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꾸눈 장군 류보청,
상당과 한단에서 연승하다
[국공내전-4] 충칭회담 와중의 전투
    2018년 12월 13일 05: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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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마오쩌둥, 홍문으로 가다”

팔로군 장자커우(張家口)와 화이인(淮陰)을 공격하다.

충칭에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국공 양당은 정치,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팔로군(1)은 회담 전에 이미 장자커우(張家口)를 공격하여 점령한 일이 있었다. 8월 9일 팔로군 총사령 총사령 쭈더가 “투항하지 않는 일본군 및 괴뢰군을 공격하라.”고 한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장자커우는 차하르 성의 성도였다. 일본은 1939년에 이곳을 침략한 다음 이른바 ‘몽골연합 자치정부’를 세웠다. 이곳은 북쪽으로 장성에 닿아 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지형이 험준한 군사상 요지였다. 일본이 이곳에 대병력을 배치한 것은 화북 침략과 북쪽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옌안에 있던 진차지(晉察冀: 산시, 차하르, 허베이성을 총괄) 군구 사령원인 네룽전聶榮臻은 11일 즉시 장자커우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자커우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력은 모두 2만명이었다. 이들이 투항을 완강히 거부하자 팔로군은 소련·몽골 연합군과 협력하여 3일간 장자커우를 맹공하여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팔로군은 일본군과 자치정부 괴뢰군 2,000여명을 섬멸하고 소총 1만 자루와 말, 노새 1만필을 노획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는 공산당이 점령지 확보에서 국민당과 경쟁하는데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공산군은 동북 지역 진군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한편 공산당 신사군은 8월 15일부터 화이인과 화이안 등 두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화이인은 초한전쟁에서 한나라 명장인 한신의 고향이다. 장쑤성 남부에 위치하여 있으며 지금은 화이안(淮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부주석을 맡고 있던 저우언라이가 바로 회이안 출생이었다. 창장강(長江)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조운과 소금 수송의 요충지였다.

신사군은 팔로군과 함께 2차 국공합작에 따라 편성된 부대였다. 이 부대는 창장강(長江) 남쪽에서 일본군에 맞서 유격전을 벌였다. 신사군의 세력이 커지자 국민정부는 이들에게 황허강(黃河)강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으나 처음에 듣지 않았다. 그러자 1941년 초 국민 정부군은 이른바 ‘환남사변’을 일으켜 북으로 이동 중인 신사군 9,000여명을 포위 섬멸하고 사령인 예팅(葉庭)을 포로로 잡았다. 부사령인 샹잉(項英)은 전사했다. 공산당은 곧바로 천이(陳毅)를 사령으로 류샤오치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신사군을 재건하였다. 이 부대의 주력은 황커청(黃克誠)이 지휘하는 3사단과 리센넨(李先念)이 지휘하는 5사단이었다.

이 전투 역시 쭈더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왕징웨이가 세운 난징 자치정부(일본 괴뢰정부) 군대가 항복 명령을 거부하자 지체 없이 공격에 나선 것이다. 전투는 황커청이 지휘하는 3사단이 8월 15일, 화이인을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신사군은 4일간 격렬한 전투를 치른 끝에 시 외곽의 일본 괴뢰정부 군대를 모두 소탕했다. 화이인에는 전부터 튼튼한 성벽이 있었다. 괴뢰군은 이 성벽에 의지하여 농성하며 저항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사군 부대들은 성벽 아래까지 교통호를 판 다음 기관총좌를 설치하는 등 성벽 위를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다시 한번 투항을 통첩했으나 거부하자 9월 6일 오후부터 총공격에 나섰다. 성벽이 폭파되고 신사군이 성안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가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1시간 반의 전투 끝에 수비군인 괴뢰군 28사단장을 사살하는 등 8,600여명을 섬멸(2)하였다. 신사군은 창끝을 화이안으로 돌려 13일부터 맹공격을 펼쳤다. 황커청은 성 아래에서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22일 화이안성을 점령했다. 화이인과 화이안 전투에서 신사군은 괴뢰군 1만 4천명을 섬멸했으며 장쑤성 북부와 중부, 화이난(淮南: 화이수이淮水 북부지역을 가리킨다.)그리고 화이베이(淮北) 해방구를 하나로 연결하여 근거지를 확대하였다.

