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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적인 것의 동시대성
[노동·문예 노트] 시와 시적인 것의 동시대성에 대한 비평적 전망-3
    2018년 12월 20일 10: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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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와 반시』 106호, 2018년 겨울호 발표된 것을 필자와 매체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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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장려된 해석의 도그마

시와 시적인 것의 동시대성에 대한 비평적 전망, 마지막 시간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Poetry>(2010)에는 김용택, 황병승 시인이 등장한다. 주인공 미자와 우연히 시낭송모임 뒤풀이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의 ‘위기와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다. 모두들 시가 죽었다고 말하며, 이제는 누구도 그런 것은 읽지 않는다고 얘기하지만, 우리는 의외로 시를 자주 접한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꽤 긴 시간, 여러 계절 동안 시를 배운다. 문학교재에 게재된 시는 비평적 관점에서 검증된 텍스트이며, 다수의 연구(자)에 의해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정당화된 지식이다. 그러나 교과서에 수록된 공식적 시는 ‘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말끔하게 정련된 ‘정보체계’다. 오해하지 말 것은, 국어수업 시간에 배우는 시가 가치 없다거나 무용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단이나 교육제도의 승인을 받아 구축된 시의 문범(文範)은 확고부동한 분석적 전제를 지니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평단은 일찍이 뉴크리티시즘을 비롯한 영미비평의 세례를 받으며 문학 작품 분석의 새로운 방법론을 입안하였다. 신비평(new criticism)은 인상주의에 머물러 있던 문학비평의 수준을 한 단계 진전시킨 것이 분명하지만, 시의 의미를 완결되고 통일성 있는 실체로 맹목하게 하는 폐해를 낳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객관적 분석주의라는 이름으로 교육현장에 이식되었고―백철을 비롯한 강단비평(가)에 의해―, 시는 작가의 의도(정답)가 존재하는 완고한 지식체계로 사물화되었다. 시를 비롯한 문학 텍스트를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생산과정의 산물’(생산비평)이나, ‘독자와의 교섭과정’(독자반응비평)으로 보는 비평적 방법론이 제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독자(학습자)들은 시를 ‘장려된 해석’의 도그마로 수용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읽는 것은 시 감상의 기본 태도이다. 그러나 일상적 어법을 통해 리얼한 이야기를 전개하며 극적 반전을 꾀하는 소설 장르와 달리, 시는 정보 추출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포스트모던 이론(가)의 급진적 비판이 아니라 로만 야콥슨의 전통적 의사소통 모델을 참조하더라도, 시적 기능은 기의를 전달하는 목적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랜 기간 시의 낱말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의미나 작가적 의도 찾기에 골몰해 왔다.

주해적 시 교육의 공과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논의의 핵심은, 시를 정의하고 분류하는 문예이론의 선진성과 정합성을 따지는 것보다는, (무려, 초중고 12년 동안 의무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작금의 시 읽기 과정이 ‘시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문화적 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언어를 시의 언어로 고양하는 과정을 시적 표현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수사적 연마나 제련을 뜻하는 게 아니라 관습적 언어의 지시적 의미체계를 모조리 거덜내는 싸움이다. 이미 다양해질 만큼 다양해진 현대시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그 자체도 녹록한 작업이 아니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시가 독자로부터 괴리된 자기 소외의 형식이 된다는 것. 사실, 시는 발신자(작가)와 수신자(독자)가 매끄럽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의사소통 형식이 아니다. 앤터니 이스톱이 자크 데리다를 인용하며 얘기했던 바와 같이, 시는 ‘수화자’가 없는 대화이다(”부재중인 사람에게 무언가 전달하려고 글을 쓴다“).(1) 비유하자면, 시는 부재하는 청자를 향한 말 건넴이다. 시의 독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양자의 상호교통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일까.

