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녀와 장한 어머니 그리고 미투 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 ‘장한 어머니상’을 생각한다.
        2018년 12월 14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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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유교와 불교의 퓨전 제문(祭文)”

    “사랑하는 남편에게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사고로 남편 먼저 보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밤이 되면 아이들을 재우고 살아생전 부르던 남편 생각이 나
    말없이 울었습니다.
    없는 살림에 혼자 자식들과 살 생각을 하니까
    참 기가 막히더군요.
    밥 달라는 자식 굶길 수 없어 살다보니
    보고 싶은 마음(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보! 나 당신 애들 다 결혼시켰습니다.
    고생했다고 한번만 말해 줘요.
    오늘따라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사진] 한글을 익힌 최종예 할머니가 사별한 남편에게 처음 쓴 편지. 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인터넷 사진)

    수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글로 76세의 최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고 처음 쓴 편지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과 대화하듯 또박 또박 쓴 이 편지에는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자식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억척같은 삶이 진하게 담겨 있다. 우리는 최 할머니 같은 이런 분을 장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기리고 존경한다.

    ‘장한 어머니’

    오늘 글은 이 ‘장한 어머니’에 대한 것이다.

    몇 년 전 흥미로운 기념 메달을 하나 수집하였다. 그리 오래된 유물은 아니다. 40년이 조금 더 지난 것이라 유물이라 부르기도 다소 민망하다. 메달은 1974년 제2회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경기국민학교에서 ‘장한 어머니’를 시상할 때 준 것으로 보인다. 먼저 앞면을 보자. 앞면 위에는 ‘장한 어머니’라고 적혀있고 가운데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2개의 화살 촉 모양의 문양을 나뭇잎들이 감싸고 있고, 그 아래에는 ‘경기국민학교’라는 학교 이름이 적혀있다. 이 학교는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학교이다. 화살촉 모양의 문양은 ‘경기’라는 학교 이름에 들어있는 자음 ‘ㄱ’ 두 개를 모티브로 만든 이 학교의 상징 마크로 추정된다.

    다음 뒷면을 보자. 위에는 ‘제2회 어버이날’이라는 글씨가 적혀있고, 제일 아래 부분에는 이 메달을 수여한 날인 ‘1974.5.8’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다. 이 날이 제2회 어버이날이었던 것이다. 5월 8일은 원래는 어머니날이었다. 1956년부터 제정되어 기념되다가 1973년부터는 아버지도 같이 포함시켜 ‘어버이날’로 개칭된 것이었으니 1974년 5월 8일은 제2회 어버이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메달의 뒷면 가운데에는 네모 칸이 약간 도드라지게 표시가 되어있고 거기에는 ‘배0희, 배0영, 배0배’ 순서로 3남매로 보이는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메달은 1974년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경기국민학교에서 이 학교에 재학 중인 세 남매를 혼자의 힘으로 어렵게 키우고 있는 한 어머니를 장한 어머니로 선정해서 시상식을 거행할 때 상장과 함께 수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경기국민학교에서 1974년 어버이날에 시상한 장한 어머니 기념 메달. 왼쪽은 메달의 앞면, 오른쪽은 메달의 뒷면이다. (박건호 수집자료)

    이 기념 메달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메달을 수상한 어머니의 이름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 이 상을 받은 주인공이었음도 불구하고 이 메달에는 3명의 자녀 (배0희, 배0영, 배0배) 이름만 새겨져 있다. 어머니 이름을 새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기술적 문제라기보다는 인식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3명의 자식들을 잘 키운 장하고 숭고한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기억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이미지 부여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000여사’라는 한 여성의 개별성은 결국 ‘장한 어머니’라는 추상성 속에서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늘 넉넉하게 아이들의 백그라운드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은 장한어머니의 신성성(神聖性)을 훼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메달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것조차 장한 어머니의 이미지에 부합된다.

    ‘장한 어머니’ 아닌가!

    섭섭하지만 어쩌겠는가!

