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전쟁터인 사람들,
    전쟁부재의 평화 넘어 일상의 평화로
    [기고] 세밑, 우리가 사는 시대의 ‘평화’를 생각한다
        2018년 12월 27일 11: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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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여기저기서 올해 10대 뉴스를 발표한다. 거기서 빠지지 않는 것이 ‘한반도 평화’다. 그런데 올 한 해 기억할만한 일과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북미 간 교착 상황이 지속되어서인지 평가가 그렇게 후하지는 않다. 일자리 등 민생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평화에 환호하던 민심도 많이 식었다. ‘잘하고 있다 45% vs 못하고 있다 46%’. 최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이번 정부 들어 최초로 대통령 업무 수행에 대한 긍정평가가 부정평가에 뒤처졌다.(격차가 더 벌어지는 조사도 나왔다. 관련 여론조사 기사 링크-편집자)

    그래서일까? 청와대는 최근 페이스북 계정 동영상을 통해 올해 이룬 ‘한반도 평화의 성과’를 다음과 같은 구체적 수치로 보여주며 홍보하고 있다. ‘2017년 16회 대 2018년 0회, 2017년 0회 대 2018년 36회.’ 전자는 북의 핵과 미사일 도발 수치이고 후자는 남북회담 수치이다. 굳이 청와대가 이렇게 홍보에 나서고 국가안보실장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올해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원년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아도, 냉전수구세력을 제외하고는 그 의의를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2017년 내내 우리는 북한의 거듭되는 핵과 미사일 실험 뉴스를 들었다. 비핵화는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화염과 분노’ 등 거친 언사가 난무하는 가운데 전쟁을 불사할 듯 대결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런데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 ‘판문점 공동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북한 최고지도자의 ‘완전한 비핵화’ 천명을 이끌어냈다. 비핵화 과정의 우발적 충돌과 확전을 막을 수 있는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도 체결했다. 하마터면 좌초될 뻔했던 최초의 북미정상회담도 성사시켰다.

    판문점에서의 두 정상 모습(방송화면)

    그런데 왜 2017년 연말 70%를 상회하던 대통령 지지율은 2018년 연말 이른바 ‘데드크로스’까지 기록하게 되었을까?

    대중들이 청와대가 홍보하고 있는 구체적 수치까지는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이제 가끔 깜빡깜빡하는 필자도 충분히 기억해내며 열거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일들에 대해 잊어버렸을까? 평화는 중요한 일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 되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아직 평화가 공고화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평화정책을 일관되게 실천해나갈 기반이 약해진 것은 아닐까? 혹시 정부여당이 평화정책에서도 여론의 눈치를 보며 우회전하는 것은 아닐까? ‘평화’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먼저, 평화정책에 대한 열광이 식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많은 사람들이 수년간 역진하던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가 급반전하며 빠르게 진척되는 것에 크게 놀라며 기뻐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곧 달성될 것처럼 낙관했다. 그러나 북미 간의 교착 상황이 길어지면서 수십 년 묵은 과제가 결코 어느 한 순간에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차가운 현실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비정상성의 정상화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홍보가 아니다. 상황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진단하며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모색, 실천하는 것이다.

    북미는 현재 ‘제재 해제(완화) 대 선 비핵화’의 치열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11월 초 예정되었던 북미고위급회담이 취소되었지만, 미국은 제재를 해제하기는커녕 북한의 2인자라고 하는 최룡해를 포함한 고위인사들에 대한 제재 조치를 추가했다. 북은 이에 질세라 12월 16일 외무성 미국연구소 정책연구실장 담화를 통해 ‘비핵화로 가는 마지막 길이 막힐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다고 상황이 다시 과거와 같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의 북한 문제 특별대표인 비건은 19일 방한해 대북 인도적 지원을 위한 대북 여행 금지를 재검토하겠다고 했고, 대표적 대북 강경파인 펜스 부통령의 북한 인권 관련 연설도 취소되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짐짓 여유 있는 척하며 북한에게 공을 떠넘기고 있지만, 2020년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로서는 2019년에 북한 문제에서 어느 정도의 진척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도 2018년 4월 20일 노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결의한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으로의 전환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회귀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올해 천명한 노선을 재확인하고, 연초에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답방도 실현되면 대중들은 다시 환호하고 대통령 지지율도 폭등하게 될까? 아마 일시적으로 반등을 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니, 지지율이야 다시 떨어진다고 해도 한반도 비핵화의 길을 다시 탄탄히 닦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문재인 정부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전쟁과 핵의 위협이 사라지면 우리의 삶도 평화로워지며 평화는 대중의 지지 속에 공고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결코 그렇지 않다.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 시대처럼 분단과 정전체제 그 자체가 사람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전가의 보도로 작용하지 못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평화는 얼마나 진척이 있었는가? 민주당 정권이 국가안보를 정권안보로 악용하지 않고 남북관계도 개선되었지만, IMF 이후 파괴된 삶이 회복되지 않는 상황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나에게 도대체 평화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특히 2017년의 위기상황을 경과하며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깨달았지만, 일상의 삶이 전쟁 혹은 지옥 같은 사람들에게 단지 국가 간 전쟁부재의 평화(세계적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이것을 ‘소극적 평화’라고 했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뿌연 탄가루 속 거칠게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보며 고 김용균은 앞서 간 동료들을 떠올리며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엄마에게 어렵게 힘들다고 토로했지만, 비정규직인 그는 실직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공포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희생되고 말았다. 그에게는 태안화력발전소야말로 전쟁터였다.

