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회담 중 국·공의 충돌
    [국공내전-5] 가오수쉰 기의와 푸쭤이의 선전
        2018년 12월 20일 1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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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국공내전-4] “애꾸눈 장군 류보청, 상당과 한단에서 연승하다

    류보청, 다시 한단(邯郸)에서 승리하다.

    상당전투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진지루이 군구 부대들은 다시 한단에서 국민당군과 싸웠다. 이 전투도 근거지를 선점한 공산당군을 밀어내려는 장제스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장제스는 총 36개군 73개 사단을 화북(1) 지역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려 하였다. 국민당군 병력을 네 갈래로 나누어 핑수이(平綏)、통푸(同蒲)、핑한(平漢)、진푸(津浦)등 철로선을 따라 북상하게 하였다. 그중 주력을 핑한철로(베이핑-한커우간)와 그 동쪽을 따라 진격하게 하였다. 한단을 점령하고 핑한철로를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책임을 맡고 있는 진지루위(晉冀魯豫: 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성에 걸쳐있는 해방구) 해방구가 있었다. 해방구의 수도가 바로 한단이었다. 장제스는 한단을 먼저 친 다음 베이핑과 텐진 등 화북 전체를 석권하려 하였다. 한단은 허베이성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옛날 전국시대 때 조(趙)나라의 수도였다. 내전 당시 인구는 3만여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네 성의 경계지역에 자리 잡았는데 교통의 요지였다. 공산당도 이곳을 사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한단전투에서 노획한 무기를 시험하는 팔로군

    10월 중순, 국민정부군 11전구 부사령겸 40군단장 마파우(馬法五)와 신편 8군단장 가오수쉰이 총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류보청에게 곧바로 반격을 명령했다. 군사위원회는 “신중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고, 잘 쉰 부대가 피로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고, 안양(安陽) 북쪽의 유리한 곳까지 깊이 유인하여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사령 류보청과 정치위원 덩샤오핑은 정규군 5만명과 민병 10만명, 그리고 지역의 인민들을 동원했다. 전투는 정규군이 맡고 민병과 지역 인민들은 주로 부차적인 전투와 보급을 담당하였다. 병력과 보급등의 객관적 조건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우세였다. 하지만 신편 8군은 과거 서북군 출신의 정예였다. 화력은 기관총과 박격포 정도의 팔로군에 비해 국민당군이 크게 우세했다.

    가오수쉰에 대한 정치공작

    서북군은 본래 장제스에 대하여 유감이 많았다. 장제스 직계부대에 비해 보급과 승진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사령관이던 양후청은 장쉐량과 함께 서안사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십 년째 연금상태로 있었다. 그 뒤 서북군은 항일전투인 타이얼좡(枱兒庄)전투(2)에 참전했으며 국민당이 전쟁에 방관하던 시기에는 훈련만 받아 전투력이 강했다. 장비도 반 이상이 미제 무기로 무장하여 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가오수쉰의 기념사진. 맨왼쪽이 덩샤오핑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가오수쉰

    가오수쉰은 국민당 장군 중에서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장제스가 특히 경계했다. 그는 산시성에서 팔로군 부총사령인 펑더화이, 부대장 샤오화와 여러 번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1939년 산둥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팔로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때 지루(冀魯: 허베이, 산둥) 해방구 사령원이던 샤오화(肖华)가 부대를 이끌고 가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때 은혜를 잊지 못하던 그가 마침내 갚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43년 상관이던 스우싼(石友三)이 카이펑(開封)에서 일본군과 비밀협상을 하여 팔로군을 공격하려 하자 부하들과 함께 죽이기로 모의하였다. 결국 의형제를 맺었던 스우싼을 납치하여 산 채로 황허변에 묻어 살해하였던 것이다.