    장한 어머니의 조건

    우리는 이 ‘장한 어머니’라는 말을 매우 익숙하게 들어왔고 사용하고 있다. 어버이날 즈음이면 뉴스에서는 미담 사례로 장한 어머니를 소개하기도 하고, 정부나 민간단체에서도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을 매년 거행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머리속에 정형화된 ‘장한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장한 어머니의 모습은 대체로 이러하다.

    ‘먼저 한 여성이 결혼한다. → 아이를 낳는다. 그래야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 남편이 사고나 병으로 비교적 일찍 죽는다. → 수절(守節)하면서 홀로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 출세시킨다.’

    여기 네 조건 중에서 하나라도 충족이 안 되면 ‘장한 어머니’로 평가되기가 쉽지 않다. 국가보훈처에서 몇 년 전 주관한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에서 보훈처장의 격려사를 잠시 들어 보자.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제31회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에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오늘 영예의 상을 받으신 열아홉 분의 장한 어머니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수상자 여러분은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을 조국에 바치고 혼자 힘으로 가정을 꾸리며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내신 이 시대의 참된 어머니이십니다….”

    여기에서 19명의 수상자들은 모두 일찍이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 자식들을 훌륭히 키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설정한 장한 어머니상에 정확히 부합된다.

    그런데 만약 홀로된 여성이 재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장한 어머니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수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혼은 죽은 남편에 대한 정절과 의리를 지키지 못한 행위이므로 장한 어머니로서의 절대적 결격사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설정한 장한 어머니의 모습은 조선시대 정절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고, ‘정절을 지킨 열녀’의 이미지가 장한 어머니의 이미지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시대가 그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조선시대 관습의 관성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남편을 잃은 여인이 재혼을 해서 자식을 훌륭히 키워냈다면 왜 장한 어머니일 수 없단 말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조선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비교를 위해 조선시대 이전인 고려시대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이승장과 그의 어머니를 만나보자. 우리가 아는 장한 어머니의 모습이 역사상 고정불변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이다.

    이승장(1137-1191)은 고려시대 무신집권기 즈음에 활동했던 문신이다. 그의 묘지명(墓誌銘)의 앞머리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남편 사별 후 재혼한 모친이 전 남편 자식인 이승장을 사학(私學)에 보내지 않고 일만 시키려하는 새 남편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먹고 살고자 전 남편과의 의리를 저버렸는데, 유복자를 공부시켜 뒤를 못 잇는다면 무슨 낯으로 옛 남편을 보겠소?” 결국 새 남편은 부인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승장은 솔성재(率性齋)에서 공부하게 되고 이후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

    [사진] 고려시대 이승장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석 앞부분에서 이승장의 어머니가 재혼하고서도 이승장을 잘 키웠다고 칭송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요약하자면 ‘이승장의 어머니가 결혼한 후 남편을 잃었는데, 재혼한 이후에 이승장을 잘 교육시켜 출세하게 했다’는 것이다. 묘지명의 이 부분이 이승장의 어머니를 칭송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승장의 어머니를 고려시대의 ‘장한 어머니’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여기 어디에도 이승장의 어머니가 수절하지 못하고 재혼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재혼 여부는 장한 어머니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의 ‘장한 어머니’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부분이다.

    조선과 달리 고려시대에는 재혼이 일반적이어서 그것이 흠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재혼해서 태어난 자식의 사회 활동에도 어떠한 차별이나 제약이 없었다.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기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려의 남녀는 쉽게 혼인하고 쉽게 헤어진다. 올바른 예법이 아니니 진실로 비웃을 만하다.”고 기록한 부분이 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적어도 송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고려 사람들의 혼인과 헤어짐이 비교적 자유롭게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였으니 무신 집권기 최고 권력자 최우가 과부였던 대씨와 재혼했다는 이야기나 원 간섭기 충선왕이 7남매를 둔 여인인 허씨와 재혼하여 왕비(순비 허씨)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남편을 사별한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일은 조선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조선과 달리 재혼 여성의 전 남편 소생인 의붓아들까지도 음서 혜택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도 여성의 재혼이 별다른 제약 없이 가능했던 사회적 환경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열녀, 조선 여성 잔혹사

