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와 냉소주의 뿌리를 캐묻다
[책]『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가토 슈이치/돌베개)
    2018년 12월 01일 11:5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가토 슈이치. 그가 일본과 세계 정세에 대해 무슨 생각과 어떤 발언을 계속해 왔는지 조감하는 논고들을 한 권에 모았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려 소련군 탱크가 체코의 수도로 진격한 사건에 대한 생생한 논평 「언어와 탱크」를 비롯하여, 1946년에 발표한 격렬한 외침 「천황제를 논하다」부터 일본 문화의 습속을 통찰한 「일본 문화의 잡종성」, 일본 정치의 교묘한 ‘말 바꾸기’ 수법을 갈파한 「교과서 검열의 병리」, 헌법 9조를 지키는 ‘9조 모임’을 이끌며 만년에 발표한 「다시 9조」까지 가토 슈이치 사유의 정수라 할 27편의 평론을 담았다.

가토 슈이치는 누구인가

일찍이 일본에 ‘전후 민주주의’라 부르는 한 시대가 있었다. 침략전쟁과 패전이라는 실패의 경험을 곱씹으며 일본 사회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 가고자 했던 정신, 이를 통해 ‘인권’, ‘민주주의’, ‘평화’라는 ‘인간적’인 보편 가치를 사회 전체에서 실현해 가겠다는 이상주의의 시대. 이때 등장한 일본 전후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이들 중 하나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다.

처음 가토 슈이치를 읽은 고등학생 시절로부터 지난 30여 년의 만남을 회고하면서 서경식(도쿄게이자이대학)은 가토 슈이치를 ‘마지막 지식인’이라 부른다. 이때 ‘지식인’이란 “자신이 사는 사회를 보다 넓게, 보다 깊게, 비판적으로 응시하고 나아가 그 변혁에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이”를 가리킨다. 지식인이라 나섰던 이들 다수가 체제에 편입되어 냉소와 회의로 돌아섰지만, 가토 슈이치는 흔들림 없이 평화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일관되게 주장했고 헌법 9조를 지키는 운동에 만년의 나날을 바쳤다.

가토 슈이치는 사실 한국에 낮선 이름이다. 그의 자전적 회상록이며 대표작이기도 한 『양의 노래』는 한국에 2015년에야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제 가토 슈이치의 사고와 언어의 정수를 모은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言葉と戦車を見すえて)』를 선보인다. 이 책은 그의 다면적 면모 가운데 정치·사회에 대한 발언을 중심으로 ‘저항하는 지식인’으로서 가토 슈이치를 조명한다.

2012년 ‘전후 레짐 탈각’, ‘일본을 되찾자’를 슬로건으로 출범한 2차 아베 신조 내각의 ‘전체주의화’는 계속 되고 있다. 아베는 자신의 임기말을 앞둔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헌법 9조의 불전(不戰) 조항을 무효화하는 개헌을 실현하겠다고 공공연히 발언하고 있다. 이대로 이루어진다면 “아베 정권의 반동화 프로젝트는 완성되고 끝내 ‘전후 민주주의’는 최종적으로 무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서경식은 일본 사회에서 반지성주의의 횡행, 냉소와 무관심의 만연 현상을 근심한다. 그는 대중과 매스미디어, 지식인층까지도 휩쓸린 이 조류를 사회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역병’이라 칭한다. 이 역병으로 “일본은 ‘감시사회’ ‘치안국가’로 굴러 떨어지고, 그 대신 이익과 힘만이 신봉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한국 사회 또한 이런 진단에서 그리 안전하지 않다. 지금 가토 슈이치를 번역하고 상기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정녕 ‘일본’을 이해하는가. 고정되고 본질화한 ‘일본상’을 만들어 그것을 찬미하거나 동일화하거나, 반대로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자기만족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역사적 문맥으로 일본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고 그 부정적 측면을 극복해가야 한다면, 스스로 ‘일본’이라는 난문에 맞섰던 가토 슈이치의 명석한 시선은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큰 창이 될 것이다. 서경식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말을 이렇게 더한다.

“‘인간’은 이제 풍전등화다. 하지만 그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이 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보편적 요청이며, 그 요청은 우리들 한민족에게도 향해 있다. 가토 슈이치가 남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그것은 동시에 전 세계가 현재와 같은 기세로 점점 더 비인간적 차원으로 전락해 가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인 것이다. 가토 슈이치라는 지적 자산은 인류, 즉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 2019년 4월 새 천황 연호의 시작을 앞두고. ‘천황이 아니라 천황제가 문제다!’