장자커우 전투와 화이인 전투는 모두 국공 양당 사이에 충칭 회담을 전후하여 벌어진 싸움이었다. 쭈더가 마오쩌둥이 충칭에 가 있는 동안 한바탕 싸우겠다고 한 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두 전투는 뒤이어 벌어질 상당(上黨) 전투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옌시산의 초상

산시의 효웅, 옌시산

엔시산은 청나라 말 광서제가 통치하던 1883년 산시성(山西省) 우타이현(五枱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사를 겸하던 소지주 출신이었다. 옌시산은 소년시절 자기 집에서 운영하던 환전소에서 장사를 배웠다. 조숙한 그는 열일곱이 되던 해 금융투기를 했다가 크게 실패하여 큰 빚을 졌다. 그때 빚쟁이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산시성 성도인 타이위안(太原)으로 도망쳤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가업을 망치고 패가망신을 하게 한 셈이다. 타이위안에서 가게 점원을 하던 그는 열아홉이 되던 해 육군사관학교 격인 산시무비학당(山西武備學堂)에 입학하였다. 다음 해인 1903년, 그는 관비로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옌시산은 쑨원이 설립한 동맹회에 가입하여 비로소 중국 근현대 정치의 소용돌이에 뛰어 들었다. 26세 때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산시성 육군 소학당 교관으로 군인이 된 옌시산은 순조롭게 승진하여 상교(대령과 중령 사이의 계급)로 연대장 신분이 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옌시산과 산시성의 동맹회원들도 호응하려 하였으나 총알이 없어 실패하였다. 봉기를 두려워한 관원들이 총알을 모두 치워버려 빈 총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11년 10월 28일 그가 속한 산시성 신군에게 신해혁명을 진압하라는 명령과 함께 총알이 지급되었다. 엔시산은 그날로 동맹회원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산시성 순무를 처단한 뒤 옌시산은 산시성 부도독 겸 부총사령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로 옌시산은 혁명을 진압하려는 청군과 산시성과 내몽골을 전전하며 계속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신해혁명에서 산시성의 대표적 인물이 된 것이다.

그는 잠시 위안스카이의 황제 취임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결국 국민정부 산시성 성장이 되었으며 장제스가 국민당 군대의 주도권을 잡은 1927년에는 북방 총사령에 임명되었다. 1930년에는 펑위샹, 리쫑런 등과 함께 장제스 타도의 대열에 서서 이른바 중원대전(3)을 치렀으나 패배하여 따롄(大連)으로 도망치기도 하였다. 1932년 다시 장제스에게 중용되어 타이위안 수정공서(綏靖公署(4)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산시에 확고한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그를 무시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계속 쓰는 것이 장제스의 도량과 정치력이었다.

근거지를 둘러싼 마찰

그후 옌시산은 국공합작이 진행되자 팔로군의 린비아오 등과 함께 핑싱관 (平型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000여명을 섬멸하며 승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타이위안이 일본에 함락 당하자 린펀(臨汾)으로 이동했다. 일본과 싸우는 기간 동안 그는 팔로군과 긴밀히 협력하여 산시성은 국공합작의 모범지대가 되었다. 1938년에 일본군이 대거 남침하자 옌시산은 부득이 산시(陝西)성 이촨현(宜川懸) 추린진(秋林鎭)의 궁벽한 곳으로 피신하였다. 옌시산의 부대와 팔로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이 철로변과 도시로 후퇴하자 광대한 산시성 농촌과 산악지역은 공산당의 해방구가 되었다. 중공은 이 지역에 진쑤이(晋綏: 산시와 쑤이위안), 진차지(晋察冀: 산시, 차하르, 허베이), 진지루위(晋冀鲁豫: 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해방구를 잇따라 설치하며 영역을 확대해갔다. 옌시산의 영역은 황허 양안의 좁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러자 옌시산은 오히려 일본과 암묵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팔로군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옌시산이 일본군에 투항할 것을 우려하여 지원을 확대하고 팔로군도 국공합작의 지속을 위해 경고만 하고 실제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1945년 8월 옌시산은 일본군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휘하 19군 군단장인 스쩌보(史澤波)에게 병력 1만 7천명을 인솔하여 상당지역(지금의 산시성 동남부 지역)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창즈(長治), 툰류(屯留), 창쯔(長子), 샹위안(襄垣) 등 현을 접수하게 한 것이다. 그로서는 근거지를 되찾으려는 당연한 조치였다. 옌시산은 산시성에서 자신의 경력과 실력으로 세력을 키워온 군벌이었다. 장제스의 직계가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산시성에서 기반을 닦아왔다. 그에게는 ‘산시왕’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장제스가 일본군의 투항을 받으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군사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류보청의 초상.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