    우리가 규정해 기리는 ‘장한 어머니’의 모습이 조선시대 관습의 연장선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위에서 확인했다. 재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낸 어머니를 장한 어머니로 규정한다면 이 장한 어머니는 조선시대의 ‘열녀’이미지의 변형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장한 어머니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재혼 여부’이기 때문이다. 남편 사후 아무리 자식을 잘 교육시키고 훌륭하게 키운들 그녀가 재혼을 했다면 그는 장한 어머니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열녀(烈女)의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다.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수절(守節)한 여자를 의미한다. ‘장한 어머니’와 ‘열녀’는 여성의 존재 기반을 ‘어머니’와 ‘아내’ 중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었는가만 다소 차이가 날 뿐, 재혼을 하지 않고 수절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공인된 단 한명의 남성인 남편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장한 어머니’를 정하고 기념하는 우리 사회의 미담 뒤에는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열녀’ 담론이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열녀는 오늘날의 ‘장한 어머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성을 가진다. 조선시대 열녀의 역사는 한마디로 여성 잔혹사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열녀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남편이 죽으면 재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성종 때 ‘재혼 금지’규정이 법제화되어 『경국대전』에 실리고 재혼녀의 아들과 손자에게 문과 응시를 금지하는 패널티를 줌으로써 양반집 여인들부터 자식의 출세 길을 막지 않기 위해 재혼을 하지 않고 수절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한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주자가례』의 예법이 점차 확산된 것도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재혼을 하지 않고 수절을 하는 여성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을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남편이 죽은 후 재혼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만으로도 ‘열녀’로 칭송되었다.

    [사진]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편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인쇄되었다. 이 책에 실린 열녀 이야기는 여성 잔혹사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으로는 부족해졌다. 수절하는 사람의 수가 점차 늘어나게 되면서 재혼하지 않는 것으로는 이제 열녀 명함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든, 남편의 병에 약으로 쓰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斷指) 정도는 해야 열녀 대우를 받는 단계로 진입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 그 정도 가지고도 열녀로 대우 받기 힘들게 되었다. 적어도 목숨 정도는 스스로 버려야 열녀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마치 누가 더 잔혹해질 수 있나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

    죽지 않고 열녀가 되는 방법은 죽음에 필적할 만한 극단적인 행위가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조선후기 영조 때의 열부(烈婦) 이씨 이야기다. 그녀는 남편 정익주가 1770년 불치병에 걸린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웃의 아낙으로부터 산 사람의 피와 살을 먹이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씨는 얼음을 쪼개어 몸을 깨끗이 씻고, 마당에 자리를 편 뒤 북두칠성을 우러러 기도한 뒤 즉시 방으로 들어가 칼로 허벅지를 찔렀다. 피가 콸콸 흘러나왔다. 병자의 이불을 들치고 입에 피를 부어 넣고, 이어 허벅지의 살은 사방 4촌쯤 베어내어 조각을 잘라 불에 구워 입에 밀어 넣었다. 밤이 되어서야 그만두었다. 새벽이 되자 목구멍에 골골하고 물을 찾는 소리가 났다. 급히 육즙을 물에 섞어 먹였다. 이렇게 며칠을 하여 다리의 살이 바닥이 나자 병이 완전히 나았다.”

     – 홍양호, [열부이씨정려기]에서 (강명관, 『열녀의 탄생』에서 재인용)

    다리의 살이 바닥이 날 때까지 다리에 칼질을 하다니! 조선후기 아름다운 열녀 이야기에는 이런 잔혹성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를 상상해보자.

    조선 후기 대대로 열녀를 배출한 집안에 시집을 간 여성을.

