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 민주연군,
패하여 천리를 물러나다
[국공내전 7] 정전협정 속 쓰핑전투
    2019년 01월 03일 04: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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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회의 글 “동북지역을 둘러싼 각축”

마샬의 활약

조지 마샬(George Catlett Marshall)이 중국으로 왔다. 헐리가 집어던진 국공 양당의 중재를 위해서였다.

헐리(Patrik Hurley)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국공 양당을 중재하라고 임명한 특사였다. 그는 나중에 중국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대사가 된 뒤에는 국민당과 장제스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1944년 헐리가 처음 옌안을 방문했을 때는 그곳의 활력과 넘치는 기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거기에 비해 충칭에 있는 국민당 관료들은 뭔가 부패한 냄새가 나고 민주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없는 구태의연한 사람들로 느껴졌다.

헐리는 공산당을 일본전에 참여시키려는 미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국공 양당을 적극 중재하였다. 대사로 임명된 그는 충칭에서 열린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을 위해 옌안과 충칭을 오갔다. 하지만 1945년 11월에 미국이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자 헐리는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느꼈다. 미국은 지금까지 중국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지원을 해왔다. 그런데 양당의 중재를 강화할 목적으로 조건부 지원으로 방침을 바꿔버렸다. 즉 “국민정부는 미국의 무기를 내전에 사용할 수 없으며 공산당과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환멸을 느낀 헐리는 그해 11월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사직서를 던졌다. 자신을 대사로 임명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헐리는 트루먼 대통령 앞에서 자신이 국민당편에 섰는데도 중재를 했다고 “헐리는 외교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간주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비난했다. 또 중재를 지나치게 원하는 국무부 관리들에게도 불평하였다. 헐리는 나중에 극우인사가 되어 매카시즘 확산에 앞장섰다고 한다.

조지 마샬

마샬은 2차 대전에서 가장 뛰어난 공을 세운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에게 “만주에서 국민정부가 영향력을 회복하도록 광범위하게 협조하지만 직접적인 군사개입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라”는 어려운 임무를 부여했다. 그는 또 “장제스에게 중요 당파가 참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게 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강대하고 통일을 이룬 민주적인 중국의 탄생”에 기여해야 했다.

마샬은 장제스에게 “중국에 대한 대규모 지원은 정전 달성과 국가 통일이 되면 결정할 것”이라는 분명한 의사를 전달했다. 마샬의 임무는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체결한 쌍십협정의 선언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연합정부를 출범시키는 데 있었다.

마샬의 구체적 당면목표는 세 가지였다. 내전 중지, 정치협상회의 개최와 연합정부 수립 논의, 국공 양당의 군대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 등이었다. 마샬은 중국에서 진심어린 환영을 받았다. 국공 양당은 회담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겉보기에만 그랬고 속셈은 서로 달랐다. 국민당은 미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고 공산당은 시간이 필요했다. 장제스는 자신들이 군사력에서 훨씬 우세하기 때문에 단숨에 적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종이호랑이”로 불렀을 뿐 아니라 공산당이 장기적인 투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46년 1월 10일, 국공 양당은 한차례 정치협상회의를 열어 즉시 휴전하고 교통을 회복하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국민당 대표와 공산당 대표, 미국 대표로 구성한 3인의 군사중재위원회를 구성했다. 3인 위원회는 마샬이 대표를 맡고 국민정부 쪽에서 외교부장 장췬(張君)이, 공산당 쪽은 저우언라이가 참가하였다.

정치협상회의는 1월 10일부터 31일까지 휴전기간에 개최되었다. 총 3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국민당 8명, 공산당 7명, 민주동맹 9명, 청년당 5명, 무당파 인사 9명이었다. 회의에서 연합정부 구성에 대하여 논의했는데 진행이 순조로웠다.

마샬은 또 국공 쌍방의 병력과 군대 합병에 대한 협정을 중재했다. 이 협정은 1946년 2월 25일 체결되었다. 1년 안에 국민당군을 90개 사단으로 줄이고 공산당군을 18개 사단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그 뒤 6개월 안에 쌍방이 각각 50개 사단과 10개 사단으로 줄이도록 규정했다. 이 협정 결과는 국민당에게 크게 유리했다. 만주와 화북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공산당의 서북 지역을 국민당이 접수하게 되어 공산당의 소련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산당이 얻은 것은 비적, 공비 대접을 벗어나 잠시나마 합법적인 지위를 얻은 것, 그리고 시간을 번 것이었다.

