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도시와 오물 이야기③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근대에 접어든 인천, ‘오물이 넘치는’ 도시?
        2019년 01월 03일 12:4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연관된 앞 회의 글 “서울은 ‘오물의 도시’? ②”

    근대 인천의 오물 처리

    근대에 접어들어 인천의 오물 처리 역사가 시작된 것은 전염병 예방을 위해서였다. 특히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인천이 개항하고, 1882년 제물포조약 이후 인천에서 일본인의 간행이정(間行里程: 개항장에서의 활동범위)이 확대되면서 일본인을 중심으로 오물 처리가 시작되었다.

    그림1 설명 : 1929년 인천항 전경(출처: 도시정보센터)

    그러나 오물 처리가 반드시 일본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찍부터 한국인들도 오물 처리 사업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해당 사업을 시행하고자 했다. 1906년에 인천항에 거주하였던 서상빈(徐相彬:1859∼1928)은 해당 항의 오물을 수거하기 위하여 청결소(淸潔所)를 설치하였다. 이에 인천항에 거주하던 민들은 그를 민의장(民議長)으로 추천하였다. 서상빈은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청결사무소(淸潔事務所) 설치를 찬성하던 2명을 총무로 삼아 일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사적인 원한을 가진 사람의 방해로 민의장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 다음 민의장(->면장으로 개칭)이 청결사무를 집행하였지만 결국 사업은 실패했다.

    이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오물 처리체계를 일본인 거류지에서 마련한 체계에 근거하여 운영하였기에 일본인 거류지와 거류민단의 오물 처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천에 일본인들이 정착했던 초기에는 위생비로 많은 비용을 지출하지 않았다. 특히 이 시기만 해도 인천은 주로 무역을 위한 항구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오물 처리보다는 ‘방역’과 ‘검역’, ‘전염병 치료’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1885(명치 18년)에 인천에 콜레라가 유행하였는데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그 해 거류지징집금액(居留地徵集金額: 거류지 세입출 예산)에서 경상비 800원 중 위생비 70원 94전을 지출하여 약 10%를 위생비로 썼다. 다만 임시비 889원에서는 739원 50전을 유행병예방비로 지출하였다.

    그러다가 1890년대 중반부터는 위생비 지출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거류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기준으로 한 ‘거류지’ 규칙에서 점차 일본인이라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 ‘거류민’ 규칙으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이는 일본인의 인구 증가를 반영하여 거류지 밖의 일본인 거주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1896년(명치 29년)에는 세출예산 총액 12,102원에서 위생비는 3,431원으로 약 30%에 달했다. 다만 1897년에는 세출예산 총액 12,160원에서 위생비가 1,496원으로 약 10%가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때 위생비가 급격히 감소한 것은 병원을 폐지하고 공의(公醫)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1905년 이후에는 한국 내 일본인 인구가 더욱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07년 일본 황태자 방문은 한국의 오물 처리체계 형성에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7년(명치 40년) 압록강 변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서울을 지나 인천에 퍼졌다. 일본은 황태자가 내한하기 이전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7,300원의 예방비를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1906년(명치 39년) 6월 10일에는 인천이사청령(仁川理事廳令) 제3호로 위생조합규칙을 제정하였다. 위생조합규칙을 근간으로 일본인 거류지에 위생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본래 오물 수거는 일본 거류지, 각국 거류지, 중국 거류지와 별개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거류지 중심에서 벗어나 통일된 민단구역 내를 기준으로 오물을 처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치 40년 4월 1일에는 인천거류민단 오물소제규칙(汚物掃除規則)이 제정되었다. 해당 규칙을 근거로 소제감시리원(掃除監視吏員)을 설치했다. 1909년(명치 42년)에는 서울과 인천에 콜레라 유행이 극심하여 다음 해에는 춘계 청결법을 시행하여 소독 위주의 청결법을 장려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는 점차 위생사업이 오물 처리를 중시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1914년(대정3년) 4월 1일에는 부제시행으로 오물 처리사업은 인천부가 계승하였다. 이 시기부터 위생행정이 통일되어 부 직영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부터는 마차와 기구 등을 대여하는 등 청부 사업으로 전환하였다. 1921년까지 7년간 청부 방식을 유지하다가 1922년에는 다시 직영으로 사업을 운영하였다. 1915년 오물소제비는 13,045원 정도였지만 부가 발전하고, 인구가 팽창하면서 1930년(소화5년)에는 29,512원을 지출하게 되었다. 1932년(소화7년)에는 세출예산 총액 445,509원에서 위생비에 속한 것은 78,080원이었는데 이중 오물소제비가 54,108원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 내에서 배출한 분뇨 및 쓰레기는 마차로 수거하여 부 밖으로 배출하였는데 주로 농민에게 비료로 불하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오물 수거에는 감독 3명, 취체(取締: 단속) 4명, 인부 62명이 종사하였다. 만약 평상시보다 많은 오물 배출이 있을 경우 임시 마차 및 인부를 투입하였다. 그렇게 수거된 인천의 오물양은 1930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분뇨 17,634석(石), 쓰레기 3,368,000관(貫)이었다.

    오물 처리를 둘러싼 불만

    오물 처리 부영화 이후 체계적으로 운영될 것처럼 보였던 오물 처리 사업에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우선 한국인 측에서 인천부의 오물 처리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다. 1920년에는 인천부에 분뇨가 수거되지 않아 악취가 발생하였다. 인천 소제사무소가 분뇨를 수거하지 않자 부민들은 스스로 인부를 고용해 수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에서는 수거한 분뇨는 소제사무소 소유기 때문에 임의 수거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1921년 8월 2일 『동아일보』에서는 인천에 있는 한국인시가에서 오물 처리 폐단이 심각하다는 비판이 나타났다. 심지어 오물 처리 때문에 이웃집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더러운 분뇨가 변소에서 넘쳐 이웃집까지 흘러들어 갔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천부가 부과금을 받아가는 것은 부지런하다고 비난하였다.

