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력근로제 강요와
    탄력적이지 않은 현실
    [소설로 읽은 한국사회] 「운수 좋은 날」- 행운의 비(非)탄력성
        2018년 12월 07일 03: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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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률 1위, 산재사고 사망률 1위, 각종 죽음을 알리는 통계, 수십 수백의 영정사진과 분향소들 죽음은 도처에 있고 예정된 죽음 또한 즐비하다. 광장에 매일 등장하는 ‘그만 죽여라’ 더 이상 낯선 슬로건이 아니다.

    ‘살아있는 시체’ ‘일상화된 죽음’ 모순적 말들이 엉키는 곳에 노동자의 신체가 있다. 절단되거나 훼손된 신체, 분투신의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인공은 줄곧 노동자였다. 박노해의 시 「손무덤」에서 정형의 손목을 ‘싹둑싸둑 짖짤라 ’ 버린 ‘프레스기’는 2017년 십대 청년의 삶도 앗아갔다. 알파고, 4차 산업, 첨단 논의가 매일 업데이트되는 와중에 노동자 산재사고와 죽음은 80년대 신문에 숫자만 바꿔 써도 무방해 보인다.

    「손무덤」의 표현대로 “아직도 잘려나가는 손들”은 2018년에도 여전하다. 이제는 거기에 자발적이란 말을 덧붙여야 할 성 싶다. 어느 시대나 노동자의 신체에는 묵시록적 예언이 새겨져 있다. 죽음을 향해 바삐 걸음을 재우치는 그 내력에 관해, 죽어야 사는 일에 관해.

    날도 궂다. 아픈 아내가 붙잡는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그런 아내를 떼어놓고 빗길을 달린다. 마냥 아픈 아내를 돌볼 수 없다. 여러 날 아팠어도 약 한번 써본 일도 없다. 집에서 아내를 돌본들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내가 먹고 싶은 것은 설렁탕이다. 약도, 지극한 간호도 아닌 한 끼의 설렁탕. 아내와 배고프다 빽빽 울어대는 자식을 달랠 끼니가 필요하다. 인력거꾼이니 인력거를 몰 뿐이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도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1924년 6월 「개벽」(48호)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조선 인력거꾼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 종일 인력거를 끈 돈으로 설렁탕을 산다. 방에 누워만 있는 아내를 깨워보지만 아내는 “나뭇등걸”처럼 굳어 있다. 죽은 아내 앞에 엎드린 김첨지는 말한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김첨지와 같이 운다. 그의 말마따나 “육시랄 놈의 돈” 때문에 아내를 잃은, 아내 생의 마지막 찰나조차 잃은 그 좋은 운수 때문에. 비가 추적추적 오는 거리에서 돈이란 모름지기 벌릴 때 벌어야 한다는 그 무참한 탄력성 때문에.

    연일 탄력근로제가 쟁점이다. 탄력근로제란 법정근로시간과는 달리 탄력적,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채택할 수 있는 제도다. 주당 52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특정 주의 근로시간을 정할 수 있고 거기에 연장근로 12시간 더하면 1주에 총 64시간 근로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엄연히 법정근로시간이란 취지에 어긋나기 때문에 당사자 간의 합의를 골자로 한다. 쉽게 말해 일이 많을 때 멀쩡한 연장근로수당도 더 못 받고 정시 출, 퇴근을 해도 이유 없이 임금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법정 노동시간 제한은 앞서 언급한 53조 1항 ‘당사자 간의 합의’와 3항의 ‘특별한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법에서 말하는 ‘당사자 간間’이란 얼마나 ‘먼-거리 (간間’) 인가. ‘특별한 사정’이야 늘 기업의 노동생산성, 이윤 추구와 착취의 효율적 관리를 소괄호로 하는 경제성장의 해묵은 사정이다. 그래도 늘 먹히고 봐줄 만한 시급한 사정이다. 한국 사회에서 ‘벌 때 더 벌자’ 만큼 매력적인 구호도 없지 않은가.

    자발적 노동에 의한 자본 체제의 공고화는 문화와 이데올로기, 심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을 부단히 갈아 넣음으로써 생존을 유지한 개인은 각자도생의 위협 속에 자기구속과 자기계발의 능력자로 변모한다. 탈인간적 노동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겠다는 인간. 이 지독한 역설 앞에 대부분 명을 부르는 노동에 가담한다.

    인력거꾼 7년이면 산송장이 된다는 말이 있다. 김첨지는 몸을 녹여 10전짜리 백동화 서푼 두푼 찰깍 주머니를 채운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달음질을 한다느니 보다 거의 나는 듯”하다. 집에 있는 아픈 아내와 굶은 자식의 울음소리가 환영처럼 다가왔다 멀어질 때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을 빈틈없이 알게 될 때” 그저 주머니를 흔들어 돈을 셈하며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 속으로 숨는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1920년대 식민지 도시 현실과 도시빈민의 비참한 인생을 보여준다. 남대문 정거장까지 여학생을 태워 준 뒤, 그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의 벌이를 기대한다. 그는 80전이 필요하다. “첫 번에 30전, 둘째 번에 50전”을 새가며 주머니를 채운다. 아내와 세 살배기에게 사줄 죽 값이다. “꼬리를 굴리는 행운이 꼭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며 탄력적으로 장시간 일한다. 벌 때 벌어야 했던 김첨지는 주머니를 넉넉히 채우고도 집으로 가지 못해 맴을 돈다. “곧 불행을 향하여 달아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으니” 누구라도 붙잡아 두고 싶었던 김첨지는 선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술로 마음을 달랜다. 빗속을 돌진하던 김첨지는 제 앞에 달려드는 불행의 기척을 느낀다. 80전 이상을 벌고도 집 앞을 배회하며 자신보다 먼저 도착했을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뒷걸음치고 싶은 탓이다.

