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홍문으로 가다
[국공내전-3] 역사적 만남, 충칭회담
    2018년 12월 06일 10: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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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일본의 패망과 국공 양당의 대응-종전 후 주도권 갈등”

국민당과 공산당이 각지 점령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시작했을 때 마오쩌둥은 뜻밖의 전문을 한통 받게 되었다. 충칭의 장제스로부터 온 것이었다.

모택동 선생 귀하

왜구가 투항하여 영구적 세계평화 실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제 혹은 국내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선생에게 청하니 기한을 정해 제2수도(중경)에 왕림하셔서 국가대계에 관한 일을 함께 토론했으면 합니다. 회신 전문을 간절히 바랍니다

1945년 8월 14일 장중정 미한(未寒: 서간문에 쓰는 날짜)

그것은 미국의 특사인 헐리가 주선한 것이었다. 헐리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추진해 왔다. 나중에는 주중 미국대사로 신분을 바꾸게 되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선 것은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전쟁 후에는 만주가 소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통일된 국가를 세우게 하려고 하였다.

장제스는 해방구를 중심으로 점령지를 확대하는 공산당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 진주한 소련이 과연 협정을 제대로 이행할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협상을 통해 공산당의 근거지 확대를 막고자 한 것이다.

공산당으로서는 장제스의 제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동안 헐리가 중재하며 서로 주고받은 내용과 과정을 생각할 때 협상으로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될 리가 없었다. 장제스는 그동안 공산당 군대를 개편하며 전부 국민정부의 통할 아래 두어야 한다고 고집해 왔다. 그것을 헐리는 “대문 안에 한 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다.”고 설득했다. 합법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오쩌둥이 반문했다. “두 손을 묶인 채 대문을 넘으면 무슨 의미가 있소?” 마오쩌둥은 또 “연합정부를 잃고, 민주원칙을 희생시키고 몇몇이 충칭에 가서 고관이 되라는 말이오? 우리는 인민을 그렇게 싼 값에 팔아치울 수는 없소.” 하고 일축하였다.

어쨌든 제의가 왔으니 답장을 보내야 했다. 8월 16일 마오쩌둥은 장제스에게 회신했다.

충징 장위원장 귀하

8월 14일에 보내신 전문 잘 읽었습니다. 쭈더 총사령이 오늘 전문 한 통을 당신에게 보내 우리측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의 의견을 기다린 뒤 회견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8월 16일 마오쩌둥

쭈더가 보낸 전문에는 장제스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있었다. “당신과 당신의 정부는 일본 및 괴뢰의 투항을 접수할 때 우리와 우선 상의할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의견을 일치시켜야 한다. 당신의 정부는 해방구 및 함락지구, 그리고 전체 항일 인민들을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우리가 일본과 괴뢰군대의 항복을 받고 무기를 접수하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가 상대하는 적은 우리가 항복을 받으면 되고 당신이 상대하는 적은 당신이 항복을 받으면 된다. 그것이 전쟁의 통례이며 내전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한마디로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었다.

8월 20일 장제스는 두 번째 전문을 보내왔다. “적에게 항복을 받는 문제는 연합군 총사령부가 정한 규정을 따라야 한다. 연합군 총사령부는 각 전구별로 나누어 처리하도록 하고 있다. 연합군측에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나라 군인의 격이 어떻게 되겠는가?”하고 이치를 설명한 다음 “선생께서는 한번 오셔서 함께 대계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오셔서 은혜를 주신다면 어찌 개인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빨리 회답을 주시고 동의하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하며 자못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충칭과 옌안 사이에 전문이 몇 번 더 오고간 뒤에 일이 급진전되었다.

홍문의 잔치

‘훙문의 잔치’는 옛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싸울 때의 일에서 유래되었다. 센양(咸陽)을 먼저 점령한 유방이 약법 삼장을 발표하여 진나라 백성의 민심을 얻자 항우는 크게 분노하였다. 항우는 단숨에 함곡관을 돌파한 뒤 홍문(鴻門)에 진을 쳤다. 책사 범증의 계략에 따라 유방을 부른 뒤 적당한 구실을 붙여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방의 겸손한 태도에 흔들린 항우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번쾌, 장량 등의 활약으로 유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 인사라면 누구라도 장제스의 초청을 홍문의 잔치라고 생각할 만 하였다.

