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지역을 둘러싼 각축
[국공내전-6] 두위밍의 진격 작전
    2018년 12월 27일 10: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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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국공내전-5] ‘평화회담 중 국·공의 충돌’

중국에서 동북이라 하면 우리가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중국 행정구역으로 동북 3성, 즉 랴오닝(遙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성을 가리킨다. 명나라 시절에는 산하이관을 기준으로 안쪽은 ‘관동’, 바깥쪽은 ‘관외’라 불렀으며 청나라 때는 ‘동 삼성’이라고 불렀다.

붉은 색 부분이 동북3성

군벌전쟁 시기 만주는 장쭤린(張作霖)이 통치하였다. 장쭤린은 강대한 군사력으로 베이징에 입성하여 전 중국을 통치할 꿈을 꾸기도 하였다. 1928년 일본 관동군이 음모를 꾸며 장쭤린이 탄 열차를 폭파하였다. 장쭤린은 병원에 후송되었으나 그날로 죽었다. 장쭤린 폭사사건을 당시 일본에서는 ‘모종의 중대사건’이라고 불렀다. 패전 후에도 ‘난징학살’ ‘종군위안부’ 등 자신들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잘 나가던 시절에 그런 사건을 굳이 밝힐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이 살아 있는 한 언젠가 사실이 밝혀지기 마련이다.

관동군 육군대좌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란 자가 부하를 시켜 저지른 일이었는데 1946년 전범 재판에서 전모가 드러났다. 일본 군부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육군 중장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가 술술 다 불어버린 것이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일본이 패망한 뒤 산시군벌 옌시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그러다 1949년에 산시성 성도인 타이위안이 해방군에게 점령되고 옌시산은 타이완으로 도주하였다. 그때 고모토가 잡혀서 장쭤린 폭사사건 음모를 자세히 진술하였다.

고모토는 중국의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5년 죽었다. 전범을 잡아 가둘 수 있었던 중국이 부러운 대목이다. 어쨌든 장쭤린이 죽자 아들 장쉐량이 뒤를 이었으며 곧 국민정부에 귀순하였다. 막강한 동북군을 얻게 된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국민혁명군 부총사령 지위를 주었다. 덕분에 장제스는 다른 군벌들에 비해 군사력에서 확고한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좋은 관계도 잠깐이었다. 1931년 일본은 마침내 9.18사변(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병탄하였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싸우지 말고 후퇴하라.”고 명령하여 ‘서안사변’의 싹을 틔웠다. 꿈에서도 동북으로 권토중래를 하고 싶었던 장쉐량이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을 시안에 잡아둔 채 공산당과 ‘공동항일’을 주장했던 것이다. 곡절 끝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공산당은 호랑이 입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장쉐량은 스스로 벌을 자청, 장제스를 따라 난징으로 가서 평생 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장쭤린(왼쪽)과 장쉐량

일본은 1932년 괴뢰 ‘만주국’을 세워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제위에 앉히고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일제는 동북을 중국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아 공업시설을 세웠는데 특히 군수공업에 치중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동북 3성은 국민정부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이 되었으며 중국 공산당 항일 유격대가 소수 활동하였다. 1945년 얄타협정에 따라 9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100만명의 대병력이 동북으로 출동했다.

소련의 공식 입장은 장제스를 도와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동북을 인계하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공산당을 도와 만주에서 주도권을 잡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이 그렇게 신속하게 국민당과 맞서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고 한다. 나중에 중국 공산당의 신속하고도 과감한 투쟁에 크게 감명을 받아 중국에 대한 방침을 변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소련이 동북에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람에 국공 양당 모두 갈피를 잡지 못하는 곡절을 겪었다. 한쪽으로는 공산당 군대를 도와 동북의 근거지를 확대하는 데 힘을 쓰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기를 넘겨주었다. 나중에는 대도시에서 공산당을 밀어내고 국민정부군이 진주하도록 보장하기도 하였다. 갈팡질팡 하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막대한 군사원조로 국민정부군을 무장시키고 병력 이동을 돕는가 하면 자신들은 중립이라며 국공 양당을 중재하려 애를 썼다. 어떻게든 연합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동북에서 국민정부군이 공산당군을 밀어붙여 승기를 잡을 무렵 휴전을 성사시켜 기사회생할 시간을 벌어주기도 하였다. 국공 양당의 각축과 미국 및 소련의 개입에 의해 동북의 정세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북쪽으로 진출하고 남쪽을 강화하라.” 중국 공산당의 방침