    1945년 9월에는 가오수쉰 스스로 왕딩난(王定南)을 통해 류보청과 덩샤오핑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서로 긴밀히 연락하자.”는 내용이었다. 왕딩난은 국민 정부군 내의 중공 지하당원이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이런 가오수쉰을 설득하여 전향시키려는 생각을 가졌다. 덩샤오핑은 “가오수쉰은 우리와 여러 번 인연이 있다. 장제스에게 푸대접을 받아 원한도 있다. 마땅히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볼만하다.”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은 왕딩난에게 가오수쉰처럼 장제스에게 불만을 가진 국민당군 고급장교들을 공작하라고 지시했다. 가오수쉰은 “휘하 장교들이 기의를 하면 가족들이 해를 입게 된다. 그러니 먼저 가족들을 쉬저우쪽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덩샤오핑은 신사군 사령인 천이에게 요청하여 가오수쉰과 휘하 장교의 가족들을 쉬저우 부근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가오수쉰 부대의 기의에 대한 준비는 모두 마친 셈이었다.

    유인하여 모래톱에서 섬멸하다

    공산당은 홍군 시절부터 패배하지 않는 전투를 지향했다. 전술은 운동전을 장기로 했으며 양동(거짓공격), 성동격서(공격에 앞서 다른 곳으로 적의 관심을 이끄는 것) ,피실격허(수비가 허술한 곳을 치는 것), 기습, 야습 등 출기불의(예상치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의 공격)의 기공법을 예사로 썼다. 이번 전투에서도 류보청은 국민 정부군을 깊이 유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포위 섬멸전을 꾀하고 소모전을 피하려 하였다.

    그는 장허(漳河)와 푸양허(滏陽河)(3)의 물굽이 모래톱에서 결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그 곳의 당조직과 군민들을 조직하여 미리 도로를 파괴하고 성벽, 다리, 보루와 방어공사를 모조리 허물어 장애물을 제거했다. 또 정보선을 배치하고 지형을 정찰하여 전투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나갔다. 팔로군은 도중에 국민 정부군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주력 선두부대가 푸양허를 건넌 뒤 24일 총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신 8군 지휘관인 가오수쉰에게 지금이 적기이니 즉시 기의하라고 통보했다. 군구 참모장인 리다(李達)가 전선을 넘어 직접 가오수쉰의 군영으로 직접 찾아갔다. 진지루위 군구 참모장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 설득하자 가오수쉰은 깊이 감동했다.

    10월 30일 가오수쉰은 신 8군 및 민병 1만여명을 인솔하여 기의를 선언했다. 전국에 전문으로 “내전을 중지하고 단결하여 건국할 것을 호소하는 기의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당군 진영을 이탈하였다. 그러잖아도 불리한 형세에 병력도 부족한 국민당군 진영은 완전히 흔들렸다. 류보청은 즉시 국민당군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전에 나섰다. 그는 이곳에서도 삼면을 포위하고 한쪽을 열어두는 전법을 채택하여 남쪽을 비워 두었다. 과연 국민당군이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자 즉시 추격, 허베이성 최남단인 린장현(臨漳縣) 일대에서 따라잡아 대부분을 섬멸했다. 스자좡, 안양에서 지원하러 온 국민당군은 소문을 듣고 신속하게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군 40군 군단장 마파우를 비롯하여 참전한 고급장교 대부분이 포로로 잡혔다. 국민정부군 사상자는 1만 4천명, 포로로 잡힌 숫자는 2만 3천명이다. 팔로군 사상자는 4천명에 이르렀다.

    이 전투는 가오수쉰의 기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두 명의 최고 지휘관 중 한 명이 병력을 대거 이끌고 전향했으니 국민 정부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 기의를 두고 양쪽 진영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국민정부 쪽은 가오수쉰의 기의 소식을 봉쇄하였다. 국민정부는 11월 8일 군사위원회 대변인 명의로 “가오수쉰은 10월 30일 밤 츠현(磁縣) 북쪽 마터우진(馬頭鎭)에서 공산군에 포로로 잡혔다.”고 발표했다. 공산당은 12월 15일 마오쩌둥 주석이 “가오수쉰 운동”을 펼치라고 명령하여 선전효과의 극대화에 나섰다. 가오수쉰이 기의한 부대는 옛 이름 그대로 ‘신 8군’을 쓰거나 ‘민주건국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가오수쉰은 중공당에 입당을 신청하여 그해 11월 공산당원이 되었다. 한단전투에서 승리하여 공산당은 동북 지방에 병력을 보내는데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상당전투에 이어 연승하자 당 지도부와 공산당군은 더 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내몽골 쑤이위안(綏遠)의 국공 충돌, 수성명장 푸쭤이의 선전