“천황제를 왜 그만두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천황제는 전쟁의 원인이었고, 그만두지 않으면 다시 전쟁의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론짓는다. 천황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그만두어야만 한다.

나는 봉건주의의 암담한 황혼에, 인민과 이성과 평화가 찾아올 아침을 향해 소리친다.

무기여, 천황제여, 인민의 모든 적이여, 잘 가라!“(「천황제를 논하다」)

‘전후 민주주의’는 천황제를 온존시켰다. 저 격렬한 논고 「천황제를 논하다」(1946)에서 아직 20대였던 가토 슈이치는 천황 개인과 천황제를 구별해 논의하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천황제의 즉각 폐지를 소리 높여 주장했다. 가토 슈이치는 전시 지도자들, 그들에게 추종한 지식인들 그리고 그러한 체제의 존재양식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간결하고 명쾌하게 질문한다. “천황제는 왜 그만둬야 하는가?” “왜 빨리 그만둬야 하는가?”라고. 그리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문제는 천황제이지, 천황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천황제가 ‘전쟁의 원인’이며, 이를 일본 자본주의의 “봉건적 성격과 거기서 유래하는 군국주의적 경향”으로까지 파들어 간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 근대 자본주의의 구조를 “전례 없는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철저하게 착취”한 “빈곤 농민·노동자의 희생”으로 파악하고, 여기서 “군국주의와 식민지획득 전쟁”의 원인을 찾아낸다. 나아가 그는 ‘일본적’이라는 것은 ‘봉건적’이라는 뜻이며, ‘비판정신의 마비’, ‘음울한 봉건적 가족제도’를 천황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진단한다. “빛이 동쪽에서 온 것처럼 모든 불합리주의는 천황제로부터 왔다”고.

가토 슈이치는 「천황제를 논하다」 11년 후에 발표한 「천황제와 일본인의 의식」(1957)에서 천황 개인에 관한 일본인의 태도와 감정을 분석 시도한다. ‘천황제와 종교의식’을 설문해 ‘천황에 대한 네 가지 사고방식’을 추출해 고찰한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래 천황제는 ‘권력의 지배기구’였으며 전쟁의 천황 책임을 단언한다. 나아가 그는 일본 ‘대중’의 천황 개인에 대한 감정으로부터, 천황과 신민이 각각에게 기대되고 있던 역할을 연기했다는 가설을 세운다. ‘천황제’를 ‘대중 내부에 침투해 있는 무엇’으로 파악하면서 일본의 정신사적 고찰을 시도한 것이다. 2019년 4월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로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천황을 맡을 일본은 무엇을 연기하게 될 것인가.

■ “우리 시대의 ‘언어’는 빈사 상태다. ‘언어’를 재건해야 한다!”

1968년 여름, 소련군 탱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침공해 ‘자유의 외침’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그 사건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고 준열히 비판했던 「언어와 탱크」는 가토 슈이치가 남긴 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꼽힌다.

“언어는 아무리 날카로워도 또한 아무리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도 한 대의 탱크조차 파괴하지 못한다. 탱크는 모든 목소리를 침묵하게 만들 수 있고 프라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라하 길거리에 있는 탱크의 존재, 그 자체를 스스로 정당화하는 일만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떻든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가지고 해야만 한다. 1968년 여름, 보슬비에 젖은 프라하 거리에서 마주 서 있던 것은 압도적이지만 무력한 탱크와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였다. 그 자리에서 승패가 정해질 리 없었다.” (「언어와 탱크」)

이 설득력 있는 언설에서, 가토 슈이치는 그때 프라하 거리에서 ‘1945년 가을의 도쿄’를 떠올렸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희망이니 계획, 가슴속에 쌓이는 생각들, 새롭다 여겨지는 아이디어들로 넘치고 있었다”고. 한국인에게 이런 절정과 압도의 순간은 더욱 선연하다. ‘언어가 탱크를 끝내 극복하는 시간’에 대한 상상력과 실천은 한국 사회에서도 수차례 시도되고 도래하였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 전시 지식인 대다수는 어째서 광신적 천황 숭배나 군국주의로 전락했던 것일까? 가토 슈이치는 이 깊숙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사유한다. “전후 ‘1억 총참회’라는 말들을 했는데 ‘지식인의 책임을 1억 국민 속에 해소시켜 생각하는 것은 속임수다. ‘국민은 속고 있었다’느니 ‘국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설명은 국민 대다수에게 통용될지 모르지만, 지식인에겐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속고 있었다’는 것은 속고 싶다고 자신이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누군가가 ‘속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자진해서 속고 싶다고 원했던가 하는 것이다.” 가토 슈이치는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스스로 참다운 지식인이고자 하는 길을 죽을 때가지 걸었다.

