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보다 더 무서운 미군의 무기, "인종주의"
        2006년 05월 31일 1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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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하티타에서 미해병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이 공개되면서 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미 미국 언론들도 하티타의 학살을 베트남 전쟁 당시 발생했던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과 비교하면서 이라크 전쟁의 도덕성에 대해 뒤늦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1968년 3월 16일, 미군 1개 중대가 베트남 중부 산악 지대의 미라이 마을에 들어가 마을 주민들을 광장에 몰아넣고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 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 중 최악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미군은 반나절만에 504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군 당국은 사건을 보고 받고도 국내의 반전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 해 사건을 은폐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져 미국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상징하게 됐고 이후 반전평화운동은 더욱 확산됐다.

    베트남 전쟁 뿐이 아니다. 하티타 사건의 보도와 때를 맞춰 AP통신은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미국의 오랜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문서를 발굴 공개했다.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공격할 수 있는 상부의 명령이 존재했다는 내용의 이 문서를 통해 노근리 학살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미군이 20세기 후반 개입한 대규모 전쟁, 한국, 베트남, 이라크 모두에서 미군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미군은 이 모든 ‘학살’이 전쟁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전쟁범죄가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는 단 한명이었지만 미라이 학살과 같은 해인 1968년 11월에 발생한 강간사건이 이듬해 10월 미국 주간지를 통해 보도됐을 때 그 비도덕성과 잔혹함에 많은 이들이 몸을 떨었다.

    토니 미서브 하사가 지휘하는 5명의 미군 수색대는 장거리 정찰에 나가면서 인근 마을에서 처녀를 납치했다. 목적은 작전 기간인 5일 동안 끌고 다니며 강간하기 위해서였다. 처녀를 윤간한 병사들은 계획했던 대로 복귀하기 전 총살해 ‘증거’를 인멸했다.

    그러나 병사들 중 한명인 스벤 에릭슨 일병이 죄책감에 못 이겨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중대장에게 털어놨으나 문제가 커질 것을 두려워 한 중대장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번엔 스벤슨 일병의 배신 사실을 알게 된 동료들이 오히려 살해위협을 하자 그는 군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신고했다. 군사재판을 통해 범죄사실이 입증됐지만 미라이 사건과 마찬가지로 군당국은 내용이 민간에 흘러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사건은 발생한지 1년이 지나, 미라이 사건이 2년 만에 폭로되기 한달 전에 미국인들에게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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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터쳐블>, <스카페이스> 등 사실에 기초한 영화를 선호하는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가 이 강간살인사건을 영화로 옮겼다. 1989년 제작된 영화 <전쟁의 사상자들>에서 마이클 J. 폭스는 스벤슨 일병역을, 숀 펜은 미서브 하사 역을 맡았다.

    영화는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실명으로 처리했고, 영화 앞뒤에 미국으로 돌아온 스벤슨 일병이 사건의 참혹한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삶을 지속하는 장면을 덧붙인 것 이외에는 최대한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 다만 영화의 시간관계상 5일 동안 5명의 군인이 한명의 여성에게 저지른 잔학한 행위가 수사보고서처럼 상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당시 사건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범죄행위와 시간까지 자세히 나와 있으니 아마 각본을 쓰기 위한 자료조사는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미국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은 아니다. 영화는 1987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을 필두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할리우드의 자기고백 시리즈 중의 하나다. 80년대 후반 할리우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긴 침묵을 깨고 전쟁에 대한 영웅주의적 해석이나, ‘우리도 피해자’라는 식의 변명이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미군과 전쟁 자체에 대한 환멸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을 쏟아냈다.

    <전쟁의 사상자들>은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쟈켓>, 베리 레빈슨의 <굿 모닝, 베트남>, 존 어빙의 <햄버거 힐>, 패트릭 던컨의 <찰리 모픽> 등과 같은 시기에 발표됐다. 어쩌면 이처럼 비슷한 테마의 영화들이 유행처럼 제작됐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할리우드의 자기비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이후 <위 워 솔저스>처럼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베트남 전쟁 영화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스릴러의 대가로 이름 높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엉뚱한 실망을 안고 돌아간 것도 영화가 큰 평가를 받지 못한 원인 중 하나다. 감독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독이 그리려고 했던 것은 스릴러의 긴장감이 아니라 도덕성의 긴장이었던 것이다.

    전쟁영화 답지 않게 영화를 통 털어 단 한명만 죽는 다는 사실도 관객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굳이 전쟁영화가 아니더라도 수십명이 간단하게 죽어나가는 할리우드의 영화의 강도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지루한 전쟁영화로 비쳐졌을 것이다. 이 경우 한계치에 다다른 할리우드의 선정성과 잔혹성을 탓해야 하겠다.

    그러나 영화가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마이클 J. 폭스의 낮은 연기력이었다. 강간을 주도한 미서브 하사역의 숀펜과 함께 전통적인 선악구도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 것은 감독의 한계지만, 그 구도 안에서조차 숀펜의 연기에 압도되면서 방향을 찾지 못한 주인공은 영화를 산으로 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심하게 말하면 옷만 군복으로 갈아입었을 뿐이지 <백 투 더 퓨쳐>의 철부지 고등학생의 이미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주인공의 불만족스러운 연기 덕분에 영화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병사의 개인적인 투쟁에 과도하게 초점이 맞춰지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작품이 돼버렸다.

       
    ▲ 미군 현장 조사단이 촬영한 학살 후의 미라이 마을, 전날 있었던 해방전선의 습격에 복수하기 위해 미군은 "작정하고" 미라이 마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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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벤슨 일병이 폭로한 강간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미라이 학살사건과 함께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에 실려 있다.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부도덕한 전쟁이었는지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이 사건의 보고서를 소설 중간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 전쟁보다 더 광할한 지역에,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미군이 투입됐던 2차세계대전에서는 이런 식의 미군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 2차세계대전은 파시즘을 격멸하는 민주주의 전쟁이었고, 병사들의 도덕성도 더 높아서 그랬던 걸까?

    해답은 노근리 학살과, 미라이 학살, 하티타 학살에 대한 미군 보고서에 들어있다. 이 사건들이 모두 “적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우발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군복을 입은 나치와 군복을 입지 않은 나치를 구분할 수는 없었다. 요컨대 미국과 미군이 가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이 전쟁범죄의 기본 원인인 것이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을 때 이미 일본군 스스로 자기 나라 국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군에게는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만약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면 유럽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몇 달을 더 버텼다면 과연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 대신 함부르크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렸겠느냐는 의문은 과도한 의심이 아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나라였다는 증거가 남아있다. 전쟁기간동안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을 서부의 수용소에 몰아넣은 것이다. 미국 시민권이 있는 일본계 이민자들이 스파이 행위를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독일계 이민자들에게는 이런 의심이 제기되지 않았다. 이 일본인 수용소의 이야기는 알란 파커 감독이 1990년 <폭풍의 나날>이라는 영화로 제작했다.

    미군의 전쟁범죄는 결코 우발적인 상황이 아니다. 인종주의로 무장한 미군이 가는 곳 그 어디서든 참혹한 학살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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