    충칭 평화회담 기간에 국공, 양당은 다시 내몽골 쑤이위안에서 충돌했다. 당시 내몽골 중부지역은 국민정부 쑤이위안성(綏遠省)(4)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성도는 구이쑤이(歸綏: 지금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였다. 장제스는 1945년 8월 11일 12전구 사령원인 푸쭤이(傅作義)에게 쑤이위안성은 물론 장자커우와 핑수이 철도(平綏철도: 베이핑- 구이쑤이간을 잇는 철도) 장악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푸쭤이는 자신의 주력부대와 일본 괴뢰군을 재편한 부대 등 총 6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진하여 쑤이위안성 일대를 점령했다. 먼저 구이쑤이를 점령한 뒤 우촨(武川)、쭈어즈산(卓资山)、타오린(陶林)、칭수이허(清水河)、량청(凉城)、지닝(集宁) 등 주변 도시와 읍을 차례로 점령했다. 핑수이 철도 연선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회담분위기를 제압하고 베이징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다.

    장제스와 푸쭤이(오른쪽

    국민 정부군 사령원 푸쭤이는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으며 1927년 북벌전투 뒤 대도시인 텐진의 경비사령을 지냈다. 그는 장제스와 펑위샹, 리쫑런, 옌시산이 싸운 중원대전과 항일전쟁을 두루 경험한 역전의 맹장이었다. 내몽골 동부에서 벌어진 홍거얼투(红格爾圖) 전투, 산시성에서 국공이 합작하여 벌인 옌먼관(鴈門關) 전투와 핑싱관(平型關)전투 등 여러 항일 전투에 참전하여 커다란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수비에 능해 ‘수성의 명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에 맞서는 팔로군 부대는 허룽(賀龍)이 지휘하는 진쑤이(산시, 쑤이위안) 군구 부대와 네룽전(聶榮鎭)이 지휘하는 진차지(산시,차하얼, 허베이)군구 부대 등 모두 쑤이이안성 주변 해방구의 부대들로 모두 5만 3천명이었다. 허룽은 1927년 난창기의를 지휘했으며 허베이 서부에 혁명근거지를 세웠다. 장정 때는 런비스, 왕전 등과 함께 2방면군을 지휘하였으며 팔로군 120사단을 지휘하여 항일전인 천좡(陈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네룽전 또한 난창기의, 광저우 기의부터 다섯 차례에 걸친 ‘반포위토벌’전투, 장정을 두루 거쳤으며 항일전투인 핑싱관 전투, 황투링(黃土領)전투, 백단대전에 참전하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특히 진차지 군구 해방구를 튼튼히 다지고 병력을 10만명으로 증강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예전에 우타이산(五臺山)에 노지심이 있었다면 지금은 네룽전이 있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네룽전과 허룽(왼쪽부터)

    중공 중앙은 허룽과 네룽전의 연합군으로 구이쑤이를 중심으로 포진한 푸쭤이 휘하의 집단군을 모두 섬멸하고자 하였다. 이번 전투는 국공회담의 분위기는 물론이고 화북지역의 근거지를 지키는데, 그리고 동북 3성으로 세력을 펼치는데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10월 22일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만약 푸쭤이 부대가 구이쑤이를 고수하면 바오터우(包頭), 우위안(五原), 구양(固陽) 등을 먼저 점령하라. 푸쭤이 부대의 식량공급을 끊어 적이 포위망을 돌파하게 한 다음 섬멸하라.” 역시 팔로군이 장기로 하는 운동전으로 승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팔로군 진차지 군구 부대와 진쑤이 군구 부대는 주변 소읍들을 먼저 소탕하였다. 양가오, 신핑바오(新平堡)등 소도시들을 공격하여 점령했으나 적병 일부를 섬멸했을 뿐 대부분 구이쑤이로 후퇴했다. 특히 쭈어즈산(卓資山)의 국민당군 5,000여명이 섬멸당하자 국민당군은 모두 구이쑤이와 바오터우로 신속하게 철수하여 수비에 들어갔다. 바오터우는 구이쑤이에 이어 내몽골의 두 번째 도시이다.