전쟁을 방관했던 일본의 지식인들을 가차 없이 들추었던 가토 슈이치의 지식인론은 「전쟁과 지식인」(1959)에 총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가토는 많은 지식인들이 ‘파시즘 권력’과의 관계에서 적극적인 전쟁 지지자들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든 적든’ 자진해서 전쟁에 협력했다는 점을 논파한다. “우리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당한 후에는 어떤 항의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유를 빼앗겨 가는 과정 어딘가에서 항의가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며, 그것에 의해 마침내 자유를 완전히 잃게 될 과정의 진행을 막을 수도 있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을 것이다.”

서경식은 이 명문들을 다시 읽으며 ‘언어’가 빈사 상태인 일본의 오늘을 근심한다. “‘언어’에 대한 신뢰가 근본적으로 파괴된 까닭에 일본의 정치권력은 ‘탱크’ 없이 인민을 통치할 수가 있다”고.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재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한국에서의 ‘언어’는 어떤가? ‘언어’로 무엇을 할 것인가? ‘가짜 언어’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 ‘말 바꾸기’와 ‘시나브로’ 수법, ‘본의 아니게도’ 심리를 넘어

가토 슈이치는 일본의 국수주의나 문화본질주의(그 전형은 ‘일본 낭만파’와 ‘교토학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토 슈이치는 ‘일본’ 탐구, ‘일본적인 것’의 고찰, 일본 문학과 문화에 대한 비평에도 천착했다. 1955년에 발표한 「일본 문화의 잡종성」은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적인 것의 내용을 전통적이고 오래된 일본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국민주의’적인 일본 문화론으로부터 전환을 선언하면서, “서양종 문화가 얼마나 깊숙이 일본의 뿌리를 기르고 있는가” 질문하며 ‘일본 문화의 잡종성’을 주장했다.

가토 슈이치는 문화의 범주를 사상과 생활까지 포함한 정신적인 태도로 넓게 잡고 일본 문화를 분석한다. 그는 ‘대중’이 일본 문화의 ‘잡종성’을 그대로 살아간다면, ‘지식인’은 잡종성을 공격하고 ‘일본 문화의 순수화운동’이라는 무의미한 시도를 한다고 지적한다. ‘일본을 서양화하고 싶다’는 ‘근대주의’와 ‘순수하게 일본적인 것은 남기고 싶다’는 ‘국가주의’라는 두 가지 유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언어에 민감한 가토 슈이치에게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역사의 은폐와 말살이며, 언어의 ‘말 바꾸기’에 의한 ‘시나브로’ 수법이다. 「위기의 언어학적 해결에 관하여」(1981)와 「교과서 검열의 병리」(1982)에서 그는 일본 사회에서 항상 정치권력과 결탁된 자들에 의한 매스미디어에서 ‘위기’가 부추겨지고, 이런 ‘위기’의 ‘해결법’으로 즐겨 ‘언어학적 대책’이 발휘됨을 지적한다.

‘패전’을 ‘종전’으로, ‘점령군’을 ‘진주군’으로, ‘침략’을 ‘자위’로, 정부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개인 자격’으로 전도하는 등 말 바꾸기 수법은, 최근 한국 대법원의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 판결’이 나온 이후 일본 정부가 ‘징용공’을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바꿔 부르는 것에서 보듯 고질적이다. 가토 슈이치는 이러한 ‘언어학적 대책’(인상 조작)이 일본 정치권력의 존재양식과 때에 따른 정책적 선택과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처럼 전후 일본 사회의 뒤바뀐 역사인식과 조작된 언어로 사회적 집합기억을 조작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가 ‘시나브로’ 과정. “상황을 조금씩 일정 방향으로 바꾸면서 갑작스러운 변화는 피한다.” 해석 개헌에 기반한, 자위대의 군비 증강, 행동 범위 확대, 그리고 전쟁 책임의 소거는 ‘시나브로’ 행해져 갔다. ‘시나브로’란 “기성사실의 혼합과 중첩”에 의해 이루어진다. 시나브로 과정은 필연적으로 현실주의를 부르고, 현실은 ‘본의 아니게도’라 말하는 현실주의자에 의해 이끌려 간다.

