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정권은 변형되고 무능한 박정희 모델"
        2006년 06월 04일 05: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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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1일, 프레스센터에서 한미 FTA 관련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는 조희연 교수를 만났다.

    그는 언제나 바쁘다. 참여연대 활동을 잠시 쉰다고 하더니, 어느새 캐나다로 날아가 부시 반대 운동을 하고, 캐나다로 연락해보니 영국에 있단다. 영국에서 공부 중이라는 전언을 들은 것도 얼마 되지 않은 듯 싶었는데, 김동춘 신정완 이병천 등 열한 명의 학자들과 함께 『우리안의 보편성-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한울)이라는 꽤 두툼한 책을 써들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선거 결과 87년 체제 전환점 보여줘

    책 이야기를 듣자는 자리였지만, 선거 다음날 선거 얘기가 빠질 수 없다.

       
     

    “노무현 정부나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의 위기는 거시적이다. 87년 이후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이 계속 강화되었고, 보수세력은 연속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런 위기 가운데에서 보수세력은 분열하지 않고 내부를 재정립해왔다. 보수세력은 민주개혁세력과의 투쟁에 의해 자기 정화와 내부 쇄신을 했다. 그런데 개혁세력은 부단히 분화 분열하며 안주해온 것 아닌가.

    이번 선거는 87년 체제의 전환점을 보여주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근대화’와 ‘민주주의’가 우리 나라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외친 세력이 저항집단이었을 때는 그들이 가진 실천적 경쟁력이 문제되지 않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는 당연히 그것을 따질 수밖에 없는데, 민주주의세력이 이념에서든 실력에서든 포스트 박정희 모델을 만들었느냐? 그렇지 못해 선거에 진 것이다.” 

    조 교수의 노무현정부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노무현 정부에는 아예 개혁 컨텐츠가 없다. 흔히 박정희 모델이라 할 때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친미 외교를 일컫는데, 한미 FTA를 추진하는 것을 봐도,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태도를 봐도, 노무현 정권은 변형된 박정희 모델일 뿐이다. 국민은 변형되고 무능한 박정희 모델-‘민주개혁세력’보다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합리화된 박정희 모델-‘보수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박정희 같은 보편성, 박정희를 넘어서는 보편성 만들어내야

    문제는 진보세력도 포스트 박정희 모델을 못 만들었거나 국민에게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국민 대부분이 ‘박정희 향수’를 가지는 것처럼, 박정희와 같은 보편성, 박정희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만들어내야 진보세력이 성장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이 많이 성장했지만, 여전히 거대한 보수의 대항물로서만 존재할 뿐이지, 극우보수세력을 진보적 보편성으로 포섭하고 있지는 못하지 않는가.”

    그가 이야기하는 ‘보편성’은 아마도 ‘Hegemony’ 비슷한 것인 듯 하다. 그는 ‘보편성’에 도달하는 한 방법으로 ‘학문적 식민주의에서 벗어난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연구 방법론이라면 유물론적 탐구틀과 실천적 개입, 그리고 그것을 통한 교정을 거친 ‘현실 정합성’을 주장하면 될 것이지, 굳이 ‘주체성’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주체’를 내건 인식틀이 가장 비주체적이고 비현실적이지 않은가를 물었다.

    “‘주체’에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주체’가 아니라 서구의 관념적 인식틀을 매개로 한 진보학계의 지적 작업이 한계에 부딪혔으므로, 우리만의 고유한 창조적 주체성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삼성의 기술이 서구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삼성이나 한류가 창조적 주체성을 가지고 앞서나가는 것처럼 진보학계도 그런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이 설정한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대목에서 조희연 교수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전혀 학문적이지 않을 것 같은 개념틀을 제기한다.
    “우리는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예를 들어 민주화 과정 같은 것을 한국의 특수성이라며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광주꼼뮨 같은 사건들은 제3세계 여러 나라에 있었던 보편적인 현상이고, 한국의 민주화는 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미흡한 점이 있지만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모델도 외국에 전파할 만하다. 또,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발의하여 시행 예정인 주민소환제 같은 것을 전국 단위에서 채택한 나라는 외국에 없다. 우리 나라에서 시민 사법참여 방식을 만든다면 그것은 미국식 배심제나 독일식 참심제와는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이나 독일보다 더 역동적인 시민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이겼지만 미국식의 자유-보수 양당 구조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노동당이 시민사회로 진입함으로써 이미 미국 모델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한국 모델을 ‘특수’라고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하고,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도록 더 연구하고 투쟁하여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 모델’에 가슴 뛰어 하는 민족주의자가 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뛰어넘는 글로벌리즘’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이 설정한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학문에서든 실천에서든 민중의 해방적 노력을 통해 국민국가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는 미국과 남북 지배세력이 부여한 경계를 민중이 인정해 왔다. 그런데 그 경계 안에서 모든 민중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가?