1945년 9월 14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 대령 한 명이 팔로군 지러랴오(冀熱遼: 허베이, 러허, 랴오둥) 사령원 청커린(曾克林)과 함께 옌안의 중공 중앙으로 왔다. 연락하러 왔다는 명목이었지만 팔로군의 동북 3성 진주를 의논하러 온 것이었다. 중공 정치국은 그날 당장 동북국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펑전(彭真)을 서기로 임명하고 천윈(陳云), 청즈화(程子崋, 우수취안(伍修權) 린펑(林楓) 등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동북은 소련군이 진주했을 뿐 국공 양당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진공상태로 있었다. 국민당이 병력을 동북으로 보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동북의 일본군은 항복했지만 만주국 괴뢰군 수십 만명이 무기를 가진 채 국민당군과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산당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평화회담을 위해 충칭에 가 있었다. 옌안에는 류샤오치가 주석 대리를 맡아 쭈더와 펑더화이 등 남은 사람들과 의논하여 군사문제 등을 다루고 있었다.

다음날인 9월 15일, 신사군 3사단장겸 정치위원인 황커청(黃克誠)이 중공 중앙에 전문을 보내왔다. 전문의 내용은 ‘현재의 정세와 군사방침에 대한 의견 및 건의’로, 요약하면 만주에 빨리 출병하자는 것이었다. “아군은 정예 병력이 부족한데도 넓은 점령지역에 흩어져 있다. 산둥을 제외하면 모두 병력 부족으로 돌격능력이 약하다. 적은 우리 근거지안에 강력한 거점들이 있고 도시와 철도 등 교통선을 장악하고 있다. 이래서는 대규모 전투를 치르기 어렵다. 장기간 전쟁을 치르려면 대 근거지가 필요하다. 동북에 대부대를 파견하여 근거지를 세우자. 산둥과 진지루위,동북을 주 근거지로 하고 나머지는 위성 근거지로 해야 한다. 동북에 당장 5만명에서 10만명은 파병해야 한다.”

마오쩌둥(왼쪽)과 류샤오치

류샤오치는 황커청의 주장에 마음이 끌렸다. 공산당은 1945년 4월 7차 대표대회에서 “항일전에서 승전하면 동북에 근거지를 마련한다.”는 결의를 해놓고 있었다. 마침 그날 충칭에 있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도 회담 진척 상황과 병력 배치에 대한 전문을 보내 왔다. 저장 동부와 장쑤 남부, 그리고 안후이 남부의 병력을 적절한 시기에 창장 건너 북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썼다. 이심전심으로 동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 생각이 일치한 셈이었다.

9월 17일, 류샤오치는 ‘동북 및 러허(熱河), 차하얼(察合爾) 장악과 인력 배치에 대한 의견’을 충칭에 보고했다. 류샤오치는 전문에서 국공 양측의 병력 이동상황을 분석한 뒤“북쪽으로 진출하고 남쪽을 방어해야 한다.(向北向北推進,向南防御)는 의견을 제시했다. 19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류샤오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류샤오치는 옌안에서 주요 지도자 18명이 참석하는 정치국 회의를 열어 ‘북쪽으로 발전하고 남쪽을 방어한다(向北發殿 向南防御)’는 방침을 최종 확정했다. 그날 밤 러허, 차하얼 두 성 및 동북으로의 병력이동이 결정되었다. 지휘부도 구성했는데 리푸춘李富春을 지러랴오(冀熱遼: 허베이, 열하, 랴오닝) 서기로 임명하고 린비아오(林彪)를 사령, 샤오진광(蕭勁光)과 뤄롱환(羅榮桓) 리윈창(李運昌)을 부사령으로 임명했다.