    10월 31일, 팔로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구이쑤이를 포위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국민당군은 오히려 다섯 차례나 반격하여 팔로군 공격을 흔들었다. 한 달이 넘도록 공격했으나 푸쭤이는 침착하게 방어해냈다. ‘수성의 명장’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바오터우도 11월 2일부터 포위공격에 들어갔으나 견고한 수비를 뚫을 수 없었다. 바오터우를 먼저 점령한 뒤 쑤이위안을 집중 공격하려던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12월 2일 힘을 모아 바오터우를 공격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북방의 날씨는 매우 춥다. 흙이 얼어 토목작업이 불가능해지고 팔로군의 보급이 오히려 곤란해졌다. 팔로군은 12월3일과 4일에 각각 바오터우, 구이쑤이의 포위를 풀고 후퇴하여 휴식과 정돈에 들어갔다.

    이 전역에서 팔로군은 국민당군 1만 2천명을 섬멸했다. 하지만 서로 비긴 전투라고 볼 수 있다. 국민정부군 12전구 사령관 푸쭤이는 본래 수비에 능한 지휘관이지만 이번에는 그의 지휘가 특히 뛰어났다. 푸쭤이는 팔로군이 야전에 능하며 공성전에 약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팔로군이 장기로 하는 적을 각개 분할하여 격파하는 것과 포위한 뒤 구원병을 섬멸하는 전술을 경계하였다. 그에 따라 전투 초반에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즉시 구이쑤이와 바오터우로 철수시켜 수비에 들어간 것이다. 겨울이 오기까지 버티면 팔로군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수비에 치중한 그의 판단이 옳았다. 팔로군은 이 전투를 평가하며 “초반에 여러 소읍의 공격에서 적의 퇴로를 적시에 차단하지 못했으며 푸쭤이의 용병이 좋아 신속하게 후퇴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산둥성을 둘러싼 전투

    싸움은 산둥성으로 옮겨 붙었다. 산둥성에는 이미 팔로군이 근거지를 세워놓고 있었다. 천이가 지휘하는 신사군도 이 싸움에 가세하여 국민정부군의 산둥성 진입을 막았다. 10월 11일 국민당군은 진푸철도(텐진-푸커우간)와 핑한(베이핑-한커우간)철도 장악과 산둥성의 대도시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10월 11일 국민당군 2개 군과 일본 괴뢰군을 개편한 부대 1개군이 산둥성 성도인 지난(濟南에) 진입했다. 천이는 먼저 전투력이 약한 일본 괴뢰군 개편부대를 먼저 섬멸하고 그 뒤에 쉬저우에서 산둥으로 밀고 들어오는 주력군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천이는 팔로군이 즐겨 사용하는 매복전을 펼쳐 괴뢰군 개편부대를 섬멸한 다음 쉬저우에서 들어오는 철도 등 각 철도선을 파괴하여 국민정부군 증원을 차단했다.

    12월까지 팔로군과 신사군은 산둥성 멍현(朦懸)등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전투결과는 대체로 팔로군이 유리했지만 정전협정 전에 산둥성의 요지를 차지하려는 국민정부군의 공세도 치열했다. 산둥성 남부의 해방구를 점령하려는 국민당군과 지키려는 팔로군이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다가 1월 13일 정전협정이 발효되어 끝이 났다. 산둥성 전투에서 국민당군 2만 8천명이 섬멸 당했으며 밀고 들어온 국민당군은 운하 남쪽으로 물러났다. 팔로군이 진푸철로 200킬로를 차단하고 산둥 해방구를 방어했으니 이 전투는 국민당군이 패배한 싸움이었다.

    <각주>

    1. 화북(华北) 지역은 동북 3성을 제외한 중국 북부지역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친링(秦岭)에서 화이허(淮河) 선 북쪽을 말하며 베이징, 텐진, 허베이성, 산시성과 내몽골 자치주 등을 포괄한다.

    2. 1938년 3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산둥성 타이얼좡등 세 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가리킨다. 이 전투는 쉬저우 전투와 더불어 중국군이 승리한 중요한 전투이다. 양쪽의 사상자는 중국군 5만명, 일본군 2만명이며 이 전투로 중국 인민들의 항전의지가 크게 고무되었다.

    3. 장허와 푸양허는 허베이성에 흐르는 강이다.

    4. 쑤이위안성은 1928년 설치하였으며 1954년 내몽골 자치주로 통합되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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