  1. 이벤트로서의 시: ‘정보의 추론심미적 경험사이

시와 독자의 상호교통 가능성에 대한 탐문은, 문학사와 문학연구에서 ‘독자’의 로케이션이 강조되던 시대적 흐름에서 출발하였다. 발신자보다 수신자, 생산자보다 소비자, 창작자보다 향유자의 위치와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은, 단순히 문학의 의사소통 과정에 대한 시각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담론 투쟁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표현 성과를 강조하는 입장과 독자의 수용 과정을 강조하는 입장은 매우 치열하게 대립해 왔다. 통상 전자를 작가중심의 표현미학, 후자를 독자중심의 수용미학이라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문학적 의미 생산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시가 시인의 의도를 추론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태도는 상당히 완고하게 지속되어 왔으며, 그것은 서양의 해석학적 전통만이 아니라 동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동서양 모두 문학적 텍스트를 성현의 말씀으로 주해하고 익히는 문화적 관습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 성경이나 유가의 정전(canon)은 구원의 말씀(logos)이자 자기 성찰의 경전(經傳)으로 이해되었으며, 무지하고 타락한 중생(독자)의 이의제기를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 ‘의미체계’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주의는 문학에서 저자의 의도를 중시하는 표현미학으로 이첩되었고, 그것은 문학적 향유구조 속에서 이데올로기처럼 물질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시 창작과 비평 전략은 크게 변하였다. 수용미학이라 부르는 독일문예이론, 독자반응이론으로 명명되는 영미비평이론은 (문학의 역사에서) 귀퉁이로 쫓겨나 있던 독자를 구출하여, 문학사의 너른 광장으로 복귀시켰다. 문학적 소통모델에서 참여자의 임무와 기능을 강조한 수용미학과 독자반응이론은 작가에게만 부여되던 창작/생산의 권위와 가치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재분배했다. 독자와 텍스트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수용미학이론의 견인차 역할을 한 H.R.야우스의 저작명이 도전으로서의 문학사인 까닭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시의 유통 현장에서는 여전히 작가의 의도를 추론하거나 장려된 해석의 패러다임을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국내에서 탐구로서의 문학, 독자, 텍스트, 시: 문학 작품의 상호교통이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루이스 엠 로젠블렛의 상호교통이론은 이러한 문제를 실천적 차원에서 극복하고자 한 의미 있는 시도이다.

시는 시간 속에서 이벤트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시는 어떤 대상이나 이상적인 실체가 아니다. 시는 독자와 텍스트가 화합해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동안에 일어난다. (중략) 언어가 규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과 함께 독립적인 연구를 인정하는 형식적 특징을 가지는 성향을 가져온다. (중략) 언어는 사회적으로 생성되고 사회적으로 생성력이 있는 현상이다. 분명 어느 누구도 어느 언어의 체계에 대한 사회적 매체(그것이 음성 텍스트이든지 문자 텍스트이든지 상관없이)를 소유하지 않고는 작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문자 예술 그 자체가 사회적 관례인 것이다. (중략) 텍스트 읽기는 독자의 인생사의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이벤트이다. 상호교통은 과거 경험뿐만 아니라 독자의 현재의 상황과 현재의 관심 또는 열중하고 있는 문제를 포함할 것이다.(2)

수용미학이든, 독자반응비평이든, 그것은 기존의 문학적 전통과 의사소통 모델에 대한 반역(“도전”)이다. 이는 독자를 수동적인 감상의 대상에서 해방시켰다는 의미에서 매우 ‘문학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다만, 문학연구나 문예비평의 측면에서 독자의 역할이 부각되었다고 하더라도, 수용미학이 선언적 차원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시를 읽는 독자가 매순간 문학적인 경험과 시적 효과를 자기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독자의 시 읽기를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시는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상호작용(interaction) 과정―역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독자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작가-텍스트-독자’의 상호교통(transaction) 과정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예술적 이벤트라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을 만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시 읽기도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이벤트“인 셈이다. 그러므로 시는 작가의 의도를 기록하고 추론하는 정보 탐색의 과정이 아니라, 낯선 언어를 독자의 경험에 바탕하여 응대하는 심미적 체험이다.

언어는 “사회적으로 생성되”며, 작가든 독자든 “언어의 체계”를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적 기능이 정보 전달 행위와 무관한 것처럼, 시는 의사소통 문법에 따라 구성되거나 독해되지 않는다. 로젠블렛이 비심미적 활동과 심미적 행위를 구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전자가 시의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낱말과 낱말의 정보를 추출/파악하는 목적의 활동이라면, 후자는 시의 행과 연을 구성하는 시어(詩語)의 격렬한 불협화음을 자기 맥락에서 감응하는 과정이다. 그녀가 시를 “음악”에, 독자를 “연주자”에 비유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심미적인 것은 무지막지한 자유연상이나 몽상과는 다르다. 심미적 체험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축된 일상적 구문과 문법, 화법과 규범을 조금은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를 통한 심미적 경험이 상투적 언어 감각을 낯설게 만드는 “시적인 표현”에서 자주 발견된다고 하면서도, 비유와 상징 같은 레토릭이 심미적 체험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의 심미성은 메타포나 심벌리즘과 같은 수사적 문제라기보다, 기존의 언술체계 속에서는 조우할 수 없는 낯선 감성체계(“감정, 소리의 울림, 느낌, 생각, 그리고 연상 작용이 주는 뉘앙스”, 45-46쪽)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벤트로서의 시’라는 말은 정보 전달이나 정보 추출적 언어 활동과는 구분되는 탈규범적 사건의 도래를 의미한다. 다만(“언어는 규칙에 지배“되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법칙들을 공유하는 화자와 청자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문학적 교통이론은 독자의 의미 해석 가능성을 지나치게 극대화하고 있다. 작가적 의도를 추론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긴 하지만―독서 중에 체험된 것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시는 충분히 ‘해석’되어야만 하는 정보와 다를 바 없다.

