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시민단체의 몰가치적인 공약 평가
    2006년 06월 01일 11: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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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페스토(manifesto)라고 하면 나는, 1848년에 쓰여진 글이 생각난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인터넷지식검색 이용자들은 세계를 떨게 했던 그 글의 이름을 ‘공약 계획’이나 ‘공약 평가’로 이해하는 모양이다. 하긴, <공산당선언>도 일종의 공약이긴 하다.

지방의제21전국협의회·장애인단체총연합회·열린사회시민연합·경실련 등의 간부들이 발의한 매니페스토 운동은 언론과 각 후보의 각광(?)을 받았고, 선관위 우편물에 동봉되는 공보물 이외의 유일한 문서가 되기에 이르렀다.

선거공약에 기간·목표·공정·재원·우선순위 등을 담아야 한다거나, 구체성(Specific)·측정가능성(Measurable)·달성가능성(Achievable)·타당성(Relevant)·시간계획(Timed)의 기준으로 공약을 평가하겠다는 SMART 계획은 고무신과 투표용지를 맞바꾸던 물물교환시대 이래 별 변화가 없는 한국 정치를 근대적 ‘계약’ 관계로 일신케 할 계기임에 분명하다.

사실 이런 식의 공약 제시와 공약 평가는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지난 3월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매니페스토 정책선거 실천 협약식에서 5당대표가 박수를 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열린우리당은 정책기본방향에 관한 내용을 제공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정책기본방향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공약 집행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대신에 10대 중점 정책공약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고, 재정계획에 관한 내용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정책목표, 정책목표달성을 위한 수단 및 논거, 예산확보방안, 재정계획, 정책착수 및 종료 시기를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한국정책학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17대 총선 정당 정책공약 비교 분석집]).”

민주노동당은, 그 전신인 국민승리21의 1998년 지방선거 때부터 언제나 위와 같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런 정책 평가가 선거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권자들의 투표 동기가 개별 공약에 의해 형성되지 않고, ‘문민정부 수립’이나 ‘수평적 정권교체’ 같은 총체적인 비젼 제시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부유세·무상교육·무상의료’라는 나름의 비젼을 제시해 꽤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정당정치가 수백 년에 이른 영국에서는 매니페스토가 정치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지 몰라도 한국적 역동성에서는 아직 그러하지 못하고, 이는 시민운동의 주된 역할이 페이퍼워크에 머물기에는 이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둘째, 선거 때만 되면 모든 정당의 공약이 거의 ‘공산당 수준’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재정 대비 사회복지예산 두 배’라는 공약을 조심스럽게 내놓으면, 자민련은 ‘GDP 대비 두 배’라고 통 크게 공약(空約)한다. 시민들은 그 중 어느 것이 거짓인지 알 수 없고, 정책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공약 실현의 가능성이나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아직도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 청계천 복원이나 버스준공영화가 이 정도라도 되리라 예측했던 전문가는 없었다. 참여연대와 민주노총의 정책 담당자들은 부유세를 회의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은가? 한국 정치에서 공약은 공약(空約)으로 악용되기 일쑤이지만, 그 거짓공약도 결국 실현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공약이 수리(數理)나 법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매니페스토에 빠져 있는 가장 커다란 것은 ‘가치’다. 오세훈의 ‘강북도심 부활 프로젝트’는 왜 매니페스토에서는 ‘우수 공약’이고, 2006지방선거연대에게는 ‘막개발 헛공약’인가? 매니페스토 우수 공약인 민주당의 ‘새만금 사업 추진’에 의해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피해를 입는가?

정약용은 ‘정(政)은 정(正)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正)은 무엇인가? 조선 시대에는 여성의 조신함이 정의(正義)였지만, 지금은 불의이지 않겠는가? 프랑스 혁명의 삼색 깃발은 파리꼼뮨 전사들을 총살시킬 때도 휘날렸다. 요컨대, 모든 정책은 적용 시대와 수혜 계층에 따라 정의로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야말로 정치와 정책의 핵심인데, 매니페스토에는 그것이 빠져 있다. 정책을 법학과 통계학에 갇히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누구 편이냐 하는 철학적 가치 선택 뿐이다.

“실용주의적 단순화는 어떤 목적에 대해서는 유용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목적에 대해서는 무용지물이거나 잘못된 것일 수 있다(아마티아 센, [불평등의 재검토]).”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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