    1922년 4월 부협의회에서는 오물 처리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논의하였다. 이때 청부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이를 개선하기 위해 부 직영으로 하게 되면 경상비 18,000원, 임시비 16,000원이라는 상당한 경비가 필요했다. 충분한 조사와 연구를 거친 결과 부를 4구역으로 나누어 일단 청부제를 유지하다가 점차 직영으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이때 오물 처리에 사용하는 기구는 부에서 제공하고 마차에 필요한 말은 청부 업체에서 마련하기로 하였다. 결국 5월부터는 부 직영 사업으로 시행하였다.

    하지만 부 직영 이후에도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인천부에서는 청부제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청부제도를 폐지하면서 부민의 오물 처리 불만을 해결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에 전화하면 문제를 즉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부에 하루 한 두 번 전화하여 열흘 이상 전화하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화평리(花平里) 일대에서는 한 달 이상 청결인부를 구경조차 못했다는 불만도 터져 나왔다. 결국 오물 처리에 대한 부민의 불만이 격심해지자 1923년에는 우마차를 폐지하고 자동차 2대를 구입하여 처리에 활용하고자 했다. 또 부 바깥에 오물을 적치할 장소들을 신설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인천부청 위생계에 대한 부민의 오물 처리 독촉 건수가 분뇨에 대한 독촉(전화와 우편으로)은 3068회, 쓰레기 처리 독촉은 332회로 합계 3400회에 달하였다. 독촉이 제일 심했던 지역은 내리(內里)의 407건이며 다음은 신정(新町) 329건이었다. 독촉이 심한 시기는 8월 992건, 가장 적은 시기는 2월 32건이었다. 1926년에는 예산을 29,226원이나 증액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물 처리 종사업자와 마차가 부족하여 불만은 잦아들지 않았다.

    1927년에는 오히려 인천부 예산이 10,000원 감액되면서 33,857원이었던 오물소제비 역시 32,634원으로 삭감되었다. 인구증가에 따라 예산을 더 책정해야 하는데도 삭감하였기에 불만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28년 초 부협의회에서 의원들의 문제제기가 빗발쳤다. 해당 협의회에서는 일본인 한국인 의원 할 것 없이 오물 처리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인천부 위생계는 사실 혈문(穴門) 북쪽(홍예문(虹霓門) 북쪽) 오물 처리는 소홀히 하였다고 인정하였다. 심지어 송현리(松峴里), 송북리(松北里)에는 1년에 한 차례도 수거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특히 혈문 북쪽은 한국인 주거지역이 밀집한 곳이었기에 한국인들의 불만은 상당하였다. 이에 부에서는 결국 1927년 예비비에서 1,500원을 지출하여 부에 산적한 쓰레기를 ‘대반출(大搬出)’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림2. 설명:  일제강점기 홍예문(혈문 풍경) 인천에는 홍예문 남쪽은 일본인 시가가 북쪽은 주로 조선인 시가가 형성되어 있었다.(출처: 도시정보센터)

    그림3. 설명: 1929년 인천부 관내도 (출처: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김남희, 2018 「이중의 도시, 이중의 근대」『中國文化硏究』39, 207쪽에서 인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물 처리 사업을 운영하던 부에서 비리 사건이 발생하여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인천부청 위생계주임이 1928년 임시인부 609명의 임금을 1인당 5전씩 떼어 횡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상용 인부가 결근한 경우에도 출근한 것으로 속여 임금을 지출해 횡령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의리(長意里)의 분뇨를 매각할 때 중간에서 매각대금을 착복한 혐의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인천부윤은 비리를 조사하여 해당 주임을 경질하였다.

    인천은 근대 이후 개항되면서 항구이자 도시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주로 인천의 역할은 항구, 거류지로서 인식되었다. 도시로서 인천이 성장하게 된 것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부영화 시기였지만 도시 기반 시설이 체계적으로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인구증가에 따른 오물 처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부는 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인천부는 오물 처리 사업을 청부로 할 것인가, 직영으로 할 것인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다.

    하지만 오물 처리를 직영화하기로 결정하였어도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직영화 이후에도 문제는 여전했다. 심지어 1년에 한 차례도 오물을 수거하지 않거나 처리 과정에서 비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서울과 비교해서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1930년대 이후에는 오물 처리에 투입하는 비용이 상당히 많아져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본질적으로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오물 처리 방법을 고안하고 도시 계획과 긴밀한 문제로 오물 처리를 다루려는 태도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천은 오물이 넘치는 ‘마계(魔界) 인천’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참고문헌>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중외일보』

    『조선신문』

    仁川府廳, 1933, 『仁川府史』

    김남희, 2018 「이중의 도시, 이중의 근대」『中國文化硏究』39

    박준형, 2014, 「재한일본 ‘거류지’·‘거류민’규칙의 계보와 『거류민단법의 제정』」『법사학연구』5

    인천광역시, 2004, 『譯註 仁川開港25年史(加瀨和三郞 著)』,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인천광역시, 2004, 『譯註 仁川開港25年史(信夫淳平 著)』,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필자소개
    가톨릭대 일반대학원 국사학과 박사과정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