애꾸눈 장군, 류보청

옌시산과 맞서게 된 인물은 류보청이었다. 옌시산과 상당에서 싸울 때 그는 중국 팔로군 진지루위 야전군 사령이었다. 즉 옌시산이 일본군에게 산시성에서 밀려난 뒤 그곳에 근거지를 건설했으니 둘은 한바탕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류보청은 1892년 쓰촨성 카이현(開縣: 지금의 충칭시 카이저우(開州)이다.)에서 태어났다. 쓰촨성에서 이름난 혁명가들이 많이 났는데 그와 계속 짝을 이뤄 싸운 덩샤오핑(鄧小平)도 쓰촨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상징인 쭈더를 비롯하여 천이, 뤄루이칭(羅瑞卿) 등 중국 10대 원수 중 네 명이 쓰촨성 출신이었다. 어쨌든 국공내전 당시 류보청은 야전군 사령으로, 덩샤오핑은 정치위원으로 계속 붙어 다녀 휘하 부대를 아예 “류덩대군”이라고 불렀다.

홍군이나 그 후신인 인민해방군은 “당이 군대를 관리한다”는 철칙에 따라 정치위원을 두었다. 군대는 사령원이 지휘하지만 정치위원이 제동을 걸면 지휘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대신 홍군이나 해방군은 군대에서 직위와 직무는 있으나 계급이 없었다. 그래서 총사령이나 일반 전사들이나 서로 “동지”로 호칭했다. 먹는 것, 입는 것도 일반 전사들이나 최고 지휘관이나 기본적으로 같았으며 상관에 의한 구타는 물론 욕설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는 이름 그대로 민주군대를 지향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왼쪽부터)

류보청의 아버지 류원빙劉文柄은 문인이었지만 농사일에도 힘써 고향 일대에서 “발에 흙이 마를 새 없는 문사”로 알려졌다. 류보청은 5살 때부터 글방에 다녔는데 그 선생도 유별난 사람이었다. 태평천국 혁명 때 용맹을 떨친 익왕(翼王) 스타카이(石達開)의 부하였던 것이다. 스타카이가 따두허(大渡河)에서 청군에 패배하여 죽은 뒤 각지를 떠돌다가 류보청의 고향마을로 흘러 들어온 것이었다. 이런 사람에게서 배웠으니 그가 혁명사상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정 때 류보청이 따두허 도하를 직접 지휘했으니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학교에 다니던 그는 열아홉 살의 나이로 군대에 들어갔다. 친구들이 모두 말리자 “대장부라면 마땅히 칼을 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야지, 자신의 안위나 부귀를 바란다는 말인가?” 하고 대답했다. 그는 단숨에 변발을 자르고 손중산(孫中山: 쑨원(孫文)의 가명이다.) 이 영도하는 민주혁명에 뛰어들었다.

그는 충칭의 장교학교를 졸업한 뒤 1916년 풍도현성(豊都縣城)(5)을 공격하다가 오른쪽 눈에 포탄 파편을 맞아 끝내 실명했다. 그는 수술 중에 뇌신경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취를 하지 않고 버텨 내었다. 집도한 독일의사가 감동한 나머지 그에게 ‘군신(軍神)’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는 인내력도 강했지만 지용을 겸비한 지장으로 유명했다. 그는 192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다음해 4월, 우한의 국민정부에 의해 15군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공산당의 첫 번째 군단장이었지만 불과 3개월 뒤 몰래 난창으로 가서 저우언라이, 허룽(賀龍) , 예팅, 쭈더 등과 함께 난창 봉기를 지휘했다. 그는 곧 중공당 전적위원회 참모장을 맡았는데 그 뒤로도 참모장 역할을 많이 하며 작전계획 등을 입안했다.