이 협정에 대하여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은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것 같다. 마오쩌둥은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평화 민주의 새로운 단계가 왔다.”고 평가하였다. 1946년 2월 1일 중공 중앙은 ‘현재 형세와 임무에 대한 지시’를 했는데 명백히 평화를 중점에 놓고 있었다. 3월 15일 지시에서는 다시 평화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길은 구비친다. 돌발적인 사태에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두 달 동안 마오쩌둥과 지도부가 형세를 낙관하고 협정 내용을 집행할 준비를 하게 하였다.

3월 6일, 마오쩌둥은 공산당 소속 군대 병사들을 두 번에 나누어 제대시킬 것을 제기하였다. 먼저 삼분지 일을 제대시키고 다시 삼분지 일을 제대시키자고 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군이 130만 명이었기에 제대하고 나면 겨우 40만 명 남짓 남게 된다. 이 제안은 집행이 조금 되다가 유야무야 되었다. 봄에 동북에 있던 린비아오의 민주연군이 창춘을 점령하며 국공 간에 다시 전투가 불붙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차지 군구는 웬일인지 지시를 착실히 집행하여 수만 명의 병사를 제대시켜 버렸다. 그 후과는 나중에 따퉁전투나 국군의 장자커우 공격에서 나타나게 된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또 정부기관을 장쑤성의 화이인으로 이전할 것을 심각하게 검토하였다. 마오는 미국특사 헐리와 대담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난징에 갈 수 없으니 화이인에서 살아야 하겠다. 화이인은 난징에서 멀지 않다. 화이인의 기후나 풍습은 모르지만 그 곳에서 일하면 무척 편리할 것 같다.”

마오쩌둥의 그런 생각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충칭 담판 전인 1945년 8월 23일과 8월 26일, 두 번에 걸친 정치국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장래 국민당이 난징으로 이전하면 전국의 중심은 난징이 된다. 항전의 2개 중심인 충칭과 옌안의 지위는 하락하게 된다. 우리는 당 중앙기관을 화이인으로 이전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국민당 통치의 중심이 난징으로 되고 공산당이 정당 간 협상에 참여하면 기관을 화이인에 두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지적도 덧붙였다. “화이인은 장쑤 북부의 평원에 있다, 전쟁이 난다고 생각하면 화이인으로 가면 안 된다”

중국의 연구자들은 마오쩌둥의 그런 발상이 평화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본다. 당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이 압력을 가하면 장제스가 내전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중재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태도와 장제스에 대한 압력, 그리고 만주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태도를 보면 마오와 공산당 지도부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이해가 된다. 마오쩌둥은 또 평화는 무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장제스가 정전협정을 체결한 것도 2차대전 이후의 싸움에서 공산당이 잘 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마오는 장제스의 반공 의지를 과소 평가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1차 국공합작을 깨뜨린 뒤부터 공산당과 공존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을 얻는 것, 그리고 중국 서남부 지역에 편중되었던 자신의 군대를 일본 점령지역에 배치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마오쩌둥은 새벽까지 일하거나 밤새워 일하고 낮에는 잤다. 그는 1945년 말부터 과로하여 한 달 동안 앓았다. 그리고 그 뒤 삼개월은 쉬기도 하고 일하기도 하였다. 중요한 전보는 언제나 직접 기초하였다. 당의 방침과 전략, 그리고 중요한 전투는 모두 개입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그러니 화이인으로의 수도 이전방침이나 군대 축소같은 일도 당연히 그가 주도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마오쩌둥은 비교적 사고가 유연하였다. 현실에 비추어 잘못되었다고 깨달으면 즉시 방침을 수정하였으며 하부의 의견도 곧잘 수용하였다. 또 언제나 다음을 준비하는 그의 태도가 잘못을 줄였다.

