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년 파업 농성의 시작은?
    [철도이야기] 아래에서 먼저 시작돼
    By 유균
        2018년 12월 07일 11:07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인터뷰를 하면서 88년 7.26파업 농성이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궁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88년 파업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파업처럼 집행부에서 계획하고 명령을 내리고 하부조직에서 조합원과 파업을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집행부가 없는 상태에서 하부조직에서 먼저 시작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진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이 마산기관차였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산기관차를 찾아갔지만 마산기관차에서도 이를 확실하게 아는 조합원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당시 투쟁의 주역들을 찾았습니다. 그 투쟁의 실제적인 주역 중에 두 분인 박대주 씨와 박경식 씨입니다. 그리고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당시 배경을 설명하면 최기덕 철도청장이 흑자경영을 운운하며 인원감축과 열차의 운전속도를 상승하기 위하여 다이아(기관차행로표) 개악(改惡)을 발표했습니다. 문제가 된 다이아는 서울-부산 간 기관사 교대 없이 운전하는 직통열차였습니다. 이 열차를 새마을에 이어 무궁화, 통일호까지 확대할 계획이었으며 다른 기관차사무소 역시 이와 비슷한 내용의 다이아 개악이었습니다.

    그 시기는 일괄적으로 모두 시행하려던 것이 아니고 마산기관차사무소를 시발점으로 차츰 차츰 넓히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마산기관차의 다이아 개악은 마산-부산-순천-마산에서 끝나는 2박3일짜리 다이아를 새로 편성하거나 서울-마산 간을 직통으로 운행하는 그런 다이아였습니다. 이른바 ‘ㄹ’자 다이아를 만들어 운행시키면 마산기관차에서 13명의 기관사를 감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의 기관사 근무시간이 평균 250시간을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집에 들어 갈 수 있는 날짜가 10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이아들이 실행되면 5-7일정도 밖에 들어갈 수 없으며 또 근무가 너무 힘들어 마산기관차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그런 다이아였습니다.

    이러한 다이아 개악은 5월경부터 소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5월 30일 소집교육 시간에 발표했고 시행일은 6월 15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이아 개악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대책위원회’ 같은 것이 만들어졌고 김00 씨가 나선 듯합니다. 김00 씨는 일반조합원으로 지부장이 되고 싶어 하는 분이었답니다. 즉,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조합원에게 인정을 받아 차기에 출마할 생각이었겠지요. 그런데 공교롭게 함안역에서 출발 모진사고(출발신호기 착오)로 열차가 탈선하여 운신의 폭이 좁아 추진력을 잃게 됩니다.

    때문에 당시 승무회장이 조합원에게 등 떠밀려 일을 맡게 됩니다. 당시 지부장은 검수원이었기 때문에 승무에 관한 일은 승무회장의 권한이 더 셌다고 합니다. 하지만 승무회장은 추진력이 약했으며 또 등 떠밀려 일을 맡아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듯합니다. 그리고 그 때의 해결방식은 각 향우회에서 돈을 걷어 본청의 열차과에 상납을 함으로 문제의 다이아를 다른 기관차사무소에 넘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때 당시는 각 사무소마다 그러한 해결방식이 가능했고 또 많이 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유종회(철고동문회)와 송죽회(공채) 등에서 20만 원 정도의 금액을 가지고 본청 열차과 담당자를 만났지만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고민하다가 장충수씨가 ‘가족들에게 회사의 내부사정을 알리기 위한 설명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6월 초순경에 30여 명 정도 가족들이 참가한 상태에서 설명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 정도 설명회로 끝날 줄 알았는데 부인들이 ‘내 문제’로 적극적으로 받아들면서 투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기존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제 투쟁으로 전환되니 처음에 일을 시작했던 장00 씨와 김00 씨의 뒤를 이어 박대주 씨와 박경식 씨가 실제로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는 지부장이 검수원이었기 때문에 지부 사무실이 검수에 있어 그 장소가 마땅치 않아 밖에 있는 준비실 부근이나 교양실에서 본격적인 농성이 시작되었으며, 장00, 김00, 최00 씨의 부인들이 주체가 되어 가족들을 소집하고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박경식 씨와 박대주 씨(왼쪽부터)

    농성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 정리를 마친 10시경부터 부인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고 토론회 형식으로 일주일 정도 진행을 하였습니다. 각자 친한 사람들과 연락하여 가족 참여율이 50% 이상 되었으며 이때 가족들이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어서만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소장실에 찾아가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조합원은 누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직장의 상하관계 때문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 지방청에서도 들어주고 싶지만 “권한 밖이다. 노력하고 있다” 라는 식의 답변만 나왔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청장 앞으로 가족의 이름과 승무원의 이름으로 문건을 작성합니다. 특히, 가족 이름의 문건은 며칠까지 답이 나오지 않으면 ‘가족을 동원하여 청와대와 본청에 가서 항의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의 협박성 편지였었습니다. 또 당시 국회의원과 관계자들에게도 알리고 협박에 가까운 내용으로 전달합니다. 그래서 공문에 실행되기 하루 전인 6월 14일 ‘무기한 유보’로 결국 승리하는 투쟁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88년 파업의 농성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기관차사무소 역시 다이아만 조금씩 다를 뿐 공통적으로 기관차승무원의 근무조건이 더 열악해 질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산기관차 투쟁의 승리가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기관차사무소 역시 자극이 되었겠지요. 그래서인지 어쩐지 88년 7.26파업 때는 다른 기관차사무소에서도 마산과 같이 가족이 동원되었고 경주나 대전, 마산 등 몇 개 지부에서 실제로 가족들이 기관차를 막기도 했습니다. 또 백골단이 들어왔을 때 “우리 아빠 못 잡아간다”며 가족들이 공권력을 막아 조합원을 보호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건과 관련되어 ‘88년 파업 전에 마산에서 가족들이 열차를 몸으로 막았다’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 다이아 개악의 문제에 대하여 항의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청와대로 가려고 했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그런 계획이 있었다.’ 정도로 보시면 될 듯합니다. 그래서 당사자들에게 그 내용을 물어보니 정말로 실행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요구 사항을 들어줬기 때문에 실행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 투쟁 이후에 88년 7.26파업 전에 마산기관차는 또 다시 농성장을 꾸렸답니다. 그 때 전국 기관차지부에서는 농성장을 꾸리기도 하였으며 교양실을 농성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답니다. 그리고 관심이 많은 조합원은 용산에 집결하였으며, 마산기관차는 지부장의 의사와 상관없이 교양실에(2층) 농성장을 꾸리고 교양실 밑에(1층) 솥을 걸었고, 투쟁가를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제대로 했다고 합니다.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