그는 소련 모스크바 고급 보병학교에 유학한 뒤 돌아와 군사이론에 더욱 정통하게 되었다. 중화인민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수도인 장시성 루이진(瑞金)에서도 홍군 참모장을 역임하며 네 차례에 걸친 장제스의 포위토벌에 따른 전투에서 승리에 기여했다. 하지만 5차 포위토벌을 맞아 싸우던 중 왕밍과 함께 군사지도를 하던 군사고문 리더(李德)의 교조주의와 전횡에 맞서 다투다 직무에서 해임 당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홍군 총참모장과 중앙종대 부사령으로 직무에 복귀했다. 리더도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그를 필요로 한 것이다.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지도부 비판을 견결히 뒷받침하여 마오가 군사 지도권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도부 핵심 요인인 그와 저우언라이의 비판이 큰 설득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치렀던 중요한 전투에 빠짐없이 참가했으며 적정 분석에 특히 뛰어났다. 팔로군 내에서 그는 “출기불의, 신기묘산”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지모가 뛰어났다. 홍군과 팔로군 총사령을 줄곧 지낸 쭈더가 그를 가리며 “장수에 필요한 인의, 신의 ,지략, 용기, 엄정함을 모두 갖춘 드문 인재”라고 평한 일이 있었다.

진과 조가 싸웠던 옛 전장, 상당(上黨)

상당은 산시성 동남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산시성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영역이었으며 진이 한위조(韓魏趙) 3국으로 분열된 뒤에는 진(秦)에 속하였다. 타이항산, 타이웨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 지역으로 지세가 험준하고 진나라의 입구에 자리 잡아 예로부터 전략적 요지로 꼽혀왔다. 과거에 이곳을 놓고 조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유명한 전투가 있었다. 조나라 명장 염파(廉颇)가 이곳에서 둔병하며 진나라군과 3년을 대치했다. 염파를 이길 자신이 없던 진나라 재상 범저范雎가 이간책을 써서 염파를 소환하게 하자 조나라는 조괄을 장수로 임명했다. 진나라 장수 백기가 계략을 써서 정면대치와 함께 별동대로 포위하니 굶주림에 지친 조나라 군이 모두 항복했다. 그때 진군에도 포로를 먹일 식량이 부족하여 백기가 항복한 조나라 병사들을 모조리 생매장하니 이로부터 조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국에서 산시성의 위치

이제 이곳에서 산시왕이라 자부하던 옌시산과 팔로군에서 손꼽히는 지장 류보청이 한바탕 싸우게 된 것이다. 이 전투는 근거지를 선점하려는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기세가 충돌한 첫 번째 싸움이며 그 결과는 충칭에 마주앉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었다.

8월 중순 국민정부군 제2전구 사령관인 옌시산은 휘하 8집단군 부총사령 겸 19집단군 군단장 스쩌보(史澤波)에게 4개 사단(6)을 이끌고 창즈(長治)로 출동하게 하였다. 괴뢰군 1만 7천명과 함께 인근 도시인 샹위안(襄垣)、창즈(長子)、툰류(屯留)、루청(潞城) 등에 나누어 배치했다. 장차 산시성 동남부를 점령하여 국민당 다른 부대들과 호응, 스쟈좡(石家庄), 베이핑(北平: 지금의 베이징) 지역으로 밀고 올라가려는 것이었다.(괴뢰군 : 일본은 점령지에 만주국. 난징자치정부, 몽골자치정부 등 일본의 위성국을 세웠는데 거기에 배속된 군대를 말한다)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류보청, 덩샤오핑에게 즉시 반격하라고 지시했다. 먼저 창즈와 주변 지역에 있는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주력을 이동시켜 국민당군의 북진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동원할 병력은 정규군 3만 1천명과 민병 5만명을 합쳐 모두 8만 천명이었다. 무장은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며 병력은 팔로군이 훨씬 많았다.