    그녀는 남편이 병으로 죽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냥 목숨을 부지하고 산다면 시댁과 세상으로부터 어떤 평판을 받았을 것인가? 그녀는 매일 매일 자살을 고민하고 결국 실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녀의 죽음은 아름다운 자살이기보다는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잔혹성을 바탕으로 한 열녀에 대해 조선후기 박지원, 정약용 등 당대 지식인들도 큰 우려를 나타내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 열녀가 소멸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아주 특수한 사례이긴 하지만, 개명한 시대 우리 대한민국의 1950년대까지 신체 훼손의 잔혹사가 이어진다. 동아일보 1954년 12월 24일자 기사에는 조선시대 열녀의 마지막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전남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신기부락에 거주하는 김(47세)은 2년 동안 신병으로 고생하는 남편을 완치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신통치 않아 사람 고기가 제일 좋다는 말을 듣고 허벅다리를 도려내어 복약케 하여 회복시킨 사실이 있다 한다. 면민들의 칭송이 자자하고 본도(本道)의 송 경찰국장은 감동하여 표창장을 수여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에서 재인용

    저 신문 기사의 김씨 여인을 끝으로 이제 조선 시대식의 열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습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개명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에 대한 잔혹성은 점차 탈각되었지만, 열녀는 대한민국 시대 ‘장한 어머니’라는 변형된 모습으로 그 흔적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신체 훼손이나 죽음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늘날의 ‘장한 어머니’는 본격적인 여성 잔혹사가 시작되기 전의 열녀, 즉 재혼하지 않고 수절한 여자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우리 시대의 ‘장한 어머니’가 사실은 조선시대 열녀의 변형이라는 이 가설을 부정하고, 또 우리시대의 ‘장한 어머니’가 조선시대 열녀의 자기장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재혼해서 자식을 성공시킨 어머니도 똑같이 칭송의 상을 받고, 또한 아내를 먼저 보낸 남편 역시 혼자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 장한 아버지로 함께 칭송되는 시대가 되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사진]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죽자 음식을 끊었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옹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열녀문은 훗날 정조가 내린 것이다. 조선 후기 열녀의 윤리는 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현재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1974년이 2018년에게 묻다

    2018년 올해는 미투(Me Too)운동의 바람이 거셌던 한 해다. 2018년 1월 30일, 서지현 검사가 검찰청 내부 성추문을 폭로함으로써 시작된 한국의 미투 운동은 이후 몇 개월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또한 2018년은 젠더 문제가 그 어떤 해보다도 큰 사회적 이슈가 된 해이기도 했다. 가부장제가 지속된 한국 사회가 그동안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던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다른 이슈들도 그렇겠지만 이 젠더 문제는 기존 관습과의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에 해결을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습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관습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 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편하다. 관습을 깨는 것은 불편하다. 그래서 젠더 문제는 우리에게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습이라는 것이 시대의 보편적 발전 방향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라면 고쳐 나가야 한다.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남녀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의 권익 향상, 그리고 한편으로는 젠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한 시대의 관습은 국가나 정부, 제도나 법률이 바뀌는 것보다 훨씬 천천히 변한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하면서도 그 행위가 수백 년 전의 관습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관습의 힘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그 잘잘못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자연스러움에 파묻혀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에 있다. 그저 관성인 것이다. 그래서 관습은 거대하면서도 구체적이다.

    가부장적 인식이 깊이 반영된 관습들의 예를 한 둘 들어보자. 그런 관습들의 문제가 인식되면 나름 해결책도 보일 수 있을 테니까…

    어떤 집에 영희(17세,여), 영숙(15세, 여), 영수(12세, 남)의 3남매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누가 이 집의 형제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1남 2녀’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남자 아이인 영수가 나이가 제일 어려도 순서는 제일 먼저 오게 하는 셈법 말이다. 이건 남녀 평등사회의 셈법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아닌가? 이런 셈법은 선남후녀(先男後女), 즉 항상 남자를 앞세우고 여자를 뒤로 돌리는 조선시대 유교적 관습이다.

