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재자 철학' 구현한 건축가 김수근의 업적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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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03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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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모든 정치에 있어서 건축은 상징적인 의미를 충족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 데이안 수직 <건물강박관념>, 2006.

    1999년부터 독일 정권의 주요 기관들이 새 수도 베를린으로 옮기면서 피셔 장관이 이끄는 외무부는 옛 나치시대의 ‘제국은행’ 건물로 이사했다.

    물론 옛날에 유태인 대량학살에 가담한 중앙은행의 건물에 들어섰다고 해서 나치에 동감한다거나 그들의 범죄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8운동 활동가 출신인 피셔가 녹색당 지도자가 되고 나서 외무부 장관까지 오르고 결국 사민당과 함께 코소보 전쟁에 참전을 결정했다고 해서 이것을 중앙은행 건물 입주와 연관시키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외무부 이전 당시 이 건물의 역사와 용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는 옛 제국은행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후 나치들에 의해 지어진 첫 대형 건축계획이었고, 또 뭐니뭐니 해도 국가 건축은 늘 정치적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역사적 건축물은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경복궁 터 안에 있었던 일제 총독부 건물과 같이 식민지 지배자들이 일부러 중요한 자리에 건설한 폭력의 상징은 사라지는 것이 옳다.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폭격으로 인해서 절반이 무너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기억의 교회’처럼 보존할 이유는 없다. 독일은 극히 파괴적인 2차 대전의 가해자이지만, 한국은 식민화와 태평양 전쟁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철학’을 구현한 건축가

    그런데 독재시대 가해자들에 의해서 건축된 건물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특히 개발독재 시절 박정희가 제시한 건축도약기획(‘건설=국방’) 아래 건설된 건물들 말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런 건물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을 또한 어떻게 봐야 하는가 라는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히틀러의 공식 건축가였던 알버트 슈페어처럼 장관으로 지낸 건축가는 없었지만, 쿠데타 일당들의 ‘철학’을 구현해준 건축가는 분명히 있었다.

    건축가 故 김수근은 한국의 현대 건축을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주요인물이다. 김수근은 1931년 현재의 북한 지역에서 태어나 1938년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14살 때 해방을 맞았다.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지 몇 개월도 안 돼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을 통해서 동경으로 도피해 일본의 건축 대가인 요시무라 준조와 당게 겐조에게서 당시 최첨단 설계를 배웠다.

       
    ▲김수근 작(作)  88올림픽 주경기장

    김수근이 모국 땅에 첫발을 밟은 것은 1960년이었다. 그가 맡은 국회의사당 설계작업은 5.16 쿠데타 때문에 무산됐지만,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잘 만나 워커힐 호텔의 힐탑바(61년), 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영맹)의 본부인 자유센터(62년), 국립부여박물관(65년) 등을 건축해 한창 젊은 나이에 이름을 날렸다.

    일본냄새를 풍긴다고 부여박물관에 대한 친일논란이 있은 후 김수근은 잃어버린 한국전통을 공부해 되찾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계기로 건축가로서 제2의 시기가 시작됐고 공간사옥(71년), 주 인도 한국대사관(77년),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77년) 등을 설계했다.

    당시 김수근의 대표적인 건축특징은 작고 어두운 색  깔이 있는 벽돌, 얇은 창문과 넒은 벽면이었다. 그는 밖보다 안, 집보다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서양보다 동양 혹은 한국의 것을 강조했다. 80년대에는 새로운 첨단 기술의 시대를 맞이해 주미 한국대사관저(83년), 국민투자금융 본사(84년), 벽산빌딩(85년) 등을 설계했다. 특히 서울역 앞에 위치한 그의 마지막 업적인 벽산빌딩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다른 현대적 건물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

    김수근은 20년 전인 1986년 6월14일 간암으로 사망했다. 때문에 1년 후 많은 젊은이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가능했던 1987년 6월 항쟁과 그에 이은 민주화의 출발점을 경험하지 못했다. 1987년 1월14일 자신이 10년 전에 설계했던 남영동 보안분실에서 한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은 것도 알 턱이 없었다.