8월 23일 공산당은 옌안 자오위안에서 정치국 회의를 열어 일본 항복 후의 전략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저우언라이가 전문 한 통을 들고 바삐 들어왔다. “충칭에 무슨 소식이 있소?” 마오가 묻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가 세 번째 전문을 보냈습니다. 꼭 와서 회담을 하자고 합니다.” 마오쩌둥이 성을 내었다. “이미 그 사람들에게 언라이 당신이 간다고 통지하지 않았소?” “그들이 주석을 거명하며 오라고 합니다.” 마오는 전보를 받아 읽더니 말했다. “장이 나하고 우리 군을 떠보는 거요. 내가 그 홍문연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기 있는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모두 묵묵부답 말이 없이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때 펑더화이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국민당하고 무슨 대화를 합니까? 싸우면 싸우는 거지.” 류샤오치는 “만약 가지 않으면 그들은 크게 여론을 만들 겁니다.” 하였다. 린보취林伯渠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장제스는 근본적으로 회담할 생각이 없어요. 그냥 홍문연을 벌여놓은 거에요. 주석, 절대로 가면 안돼요.” 류샤오치는 “하지만….”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캉성(康生)은 “이런 상황에서 하지만이 다 무엇이오? 주석은 우리의 영수요. 절대 모험을 하면 안 됩니다.”하고 강경하게 말했다. 마오가 “샤오치 동지, 계속 말해 보시오.”하고 권하자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을 보며 한참 망설이더니 말했다. “8년 항전을 치러서 인민들은 모두 평화와 안정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서 회담하는 것은 인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서 최대한 평화를 설득해야 합니다. 나도 주석이 가는 것은 당연히 반대합니다. 우리가 방안을 잘 연구해 봅시다.”

저우언라이는 좌중의 사람들 눈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제스는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서안사변 때 우리는 그를 놓아주자고 강력히 주장했지요. 장쉐량은 호의를 가지고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팔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가둬두고 있습니다. 그가 제의한 회담을 우리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석이 갈지, 안갈지는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항전에서 평화로 이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힘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심이지요.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장제스에게 타협하도록 압박해야 합니다. 대화하자고 하면서 싸운다면 우리는 손해를 보고 그는 인심을 잃게 됩니다.” 마오가 뒤를 이었다. “도대체 언라이 당신이 간다는 거요? 아니면 내가 가야 한다는 거요?” 저우언라이는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때 쭈더가 참지 못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주석이 가는데 동의하오.” 일순 모두의 눈이 쭈더에게 쏠렸다. 쭈더는 “당신들 왜 나를 보는 거요? 내가 주석 대신 장을 만나러 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주석이 간다면 우리는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바탕 크게 싸울 준비 말이오.” 사람들 모두 얼굴빛이 변해서 좌중이 소연해졌다. 캉성이 자리에서 일어다니더 성을 내며 말했다. “총사령, 그건 주석을 죽을 길로 밀어넣는거 아니오?” 린보취도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 총사령, 당신은…” 류샤오치는 “총사령의 말을 자세히 들어 봅시다.”고 권했다.

쭈더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합니다. 반드시 가서 회담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싸움에 입각해야 합니다. 유방과 항우가 담판을 지을 때 초한 간에 무슨 경계가 있었습니까? 마지막에 결국 싸움으로 결판을 내지 않았습니까? 유방과 항우는 물과 기름이었잖소, 또 위오촉 삼국이 분립했지만 결국 싸움으로 통일이 되었소. 싸움 없이 평화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소. 주석이 가면 여론은 우리 쪽에 설 것이오. 장제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싸우던 싸우지 않던, 크게 싸우던 작게 싸우던 명분과 주도권을 우리가 가지게 됩니다. 이틀 전에 스탈린도 전문을 보내 주석이 충칭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캉성이 물었다. “하지만 주석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쭈더는 “평화가 중국 인민에게 이익이 있습니다. 이번 회담은 가야 합니다. 장제스는 약간 양보할 텐데 주석이 가는 게 유리합니다. 위험하지 않느냐구요?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군대가 있고 인민들이 있어요. 인민들은 이미 얻은 승리의 과실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충분히 준비를 해서 회담과 전장 상황을 충분히 결합할 수 있다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도 감히 천하에 죄를 짓지는 못할 것이오.”

말이 여기에 이르자 마오쩌둥이 탁자를 쳤다. “좋소, 총사령이 이미 명령을 하였으니 그렇게 결정하겠소. 나 마오쩌둥이 충칭의 잔치에 갈 테니 총사령은 집에서 싸울 준비를 해주시오. 동지들, 여러분 모두 내가 가는 게 위험하다고 걱정하지 않았소? 내가 아는 장제스는 이렇소. 여러분이 전방에서 잘 싸우면 나는 안전할 것이오. 여러분이 잘 싸우지 못하면 나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소.”

