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유효성 또는 절망에서 길어올린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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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03일 10: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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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은 평론가 정성일씨의 칼럼과 함께 앞으로 매주 4명의 젊은 영화인들이 쓰는 ‘영화에 관한 거의 모든 얘기들’을 연재합니다. 독자들과 함께 영화 얘기를 나둘 네 분은 유운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곡 독립영화 감독, 원승환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입니다. 이들 필자들은 앞으로 주류 영화는 물론 독립영화에 대해서, 작품평은 물론 문화, 영화 정책까지 영화에 관한 거의 모든 것들에 관한 내용의 글로 여러분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음부터는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나는 이 자리에 게재되는 글의 성격이 어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레디앙> 편집부로부터 전해들은 바가 거의 없다. 다만 한 달을 주기로 해서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의 필자가 교대로 원고를 쓰게 될 거라는 안내가 담긴 정중한 메일을 받았다.

    청탁을 받고 나서 앞으로 어떤 성격의 글을 써야 할지에 관해 고심했지만 이 고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물론 최근에 개봉된 주요한 영화들 가운데 한 편을 골라 그에 관한 리뷰를 쓰는 것이 가장 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구타유발자>, 이 지독한 영화 여기서 논할 가치 못느껴

    그래서 가장 최근에 본 원신연의 <구타유발자들>에 관한 글을 써 볼까도 잠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폭력의 비인간성을 관객들이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고자 했다는 연출자의 의도가 내겐 그저 핑계거리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이 지독한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폭력에 관한 위장된 교훈극조차도 아니다. 사실 이 영화에 보다 어울리는 제목이 있다면 그건 ‘잃어버린 팬티를 찾아서’일 것이다(이 영화를 이미 본 독자들이라면 이러한 지적이 결코 악의 섞인 경박한 과장이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영화의 태반을 차지하는 격렬한 몸싸움과 구타 장면들보다도 내게 더욱 불편했던 것은 여주인공 인정이 ‘노팬티’ 차림임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카메라의 그 음란한 시선이었다. 노출장면이 없이 저열한 페티시즘에 의존하는 소프트코어 포르노를 관람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여하간 <구타유발자들>은 굳이 이 자리를 빌려서까지 논하고 싶은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고민 끝에 나는 이 자리를 개봉작에 관한 리뷰로만 채우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란 결론을 내렸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최근 개봉된 영화 한 편에 대한 리뷰 형식의 글이라면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색용 영화평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물론 기왕의 리뷰들과는 좀 색다른 관점에서 한 편의 영화를 읽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개봉작 가운데 그처럼 다른 견해로 보아야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영화가 있을 경우엔 주저 없이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과 대화하고 싶다.

    한편으로 나는 <레디앙>이 영화전문지가 아니며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보다 폭넓은 독자층에게 호소하는 인터넷 매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성격의 매체에 매달 한 번씩 개봉작 리뷰를 쓴다는 건 그저 잡지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런 리뷰는 속도의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오늘날의 영화전문지 시장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언제나 뒤처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내 나름대로 앞으로 여기에 실릴 글의 성격과 방향을 정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이 <레디앙> 편집진들의 의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느리지만 세상보는 우리 태도에 영향주는 ‘공명의 영화’ 얘기 나누고 싶다

    영화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을 고민할 때 쉽게 빠져드는 결론들은 다분히 반영론적인 시각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화는 거울처럼 당대의 사회를 ‘비추고’(존재명제로 표현된 반영론) 또 ‘비추어야 한다’(당위명제로 표현된 반영론)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건 부르주아적 양심의 도덕률에 부합하는 매우 편리한 비평적 견해이며 또 그러한 견해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영화들이 보는 이의 삶 속에 오래도록 흔적을 남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개의 경우 그런 영화들은 매우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기 마련이다. 느린 속도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만 지속적인 잔영을 남기는 영화들은 오히려 일견 완벽한 영화적 허구의 세계, 그만의 고유한 세상이 어느 순간 우리의 세상과 ‘가족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즉 세상을 반영하기보다는 세상과의 공명을 이루어내는 영화들이다. 나는 이처럼 신중하고 섬세하며 느린 파문을 일으키는 영화들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다.

    예컨대 <무방비 도시>(1945)라는 네오리얼리즘의 고전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만든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이탈리아 여행>(1954)이라는 작품이 있다.

    일견 이 영화는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 부부가 이혼 직전에까지 이르렀다가 기적적으로 – 명확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다.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것은 영화의 시네마토그래픽한 구조 자체이다 – 화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평범한 영화처럼 보인다.

    로셀리니, 버그만의 <이탈리아 여행>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서구)문명 자체에 대한 근심을 읽어내곤 한다. 대부분의 대사는 일상적이고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극중의 부부가 영화 속에서 마주치고 통과하게 되는 장소들과 상황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미세한 제스처들에 집중하다 보면,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문명의 위기를 근심하는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사진=전주국제영화제홈페이지)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를 이루는 가족-부부관계 속에 우리의 세상과 가족 유사성을 지닌 형상들을 새겨 넣은 로셀리니의 작업은 이후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제공해왔다.

    올해 <퍼펙트 커플>이라는 신작을 들고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한 일본영화감독 스와 노부히로도 그런 감독들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그는 로셀리니의 작업과 그의 <이탈리아 여행>에 큰 인상을 받은 바 있지만 자신의 영화가 로셀리니적인 그 무엇을 담지하고 있다고는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문득 그 사실을 환기시켜 준 이는 <퍼펙트 커플>의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발레리아 브뤼니 테데시였다. 스와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자신도 모르게 로셀리니적인 영화를 찍고 있음을 알았다.

    완성된 스와 영화의 결말은 <이탈리아 여행>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기적의 순간 – 스와는 <이탈리아 여행>의 결말에 대해 “맞습니다. 그건 기적입니다!”라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 을 보여주지만 이상하게도 지독히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유효성 또는 절망 속에 길어올리는 유물론적 기적

    오랜 망설임의 순간 끝에 다시 마주하고 선 부부의 제스처, 그 미묘하고도 지극히 작은 제스처. 이 결말에 대해 언급하면서 스와는 2년 전 그가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자리에서 한국의 관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즉 이 작은 제스처 속에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시네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세계에 대한 믿음의 회복’을 향한 소망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시대에 그러한 소망을 간직하는 것은 로셀리니의 시대보다 더욱 힘든 일이 되었다고 믿는 것 같다.

    <퍼펙트 커플>의 결말에 간직된 쓸쓸함은 거기서 연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아직도 유효한 예술이라면 그건 바로 절망의 시간에 기어이 (초자연적이라기보다는 유물론적인) 기적을 붙들고자 하는 이러한 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가 그러한 기적의 순간들을 간직한 영화들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며 또한 그 영화들이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창작자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한국영화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그 영화들의 섬세함과 울림을 제대로 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나의 필력엔 미리 양해를 구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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