    남녀 평등성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고려시대의 경우라면 위의 3남매는 ‘2녀 1남’이 된다. 실제 그렇게 불렀다. 나이가 제일 많은 형제의 성별을 앞세우는 셈법이 작동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3남매를 셀 때 굳이 ‘1남 2녀’라고 하지 않고 ‘2녀 1남’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시대의 아비투스(habitus)이다. 관습의 힘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조선이 망한 지 100년 이상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조선시대의 관습의 자기장 속에 사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방식으로 ‘장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만들고 상을 주고 장려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을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조선 시대 방식으로 남매의 수를 세면서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부장적 관습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과부’(寡婦)와 ‘미망인’(未亡人)이란 용어를 보자. 이 용어들은 그냥 관습적으로 써 온 표현이라 그 표현에 담긴 가부장적인 인식구조를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 용어들 속에는 무서울 정도로 낡은 인식이 깔려있다.

    먼저 과부(寡婦)란 용어.

    ‘과부’에 쓰인 ‘과(寡)’는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남편이 세상 떠나는 순간 남겨진 여자(아내)는 부족한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과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홀로 독립할 수 없이 모자라는 사람의 뜻이므로 이 용어는 남녀 평등을 지향하는 시대에는 맞지 않는 표현인 것이다.

    다음 미망인(未亡人)이다. 가부장제도 아래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미망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말로,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亡) 못한(未) 사람(人)’라는 뜻이다. “남편이 죽었는데 따라 죽지 못해 미안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 말은 여성들에게 남편에 대한 일방적인 정절과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단어 하나에 무시무시한 인간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래는 과부를 낮춰 부르던 이 말이 오늘날에는 대단한 높임말처럼 사용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처럼 ‘과부’와 ‘미망인’이 두 단어는 여성을 철저하게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을 관성에 따라 쓰고 있다. 이런 의미를 가진 이런 용어들을 앞으로도 써야 할 것인가? 그냥 관습상 자연스럽고 편하다는 이유로.

    [사진] 조선시대 열녀와 우리 시대의 장한 어머니는 외형만 다를 뿐 유교적 여성상을 이상화하고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동일하다. 사진은 전남 장흥군 해당리에서 열녀상을 시상하는 장면이다.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1950∼60년대로 추정된다. (박건호 수집 사진)

    다시 글의 앞머리에서 다루었던 장한 어머니 기념 메달로 돌아가 보자. ‘장한 어머니’를 선정해서 상을 주는 행위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므로 이 메달도 그렇게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이 내가 이 기념 메달을 수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별 볼일 없이 보이지만 이 작은 메달 하나에는 이전 시대 ‘열녀’로 혹은 ‘장한 어머니’로 살았던 수많은 여성들의 희생과 고난이 깊이 새겨져있다.

    미투 운동이 휩쓸었던 2018년이 저물어가는 12월 이때에 뜬금없이 장한 어머니를 기리는 기념 메달을 이야기 주제로 삼은 것은 이전 시대의 여성들의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는 더디더라도 남녀 양성(兩性)의 조화와 평등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자는 뜻이다. 거대한 그 무엇이 아니지만 작은 관습부터 바꿔 나가자는 것이다. 양성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착취하거나 지배할 수도 없으며, 또한 홀로 존재할 수도 없으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남혐 여혐 대립의 프레임 속에서는 양성 공존의 답이 나올 수 없다.

    아름답고도 장한 모습으로 칭송된 장한 어머니!

    그러나 그 뒷면에 드리운 관습의 폭력!

    장한 어머니 기념 메달은 그래서 숭고하면서도 가슴 아프다.

    장한 어머니를 기념했던 1974년의 작은 메달 하나는 2018년 미투 운동을 거치고 2019년을 맞는 우리들에게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인가!

    “왜 장한 아버지상은 없는가?”

    “왜 1남2녀는 되고 2녀1남은 안 되는 것인가?”

    “재혼은 여성에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왜 재혼을 해서 자식을 헌신적으로 교육시켜 훌륭하게 키워내면 ‘장한 어머니’로 칭송을 받을 수 없는 것인가?”

    “남편을 먼저 보낸 여자를 언제까지 과부(寡婦)나 미망인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내를 먼저 보낸 남자들도 똑같이 과부(寡夫)나 미망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인가?”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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