류보청의 계산

류보청은 먼저 상위안을 공격 점령하게 하였다. 그후 ‘상당전역(7)의 전술문제와 관련한 지시’를 기초하여 각 부대에 하달했다. 류보청은 먼저 산시성 엔시산군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였다. 옌시산군의 강점으로는 “방어를 위해 토치카를 잘 구축한다. 강력한 예비대를 두어 반격한다. 야전 중에는 세 마리 호랑이를 고립시키는 전술을 즐겨 채택한다. 즉 정면은 감시하고 우측을 포위하며 좌측을 빼앗는 전술이다.” 하지만 그 약점도 많아서 “육박전을 싫어하고, 수성을 중시하고 야전에 익숙하지 못하다.” 류보청은 약점에 주목했다. 그는 작전회의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야전으로 끌어내야 한다. 주력이 포진한 창즈는 미뤄두고 주변 성들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 국민당군 주력이 구원하러 오면 이동 중에 포위 섬멸해야 한다. 그 뒤에 고립된 창즈를 빼앗으면 된다.” 운동전은 홍군 이래 공산군의 전통적 장기였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9월 10일 툰류와 상춘(上村) 두 성의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자신들은 지휘소를 전선에서 가까운 루청 서쪽의 중춘(中村)으로 이동했으며 세 시간 만에 다시 구시엔춘(故縣村)으로 이동했다. 전투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지휘소를 설치하는 것이 팔로군 고급 지휘관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필요하면 직접 전장에 나가 쌍안경으로 적정이나 전투현장을 지켜보며 지휘관과 전사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고급 지휘관일수록 위험한 일을 꺼려 대도시에 차려진 지휘소에서 전화로 지휘하는 국민당군과는 중요한 차이였다. 병력을 집중하여 적보다 우세를 유지하는 것도 팔로군 전술의 특징이었다. 팔로군은 총병력은 적어도 민활한 기동을 통해 단위 전투에서는 언제나 적보다 우세한 병력을 만들어 싸우곤 하였다. 패하는 싸움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군사철학이며 전술도 그에 따라 입안했다.

서전을 승리로 이끌다

9월 12일 류보청은 먼저 툰류와 상춘을 공격하게 하였다. 병력의 반은 툰류에서 창즈로 향하는 도로 양쪽에 감춰두었다. 창즈에서 구원군이 오면 포위 섬멸할 계획이었다. 과연 창즈의 국민당군 6천명이 두 번이나 툰류를 구원하러 왔다. 하지만 국민정부군은 “성을 포위하고 구원군을 공격하는 팔로군의 전술”을 두려워하여 아주 신중하게 접근했다. 결국 팔로군 매복부대가 노출되자 창즈의 국민정부군은 싸우는 듯하더니 바로 돌아갔다.

대병력이 공격한 툰류는 이틀 만에 함락되었다. 구원병이 오지 않으니 나머지 성들의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맹장 천겅(陳羹)이 인솔하는 타이웨 종대가 창쯔(長子)현성을 공격했다. 창쯔성은 옌시산의 부대 1,200여명이 수비하고 있었다. 일본 점령 당시 괴뢰군이 성을 대대적으로 공사하여 매우 튼튼했다. 성의 높이는 17미터이며 성벽 아래 해자의 넓이는 7미터에 달했다. 성문과 성벽의 네 귀퉁이에는 돌로 쌓은 포루가 있었고 여러 토치카가 설치되어 있었다. 본래 옌시산군은 토치카 등 방어공사에 매우 뛰어났다. 지뢰, 철조망, 녹각(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설치한 것) 등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었다. 성의 네 관문에는 각각 고묘(8)와 절, 누각 등이 자리 잡아 기관총좌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방어에 능한 옌시산군과 싸움은 격전의 연속이었다. 서관은 단숨에 돌파했으나 고묘가 문제였다. 북쪽 고묘는 높이가 10미터나 되었다. 공격부대가 번번히 좌절당하자 팔로군은 담벼락을 폭파한 뒤 돌격하여 국민당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백병전에 서투른 국민당군이 상당수가 섬멸당하자 성안으로 달아났다. 남쪽은 누각을 점령한 뒤 고묘의 국민당군에게 정치선전을 하며 설득했다.