    어쩌면 독자들도 아픈 아내를 두고 밖에 나와 큰돈 벌었으니, 대가가 지불될 거라 느낀다. 그의 하루는 힘들게 번 돈으로 겨우 산 설렁탕의 따끈한 온기 속에 차디차게 식어버린 아내의 시체를 당면해야 하는 그런 일상이다.

    조선에 인력거(人力車)를 들여온 것은 일본이었다. 1920년 토지를 빼앗고 도시로 몰린 노동자들을 값싼 임금으로 부려먹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경작지를 수탈당한 소작농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유입되면서 선택한 일이 인력거꾼이다. 20세기 초 삶의 근간을 잃고 도시로 유입된 자들은 천재지변을 제외하고 대부분 자본주의 경제정책 덕에 파산한 이들이었다. 경성부 문밖에 살면서 주야로 인력거를 몰아 돈을 벌었고, 방 한 칸에 3원씩 세를 들어 생활(1)했다.

    일용노동자로 전전하며 인력거 삯의 대부분을 사용자에게 지불했다. 경성부 안 인력거 회사 사장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그 당시 식민당국에서 물가 안정책으로 “인력거꾼의 삯은 이전 삯전보다 대략 2/10가량 내리게 할 계획”(2) 을 발표한다. 사실 인력거 영업자들은 피해가 없었다. 정책으로 인해 손해 본 만큼 노동자들에게 더 걷고 착취하면 그만이었다. 횡포를 못 견딘 인력거꾼들은 동맹파업에 나섰다. 대부분 도시빈민이라 오랜 파업은 치명적이었다. 인력거 삯이 80에서 60까지 떨어지면서 금융공황기에 고통은 오로지 인력거꾼에게 돌아갔다. 수탈이 심해지자 2차 동맹파업을 시도했지만 공권력이 동원돼 관련자들 모두 구속된다. 전차의 확장과 자동차의 유입은 근대의 가로계획과 맞물려 도로를 정비했고, 인력거꾼들은 당시 대중교통 정책과 기술진보의 그늘에 가려 이전 보다 더 처참하게 살았다.

    「운수 좋은 날」을 교과서로만 접했을 때 식민지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다룬 소설이자 아이러니한 운명을 그린 작품이라 암기했다. 노동 빈곤층의 처참한 삶은 단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현진건은 일본 자본주의 체제하에 매일매일 가해지는 생존을 볼모 삼아 탄력근로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인력거꾼의 현실을 보고 있다. 전차의 도입과 택시 보급 이후, 인력거꾼들의 발로 경성 시내를 누비던 자본가들은 자동차를 선호했고 당국은 “도시미(都市美)를 해친다”(3) 는 이유로 인력거꾼들을 몰아낸다.

    1920년대 임금노동자들 역시 노동 환경이 열악했고 생활수준이 극히 낮았다. 장기화된 실업률로 인해 그들에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사용자와 노동자, 그 아득하고 먼 ‘당사자 간間’의 거리를 지속적으로 벌리는 것은 다시 박노해의 시구를 빌려 “일 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이었다. 가난은 단지 어느 학자의 진단처럼 불평등의 문제라 얼버무리고 말 게 아니다. 비정규직 임금 노동자에게 명을 재촉하는 재앙에 가깝다.

    운수가 유난히 좋았던 그날의 불행은 단지 그 하루의 일만은 아니다. 성수기라며 생명 줄을 잘라 연명하는 숨, 지속적인 노고와 기아에 시달리며 자신의 게으름을 탓한 채, 살기 위해 죽는 장시간 노동 혹사다.

    결국 자동차가 유입되면서 인력거꾼들은 다시 날품을 팔며 생을 연명한다. 세상이 급변하는 만큼 이들의 직업도 노동도 가히 탄력적으로 유연화 된다. 허나 죽어가는 아내에게 먹일 좁쌀을 사기 위해 또다시 아내를 죽음에 골방에 방치해야만 했던 현실은 전혀 탄력적이지 않고 견고하기만 하다.

    여전히 한국 정치는 친자본적 흐름 하에 창조적 혁신을 통한 노동 유연화 정책만이 모두가 잘 사는 길이라 한다. 기업을 살려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전언은 마치 ‘세기의 유물’이 돼버린 인력거보다 더 낡은 동어반복이다.

    용변조차 해결할 수 없어 사망하는 노동자, 추락과 절단의 공포로부터 잠을 쫓으며 일하는 청년 노동자, 매해 과로사하는 300명 노동자들의 영정 앞에서 탄력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란 적어도 자신이 얼마든지 급변하는 자본 속에 내던져지고 대체되며 폐기처분될 노동 상품이라는 점을 망각했거나, 혹은 이를 얼마든지 탄력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기- 착취의 능력자가 아닌가 싶다.

    <참조>

    1. 『매일신보』, 1922년 1월 25일, 「舊歲慕」
    2. 『동아일보』, 1922 11월 5일 「경찰이 조합 측에 교섭」
    3. 『동아일보』 1938 5월 27일, 「응소(應召)된 석일(昔日)의 총아(寵兒)! 불우(不遇)에 울던 인력거 재등장」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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