그는 1946년 3월 6일, 병사의 제대 문제에 대하여 “사람과 무기를 농촌에 잘 두고 관리하라. 형세 변화에 준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병력 감축과 수도 이전 문제는 공산당이 세력을 유지하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화이인 수도 이전 문제도 평화기간이 너무 짧아서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종전 이후 계속되어온 국공 양당의 군사적 충돌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중국 인민들은 내전 없이 연합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협정대로 현실이 진행될지는 미지수였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군대 개편안을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의심스러워했다. 그는 마샬에게 국공 군대를 합병하는 것은 “호랑이 가죽을 벗기는 일을 호랑이하고 의논하는 격”이라고 말했다. 국민당 안의 CC파(1)는 이 협정을 ‘마샬이 국민당에게 강요한 것이며 그런 간섭이 없었다면 국민정부군이 벌써 공산당군을 소멸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샬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1946년 2월 25일 미국의 군사사절단 1,000명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소련군도 3월에 만주에서 철군을 시작했다. 소련의 철군은 한층 강경해진 미국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만주에서 공장은 물론 가져갈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뜯어서 소련으로 가지고 갔다. 마샬은 옌안에 가서 마오쩌둥도 만났다. 둘이 침대의자에 누워 사이좋게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마샬은 누구나 걱정하던 불가능한 임무를 훌륭히 해치운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한층 가벼워진 마음이 되어 미국에 돌아가 수출입은행이 중국에 제공하는 5억 달러의 차관을 처리했다. 하지만 그가 미국으로 떠나자 휴전협정은 곧바로 휴지조각이 되었다. 국지적인 전투는 곧 대규모 전투로 비화했다. 다시 중국 하늘에 내전폭발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졌다.

장제스가 협정에 동의한 것은 미국과 소련의 지지를 통해 만주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는 큰아들인 장징궈(將經國)을 소련으로 보내 이 협정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을 탐색하게 하였다. 뜻밖에도 스탈린은 처음의 입장을 바꿔 미국 군대의 중국 주둔을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얄타회담 결과에 대한 소련의 늦은 선포, 동유럽과 발칸반도에서 소련이 보여준 행동은 크렘린의 의도를 더욱 의심스럽게 하였다. 만주에서는 정보요원이 공산당군과 소련군이 서로 공모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스탈린이 우호조약을 체결할 때 먹었던 마음이 변한 게 틀림없었다.

1946년 3월 6일, 장제스는 소련이 만주에서 벌이는 행동에 대하여 정식으로 항의했다. 그리고 소련군이 만주에서 모두 철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장제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스탈린도 하는 수 없이 만주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미국과 충돌을 피하고 싶었으며 얄타회담에서 맺은 협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변덕스러운 소련군의 견제를 받던 공산당군의 행동이 자유로워졌다. 소련군이 노획한 일본 무기는 모두 공산당군의 손에 들어갔다.

미국도 연합정부 구성을 조건으로 지원한다고 했지만 점차 무조건적인 지원을 계속하게 되었다. 루즈벨트를 이은 트루먼이 점점 국민당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미국은 차관 및 무기의 지원은 물론 국민정부를 도와 군대 수송을 계속 엄호하였다. 그리고 공중 및 해운을 통해 국민정부군을 동북으로 직접 실어 날랐다.

중앙의 붉은 표시가 된 곳이 쓰핑

정전협정 기간 중에 쓰핑을 공격하다

1946년 3월까지 국민정부는 동북에 6개 군을 실어 날랐다. 지방 보안부대까지 더하면 국민당군은 총 31만명에 이르렀다. 소련 군대가 철수하면 곧바로 동북 전역을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국민당 동북 사령부 주임인 숑스후이와 보안사령관 두위밍은 3월 27일, 국공 쌍방의 ‘동북정전에 관한 협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다. 11개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동북 민주연군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국민당군은 먼저 랴오닝성에 있는 번시(本溪), 안산(鞍山), 쓰핑지에(四平街:지금의 쓰핑) 등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아 점령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창춘(長春), 하얼빈(哈爾濱) 등 동북 전체를 점령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두위밍이 이렇게 결심하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었다.