공산당의 의사결정은 신속하고도 긴밀했다. 하부에서 건의한 내용이 나흘 만에 방침으로 확정된 것이다. 당시의 중국 공산당은 그만큼 조직이 통일되고 정비되어 있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당과 군대의 지도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일사불란하였다.

뒤이어 병력 배치가 빠르게 시작되었다. 중공은 10만명의 병력을 이동시켜 러허와 차하얼에 배치했다. 11월초에는 동북 인민자치군을 조직하여 린비아오를 사령으로, 펑전과 뤄롱환을 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 중공은 11월 말까지 동북지역에 각 해방구에서 차출한 병력 11만명과 2만명의 간부를 이동 배치했다. 동북 인민자치군 병력은 1945년 말까지 27만명으로 확대되었는데 1946년에 동북 민주연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동북 민주연군은 소련군으로부터 무기를 차례로 넘겨받았다.

소련측 기록에 따르면 소총 70만정, 기관총 12,000-14,000정, 각종 포 4,000문, 탱크 약 600량, 비행기 약 800대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료는 일본이 가지고 있던 무기 총수를 전부 포함한 것으로 과장된 것이었다. 실제로 1947년 동계 공세가 끝난 뒤 동북 야전군은 각종 포 2,400문을 가지고 있었고 1949년 전쟁 끝 무렵에 탱크 375량, 장갑차 272량, 비행기 800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국민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었다. 가진 무기라고는 소총과 기관총, 얼마 안 되는 박격포가 전부였던 공산당으로서는 비로소 군대다운 무장을 갖추게 된 셈이었다.

국민정부, 소련의 협력아래 동북을 접수하다

장제스도 바쁘게 움직였다. 장제스가 중소우호조약을 맺은 것은 바로 동북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동북 지역에 대한 무리한 요구를 관철시켰지만 장제스는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였다. 장제스는 국민정부군이 동북지역을 장악하기만 하면 화북에 있는 공산당 해방구를 남북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제스는 1945년 8월 31일 동북 3개성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동북 행영(行營: 야전사령부)을 설치하고 숑스후이(熊式輝)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미군의 도움을 얻어 해공 양로로 동북 지역에 국민당군을 이동시켰다. 이때 중국에는 미군 6만여명이 배치되어 주둔하고 있었다. 웨드마이어 중국주재 미군사령관은 장제스에게 “장성 남쪽과 창장 북쪽 지역을 굳히고 화북의 교통선을 확보하라.”고 제안하였다. 웨드마이어는 국민정부가 만주를 장악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장제스는 미국 사령관의 제의를 일축했지만 병력 배치를 고려하여 정치회담을 1946년까지 미뤄두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소련군이 협력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쿤밍 수비사령관이던 두위밍(杜律明)에게 병력을 배에 싣고 따렌(大連)항에 상륙시키려 하였다. 소련군은 “따롄은 자유항이므로 상륙할 수 없다”는 핑계로 이를 거부했다. 두위밍이 창춘에 있는 소련군 사령관 말리노프스키를 찾아가 교섭한 결과 잉커우(營口) 상륙은 가능하다고 답변을 얻어냈다.