  1. 해석학의 함정: 개인적 감상의 특권주의와 탈정치성

로젠블렛은 시적인 순간을 심미적 사건으로 규정하면서도, 독자를 의사소통 규칙을 공유하는 파트너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학습자의 반응중심 문학이론을 시 교육의 현장에서 실행하고자 하는 목적적 한계 때문이다. 시와 독자가 시적인 것의 역동성을 창안하는 동반자임을 증명하는 것, 다시 말해 (시적인 것의 생산 라인에서) 심미적 경험을 창조하는 독자의 능동성과 수행성을 입증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이다.

스무 해 넘게 ‘비평과 문학적 경험’이라는 강좌를 운영하며, 시적인 것의 제한성과 개방성을 고민해온 학자의 진정성 있는 노력은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특히, 시 텍스트와 독자의 상호교통 과정에서 시적 사건(event)을 융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왜 시를 읽고 써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하며, 또 학교 현장에서 시를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하지만 시적인 것의 구체성을 부여하는 작업이 언어적 의사소통 모델에 국한될 경우―로젠블렛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조금 더 고양된 ‘심미적 정보’나 ‘개인적 감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특히, 반응중심 문학교육에서 중시하는 심미적 체험의 ‘개인성’은 자칫 해석적 상대주의나 개인적 작품 감상에 특혜를 부여할 우려가 많다. 사적 소회라 하더라도, 시의 감상은 개개인의 취향이나 판단이 아니라 당대 사회가 선호하는 해석적 지평을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출신의 미국 문예이론가 짱 롱시는 “어떤 특별한 독법으로의 이끌림은 대체적으로 개별적인 취향과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라고 하면서 “이러한 것들은 객관적인 법칙을 따르거나 실제적인 증거에 기초하여 도달한 결론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사회적이고 미적인 기준에 의해 부분적으로 형성되고 결정된다”(3)고 하였다.

앞서 언급한 앤터니 이스톱의 저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시 역시 담론의 형식이다. 이를 테면, 시가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표현양식이라는 주장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예저작 중 하나인 『상서(尙書)』에서 이미 제기되고 있으며, 『시경(詩經)』의 「대서(代序)」 부분에서도 정교하게 언급되고 있다. 시란 “시인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독자가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가 시인의 의도를 재구성”(짱 롱시, 224쪽)해야 한다는 것. 이렇듯 작가의 의도를 중시하는 입장은 맹자를 비롯한 유가 전통에 기인해 있으며, 이는 중국 비평가들을 지배하는 핵심 문예 담론이 된다.

언어는 순수하거나 투명하지 않다. 언어를 표기하거나 학습한다는 것은, 국민국가의 네트워크 속에 개인의 삶을 등기하고 적응시키는 사회적 변환 과정이다. 국민국가 구성원의 결속감을 형성하는 물리적, 정서적 매개는 ‘(모)국어’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협약에 따라 언어사용 방식을 일체화하는 것은, 단순히 의사소통 규칙을 통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배질서의 정치적 헤게모니와 경제 시스템을 내면화하는 통치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시의 낱말과 구조를 지배하는 언어 역시 순수하고 가치중립적인 체계나 패턴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담론 효과(ideologie)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의 언어 역시 ‘서열’을 구축하고 ‘표준’을 창안한다.

하여, 시의 정치적 무의식을 고려하지 않는 순진한 해석학은 시적 담론의 효과를 은폐하는 ‘무지의 정갈함’을 떨쳐낼 수 없다. 짱 롱시는 『도와 로고스』에서 이를 명확하게 짚고 있다.