둘째는 ‘말 바꾸기’ 수법. 그것은 ‘항복’을 ‘종전’으로 ,‘점령’을 ‘진주’라 했을 때부터 시작되어 ‘전력’을 ‘자위대’로, ‘검열’을 ‘검정’이라 말한다. 역사교과서 문제에선 한층 심해져 문부성은 ‘침략’을 ‘진출’로 고쳐 쓰도록 ‘검정’ 의견을 내놓았다. 가토 슈이치는 “바꿔 말하는 것은 표현의 객관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속여 넘기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것이 대외적으로 문제가 될 때 일본 정부는 ‘쇄국 심리’를 작동한다. ‘쇄국 심리’는 ‘국내 사정을 대외 사정에 우선’시키고 “대외적으로도 국내용 수법을 그대로 써먹는”것으로 분절화되며, ‘국내용 수법’은 ‘시치미 떼기 주의’와 ‘책임 전가’와 ‘일본제 성의’라는 세 가지로 분절화된다. 놀랍게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근본 대책으로 ‘문부성 폐지’를 주장한다.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은 국가의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인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 ‘지성’을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본의 퇴행과 가토 슈이치의 불굴의 만년

1990년대 들어서야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가 널리 논의되기 시작했다. 1995년에 ‘전후 50년 결의’와 ‘무라야마 담화’가 있었다. ‘결의’에는 애초 “아시아 여러 국민들에게 끼친 고통을 인식하고, 깊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문구가 있었지만, 우익의 강경한 요구로 발표 전날, “세계 근대 역사상의 수많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행위를 생각하면서”라는 글귀가 첨가되었다. 나쁜 것은 자기들만이 아니다? 전후 일본과 독일을 대비하면서 “과거를 확실히 과거로서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현재에 연결하고 전쟁 책임에는 둘러대기를 되풀이해 온 것은 전후 일본의 최대 실패였다”고 ‘윤리적 실패’와 ‘정치적 실패’를 설파했던(「‘과거 극복’ 각서」) 가토 슈이치는 다음과 같이 이 결의를 비판한다.(「전후 50년 결의」)

“결의 내용은 모호하다. 일본의 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인정하는지 인정하지 않는지 확실치 않다.” “이와 같은 결의는 공허하고, 실질적인 태도 표명을 거의 전혀 품고 있지 않다.” “국회 결의는 윤리적인 참사이고 정치적인 우행(愚行)이었다. 아마도 아시아에서 일본의 고립은 이제부터 심해질 것이다. …과거를 속여 가면서 미래를 만들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전후 50년 결의’ 시기를 경계로 현재까지 일본의 기나긴 우경화·반동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경과한 오늘, 우리는 가토 슈이치의 예언이 적중해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이라 오만을 떨었던 ‘2016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해산 절차라는 ‘윤리적인 참사’가 되풀이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가토 슈이치는 만년에 헌법 9조를 둘러싼 실천적 활동과 비평을 통일하고자 했다. 그가 주도하여 발족한 ‘9조 모임’의 ‘말 건네기’는 처음부터 매스미디어에서 무시당했다. 모임은 “전국에서 ‘9조 모임 강연회’를 개최해 전하자”는 행동방침을 제기했다. ‘입으로 전해 운동으로 만들어 가자’는 존재방식의 선택. 일본열도 주요 도시에서 ‘9조 모임’의 발기인들은 말하고 또 말했다. 이윽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9조를 지지하는 의견’이 표명되기 시작했다. 가토 슈이치는「다시 9조」(2004)에서 헌법 9조를 둘러싼 논의의 핵심을 전복적으로 논파한다.

“여기서 두 가지 해결법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9조를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보조약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안보조약 대신 비군사적인 일미우호조약을 맺는 것이다. 후자의 길을 택한다면 9조는 보존될뿐더러 재생되어서,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안보조약은 냉전의 최성기,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만들어졌다. …한국전쟁도 끝난 지 오래되었다. 지금 일미 양국의 ‘국익’에 있어, 다시 살펴야 할 것은 9조가 아니라 안보조약일 것이다.”

전복적 사고는 가토 슈이치의 ‘방법’이었다. 「원폭 50년」(1995)에서 가토 슈이치는 말했다. “핵무기 보유국 대 비보유국, 보유국 내부에서의 격차라고 하는 이중의 불평등을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핵 보유국 스스로 비보유를 향해, 핵 철폐를 향해, 실천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다는 것. 작금의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에서 빠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여기에서 발견한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