동북의 상황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공산당군이 소련군을 따라 둥북의 여러 도시에 진출하며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방침, 국공 간의 평화회담과 맞물려 상황이 계속 변해갔다. 결국 대도시를 국민당군에 인계하려는 소련의 방침에 따라 공산당군은 중소 도시와 농촌지역으로 잠시 철수하였다. 하지만 국공 사이에 회담이 열리고 있던 1946년 1월 중공 중앙은 동북국에 “병력을 집중시켜 창춘, 하얼빈, 치치하얼 등을 장악하라”고 지시하였다. 1월 27일, 동북국은 다시 “선양 남쪽에 있는 아군은 창춘로 연선에 위치하여 회담 상황에 따라 출동 대기하라”는 중공 중앙의 명령을 받았다. 회담 상황에 따라 전투가 벌어질 경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중공은 다시 1월 31일, 동북국에 “소련의 양해를 얻어 번시, 안산, 랴오양(遼陽)에 진출하여 테링(鐵領), 창투(昌圖), 카이위안(開原)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2월 7일 전문을 보내 “린비아오, 펑전 당신들은 진저우, 러허에서 전투할 기회를 잃은 일이 있다. 이번 기회에 승리하여 만회하도록 하라”며 독려했다. 린비아오로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국민정부로서도 동북에 충분한 병력을 확보했다고 판단하자 공격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쓰핑은 지린성(吉林省)에 위치해 있다. 랴오닝성, 지린성, 그리고 내몽골 자치주 경계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이곳의 싸움이 창춘을 비롯한 남만주 전체의 판도를 좌우할 상황이 된 것이다. 중공 중앙은 국민당군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자 막기 위해 고심했다. 중공은 회담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장차 동북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동북 민주연군에게 주력을 집중하여 쓰핑을 견결히 사수하라고 요구했다.

동북 민주연군 총사령 린비아오, 정치위원 펑전은 부대 병력을 남만주에 두어 번시(本溪)를 방어하고 남만주를 석권하려는 국민당군을 견제하기로 결심했다. 일부 병력은 친일 괴뢰군이 점령한 창준, 하얼빈, 치치하얼(齐齐哈尔) 등을 수복하기로 하였다. 주력은 쓰핑 지역에 집중하여 국민당군의 북진을 저지하기로 하였다.

린비아오(林彪)

린비아오는 후베이성 황강(黄岡) 사람이다. 그는 열일곱 살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황푸 군관학교 4기생으로 수학했다. 1927년 국민혁명군 북벌전투 때 린비아오는 예팅(葉廷)의 휘하에서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그해 난창기의에 참가하였으며 징강산에 들어가 중공 소비에트 창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이 직접 지휘한 융신(永新) 전투에 연대장으로 참전했는데 지휘가 민활하고 의병(가짜 군대)을 잘 써 마오쩌둥의 칭찬을 들었다.

린비아오

1929년 쭈더와 마오쩌둥을 따라 장시성 남부와 푸젠성 서부에서 싸웠는데 그해 연말에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신년을 축하하는 인사를 하였지만 실제로는 1년 안에 장시성을 석권하겠다는 마오쩌둥의 계획이 무리한 것이라고 직언한 내용이었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에게 회신을 보내어 타일렀다. 그 편지는 나중에 “한 점의 불꽃이 광야를 불태운다”는 유명한 책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그는 장정 때 1방면군 주요 지휘관으로 마오쩌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쭌이회의 뒤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사도적수(四渡赤水)(2), 진사강(金沙江) 도하 등에 불만을 품고 “앞으로는 펑더화이가 군을 지휘하게 하고 북상하여 4방면군과 합류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마오쩌둥으로부터 엄중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항일전에서도 핑싱관 전투, 백단대전에 참여하여 전공을 쌓았으며 1946년 동북민주연군 총사령겸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39세때 일이었다.

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병력이 많을수록 지휘능력을 잘 발휘하였다. 그의 지휘는 ‘일점양면(一点兩面)’ ‘삼삼제(三三制)’ ‘삼맹(三猛)’ 등으로 표현되는 특징이 있었다. ‘일점양면’이란 공격할 때 병력을 집중하여 적의 한 곳을 공격하여 돌파하고 신속하게 전과를 확대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또 정면공격과 측면을 우회하여 포위하고, 적의 취약한 곳을 치고 들어가 분할하여 각개 섬멸하는 전술을 잘 운용하였다. ‘삼삼제’란 분대를 세 개의 전투소조로 나누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소조 단위로 대형을 분산시키면 적의 화력에서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삼맹’은 ”맹렬하게 공격하고, 맹렬하게 돌격하며, 맹렬하게 추격하라.“는 일종의 구호였다.

