방구에 모두 병기공장 65곳이 있었고 매월 소총 천자루를 생산했다. 박격포는 2문, 수류탄은 27만발, 총탄 30만발, 재생총탄 74만발, 박격포탄 4,700발, 지뢰 7,650발을 생산하였다.

<각주>

1. ‘장제스 일기를 읽다.’레이황 지음, 구범진 번역 551쪽 인용

2. 위 1항과 같은 책, 551쪽

3. 같은 책 555쪽

4. 같은 책 556쪽

5. 수정공사는 전시 계엄사령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정저우 수정공사는 허난, 산시(陝西)등 두 성을 관할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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