두위밍은 국민정부군 13군을 미군 함정에 싣고 잉커우에 상륙하려 하였다. 그런데 막상 잉커우에 가니 팔로군이 벌써 방어진지 공사를 하는 등 충돌을 불사할 태세였다. 국민당군은 하는 수 없이 친황다오로 상륙하였다. 친황다오에서 산하이관으로 진출하려 하자 이번에는 소련군과 함께 진주한 팔로군이 가로막았다. 결국 소련이 겉으로는 국민당군에 협조하는 척 했지만 팔로군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장제스는 소련에 항의하는 한편 만주에 있는 소련 연락관을 철수시켰다. 또 미국의 트루먼 정부에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이 움직이자 비로소 소련이 움직였다. 스탈린은 미국과 충돌을 원하지 않았으며 충칭의 장제스와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 주둔 소련군에 훈령을 보내어 “중국 정부가 동북지방에 정치권력을 세우는데 원조”하게 하였다. 마침내 소련 점령군 사령관은 창춘에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반대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스탈린은 장제스가 충분한 병력을 보내 만주를 인수하고 관할할 때까지 소련군 철수를 늦추는데 동의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국에 주둔군을 유지하더라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비치기도 하였다.

장제스는 11월부터 산하이관, 잉커우, 번시(本溪)를 점령하고 1946년 1월에는 창춘을 접수하였다. 뒤이어 선양과 하얼빈 등 동북 지역의 대도시를 접수했다. 장제스는 윈난 등 주로 남방의 병력을 동북으로 보냈다. 현지 인물들을 철저하게 무시했으며 장쉐량을 석방하여 예전 영토를 확보하게 하자는 건의도 즉각 거절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장쉐량의 형제들을 설득하여 만주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다. 장제스가 병력을 만주에 보내기는 하였지만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1945년 말까지 동북에 대한 장제스의 힘은 주로 소련과 협력에서 나왔고 워싱턴의 지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국민당군이 접수한 동북지역은 주로 교통선 주변과 대도시들이었다. 공산당은 국민당이 진주한 대도시에서 병력을 철수하여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옮겨갔다.

장제스(왼쪽)와 두위밍

장제스, 두위밍을 동북지역 사령관에 임명하다

1945년 10월 18일 장제스는 두위밍을 동북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두위밍은 직전까지 윈난성 쿤밍의 수비사령관겸 5집단군 총사령이었다. 그는 장제스의 밀명을 받고 윈난성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군벌 룽윈(龍云)을 제거하여 장제스의 신임을 얻었다. 룽윈은 두위밍에게 제압당하여 아무 실권이 없는 군사위원회 참의원 원장직을 맡았다.

두위밍은 산시성(陝西) 미지(米脂)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황푸 군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장제스가 군벌들을 토벌한 북벌전쟁에 참가하며 순조롭게 승진했다. 그는 1938년 장갑차 연대를 확대 개편한 200사단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부대가 후난성 상탄(湘潭)성에서 훈련하며 주둔할 때였다. 창사에 있던 국민당 경찰국과 소방대가 상탄성에 불을 지른 후 소방훈련을 하려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두위밍이 깜짝 놀라 부대를 파견하여 이 미친 짓을 막고 방화도구들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포고문을 붙여 방화를 엄금하니 십만이 넘는 상탄현성 백성들이 감격하여 칭송한 일이 있었다.

항일전쟁에 참전한 그는 1939년 12월부터 1월까지 정동궈(鄭東國)등과 함께 광시장족 자치주 남부 난닝(南寧) 부근에서 중국군 5군단장으로 쿤룬관(昆侖關)전투에서 승리하여 전공을 쌓았다. 중국 전사에서 ‘쿤룬관 대첩’으로 기록된 이 전투는 중국군 30만명, 일본군 10만명이 동원된 대규모 회전으로 국민정부의 베트남 연결선 확보에 절대적인 전투였다. 그는 중국군 장군들 중에서도 일본군에 견결히 맞서 싸워 장제스의 신임을 얻었다. 결국 장제스가 1945년 4월 룽윈 제거와 동북문제 해결에 두위밍을 내세운 것은 그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두위밍은 국민정부군 장군 중에서 몇 안되는 서구형 군사지도자였다. 즉 미국이나 유럽의 장군들처럼 현대전에 정통했으며 지휘에 과단성이 있었다. 두위밍은 진격할 때 속도를 중시하는 전격전을 선호했다. 그는 항일전에서 다른 중국군 장군들처럼 수비에 치중하고 조심스럽게 전투하는 방식을 싫어했다. 그는 공격을 좋아했으며 우세한 화력으로 적을 두들긴 다음 쾌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장기였다. 그의 장점이 가장 크게 부각된 것이 쿤룬관 대첩이었다. 장제스는 그의 이런 능력을 높이 사서 가장 장비가 좋고 훈련이 잘되어 있는 정예 병력을 보내 주었다. 그는 중국에서 최초로 탱크부대와 낙하산부대를 보병작전과 배합, 지휘하여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쾌속으로 동북을 석권해가는 두위밍