마오쩌둥은 이어서 이렇게 지적했다. “한동안 나라가 평화국면이 될 것이오. 우리들이 지금 외쳐야 할 구호는 평화와 민주, 단결이오. 우리는 평화국면에서 투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굽은 길을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회의는 마오쩌둥이 충칭에 가기로 한 뒤 류샤오치를 주석 대리로 결정했다. 또 마오쩌둥을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선출하고 쭈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를 부주석으로 인선했다.

만약을 위해 중공은 소련에 필요할 경우 충징 주재 소련 군사대표단이 피난처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비행기가 격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헐리가 충칭에 와서 동승할 것도 요구했다. 하지만 회담을 권하며 헐리가 안전을 보장한다고 비행기에 동승하겠다고 했다는 말도 있다. 장제스는 이 일에 대하여 나중에 일기에 썼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 공산당원이 그렇게 겁이 많고 뻔뻔스러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불과 사흘 전에 공산당 신문과 라디오가 헐리를 반동적인 제국주의자라고 욕하지 않았던가. 그 제국주의자가 이제 마오의 안전을 보장하는 동승자가 되다니.”

하지만 이런 기록도 존재한다. 마오를 회견한 장제스가 비서인 천부레이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 저 사람 보통이 아니다. 담배는 그의 목숨과 같은 것이다. 손에서 담배연기가 꺼질 줄 모르는데 우리가 피우지 않는 것을 알고 회담 내내 한 개비도 피우지 않았다. 그런 결심과 태도를 가볍게 볼 수가 없다.” 마오쩌둥의 충칭행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적지인 충칭으로 날아가 장제스와 회담을 벌였다는 사실이며 그와 당이 그것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마오쩌둥은 10년 전 장정을 마친 뒤 처음으로 작은 소도시 옌안을 떠나게 되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원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미 마오의 두 아우와 첫 번째 부인이 국민당 군대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8월 25일 중공 정치국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왕루어페이王若飛가 평화회담 대표로 함께 충칭에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쭈더에게 각 근거지의 군사행동을 관리하여 자신의 충칭회담과 결부시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회담을 대하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속내는 다른 점과 같은 점이 있었다. 장제스는 미국의 압력과 병력 배치에 필요한 시간을 원했다., 마오쩌둥은 명분을 얻고 가능하면 잠시나마 공산당이 합법적 지위를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충칭은 적지였다. 장제스가 자신을 억류하거나 죽이려면 구실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비장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생각이 어떻든 중국 인민들은 이 회담으로 중국이 평화를 얻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100년 동안 대란의 시기를 거쳐 왔다. 아편전쟁과 열강의 침탈, 태평천국의 건국과 투쟁, 염군과 회교도의 반란, 청일전쟁, 군벌전쟁, 신해혁명과 북벌전쟁, 홍군 포위 소탕전과 중일전쟁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거기다 기아와 지배세력의 착취, 병력의 동원과 식량 징발등으로 인민들은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충칭회담에서의 장제스와 마오쩌둥

쌍십협정, 충칭회담의 과정과 결말

마오쩌둥은 8월 28일 국민정부 임시 수도인 충칭으로 갔다. 비행장에서 그의 첫 인상은 “구겨진 푸른 옷을 입고 머리카락이 길며 약간 살이 붙어 얼굴선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한마디로 대도시 충칭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골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마오는 충칭 비행장에서 “장위원장 만세!”를 외쳤다 마오는 그 뒤로도 여러 자리에서 장위원장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를 수행한 공산당 쪽 사람들이나 기자들, 그리고 국민당 인사들에게는 깜짝 놀랄 행동이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만세를 외치는 것은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나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마오쩌둥은 장제스 앞에 몸을 낮춰 환심을 사고자 했으며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끌어내고자 했다. 그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손자병법에서 ‘출기불의(出其不意)의 방법을 썼는지도 모른다. (출기출의 :공기무비 출기불의(功其無備 出其不意)는 손자병법의 한 구절이다.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며 뜻하지 않게 나타난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허를 찌르는 것을 말한다-필자)

회담을 위해 충칭 공항에 도착한 마오쩌둥의 모습

마오쩌둥이 한껏 몸을 낮춘 탓인지 몰라도 회담이나 연회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회담에서 마오쩌둥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으며 타협을 원한다는 이미지를 확립했다. 그리고 충칭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이 결코 “모든 면에서 강경하며 성질이 거칠고 조급한 혁명가가 아니라 우호적이고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려 노력했다.

장제스는 일기에 “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대접했다.”고 썼다. 그도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려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는 만족스럽지 못한 듯 했다. 그는 나의 호의를 이용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데 어물쩍거리지 않았다.” 하고 기록했다.