성벽이 너무 튼튼하고 화력이 강하자 팔로군은 정면 공격을 일시 멈췄다. 갱도를 굴착하기로 하여 공병대가 북문을 향해 4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땅굴을 뚫었다. 팔로군은 기폭 준비를 마친 뒤 폭발과 동시에 대포로 성벽을 파괴하고 무너진 곳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다른 방향의 부대들도 성벽을 기어올라 잇따라 성안으로 돌격했다. 성벽이 돌파 당하자 병력이 부족한 국민당군은 순식간에 섬멸당하고 진지를 버리고 달아난 국민당군도 추격부대가 대부분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군 500여명이 사상 당했으며 1,5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성 방어 국민당군 최고지휘관인 돌격종대 사령원인 바이잉찬(白映蟾) 및 현장 천쓰팡(陳士芳)도 포로가 되었다. 후관과 루청의 점령도 시간문제였다. 9월 17일 후관이, 19일에는 루청이 점령당했다. 이제 창즈는 고립된 섬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팔로군은 국민당군 7,000여명을 섬멸했으며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류보청은 창즈에 있는 국민당군 지휘관 스쩌보가 농성하며 구원군을 기다린다는 것을 확인했다.

9월 20일 팔로군은 동,남,서쪽 등 삼면에서 창즈성을 포위 공격했다. 북관과 동북쪽 모서리는 일부러 남겨 두었다. 포위하여 돌파하는 것이 희생이 크고 시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여 퇴로를 만들어 둔 것이다. 옌시산 부대가 포위망을 벗어나면 야전에서 차단하여 섬멸할 계획이었다. 창즈성은 상당 지역의 성 가운데 가장 튼튼하고 높으며 방어공사가 잘 되어 있었다. 국민당군 병력도 1만 1천명이 되어 수비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4일간 격전을 벌였지만 팔로군은 성 바깥쪽 관문 두 군데를 장악했을 뿐 성의 수비는 아직 튼튼했다.

그때 류보청은 옌시산이 창즈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병 7,000여명을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류보청은 즉시 전투 대상을 국민당군 구원군으로 바꿨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국민당군 구원 부대가 매복을 눈치 채고 달아나면 안되었다. 류보청은 매복부대가 떠나던 날 공성부대가 운제를 들고 공성 연습을 하게 하였다. 저녁에는 불을 켜고 나팔을 불며 국민당군을 교란시켰다. 그런 뒤 28일 어둠을 틈타 봄비처럼 조용히 창즈성에서 출동하였다.

9월 29일 팔로군 매복부대는 툰류 서북쪽 왕자취(王家渠)에서 국민당 구원군과 조우했다. 팔로군은 정면에서 국민당군이 계속 전진하도록 유인하고 주력은 좌우익 양쪽으로 우회했다. 후미에서도 이미 두 개 부대가 국민당군 구원군을 따라붙고 있었다. 먼저 후미의 부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국민당군 구원부대는 모두 2만여명이었다. 매복하고 있던 팔로군도 비슷한 병력이어서 류보청은 창즈의 공격군 가운데 나머지 주력을 구원군 공격으로 이동시키고 지방부대가 계속 포위상태를 유지하게 하였다. 류보청은 아예 대낮에 지원병력을 이동시켜 공격받고 있는 구원병을 동요시키려 하였다. 지원병이 도착하기 전 매복하고 있던 팔로군이 총공격을 시작했다. 화력은 국민당군이 훨씬 우세하기 때문에 주로 야간에 공격하였다.

그사이 창즈성에서 농성하던 국민당군이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남은 팔로군 부대가 격퇴하였다. 구원군 공격에 지원병력이 합세하자 단숨에 병력이 우세해졌다. 국민당군은 한 곳에 묶여서 물과 식량이 떨어져 군마까지 잡아먹는 형편이었다. 류보청은 이곳에서도 “삼면을 포위하고 한쪽은 열어두라”고 명령했다. 결국 10월 5일 팔로군은 전력을 집중하여 총공격을 가했다. 구원을 온 국민당군은 2,000여명이 흩어져 도주한 것을 빼고 모두 섬멸되었다. 구원군 총사령 펑위빈도 사살 당했으며 나머지 고급 지휘관들도 모두 포로가 되었다.