    고 김용균 씨 관련 기자회견 모습

    삶이 전쟁터인 것은 고 김용균과 같은 비정규직만이 아니다. 가게 10군데가 문을 열면 1년 내 4곳이 문을 닫고, 2년이 지나면 반 이상이 문을 닫는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가게 문을 연다. 자영업자로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텅 빈 가게가 전쟁터다. 그 전쟁터로 내몰리기 두려워 대한민국의 장삼이사들은 오늘도 갑질을 참고 견딘다. 미투에 가해지는 2차 폭력, ‘페미니스트’가 딱지가 되는 현실을 목도하는 여성들에게는 대한민국이 전쟁터다.

    이 전쟁터에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촛불정부’와 ‘평화정당’ 민주당은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그들은 남북 간에 혹은 북미 간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게 평화이고, 그 평화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일찍이 1967년 인도의 평화학자 다스쿱타는 전쟁이 없는데도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제3세계의 사회 갈등과 인민들의 고통을 보면서 그것을 ‘비평화’라고 불렀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오늘의 대한민국에 제3세계 국가가 직면한 저발전에 따른 고통과 해결 과제를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비평화’라고 하든, ‘소극적 평화’라고 하든, 평화가 거기에 그쳐서는 사회적 고통과 그에 따른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가 겪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차별 및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 등 ‘구조적 폭력’과 차별과 배제, 억압의 ‘문화적 폭력’을 극복하는 쪽으로 평화는 나아가야 한다. 요한 갈퉁은 이런 평화를 ‘적극적 평화’라고 칭했다. 그래야 전쟁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평화를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혹은 인류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평화는 오지 않는다는 것인가? 역설적으로 그런 평화가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단지 전쟁부재만을 평화로 이해하는 데 그친다면, 상대가 전쟁을 도발할 수 없도록 하는 억지력 증대를 우선하게 된다. 동맹에 문제가 많아도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군비증강과 상대의 반발에 따른 ‘안보딜레마’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상기해보라. 2017년의 위기를 타개하고 2018년의 전기를 맞은 것이 강력한 동맹과 그것을 업은 군사적 시위, 역대 최고의 군비증강 때문이었는가? 상대의 안보에 대한 우려를 인정하며 상대가 위협으로 느끼는 연합훈련을 중단하고, 체제안보와 비핵화를 교환하는 안보 대 안보의 교환, 평화체제를 만들어 공동으로 안보를 증진시키려는 정책 때문이었다.

    대중의 지지가 흔들린다고 홍보를 강화하고 수구 언론을 탓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반도 평화의 신기원을 열었다면서도 작년의 43조 2천억 원보다도 3조 5천억원이나 증가한, 보수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8.2%의 국방비 증가가 필요했는지 자문할 일이다.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메아리’ 등 선전매체들은 이런 국방예산 증액에 대해 “북남선언들과 군사 분야 합의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이며 북남관계 개선과 조선반도(한반도) 정세 완화 흐름에 역행하는 엄중한 도전행위”라고 반발했다.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야 할 상대가 반발하고, 핵을 제외한 군비에서의 불리함을 생각하며 비핵화도 주저하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면서도 현 정부는 ‘아직 평화가 공고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리화한다. 그러나 이런 관성적 정책으로는 한반도 평화는 끊임없이 흔들릴 수 있다.

    2018년 세밑, 2019년에는 평화가 심화되고 평화정책에 대한 지지도 공고화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평화의 공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비를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 군축을 달성해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배당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의 외주화 등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구조적 폭력을 척결하고 든든한 복지망을 구축할 때 평화는 공고화된다. 그런 평화를 한반도 구석구석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 한반도 평화체제다.

    필자소개
    정의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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