두 사람이 최대한 양보하고 회담의 성사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국공 양당 간의 간극은 너무 컸다. 장제스는 실질적인 정치 및 군사권력에 대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다음 해 봄에 국민대회를 열어 연합정부를 구성하자고 말했지만 “국민당을 느슨한 연합체체에 양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또 홍군의 규모를 현저히 감축하고 정부 권위를 전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일 년간 미국의 중재 속에 벌어진 교섭에서 계속 견지해왔던 주장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지도부가 북방의 다섯 성의 주석과 10개 성의 부주석, 베이징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갖기를 원했다. 그리고 홍군은 여전히 공산당 관할 하에 두고 싶어했다. 장제스는 9월 4일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에게 국가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마오쩌둥에게 보여달라고 기도했다.”고 일기에 썼다. 또 “나는 그에게 모든 곤란한 문제를 공정하고 관대한 정신으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28개 사단을 편성하겠다고 했다.”고 썼다.

다른 회담 후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헐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공산당의 요구를 48개 사단으로 올려 놓았다.”고 기록했다. 장제스는 이렇게 불평했다. “이는 공비와 협상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참으로 불공정하고도 불성실하다.” 하지만 그 말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어려운 조건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공산당의 이익을 지키려 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두 사람 간의 회담과 저우언라이 등이 참여한 실무회담이 열렸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두루뭉술하게 평화를 주장하고 연합정부를 표현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부분에서는 조금의 진전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장제스에게는 거대한 군사력과 미국의 원조와 지지가 있었다. 스탈린과는 우호 동맹조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8년간의 항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 열매를 공산당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오쩌둥은 표면적으로는 화해의 자세를 보였지만 중국 공산당의 근본적인 지위와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시간을 벌기를 원했으며 충칭에서 자신과 공산당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회담 중 만찬장에서의 마오쩌둥과 장제스

마침내 10월 10일 이른바 ‘쌍십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공 양당은 평화, 민주, 단결, 통일을 기초로 장기적으로 합작하며 내전을 피하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

둘째, 국민당의 훈정을 조속히 끝내고 헌정을 실시하며 먼저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각 당파 대표와 무당파 대표가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의 기본방침과 정책을 협의하며 평화로운 건국방안과 국민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제반사항을 토의한다.

셋째, 모든 인민에게 일반 민주국가 인민들이 향유하는 민주와 자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다. 특무기관을 철폐하며 정치범을 석방하고 자치를 적극적으로 실시하며 보통선거제를 실시한다.

양측의 이해가 걸린 국민대회 문제, 해방구 정권 문제, 군대의 개편문제는 쌍방이 계속 협상하거나 정치협상회의로 넘겨 해결한다고 하여 미뤄 두었다. 협정 내용에 사실상 접근을 이룬 뒤 10월 8일 국민당 군사위원회 건물에서 열린 만찬회에서 마오쩌둥은 만찬을 주최한 국민당측 인사 장즈중(張治中)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이 파시스트를 타도한 뒤 세계와 중국에 광명이 왔다. 중국에게는 오늘날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평화다. 다른 것을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10월 9일 로이터 통신 특파원 캠벨은 이렇게 썼다. “한 쪽은 다른 쪽을 믿지 못하고 먼저 양보하지도 않았다. 양측은 다른 쪽에 의해 세워질 지방정권을 막고자 했다. 양쪽 모두가 강역, 군대, 공민, 정치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민주, 통일, 자유, 군대의 국가화에 찬성했다.”

회담 후 연안으로 출발하기 전의 마오(왼쪽에서 두 번째)와 헐리(세 번째)의 모습

어쨌든 마오쩌둥은 충칭회담이 끝난 뒤 10월 12일 옌안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그는 한참동안 앓았다. 며칠 내내 침대에 엎드려 몸을 떨었다. 차가운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놓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듯 했다. 아무리 담대하고 의지가 강하다 할지라도 홍문의 잔치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마오쩌둥은 충칭회담을 “한 장의 종이쪽에 불과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스탈린이 국민당과 잠정협정을 맺으라고 보낸 전문을 보고는 “설마 우리에게 총을 내려놓고 국민당에게 투항하라는 뜻은 아니겠지.”하고 대꾸했다. 그의 태도는 분명했다. “인민이 무장한 총과 총알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

충칭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국공 양당은 끊임없이 군대를 이동시켰다. 일부 지역에서는 서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국민당과 미국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이 팔로군의 항복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아 싸우기도 하였다. 겉으로는 평화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중국의 하늘에는 내전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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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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