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저임금 구간 결정,
    노사 당사자는 배제한다?
    한국노총 "정부 개편안, 제도 개악"
        2019년 01월 07일 03:55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정부가 또 다시 노사 이해당사자와의 협의 없이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방안을 발표하겠다고 통보하면서 노정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이원화하는 최저임금 개편 초안을 7일 발표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시한인 7월 전에 국회 입법을 마무리하겠다는 입장이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 개편안이 이달 중으로 확정되면 국회가 본격적인 입법에 착수해야 한다”며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시한인 7월 이전에는 국회 입법이 마무리돼야 한다. 2월 임시국회에서 여야가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하고 가능하면 결론을 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발표한 최저임금 개편 초안은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구간설정위원회’와 ‘결정위원회’로 이원화하는 방안을 골자로 한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구간설정위원회가 최저임금의 상·하한 구간을 결정하면 노사와 공익위원이 참여하는 결정위원회가 그 구간 내에서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내용이다.

    최임 결정구조 이원화, 노사 빼고 정부가 최임 결정?
    “최임 당사자인 노사는 거수기로…문재인 정부, 20년 역행”

    정부의 최저임금 결정구조 이원화 방안은 절차부터 그 내용까지 노정 갈등을 촉발할 만한 문제가 곳곳에 포진해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임금인 최저임금 결정을 노사 당사자가 아닌, 사실상 정부가 좌우하는 전문가들이 사실상 결정한다는 점이다. 공익위원이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 상당 부분 개입하는 기존 최저임금위원회조차도 구조 개편 요구가 잇따랐다는 점을 환기하면, 이번 이원화 방안은 노사 참여를 배제하고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노골적으로 뜻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결정 방식으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 임금인 최저임금 인상 폭이 정부의 입맛에 따라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 또한 문제다. 기존 최저임금위원회의 최저임금 결정과정에 공익위원의 입을 통해 정부가 개입했던 것에 노사 모두 반발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러한 결정 방식은 노사정 갈등만 더 심화시킬 우려도 있다.

    ‘노사 당사자 결정’이라는 임금 결정의 대원칙을 훼손한 것이라는 비판이 노동계는 물론, 정치권 일각에서까지 제기되는 이유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 이날 상무위회의에서 “전문가를 내세워 정부가 최저임금을 사실상 결정하고, 노사 당사자는 최저임금 결정에 들러리로 세우겠다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최저임금 제도는 한번 변경하면 다시 바꾸기 어렵다. 500만 저임금 노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바꾸려면 충분한 대화가 필수”라며 “만일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면 노정 관계는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호진 정의당 대변인도 이날 국회 브리핑을 내고 “임금 결정의 당사자인 노사를 거수기로만 동원하겠다는 불합리한 발상”이라고 규정했다.

    이번 정부 개편안을 통해 사실상 최저임금 결정과정에서 배제된 노동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민주노총은 지난 4일 성명을 내고 “노사가 빠진 상태에서 ‘전문가’들로만 구성한 구간설정위원회가 최저임금 상·하한을 결정한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며 “저임금 노동자 생활안정을 위한 것이 최저임금인데, 정작 당사자인 저임금 노동자는 배제하고 누가 최저임금 상·하한선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직접 당사자인 저임금 노동자, 그리고 이들을 대표해온 민주노총을 배제하거나 대표성을 약화하는 어떤 방안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노총도 같은 날 입장문을 내고 “소위 전문가들이 미리 구간을 설정하는 것은 노사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훼손하는 것이며 노사공은 사실상 거수기로 전락하고 만다”면서 “이는 최저임금을 결정하면서 당사자인 노동자의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최저임금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국제노동기구(ILO) 권고를 역행하는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에 최저임금협약을 비준한 이후로, ILO 권고에 따라 최저임금 결정과 최저임금제도 변경에 노사 당사자가 직접 참여한다는 원칙 아래 최저임금 등을 논의해왔다.