    조희연 교수가 엄청나게 왼쪽으로 이동했다

    미국에서는 앵글로색슨 이외의 민중은 권력의 주체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러하고. 어차피 경계 밖에 밀려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국민국가적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노동자에게는 비자를 요구하지만, 자본은 비자 없이 움직이지 않는가.

    세계 투기자본의 60%가 동북아에 집중돼 있다. 그렇다면 동북아 시민사회가 함께 투기자본규제책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각국 시민사회의 주된 투쟁 대상은 그 국민국가이겠지만.”

    그렇다. 진보주의자에게 국가는 단일한 공간이 아니었다. 진보주의자에게 국가는 언제나 그 안에 촘촘한 경계와 분할선을 가진 하나의 틀일 뿐이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읽어본 조희연의 책 몇 권은 실증적이어서 그랬는지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이번 책은 철학적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책과 담 쌓고 지내온 나의 적응능력 때문인지 금방 이해되지는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보기관 표현법에 따르자면, ‘극좌 – 정통 – 수정’이라는 계열도에서 항상 오른편에 위치했던 그가 엄청나게 왼쪽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맑스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만약 책을 사 읽게 된다면, ‘지적 식민지성’에는 ‘특수의 간과’나 ‘구체성의 부족’ 정도를, ‘긍정을 통한 보편성’에는 ‘귀납에서 연역으로’ 정도를 대입해보기를 권한다.

    생산수단처럼 정치를 사회화해야 한다

    그는 확실히 과격해졌다.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처럼, 정치를 사회화해야 한다. 정치와 사회를 일치시켜야 한다.” 직접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 정치가, 흔히 정치의 장이라 불리는 곳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대만의 정당에는 ‘당외 정치부’라는 게 있다. ‘장외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개혁세력이라 칭해지는 정치집단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고, 민중이든 시민이든 그 역동성과 잠재력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참여연대 일을 조금 뜸하게 하는 이유가 보이는 듯하다.
    “시민운동가로만 인식되는 것이 싫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운동이 아니다. 정치적 개혁주의가 참신성을 갖던 시대는 끝났다.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 향해야 한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외피로만 존재할 것이냐, 아니면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확대해서 자본주의를 규제하거나 대체할 것이냐를 가늠하는 시점이다.”

    언젠가 참여연대가 만들어질 때, 사람들은 ‘진보정당을 향한 우회로’라는 표현을 썼다. 적어도 조희연은 우회로의 막바지에 다다른 듯 하다.

    그는 1990년대 초반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조직했었다. 최장집-백낙청, 두 거장이 만들어준 민주주의와 통일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보적 학자들이 대학교수가 되어서 진보적 연구 성과를 만들어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진보적 학자들은 학문적 연구보다는 교수라는 권위를 이용한 시민적 기능으로써 진보적이었다. 지금 당장은 최장집-백낙청 논쟁을 받아서 키울 힘도 없다. 그래서 지금 학계의 창조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진보 학자들 백낙청-최장집 논쟁 받아서 키울 힘도 없다

    조희연은 인터뷰 내내 학자의 창조성을 강조했지만, 내가 아는 조희연은 너무 창조적이어서 문제다. 언제나 그러하였는데, 조희연에게 무언가를 듣고 있자면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하다가 옆을 돌아 보면 정작 조희연은 거기에 없었다.

    그는, 그에게 설득된 남들이 그 일을 시작한 순간, 저 멀리 어딘가로 떠나 또 다른 누구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설득하고 있다. 이거 사기당한 거 아닌가? 그가 보여 온 열정과 그가 쏟은 헌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섭섭할지언정 사기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희연 교수는 학술단체협의회와 민주노총과 참여연대와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는 그곳에서 언제나 아이디어 뱅크였고, 조직가였다. 그래서 그가 내달이나 내년쯤 오늘의 인터뷰를 잊는다 하여도 핀잔할 수는 없다. 운동권 공식 지정 ‘각종문제연구소장’인 그가 부산스레 또 다른 책을 쓰기 전에 『우리안의 보편성』을 읽어 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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