해석학과 해체주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재현이의 전통적인 철학 개념과 함께 의미를 거부하고 언어를 기표들의 자유로운 놀이로 생각하는데 반해, 가다머는 그리스어 미메시스 혹은 이미타치오를 관념론적인 오용으로부터 개선해내고, 예술과 문학에서 의미의 가능성을 보존한다. 의미, 의사 소통, 예술의 현대성, 그리고 예술의 미적 체험과 우리의 일상적 실존 사이의 근본적인 연속성에 대한 해석학적 강조―이 모든 것은 예술 체험을 인간의 전체 체험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그리고 이 분열과 자기 폐쇄의 시대에 미적인 것의 적합성을 확신하는 미덕을 가졌다. (중략) 그럴듯한 다양한 해석들 속에서 각각의 독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판단과 선호도를 지니듯이, 여러 다른 해석들 가운데 단 하나의 해석에만 특권을 부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종 한 해석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하고 그 외의 다른 모든 해석은 타당하지 않거나 완전히 틀렸다고 주장할 수 없을 때가 있다.(4)

시적 언어에는 개인과 집단의 정치적 무의식이 기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미학이나 독자반응비평의 이론적 지렛대가 되는 ‘해석학’은 독자(혹은 인간)의 작품 개입과 주체적인 해석 경험을 더 강조한다. 물론 해석학 역시 시적 의미가 불확정적이며 분열적인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독자의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해석의 여정으로 이해될 뿐이다.

인용문에서 보듯, 해석학은 “개인과 공동체의 중요한 관계를 인식하고 인간의 체험을 참여, 즉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의 자아의 변용으로 생각”하며 “의미는 그 자체 속에,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참여를 위해서 의사소통에서의 생각의 결실 있는 교환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 텍스트와 독자의 상호교통은 흩어진 낱말들의 의미가 응집되고 “풍부“해져 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의미 구성은 매우 중요한 문학 활동이 된다.

그러나 시적 의미의 불확정성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견이 있다. ”해석학과 해체주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가 의미의 불확정성을 부득이한 해석의 과정으로 본다면, 후자는 의미의 불확정성을 해석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증례로 인식한다. 물론 해체주의적 시각도 시어의 의미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석학적 입장이 독자의 스키마에 입각해 통일성 있는 주제의식을 재창조해내는 심미적 독서라고 한다면, 해체주의는 통상적인 의사소통 방식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사건과 사물을 감지하고 가시화하는 “마술”(185쪽)적 표현에 가깝다. 하지만 해체주의 사상가들은 왜 시적 의미의 불확정성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일상적 의사소통은 청자나 독자를 권력과 자본의 영향 관계 속에 배치하는 비가시적 ‘명령(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언어 활동이 인간의 사고와 감성체계를 포박하는 언표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사고와 마음을 다루는 문학이 안정적이고 표준적인 통사 규율을 어긋내는 반동적 언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언어의 결속성과 해석 가능성이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규율의 리듬’(앙리 르페브르)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1. 감수성의 혁명: 오늘의 시, 새로운 삶을 위한 읊조림

‘시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지배질서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난폭한 사건(event)이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시’를 읽는다는 것과 ‘시적인 것’을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시의 독자가 주체적 태도로 시를 읽거나 배운다고 해도, 매번 시적 대화를 성사시킬 수는 없다. 시적인 것은 시를 통해 체험되기도 하지만, 시의 창작과 비평이 오히려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경우가 더 많다. 독자에게 시적 경험을 부여하기 위해 계발된 반응중심 문학교육의 해석학적 함정은, 이를 방증하는 부정적 증상이다.

시적인 것은, 자기 존재를 지시하고 증명하는 가상의 이름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현재의 시 교육은 언어의 교환(해석) 불가능성을 사유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과서에 수록된 시는 ‘심미적 체험의 계기’라기보다는, 말끔하게 정제되어 권장되는 ‘정보체계’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맑시스트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가 얘기한 것과 같이, 시적인 것은 지배질서의 자동화된 정보체계를 초과하는 언어적 과잉이며, 그것은 자본과 권력의 질서(order)를 비틀고 전복하는 새로운 감수성(sensibility)이다.

감수성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5) 자질이다. ‘sensibility’를 증진하는 것은 시일 수도 있고, 음악이나 그림일 수도 있으며 트라우마 치료법이나 정치적 행위일 수도 있다. 다만, 시인과 비평가는 음악-그림-치료-현실정치가 아니라, 시적 감수성을 통해 일상의 업라이징을 정초하는 존재이다. 현대시가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거나 자족적인 예술 활동에 머무는 참담함을 감수하면서도, ‘수화자’가 없는 대화(부재하는 청자를 향한 말 건넴)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시는 본질적으로, 대중 영합적 글쓰기가 아닌 까닭에, 상투적 정보체계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외롭다. 독자와 교환될 수 없는 언어를 빚어내야 하는 시인의 숙명은 너무도 잔인하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직조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기표-기의 관계를 절단하고 허무는 시적 감수성을 생성해주기 때문이다. 유계영 시인의 도전적인 글쓰기가 주목되는 것은 이런 사정이다.

