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대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세대를 위한 그림책
        2006년 05월 26일 12: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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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천국인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다양한 주제들이 만화로 제작된다. 역사책을 만화로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시험과 관련된 내용이나 영행이나 취미 같은 안내서들도 만화로 제작된다. 철학이나 천황제 같은 심각한 주제들도 피해갈 수 없다. 물론 모두 성인독자를 대상으로 기획되는 것들이다.

    우리의 경우 80년대에 일본에서 들여온 PC학습용 만화교재들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점차 확대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전문적인 내용을 만화로 재현한 것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교양만화의 대부분은 아동이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다. 예전과 달리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만화를 펴들고 있는 학생들이 많아졌지만 아직까지 넥타이 멘 직장인이 만화를 펴들고 있는 모습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지만 80년대 그 엄혹한 시절에 이미 ‘아이들은 절대 안 볼’ 심각한 만화 책들이 사회과학 서점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모았었다. 오월출판사가 주로 냈던 이 만화책 시리즈는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 같은 위험한 인물부터 사회주의, 반핵, 페미니즘 등 골치 아픈(?) 주제들을 다뤘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 중 몇 권은 출판사를 바꿔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

    오월 출판사의 사회과학 만화들이 비교적 인기를 끌었던데 반해 백산서당에서 1985년 출판한 만화 <전공투 일본학생운동사>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유통량도 적었고 출판사가 재판을 찍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그만큼 안팔렸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왜일까? 멀리는 오월광주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건대사태와 열사들의 희생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던 시절이니 만큼, 아무리 남의 나라 학생운동사라고 해도 그런 숭고한 주제를(?) 감히 만화로 다루는 것이 못 마땅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무리 책 자체가 ‘입문서’라고 해도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무슨 말인지 잘 납득이 안됐을지도 모르겠다. 일본학생운동의 활약상이 정말 ‘만화 같은’ 이야기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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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서는 1984년에 나온 <일러스트레이티드 전공투(イラストレイテッド 全共闘)>다. 저자인 다카자와 고지(高沢皓司)는 대학시절 전공투 운동을 체험했고, 그 경험에 기반 해 훗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되어서는 일본의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에 관한 저작들을 주로 발표했다. 1990년 이후로는 1970년 비행기를 납치해 북한으로 갔던 적군파 조직원들의 행로를 직접 북한에 들어가 취재하기 시작했다. 취재 결과를 정리해 2000년 발표한 책 <숙명-요도호 망명자들의 비밀공작>은 그해 고단샤논픽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도요타가 주히코(豊田一彦)는 와세다대 출신으로 유명한 아동그림책 작가다. 아마 그의 작품 활동 경력에서 이 만화책의 작업은 별종 중의 별종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전공투, 그러니까 “전학공투회의”에 대해 다룬 이 책은 150쪽 정도로 얇다. 앞부분의 1/3은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의 패전부터 전공투 운동이 시작되는 68년까지의 학생운동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전공투 운동은 사실 4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의 폭풍이었지만 책은 1945년부터 일본 학생운동이 실질적인 막을 내리는 70년대 초반까지를 다루고 있는 만큼 ‘일본학생운동사’라는 부제가 어색하지는 않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전학련’과 ‘전공투’로 상징된다. 전학련은 자치회, 우리식으로 말하면 학생회의 연합체다. 50년대 초반까지 전학련은 단일한 조직이었지만 이후 신좌익운동이 시작되고 정파들이 분립하면서 각 파벌마다의 전학련이 따로 생겨났다. 전대협이 학생운동의 대표체였다가 지금 한총련이 ‘하나의 분파’로 전락한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반면에 전공투는 어떤 조직형식을 갖춘 운동이 아니었다. 모든 학생의 공동투쟁 회의라는 이름에서 보듯 당면한 투쟁을 위한 임시기구의 성격이 짙었다. 68년 도쿄대와 니혼대에서 대학의 민주화와 재단과의 갈등을 계기로 자연발생적으로 이들 대학에서 학생투쟁체가 건설됐다.

    여기에는 두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기존의 학생운동이 정파운동으로 재편되면서 4~5년 넘게 상호간의 헤게모니 투쟁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베트남 전쟁의 격화, 일본경제가 고도성장하면서 발생한 사회모순, 기성세대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 등이 학생 대중들을 급진화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학생운동 정파에 가담해 체제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조직의 틀을 거부하고 급진적 행동을 표출하기도 했다.

    무당파라는 의미에서 “논섹트 라디컬”로 불려진 이 일본의 68세대들이 학원분쟁이라는 형태로 행동에 나선 것이 바로 ‘전공투’ 운동인 것이다. 전공투의 시작은 거창한 정치적 목표가 아니었다. 니혼대는 한 교수가 돈을 받고 부정입학을 알선한 것이, 도쿄대는 의대 수련의들이 근로조건과 병원의 권위주의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렇게 시작된 학원분쟁은 한두달 만에 국가권력을 대행하는 학교와 재단, 경찰기동대와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전체 학생이 대립하며 학원을 해방구로 만든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바리케이드와 학생파업 속에서 니혼대 전공투는 1968년 5월 28일, 도쿄대 전공투는 같은 해 7월 5일 결성됐다.