과연 두위밍은 동북지역을 쾌도난마식으로 신속하게 석권하기 시작하였다. 두위밍이 부임한 뒤 4일째 되는 날,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다. “소련과 더욱 긴밀히 접촉하라. 그래서 동북의 영토주권을 접수하라.”는 것이었다. 두위밍은 열흘 가량 소련군과 접촉한 결과 그들이 이미 동북에서 철군하기로 선언한 것을 확인하였다. 잉커우의 소련군은 이미 떠났으며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이 접수하였다.

두위밍은 장제스에게 다시 건의했다. “둥북 문제는 무력을 쓰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11월 5일 두위밍은 비행기로 충칭의 장제스에게 가서 상황을 보고한 뒤 다시 요청했다.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야 하며 미국 함대로 후루다오(葫爐島)나 친황다오(秦皇島), 잉커우 상륙을 엄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두말없이 동의했다. 대신 이렇게 반문했다. “잉커우의 비적을 소탕하지 못하면 아주 시끄러워질 텐데…” “걱정마십시오. 후루다오, 친황다오, 잉커우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겠습니다.” 잉커우와 산하이관, 그리고 후루다오, 친황다오는 보하이만(勃海灣)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중 잉커우와 후루다오, 친황다오에 커다란 항구가 있어 모두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하이관은 친황다오시에 속해 있다

11월 13일, 두위밍은 산하이관을 공격,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동북 민주연군 주력이 도착하기 전에 전략적 요충지들을 점령할 결심이었다. 또 다른 병력으로는 후루다오로 진격하게 하였다. 후루다오를 점령하면 그 다음에 진저우(錦州)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진저우는 랴오닝성에 있는 대도시로 화북과 동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산하이관은 장성의 동쪽 끝으로 옛적에 후금과 명군이 대치했던 고금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곳은 이미 팔로군이 주둔해 있었다. 팔로군은 소련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 및 괴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산하이관을 점령하였다.

10월 28일 미군과 국민정부군, 그리고 팔로군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벌어졌다. 팔로군이 친황다오에 있는 미군에 항의하자 잘못을 인정한다는 답변이 있었다. 팔로군도 사살한 상대의 시신을 인도하며 충돌을 회피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11월 4일 두위밍이 “팔로군은 즉시 산하이관을 떠날 것이며 철도에서도 30킬로 이상 떠나라.”고 통첩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국공은 서둘러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산하이관 수비군은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의 방침에 따라 동북 민주연군이 움직일 시간을 벌 셈이었다. 산하이관 팔로군 수비군은 1만명, 공격하는 국민정부군은 8만명으로 병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국민정부군은 비행기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양측의 전투는 22일간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 팔로군이 자진 철수하면서 끝이 났다. 10월 26일 국민당 군은 산하이관을 점령했다. 같은 날, 진저우에 있던 동북 민주연군도 스스로 철수하여 국민정부군은 순조롭게 목적을 달성했다. 결국 두위밍은 빠른 시일 내에 후루다오, 친황다오, 산하이관을 석권했다. 잉커우는 다음해 1월 국공 간에 맺은 정전협정 ‘국내 군사충돌 중단에 대한 통고’가 체결된 뒤 공산당군이 철수하여 국민정부군 수중에 들어갔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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