    김수근 자체에 대한 평가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설립한 공간사옥에서 출간된 저서 몇 권, 정인하 교수가 쓴 책과 논문 외에 연구자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부분이 건축학이나 미술적 관점에서 본 비정치적인 평가에 그친다.

       
       ▲김수근 작(作) 남영동 대공분실 ⓒ연합뉴스

    작년에 남영동 보안분실이 29년 만에 해체되고 앞으로 인권보호센터로 쓰인다는 소식과 함께 이 건물의 설계자가 널리 알려지자,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최근에 <교수신문>은 남영동 분실을 설계한 김수근의 ‘의도’에 대한 건축학 교수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소개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건축가와 설계 혹은 건물의 사회적 의미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또한 김수근이 설사 남영동 보안분실을 경찰이 사용하게 될 것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유명장소’가 될지는 알 수 없었지 않았냐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조금 더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보안분실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설계된 타워호텔(62년), 이란 엑바탄 주거단지(75년), 88올림픽 주경기장(77년), 인천상륙작전기념관(82년), 치안본부청사(83년), 서울법원 종합청사(84년), 육사 교훈탑(86년) 등 3공화국부터 5공화국까지 독재자들의 뜻을 무수하게 구현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또한 1968년에 대규모의 국가 건설기획을 담당하는 한국기술개발공사의 대표이사가 된 것이나 1981년 당시 새 주한 미대사 워커에게 광주학살의 주범인 허화평과 허삼수를 소개해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수근이 독재자와 협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특히, 당시에 일종의 경쟁자인 건축가 김중업이 독재정권과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7~8년간 프랑스로 추방당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악마와 조약을 맺는 건축가

    독재자와의 협력은 김수근의 건축철학과도 어긋난다. 그는 ‘인간의 필요’ ‘생활공간’ ‘자연환경의 균형’ 등을 강조하면서 건축행위가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비판했다. 1979년에는 ‘네가티비즘’론을 펴서 건축행위의 사회문화적인 책임, 즉 ‘건축가의 도덕성’을 철학적인 맥락에서 주창하기도 했다. 김수근은 이처럼 두 눈을 뜨고 세계를 직시하는 건축가였지만, 국가권력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김수근 작(作)  육사 교훈탑
     

    "건축가는 연어가 죽기 전에 산란하러 마지막으로 힘들게 강 상류로 올라가는 의무처럼 마치 유전자적인 운명과 같이 설계할 수 있기 위해 모든 짓을 한다. 건축가의 직업은 악마와의 조약을 맺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데이안 수직, 위의 책.

    김수근뿐 아니라 르코뷔지에, 미스 반 더로헤, 렘 콜하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대부분 그렇다는 얘기다. 김수근은 분명히 한국의 문화, 미술, 건축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김수근은 김덕수, 김용배, 공옥진 등 오늘날 예술계의 유명인사들을 데뷔시켰다. 하지만 김수근이 한국 문화예술의 ‘로렌초 메디치'(르네상스기의 시인)였을지는 몰라도 그가 ‘악마와의 조약’을 맺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수근이 건축할 당시의 정부깡패들과 독재체제는 더 이상 없지만, 그들이 남긴 건축물들은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역사의 증거물인 그 건축물을 부술 필요는 없지만 설계한 사람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필요하다. 더구나 김수근은 분명한 의식이 있는 주요 문화예술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인정하되 책임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6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에 전시회, 학술회의 등 김수근 20주기 추모행사가 열린다. 이 자리가 책임있는 성찰의 첫 걸음이 됐으면 한다.

    강미노_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한네스 B. 모슬러라는 독일 이름을 갖고 있는 이방인. 76년 독일에서 태어나 95년 브레멘대학에 입학했다. 이듬해 베를린 훔볼트대로 전학해 문화학과 한국학을 전공했다. ‘한국 민족주의 논쟁에 대하여’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와서 <이코노미21> 객원기자로도 활동했다. 현재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한국의 정당체제’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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