    전공투 운동은 기존의 신좌익운동과는 다른 사상을 만들었다. 도쿄대 전공투 의장이었던 야마모토 요시다카가 처음 사용한 ‘자기부정’이다. 처음에 그것은 일본사회의 최고 엘리트로서 오늘은 시위에 나서지만 내일은 관료로의 출세가 보장된 모순된 존재에 대해 비판적인 반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논리가 확장돼 대학의 해체와 자기 존재에 대한 철저한 부정만이 진정한 변혁에 이른다는 식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전공투 뿐만 아니라 일본 학생운동의 최대 사건 중 하나인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이 발생했다. 이미 1968년 말부터 각 학부 건물을 점거하고 파업농성 중이던 전공투는 해가 바뀌자 주력부대를 야스다 강당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결국 대학당국이 경찰투입을 요청하고 기동대가 1월 18일 진압을 개시했다. 꼬박 이틀이 걸린 공방전은 TV중계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이 책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강당 꼭대기 층까지 밀리면서 최후의 저항을 한 500명의 전공투 활동가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전원 체포됐다고 한다. 이들이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한 이유는 그해의 도쿄대 입시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부정의 한 방법으로 이 더러운 제국대학의 엘리트를 재생산을 막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뜻대로 그해 도쿄대 입시는 중단됐다.

    도쿄대 전공투는 야스다 강당 건물의 방송시설을 이용해 점거기간동안 자주방송을 실시했다. 본인은 죽을 때까지 확인을 해주지 않았지만 이 방송은 후에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는 의대생이 책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는 기동대가 강당을 함락하기 직전 마지막 방송을 이렇게 끝맺었다. “우리의 방송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국의 학생, 시민, 노동자가 우리의 투쟁을 이어나가 주십시오. 다시 해방강당을 되찾는 그날까지 방송을 중지합니다.”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닐지 몰라도 확실히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은 37년째 중지상태다.

       
    ▲ ‘자기부정’은 전공투 운동의 화두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모순적 성격을 보여주는 단어다. ‘민청’은 일본공산당의 청년조직으로 당시 학원분쟁에서 일종의 ‘구사대’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좌익운동은 이들을 ‘체제의 일원’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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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다 강당 이후 일본의 대학에서는 유행처럼 전공투가 결성됐다.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던 여대와 체육계 대학에서조차도 전공투가 결성돼 학원분쟁이 격심해졌다. 전공투 운동의 정치성이 강화됐다.

    1969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는 3만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전국전공투가 결성됐다. 각 대학 전공투가 연합하고 도쿄대 전공투 의장과 니혼대 전공투 의장이 각각 의장과 부의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내막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8대 당파의 연합체였다. 운동의 주도권이 다시 당파에게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책은 “전국전공투의 결성이 결국은 전공투 운동의 마지막”이었다고 회고한다. 전국전공투의 정치성과 학원투쟁이 괴리되기 시작하고, 무당파 활동가들이 당파에 반발해 이탈하고, 조급해진 일부는 ‘무장투쟁론’으로 나아가면서 전공투 운동은 내부에서 붕괴되어 갔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적군파다. 또 당파들은 대중과 혁명의 전망을 잃어버리면서 경쟁당파를 ‘반혁명 집단’으로 규정하고 상대조직의 활동가를 살해하는 ‘내분’을 시작했다. 책은 여기서 끝맺는다.

    골치아픈 이야기만 적었는데 만화로 구성한 책답게 재밌는 이야기들도 있다. 일본 학생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공사장 안전헬멧이 당시 500엔이었고 주무장이었던 각목은 50엔이었던 반면 기동대의 개인안전장비는 모두 합쳐 9,550엔이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서 구치소에서 제공하던 관식의 메뉴 같은 자료는 진지한(?) 책이라면 결코 다루지 않았을 내용들이다.

    각 시기별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 책이나 대중문화를 적어놓은 것도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정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 글로만 적어놓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데모의 전개상황이나 점거상황들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등 만화책만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재판이 나오지는 않은 만큼, 국내에서 이 책이 다시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혹시 도서관이나 아는 사람을 통해 책을 구할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나라 도서관에 과연 만화책이 구비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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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신이 전공투 세대인 작가는 책을 통해 전공투 운동이 가졌던 ‘연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전공투 운동은 사회세력화에 실패하면서 세대가 아닌 세대를 남겨놓았다. 전공투 세대는 규모나 그 경험에 있어서 우리의 소위 366세대와 비교가 안 되지만 운동의 패막과 함께 급속도로 기성 사회에 빨려 들어갔다. 전공투 운동 이후 일본사회에서 전공투 세대의 특성이 집단적으로 발휘된 적은 없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저자는 사라져간 연대의 기억에 목말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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