린비아오는 복잡한 전술문제를 몇 개의 간단한 표현으로 개괄하여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전술원칙을 널리 학습시켜 동북 민주연군이 모두 제대로 응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기록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몸이 약하고 조용한 성격이어서 말수가 매우 적었다. 린비아오는 공산당 군대 최고 지휘관 중에서 나이가 가장 적었다. 하지만 공산당군 3대 주력인 동북 민주연군을 지휘했으며 내전 초기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지인 동북을 맡았다. 그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공 중앙의 독려와 린비아오의 결심

정전협정 발효 중이던 1946년 3월 17일, 동북 민주연군의 주요 지휘관인 황커청과 리푸춘(李富春)이 병력을 인솔하여 쓰핑시를 점령했다. 3월 24일 중공 중앙은 다시 린비아오, 펑전에게 전문을 보내 “우리는 창춘과 하얼빈을 장악해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두 도시와 중동로(中東鐵路(3))를 국민당군의 공격에서 지켜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투를 지휘하는 린비아오

3월 25일에는 다시 전문으로 “소련군이 철수하면 하루, 이틀내로 하얼빈, 치치하얼, 창춘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29일에도 전문을 보내어 “세 곳을 점령하고 저항하는 적은 모두 섬멸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여러 번 전문을 보냈으니 린비아오를 비롯한 동북 민주연군 지휘관들이 어떤 압박을 느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4월 14일, 소련군이 탄 마지막 열차가 창춘역을 빠져 나갔다. 동북 민주연군은 즉시 공격을 시작하여 4일 만에 창춘을 점령하고 수비군 2만 명과 토비 백여 명을 섬멸했다. 수많은 탄약과 국민정부의 화폐를 노획하였다. 23일에는 서만주에 주둔한 민주연군이 치치하얼을 점령했으며 수비군 3천여 명을 섬멸했다. 4월 28일에는 북만주의 민주연군이 하얼빈을 점령했다.

4월 19일 중공 중앙은 린비아오, 펑전에게 전문을 보내 승리를 축하했다. “창춘을 점령한 것은 동북은 물론 전체 국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공이 있는 장사들을 포상하라” 중공 중앙은 그날 다시 전문을 보내 지시했다. “강적을 맞이하여 이기고 창춘을 보위하라. 집중하여 우세한 병력으로 쓰핑 남쪽에서 적과 수차례 결전하라. 세 도시를 지키느냐 여부는 이번 싸움에서 승리하고 적을 대거 섬멸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4월 20일 전문은 이렇게 지시했다. “필요시 창춘을 중국의 마드리드로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하라.”(4)

린비아오도 이미 마오쩌둥과 동북국에 쓰핑 방어전에 대한 결의를 밝힌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쓰핑을 사수하여 동북의 정세를 안정시키겠다.” 중공 중앙은 린비아오의 결심에 대하여 “6개 여단을 집중하여 쓰핑을 방어하겠다니 매우 좋다. 수천 명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회신했다.

쓰핑전투 양상을 그린 기록화

국민당군 격전끝에 쓰핑을 점령하다

4월 18일 쓰핑전투가 시작되었다. 국민당군은 5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4월 22일 중앙은 린비아오에게 전문을 보내 독려했다. “적의 예기를 꺾고 쓰핑을 사수하라. 전황을 반드시 호전시켜야 한다.” 4월 27일 마오쩌둥은 린비아오에게 다시 전문을 보냈다. “쓰핑의 아군은 매우 영용하다. 나의 격려를 전해 달라.” 또 “1개나 2개 연대를 증원하는 것을 고려해 보라. 쓰핑을 마드리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4월 29일, 중앙은 동북국에 전문을 보내어 “국민당은 아군이 유격전만 할 줄 알지 정규전이나 방어전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번시를 공격한 것이나 쓰핑을 완강히 방어한 것은 그들의 계산 밖이었을 것이다. 장제스의 마음이 심히 초조했을 것이다.”고 자찬했다. 이때가지만 하여도 린비아오나 마오쩌둥의 언행에는 여유가 있었다.