3과 4의 사이
강물은 신발을 모은다
여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온
가을의 유령들이 모인다
나는 자꾸 깨닫는 사람
눈과 눈 사이를 찌를 수 있도록
물결을 평평히 눌러 두었다

0과 1의 사이
천사는 자신이 거대한 태아라는 사실이 싫다
고작 이런 대우나 받으려고 착하게 산 게 아니야
통통한 발을 벗어 버리고
차라리

괴물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우리 뿐

9와 0의 사이
극락조: 부리를 머금고 발을 꺾어 신은 새
유령: 어둠에 기댄 것처럼 서 있기
오늘은 해가 두 발로 지지만

0과 1의 사이
바람의 말투를 훔치려다 비가 되었다
말 없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러 강가로 몰려왔다
유령들은 강의 괘를 따르며 빠른 노래를 불렀다

유계영, 「일요일에 분명하고 월요일에 사라지는 월요일」(6)

『온갖 것들의 낮』(2015),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2018) 등,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한 유계영 시인은, 시의 통상적인 창작/독해 방식을 비틀고 있다. 그녀의 시는 언어와 세계의 확고부동한 관계를 기각하는 심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생경하고 불가해한 말(들)의 병치로 넘쳐난다. 조금은, 해석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는 「일요일에 분명하고 월요일에 사라지는 월요일」을 보자.

0과 1은 가상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코딩형식이다. 사회적 의사소통망은 부호화된 입력 패턴(“0과 1”)만을 사용할 뿐, 다른 말의 출력 가능성을 하용하지 않는다. “9”에서 “0”으로, 다시 “0”에서 “1”로, 언어적 매트릭스는 자동화되어 있다. 시인은 언어의 지시적-사전적 정의를 비트는 방식(“극락조”, “유령”)으로 말의 자동화에 저항하지만, 0과 1의 상투적 변환 시스템은 지속될 뿐이다. 그러므로 “0”과 “1”은 무(無)와 유(有), 더 나아가 부재와 존재가 아니라 무의미한 명령(어)만을 반복하는 “유령”의 시스템이다. 인간의 가상적 언술체계를 절단하고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자동화된 감각을 파괴하는 시적 언어가 필요하다. 시인은 어떤 행렬체계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언어(“바람의 말투”)를 갖고자 열망한다. 하지만 이는 대중에게 돌팔매(“돌”) 당하거나, 스스로 “괴물”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유계영 시에서 볼 수 있듯, 시적인 것은 지배질서의 자동화된 언술체계를 전복하는 문화적 봉기(uprising)이다. 마르크스주의 언어철학에 기대지 않더라도, 인간의 음성/문자언어는 초국적 자본의 리토르넬로에 포섭돼 있다. 일상언어가 정치 권력에 의해 입안되거나 조율된다는 나이브한 주장이 아니다. 표준어는 자연어가 아니라 인공어이다. 국어는 다양한 억양과 표기의 차이를 탈색한 후, 획일적인 문법 규범에 근거해 ‘표준적인 것’과 ‘비표준적인 것’을 분할하고 위계화한다. 서울말과 부산말, 혹은 서울말과 대구말의 격차는 이내 지워지고, 동일한 음운 모델과 문법 규칙에 복종할 것을 강요당한다. 시적인 것은, 이러한 차이와 분별을 해체하는 전복적 행위이며,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가 필요한 이유이다.

시는 독자와의 교환 불가능한 언어를 직조해야 하는 부채 때문에, 매순간 대중독자로부터 이별 통보를 당한다. 고독의 시간 속에서 저항의 감수성을 풀무질하는 대장장이처럼, 땅! 땅, 지배질서의 감성체계를 타격하는 시인의 읊조림(rhapsody)에 귀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그대, 그대는 들리는가. 저 구슬픈 업라이징의 랩소디가.

<각주>

1. 앤서니 이스톱, 박인기 옮김,  『시와 담론』, 지식산업사, 1994, 34쪽.
2. 루이스 엠 로젠블렛, 김혜리·엄해영 옮김,  『독자, 텍스트, 시: 문학 작품의 상호교통이론』, 한국문화사, 2008, 21~36쪽.
3. 짱 롱시, 백승도 외 옮김,  『도와 로고스』, 강, 1997, 254쪽.
4. 짱 롱시, 백승도 외 옮김,  『도와 로고스』, 강, 1997, 179-254쪽.
5.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유충현,  『봉기: 시와 금융에 관하여』, 갈무리, 2012, 150쪽.
6. 유계영,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2015, 46-47쪽.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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