펑위빈의 구원군이 전멸당할 무렵 옌시산은 창즈성에 고립되어 있는 스쩌보에게 전문 한통을 보냈다. 전문에서 그는 “상당은 반드시 빼앗아야 하며 우선 창즈를 사수해야 한다. 원군이 도착할 테니 협격하여 반란군을 모두 섬멸하라.”고 격려했다. 스쩌보도 결사대를 조직하여 여러 번 반격했으나 포위하고 있던 팔로군에게 모두 격퇴 당했다. 마침내 펑위빈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쩌보는 포위망을 깨뜨리고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1945년 10월 7일 밤, 창즈성에 다시 큰 비가 내렸다. 스쩌보는 비를 틈타 부대를 인솔하여 포위망 돌파를 결행했다. 하지만 이미 이를 예상하고 있던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포위부대에게 명령하여 일부는 곧바로 성에 진입하고 주력은 달아난 적을 추격하게 하였다. 팔로군은 이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하여 마침내 친수이(沁水)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가로막고 섬멸전을 시작했다. 12일 새벽 포위망을 벗어난 국민당군이 모두 섬멸당하고 스쩌보와 국민당군 고급 지휘관들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국민당군과 팔로군의 서전은 팔로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산시군 11개 사단 3만 5천여명이 섬멸 당했으며 국민당군 고급장교 27명이 포로로 잡혔다. 산시왕이라 불리던 옌시산은 이 전투에서 주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다. 옌시산은 산시군만으로 지역을 수비할 수 없게 되어 그렇게도 꺼리던 황푸(黃埔)계 중앙군의 진주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신해혁명 뒤 옌사신 혼자 독점해온 산시성의 할거 국면이 끝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충칭에서 회담하던 마오쩌둥의 기세가 올라갔으며 쌍십협정 조인에서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또 10월 30일 덩샤오핑이 오래 공을 들여 전향 작업을 하던 국민당 신 8군 군단장 가오수신(高樹勳)이 기의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10월 30일 국민당 신 8군과 허베이(河北) 민명 1만명을 인솔하여 한단 남쪽 마터우진(馬頭鎭)에서 기의했다. 그는 기의의 구실로 “내전을 벗어나야 하며 평화와 민주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 10일 가오수신의 부대는 이름을 ‘민주건국군’이라고 바꾸고 총사령에 취임했다. 중공은 ‘가오수쉰 운동’을 제창하며 국민당군에 대한 선전공세를 강화했다.

마오쩌둥은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매우 흡족해 하였다. 그는 “타이항산(太行山), 타이웨산(太岳山), 중티아오산(中條山) 중간에 큰 대야가 있으니 그곳이 상당지역이다. 그 대야에 물고기가 있어 옌시산이 13개 사단을 보내 빼앗으려 하였다. 우리는 그 땅을 놓고 싸워 잘 싸웠으며 이겼다. 남이 싸우러 오면 우리는 싸운다. 반동파에게 큰 타격을 주지 않으면 평화는 오지 않는다.”여 이 싸움을 찬양하였다.

<후기 : 자료를 잘못 선택하여 원 재료가 무려 삼십여 쪽에 이르는 장문이었습니다. 진둥한둥 번역하고 막 줄이기에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어 전투장면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상세한 서술이 한 번쯤 필요하다고 변명하고 다음부터는 과감히 줄이기로 하겠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각주>

1. 국공합작 당시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개칭되었다. 나중에 부대 개편에 따라 18집단군으로 편성되었으나 통칭 팔로군으로 불렀다. 1946년 내전 폭발 뒤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2. 섬멸이라고 하여 모두 사살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사살, 부상, 포로, 귀순, 도망 등으로 인해 적의 병력이 감소한 것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3. ‘중원대전’이란 1930년 5월 10일부터 장제스와 옌시산, 펑위샹, 리쫑런 등이 허난성, 산둥성, 안후성 등에서 벌인 군벌전쟁이다. 중원지역에서 벌어져서 중원대전이라고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장펑옌 전쟁이라고도 한다.

4. 수정공서(绥靖公署) 국민정부가 전시에 설치한 군사기구로 일종의 계엄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5. 펑두현성(豊都縣城)은 나중에 장강삼협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6. 이 당시 국민당 편제는 1개 사단이 2,000-3,000여명으로 지금 연대 규모와 비슷했다. 1만명 정도로 규모를 갖춘 사단은 따로 정편(整編)사단이라고 불렀다.

7. 전역(戰役)이란 전쟁의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군사용어로는 특정지역에서 특정 기간 동안 벌어진 여러 전투를 묶어서 전역이라고 표현한다.

8. 중국에서 큰 인물을 모시는 일종의 사당이다. 높은 계단 위에 담벼락에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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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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