5월 중순 국민당군 공격병력이 10개 사단으로 늘어났다. 남만주에서 이동해온 국민당 신6군이 민주연군의 측면을 포위하며 주변 소도시인 시펑(西豊), 하푸(哈福) 등을 점령했다. 민주연군은 이제 배후까지 위협 당하게 되었다. 두위밍으로서도 본격적인 서전에서 밀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린비아오는 병력의 열세와 포위당할 위험에 빠지게 되자 생각을 바꿨다. 그는 중앙과 동북국에 철수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리고 5월 19일 밤 쓰핑을 방어하던 민주연군에게 주동적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쓰핑 방어전은 국민당군이 점령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쓰핑 방어전에서 국민당군에 1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민주연군 사상자는 8천여명이었다.

쓰핑 방어전은 국민당쪽이 승리하였다. 동북 민주연군은 쓰핑은 물론 창춘 등 남만주의 모든 도시를 내주고 하얼빈 쪽으로 철수했다. 동북 민주연군은 병력 부족과 도시에서의 방어전 경험이 부족하여 소모전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동북에 부임하여 세력을 펼치고 있는 두위밍 등 국민당군 지휘관들의 사기와 기세도 동북 민주연군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두위밍은 후퇴하는 동북 민주연군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그는 창춘, 선양 등 대도시를 점령했을 뿐 민주연군을 추격하다가 돌연 멈추었다. 쑹화장 너머 하얼빈 등 북만주를 공격할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6월 6일 충징에 있는 장제스가 추격을 멈추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가 마샬에게 정전협정 위반을 항의하였고 마샬은 즉시 싸움을 멈추도록 촉구하였다.

나중에 이 일을 두고 동북 민주연군이 숨을 돌릴 수 있는 틈을 주었다는 비판이 일었다. 국민정부 국방부장을 지낸 바이충시(白崇喜)의 아들이 책을 써서 이렇게 비판하였다. “아버지가 장제스에게 세 번이나 북만주의 공산군을 섬멸하자고 했는데도 듣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5월 19일 마오쩌둥은 동북국과 린비아오에게 전문을 보냈다. “적이 북진하지 못하도록 선양에서 쓰핑 사이 철도를 철저하게 파괴하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으로 밤낮을 가리지 말고 창춘까지의 철도도 파괴해야 한다. 그래서 적의 보급선을 끊어야 한다.” 마오쩌둥이 잘한 것은 재빨리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쓰핑을 끝까지 사수하라고 요구했지만 세가 불리해지니 철수에 동의한 것이다. 린비아오도 승산이 적어지고 자신의 부대가 위험에 빠지게 되자 신속하게 결단하였다.

공산당 지휘관들의 이런 판단은 “패하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라.”는 마오쩌둥의 군사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홍군 설립 이래 대부분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어쨌든 동북 민주연군은 최소한의 피해만 입고 신속하게 조직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남만주에서 공산당군은 다시 유격전을 하던 시절의 전술로 되돌아갔다. 동북 민주연군은 쑹화쟝(松花江) 너머 하얼빈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국민당이 차지한 것은 남만주의 대도시와 철도 및 주요 도로망이었다. 공산당은 남만주 농촌 곳곳에 근거지를 만들었다. 토지개혁, 토비소탕, 괴뢰정권 인사 숙청, 고리대 폐지 등 농민들을 조직할 수 있는 정책을 펴나갔다. 노동자들을 조직했으며 임금인상을 주도했다. 이런 근거지들은 나중에 동북 민주연군이 밀고 내려올 때 곳곳에서 기의를 일으켜 호응하였다. 동북 민주연군이 신병을 모집하고 보급을 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쓰핑전쟁기념관과 부조도

<각주>

1. CC파는 중앙구락부(Central Club)라고도 한다. 국민당 안의 파벌로 1927년 상하이에서 설립하였다. 그 지도자인 천리푸(陳立夫)와 천궈푸(陳果夫)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2. 마오쩌둥이 구이저우 쭌이 부근 츠수이(赤水)에서 국민당군을 기만하기 위해 4번 도하한 작전을 가리킨다.

3. 중동로(中東鐵路): 따롄을 남쪽끝으로 동쪽으로 만저우리(滿洲里), 서쪽으로 쑤이펀허(綏芬河)를 잇는 고무래 정자형 철도를 말한

4. 스페인 내전에서의 마드리드 방위전을 말한다. 1936년 프랑코의 반란군이 마드리드 교외에 육박하자 의용군과 국제여단이 함께 2년반동안 사수했다. 즉 이 전문의 내용은 끝까지 사수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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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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