    민주노총은 “우리나라가 2000년에 비준한 ILO 최저임금협약은 권한 있는 노사대표가 최저임금제도 및 최저임금 결정에 참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며 “(정부가 일방 발표한)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안은 ILO 권고보다 훨씬 후퇴한 것으로 그 취지에도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이정미 대표는 “만일 새로운 최저임금 결정방안이 현실화되면 ILO로부터 문제제기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며 “기존에 비준한 협약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나머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정호진 대변인도 “정부 개편안은 20년을 역행하는 것”이며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조치”라고 질타했다.

    ‘노동 존중’ 문재인 정부와 여당
    또 노동계 배제하고 입법 추진할까

    노동계에 따르면, 정부가 이번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안을 내놓으면서 해당 정책을 적용받는 이해단체인 노동계와 어떠한 사전 협의도 하지 않았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나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추진하면서 노동계와 사전 협의조차 거치지 않아 노정 갈등을 유발했던 당시와 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집권여당 또한 이번에도 법안 통과 시한을 통보하고 ‘여야 논의’를 거치겠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노사정 대화의 건강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하는 ‘노사정 대화를 통해 경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대외적 발언과 실제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이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당장 경사노위 운영도 어려워질 수 있다. 조만간 경사노위 참여를 결정할 민주노총은 이 문제로 또 다시 노사정위 참여에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높아졌고, 정부여당에 우호적인 한국노총 역시 “매우 불쾌하고 유감스럽다”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강도 높은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임금과 노동시간 관련 정책과 관련해, 정부가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이중적 태도를 유지하게 되면 장기적으론 정부에 대한 노동계의 불신까지 높여 노정 관계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달을 수 있다.

    민주노총은 “정부는 노동과 밀접한 제도 개정을 추진하면서 당사자와 충분한 사전협의 절차 없이 언론에 설익은 계획을 먼저 터뜨려 답을 정해놓은 뒤, 타협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 같은 행태는 민주노총 총파업을 불렀던 2018년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 현재 격렬한 쟁점이 되고 있는 탄력근로 단위기간 확대 추진 시에도 동일하게 반복돼왔다“고 짚었다.

    민주노총은 “이른바 ‘답정너(답은 정해놨으니 너는 대답만 해)’식 정책 추진은 대화상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단히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라며 “정부는 이후 노정관계를 악화시킬 이런 식 정책 추진을 당장 중단해야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정식으로 최저임금위원회를 소집해 관련 노사 당사자와 충분한 사전협의에 나서야 한다”며 “그것이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헌법이 정한 최저임금제의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노총도 이번 정부 개편안을 ‘최저임금 제도개악’이라고 규정하고 “매우 불쾌하고 유감스런 일이며 이 정부의 노동정책이 확실하게 후퇴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정부가 형식적인 의견청취를 거쳐 국회 입법화를 할 것이 아니라 기존 논의주체인 노사공이 참여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결정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대노총은 오는 9일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위원 워크숍을 통해 정부계획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향후 정부가 개편안을 강행할 경우 연대 투쟁에 나설 방침이다.

    사용자 단체 역시 최저임금 결정구조 이원화를 골자로 하는 정부 개편안에 부정적 입장이다.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장은 7일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열린 소상공인연합회 신년하례회에서 “구간설정위원회를 설치한다고 해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잦아들지는 미지수”라며 “누가 위원으로 추천되더라도 과거 이력과 성향 등을 둘러싼 논란으로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그러면서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구간을 정하고, 그 결정을 따르는 게 맞다”며 “전문가들이 아니라 국회가 최저임금 인상구간 설정 임무를 맡아야 한다”고 거듭해 주장했다.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 위원인 권순종 소상공인연합회 부회장도 “구간설정위원회 자체는 합리적인 방향”이라면서도 “구속력 있는 의결권을 부여하면 부작용이 커 일본처럼 권고 정도의 권한이 적당하다”고 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