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기영합 정치는 좋은 것이다
        2006년 05월 29일 03: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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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자치가 부활하고 10여 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보수언론이 욕하는 님비 현상은 자기 이익과 주장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시민이 그만큼 늘었다는 것이고, ‘무소신 행정’이니 ‘인기 영합 정치’니 하는 것도 결국은 위정자들이 피치자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물론 민주주의에 지불한 비용은 엄청나다. 지자체의 온천 개발이 한창 유행할 때는 일부 지역의 단위 면적당 온천공 숫자가 일본에 버금갔고, 강에 다리가 놓이고 산허리를 휘감는 도로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막상 그 다리와 도로 위를 왕래하는 차량은 한 두 대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 복지에 쓸 생돈이 개발업자 주머니로

       
     
    ▲새만금사업의 지속적인 추진을 요구하는 전북 민간사회단체 총연합회 회원들의 집회장면. (사진=연합뉴스)
     

    나는 생태주의자가 아니지만, 지역개발을 빌미로 한 이런 난개발이 좋지 않음은 잘 안다. 주민복지에 쓰일 생돈이 개발업자들 주머니로 들어가고, 지역 주민의 대부분인 농민과 세입자들은 생활터전을 빼앗기고 더 외진 곳으로 쫓겨나야 했다.

    2004년부터 작년 말까지 경기도 광주시의 시장, 시의원, 지역구 국회의원, 지방공기업 책임자, 민간 개발업자가 줄줄이 구속되었다. 범죄조직을 방불케 하는 지역 난개발 카르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지역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주들, 이렇다 할 지방기업이 없는 가운데 유일한 향토기업이라 할 건설회사는 난개발을 통한 이윤 추구를 기획하고, 자치단체의 공직자들은 토지 소유자의 이익을 위해 지방에 이전된 인허가권을 최대한 악용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지방자치의 모범 시나리오다.

    김대중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 정권은 ‘균형발전’이라는 난개발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서울만 잘 살 게 아니라 전국이 고루 잘 살자는 것이야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균형발전의 방법이 하필이면 곳곳에 도로와 다리를 뚫고, 지방공단을 건설하고, 경제자유구역과 기업도시를 만드는 것인가?

    전국 곳곳에 들어선 지방공단의 분양률은 60%이고, 분양된 공장의 가동률 역시 60%다. 즉, 100원을 풀면 36원 만이 지역에 돈다는 이야기인데, 이처럼 비경제적인 ‘균형발전’ 방법에 집착하는 것은 한국 보수정치의 돈줄이 대토지 소유주와 건설업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헌법에 정해진 노동권 환경권 교육권 의료권조차 부정하는 경제자유구역과 기업도시의 중점 산업은 금융 IT BT 따위인데, 지방이 그럴만한 자본 기술 노동력을 가지지 못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이에 비해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공장 도로 다리를 짓고 무분별하게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복지 재정을 지방에 분배하고, 그를 통해 균등한 지역 소득과 고용을 보장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시민단체는 난개발 범죄의 종범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정부들의 ‘균형발전론’은 과포화에 이른 수도권의 난개발을 전국화하고, 전국적 토지수탈을 통해 새 이윤을 지속적으로 만들자는 전략이다.

    이런 난개발에 시민사회의 정당성을 제공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지식관료들이 주도한 ‘지역균형발전과 민주적 지방자치를 위한 지방분권 국민운동’이라는 단체인데, 그 단체에는 경실련과 참여자치시민연대의 지역조직들이 속해 있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시민단체’라는 이름이 난개발의 종범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일부 시민단체는 실천 역시 그러하였다.

    부산에서는 목숨을 건 KTX 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 그 때에 경실련, 환경련, 참여연대 등으로 구성된 울산시민단체협의회 회장과 탈당한 민주노동당 간부들은 KTX 울산역 유치 운동을 펼쳤고, 있는 공항도 문을 닫는 판에 ‘세상을 바꾸는 시민행동 21’과 같은 풀뿌리 NGO들은 김제 신공항 건설을 위해 투쟁하였다.

    이런 현상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지역 이권이 걸린 난개발에 대한 논평의 강도와 빈도수를 조사하면, 인접 지역의 시민단체에서는 강력한 반대 입장을 빈번히 발표하는 데 비해, 해당 지역의 같은 시민단체는 묵묵부답이거나 심지어는 난개발 선동의 선봉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은 이른바 ‘풀뿌리 시민단체’들이 지방자치를 ‘자치’나 ‘시민’의 관점보다는 ‘분권’이나 ‘지역’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주민 자치인가 지방 분권인가

    지방자치제도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개의 입장이 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같은 단체들은 대체로 주민자치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 같고, 그 단체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훨씬 많은 지역 시민단체들은 지방분권의 측면에 주목하는 것 같다.

    80년대의 부당한 국가권력, 고도로 집중화된 군사정권에 대한 반발과 그 여운이 후자의 입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민주주의 교과서를 찾아봐도 지방분권이 중앙집권보다 철학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정의는 찾아볼 수 없다.

    중앙집중화된 부르주아민주주의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봉건귀족과의 타협이 이루어졌고, 양원제와 지방자치제가 그 산물이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방제 국가에서조차 시민권의 최저기준(National minimum)에 관해서만은 지방의 재량권을 축소하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현재 그리고 미래적 의미에서의 지방자치는 중앙권력에 대항하는 지방분권이 아니라, 통치 일반에 대한 주민 참여와 자치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이고, 지방은 이익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자치의 범주가 아닐까?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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